MEMORIZE RAW novel - Chapter 296
00295 분기점(分岐點) =========================================================================
(이번 회는 성애 장면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원하시지 않는 분께서는 해당 부분을 생략해주시길 부탁합니다.)
“수현, 자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고연주였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잿빛 눈동자 한 쌍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어나있었네요.”
내가 일어나있는 것을 봤는지 달덩이 같던 눈동자가 일순 예쁘게 휘었다. 고연주는 가볍게 웃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박. 자박.
한걸음 한걸음. 느릿한 걸음소리.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은 어슴푸레하면서 흐릿했다. 소리는 월광이 스며있는 장소에서 멈췄고, 그제야 비로소 고연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달빛에 반사된 그녀의 자태는, 살짝 충격 먹을 정도로 외설적이고, 유혹적이었다.
어깨는 물론이고 가슴 골까지 훤히 드러내는 상의. 상의와 이어지는 하의는 속옷이 비쳐 보일 정도로 짧고 투명했다. 분명 야하기 그지없는 일체형 원피스였지만, 고연주가 입으니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치명적이라 느껴질 만큼 유혹적이지만 천하지 않다. 살짝 되바라진 느낌은 있지만 깊숙한 맛 또한 존재했다.
“어젯밤 일을 사과하려고 찾아왔어요. 미안해요. 연혜림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었네요.”
“알만한 사람이 그랬습니까? 쯧…. 아무튼, 다행히 일은 잘 덮었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는 건 들었지만 다음부터 조심하도록 하세요. 경고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내겠습니다. 두 번은 없을겁니다.”
“네, 그 말씀 가슴 깊이 새길게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이상 그냥 무시하도록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고연주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 정도라면 허언을 할 리가 없으니 믿어도 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 고연주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호호. 고마워요. 정말 조심할게요. 하지만…. 말로만 하는 사과는 진정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몸으로도 사과하겠다는 건가요?”
참 핑계 한 번 좋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없다 여겼는지, 고연주도 민망한 눈웃음을 보였다. 아무튼, 내 반응을 무언의 승낙으로 받아들인 듯 그녀는 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이윽고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나긋한 손길이 느껴질 즈음, 나는 다시 침대로 몸을 눕게 되었다. 그러자 고연주는 쓰러지듯 몸을 허물어뜨리며 내 위로 몸을 겹쳤다. 콧속으로 농익은 육체의 향기가 진하게 흘러드는 것을 맡으며 나는 차분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미약한 숨이 가슴이 간질이고, 보드라운 살결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잠시 동안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고연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심을 다해 모실 테니, 부디 저의 사과를 받아주시겠어요?”
“사과가 기대되는군요.”
“제법 달콤하실 거예요.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어요.”
“?”
갑자기 고연주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의아히 바라보자,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고연주의 눈매는 아까보다 더욱 휘어져, 초승달처럼 예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음~. 지금쯤 다들 별관에서 자고 있을 거고. 본관에는 아무도 없으니…. 오늘은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그렇죠. 근데 뭐가 걱정인가요.”
“그런데 그렇게 격렬하게 하기에는 수현의 체력이 너무 걱정 되서요. 혹시 오늘 너무 힘들어하시는 건 아닐지….”
“…하.”
표정으로 보나 말로 보나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예전에 했던 다짐을 되새길 수 있었다.
*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아아아아아! 수, 수현! 아, 안 돼! 제바아아알!”
고연주가 미친 듯이 도리질을 치며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난 그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젖가슴을 꾹 눌러놓고 있었다. 한 번 손을 강하게 그러쥐어 보자, 말캉한 감촉과 함께 압력에 따라 젖 무덤이 와짝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남성은 고연주의 소중한 곳을 사정없이 헤치며 뿌리 끝까지 들락날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격렬한 정사에 고연주는 울부짖는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약한 모습을 보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1회차 시절에는 오를 수 없는 나무라 여겼던 그림자 여왕이 지금은 내 아래 깔려 교성을 내지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미소를 베어 물고 말았다.
“그, 그만! 수현! 자, 자, 잘못…! 제발 그마아아안!”
다시 한 번 강하게 파고 들어갔다. 고연주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에 아랑곳 않고 한층 허리를 세게 놀리자, 등뒤로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다리가 느껴졌다. 양손은 시트를 찢어져라 잡은 채 심하게 떨고 있다.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심란함은 깨끗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자리는 짐승과 같은 욕망으로 점철된 정복욕이 대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풀 수 없는 답답함과 복잡함을 고연주에게 대신 배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꽉 쥐고 있던 고연주의 젖가슴을 놓고 잘록한 허리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깊숙이 박혀있던 남성을 빼내고 잠시 허리를 들었다. 그녀는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대를 곧바로 배반해주었다.
허리를 쓰다듬던 손은 순식간에 엉덩이와 정강이를 거쳐 발목을 잡았다. 그대로 아래쪽에서 번쩍 들어올리자, 힘을 못 이겼는지 배가 안쪽으로 접히며 엉덩이가 올라왔다. 이윽고 고연주의 늘씬한 다리는 좌우로 살짝 늘어진 젖가슴 위를 지나 그녀의 머리를 사이에 두게 되었다.
고연주의 눈이 다시 절망감에 물들고 입술이 벌어진다. 나는 꽉 접힌 그녀의 발가락부터 V자를 그리고 있는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꼭지점을 맡은, 치켜 올려진 엉덩이에 시선이 닿은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진득한 액체로 번들거리는, 발갛게 부어 오른 소중한 곳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로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고연주의 부끄러운 분문(糞門)이 수줍게 모습을 내밀고 있었다.
“수현…! 제발 보지 말아요…! 부끄…! 흑!”
애원조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다리를 더욱 넓게 벌렸다. 둥그스름한 엉덩이가 활짝 열리자, 그에 따라 소중한 곳들 또한 좌우로 벌어지며 자신의 음란함을 한껏 뽐내었다. 고연주는 신음을 내며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상태를 유지하며 나는 불그스름한 구멍에 남성을 맞추었다.
그대로 음부를 향해 살짝 진입을 시도하자, 고연주의 허리가 이리저리 비틀렸다.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것 같지만 이미 끝부분은 걸친 상태였다. 오히려 그러한 행동은 더욱 커다란 쾌감과 함께 남성이 안으로 딸려 들어가는 결과를 불렀다.
고연주의 안에서 약한 저항이 느껴졌지만, 이미 밤새 수백 번은 들락날락한 곳이었다. 이미 길은 만들어져 있었다. 그대로 살짝 힘을 주자 남성은 이내 수월하게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나와 그녀의 사타구니가 맞부딪치는 순간 고연주의 몸이 크게 떨어 울렸다.
푹!
“악!”
쑥,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한 번에 뿌리 끝까지 들어가버렸다. 고연주의 안은 언제나처럼 뜨겁고, 포근했다. 내벽이 반사적으로 남성을 강하게 조여 들고 기분 좋은 압박감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꽉 물었다는 표현이 이럼 느낌일까?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감촉을 즐기며 나는 여전히 발목을 붙잡은 채 아래로 힘을 실었다.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아, 아, 아, 아….”
고연주는 다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직도 좁다고 생각되는 그녀의 안을 맛보며, 나는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하지만 이내 빠르게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자, 풍만하다 못해 커다란 가슴이 위아래로 덜렁이듯, 박자에 맞추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고연주의 비명이 커지고 몸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붙잡고 있는 발목에서도 이따금 덜덜 떨리는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아, 아, 아, 악! 아, 아, 아, 악!”
서서히 배출하고픈 욕구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나는 바로 손을 놓고 고연주의 상체를 덮어 눌렀다. 그러자 그녀의 젖가슴이 내 가슴에 짓눌리며 묘한 압력을 선사해주었다. 젖가슴 중 꼿꼿이 서있는 부분이 가슴팍에 이리저리 짓뭉개지는 감촉을 즐기며, 나는 더욱 열심히 허리를 놀렸다.
“수, 현! 읔, 읔! 부, 부, 탁, 해, 해, 요! 이, 제, 그, 읍!”
고연주의 애원. 그 대답으로, 그녀의 고운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쳐주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입술이 살짝 열렸고, 뜨거우면서 달콤함 숨결이 입안으로 흘러 들었다. 그것을 흠뻑 들이마시며, 나는 주저 없이 혀를 밀어 넣었다. 혀와 혀가 섞여 들자 비로소 지금의 뜨거운 열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고연주의 입안에선 단내가 풍겨왔고,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곳은 서로의 땀이 비벼져 번들거릴 정도였다.
한 순간 고연주의 양손이 내 어깨를 밀어내는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그것을 가볍게 털어낸 후, 오히려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더욱 거칠게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아, 끅! 아, 흑! 흑…. 아앙! 아아앙! 아아아아앙!”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물이 튀기고, 살과 살이 마찰하는 음란한 소리가 고연주의 비명과 이중주를 이루며 아름다운 화음을 울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 흑…. 아…. 흑…. 아….”
이제는 목소리를 낼 힘도 상실했는지, 고연주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내며 몸만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끊을 듯이 허리를 휘감던 다리도, 격렬히 등을 긁던 손도 모두 힘없이 널브러져있다. 그것은 마치 실이 툭 끊긴 인형처럼, 내가 움직이는 대로 덜그럭거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감각은 살아있는지 남성이 한 번 뽑혔다가 다시 들어갈 때마다 가냘프게 흐느낄 뿐이었다.
그 순간 아까부터 서서히 차오르던 사정의 욕구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나는 허리를 들고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물결치듯 흔들리던 젖가슴을 쥐어 내 손안에 고정했다. 그러자 실처럼 가는 상태를 유지하던 고연주의 눈동자와, 힘없이 벌어져있던 입술이 일순 크게 열리었다.
그 반응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나는 마지막으로 최대한 깊숙이 박음과 함께 움직임을 멈췄고, 그와 동시에 폭발하듯 터지는 절정감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새벽 내내 뜨겁게 달구어진 피가 남성으로 몰리고, 그것은 이내 고연주의 안으로 세차게 분출되었다.
“헉…. 헉….”
“아아아아…!”
꿀렁꿀렁! 꿀렁꿀렁!
남성은 진액으로 이루어진, 끈적거리는 액체를 거침없이 토해내었다. 내벽을 두드리듯 흘러 들어가는 새하얀 정(精)들. 한 번 토해낼 때마다 고연주는 약한 신음과 함께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렇게 사정의 여운을 즐기던 도중 도대체 몇 시간에 걸쳐 정사를 벌인 걸까, 얼핏 생각이 들었다.
이내 모든 정을 분출한 후 고개를 들자, 어느새 어렴풋하게 침대를 비추는 아침 햇살이 보였다.
‘설마 진짜 밤새…. 응?’
그때였다.
쉬….
조금 황당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무렵, 뭔가 하복부를 적시는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 고연주의 소중한 곳과 결합돼있던 남성을 빼내었고, 얼른 허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아래로 고개를 떨궈 사정없이 벌려진 그녀의 다리 중앙을 응시했다.
쉬….
고연주의 소중한 곳에는, 하얀 액체가 흘러내림과 함께 노란빛이 감도는 물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녀가 실금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고, 고연주.”
“흑…. 흑….”
얼떨떨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자, 고연주는 순간 눈물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도 다리를 오므리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미약이 움직일 뿐이었다.
소리 죽여 우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멍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당당하고 여유 있던 그녀인데, 지금 내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실수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했다. 나는 뭔가에 홀린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미안해요.”
“흑…. 끅….”
“고연주,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흑…. 왜…. 흑…. 너무…. 흐아앙…. 으아아앙….”
고연주는 뭔가 말하고 싶었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서글픔을 이기지 못한 듯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가,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등을 보듬으며 달래기 시작했다.
*
고연주를 안고 달랜지 3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사과에 어떤 대답도 않은 채 그저 눈물만 흘리다가, 지쳤는지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한동안 새근새근 잠들은 고연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조심히 이불을 덮어주고 방문을 열어 밖으로 나와버렸다.
‘…….’
착잡하다. 멍하니 복도를 걷고 있자 가슴을 콕콕 찌르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문득 고연주와의 첫 관계를 가졌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지금보다 덜하긴 했지만, 둘 다 만족했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던 관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속의 복잡함을 떨치려고 그랬다는 것도, 고연주의 도발에 넘어갔다는 것도 모두 유치한 변명이었다. 오직 고연주를 남성으로써 정복하고 싶다는, 1회차서부터 이어져온 추레한 욕망이 지금 와서 폭발한 것이다.
그저 한숨과 함께 4층의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또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짐했다. 나중에 고연주가 일어나면 오늘 일은 정식으로 사과하겠다고.
그렇게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계단을 돌아 3층 복도로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타박타박.
그 순간, 누군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 2층 계단에서부터 사뿐사뿐 올라오는 한 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발소리의 정체는 임한나였다.
“안녕하세요.”
“어머! 클랜 로드!”
임한나는 나를 보자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빡였다.
“아침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데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 네…. 원래 잠이 많은 편이 아니기도 하고, 새로운 곳에서 잠들려니 조금 낯설어서요. 그리고 클랜 하우스 이곳 저곳 좀 구경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혹시 실례일까요?”
“사용자 임한나도 머셔너리 클랜원입니다. 실례될 리가 없지요.”
“너그러이 보아주셔서 감사해요.”
임한나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살포시 미소 지어 보였다. 그리고 찾아온 조용한 침묵. 그녀도 대화가 끊기자 어색함을 느꼈는지, 내 시선을 피한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이대로 잘 가라고 할까 고민하고 있자, 문득 임한나의 말문이 열렸다.
“그런데 클랜 로드님께서는 어쩐 일로….”
“잠시 3층에 창고 좀 들를 생각이었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괜찮으시면 같이 창고 구경하시겠어요?”
임한나는 여전히 바닥을 응시하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해주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복도를 앞장서서 걸으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러브 하우스에서의 임한나는 상냥한 면모를 보이긴 했지만 부끄러워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와 밤의 꽃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도 부탁할지언정 비굴한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 있고 흘러 넘치는 기품을 엿볼 수 있었달까. 마침 나이도 동갑이고 하니 적어도 어색하진 않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어려워하는 기색이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창고 앞에 도착한 후 나는 중앙에 그려진 마법 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차가운 감촉이 닿는 순간 천천히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법 진은 파랗게 빛나며 반응하더니 이내 안에서 철컥, 잠금 장치가 풀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창고에 출입할 수 있는 인원은 저를 비롯해 총 세 명입니다. 보유하고 있는 장비가 조금 있는 편이라, 부득이하게 관리하는 중이에요.”
“아, 들어봤어요. 마법 진으로 출입자를 판별하는 거군요.”
“맞아요. 그럼 들어갈까요?”
“네.”
나는 바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의 내부에는 저번 결산에서 보류 판정을 받은 장비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있었다. 장비의 일부는 벽에 걸려있거나 진열대위에 놓여져 있었고, 나머지 알이나 금은보석 등 기타 물품들은 바닥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그 중 물약들이 있는 곳을 헤치다가, 나는 조심조심 두리번거리는 임한나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사용자 임한나는 몇 살이에요?”
“저요? 스물네 살이에요. 그럼 클랜 로드께서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도 스물넷입니다. 동갑이네요.”
“아, 정말요? 다행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한마디 툭 던졌을 뿐인데, 임한나의 반응은 의외로 놀라웠다.
“뭐가 다행이에요?”
“아. 그냥 동갑을 만났다는 게 좋아서요. 저는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연하 아니면 연상이었거든요. 그래서 친구 하나 있었으면 했거든요.”
“친구라. 머셔너리에서 스물넷은 저 한 명인데. 그럼 저랑 친구할까요? 공식석상에서는 힘들겠지만, 사석에서는 말도 놓고요.”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클랜 로드께….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었어요.”
사용자들은 모두 현대인들이다. 공식석상에서는 예를 갖추더라도, 사석에서 말을 놓는 경우는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한소영도 몇몇 클랜원들에게는 사석에서 말을 편하게 하라고 허락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연혜림이라던가.
물약이 모아져 있던 곳을 보고 있자, 이윽고 노란 액체가 채워져 있는 세 개의 물병을 발견했다. 그 중 한 병을 집어 들고, 나는 숙였던 허리를 일으키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보니까 너무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런 태도가 이어지면 곤란하잖아요.”
“그, 그럼….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네. 말씀해보세요.”
“저…. 저는 당분간 말을 높일 테니까, 클랜 로드께서는 저한테 말을 놓아주시면 안될까요? 그리고 저는 오빠라고…. 아. 이, 이건 아니에요.”
‘뭐지?’
임한나의 표정은 어느새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창고 구경하라고 데려왔는데 구경은커녕 모든 신경을 나에게 쏟고 있다. 문득 회의실에서 그녀와 눈을 마주쳤던 것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임한나의 눈동자는 기묘한 열망으로 차올라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크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말 편하게 할게. 임한나.”
“가, 감사해요. 저는 당분간 높이다가, 나중에 편해지면 그때 말씀 드릴게요.”
“그러던가. 아. 나는 이만 나갈 건데, 조금 구경하고 있을래?”
“으으응. 아니요. 저도 나갈래요.”
임한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윽고 창고에서 나와 문을 닫자,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물병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병은 뭐에요?”
“엘릭서.”
“와…! 그게 엘릭서구나.”
“응. 우연한 기회에 구할 수 있었지. 음…. 임한나.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부탁하나 해도 될까?”
임한나는 “그럼요.”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고연주의 일도, 임한나도 일단은 한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지금 당장은 한소영에게 들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출 때였다. 해밀 클랜에서 엘릭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단순히 형만 아니라, 클랜원 한 명 한 명이 내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모든 일에는 절차와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다. 마음만 먹으면 동부 도시로 가서 형을 만나는 일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동부와 남부가 암묵적인 동맹을 유지하고 있으니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면 1시간, 아니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해밀 클랜. 반시의 저주를 받은 사용자. 남은 시간은 2주도 안된다. 엘릭서로 목숨을 구원할 수 있다.’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임한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외부에 나갔다 올 생각이야.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 일부러 깨우지는 말되, 클랜원들이 일어나면 3층 소회의실로 모여달라고 해주겠어?”
“어렵지 않은 부탁이에요. 그런데 어딜 다녀오실 생각이세요?”
“신전.”
“신전이요?”
지금 필요한 건 정보였다. 현재 내가 들고 있는 엘릭서는, 일단 목숨만 붙어있으면 어떤 상태이상도 회복시켜주는 하나의 목숨과도 같은 천고의 영약이다. 그것을 단순히 감정에 이끌려 사용하는 것은 사용자로서도, 그리고 클랜 로드로서도 절대로 지양해야 할 행동이었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담당 천사를 만나고 올 생각이야.”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음, 지금 와서 솔직히 밝혀보면요. 제가 마르가리타 사건 이후로 독자분들께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습니다. 물론 굉장히 심하다 싶어 과감히 절반을 쳐낸 게 크긴 했지만, 타격은커녕 여유롭게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먹었습니다. 뭐, 뭐지? 나는 정말 고자였던 건가? 라고 생각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이번엔 정말 화끈하게 써보자! 라고 마음을 먹고 작정하고 썼는데, 다 적어놓고 보니까…. 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것도 고요히 웃으시면서 겨우? 이게 강해? 라고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OTL
아무튼, 독자분들의 이번 회를 보시고 어느 정도 감(?)이 오셨는지 궁금하네요. 아. 물론 이번 회에 불쾌감을 느끼셨을 분들께도 사죄를 드립니다. 다만 메모라이즈는 성애 장면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품입니다. 그런 만큼 부디 독자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합니다. _(__)_
PS. 내일 제 이모님이 스마트 폰을 장만하실 계획입니다. 현재 갤럭시S3랑 옵티머스 G 프로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대리점에 가서 구매할 계획인데, 저보고 도와달라고 하시네요. 이것저것 검색은 해봤는데 할부원금(?)만 건졌고 나머지는 먹먹하네요. 혹시 갈 때 어떤 점을 염두에 두면 좋을까요? ;ㅅ;
『 리리플(293회) 』
1. 플룻 : 1등 축하합니다. 🙂 미월야 님이 잠시 1등을 놓으신 이후, 1등에 여러 많은 분들을 뵐 수 있어서 좋네요. 하하. 그럼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카아르엠 : 아, 오랜만에 뵈어요! 반갑습니다. ㅜ.ㅠ 하하. 혹시 새 작품 연재하고 계시다면 읽으러 가겠습니다. 🙂
3. 삼극무쌍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4. 사용자간달프 : 쉿. 비장의 무기입니다. 김수현은 아직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어요. 🙂
5. MT곰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하하. 요즘도 제 작품이 MT곰 님께 힐링이 되는지 궁금하네요. 🙂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이 있습니다.
『 리리플(294회) 』
1. RandomStyle : 1등 축하합니다. 🙂 정답입니다. 수현은 그때 형과 만나지 못했고, 그리고 유현도 딱히 수현에게 그녀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효을은 1회차에서 이때 죽었거든요. 🙂
2. dbss : 메모라이즈는 기억하다, 암기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세히 풀어보면 외워 잊지 아니하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지요. 김수현은 1회차를 기억하고, 외웠으며,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하고 있고요. 이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3. asfdgads : 입대하시는군요! 그저 눈물만 나네요. ㅜ.ㅠ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파이팅!
4. 연우진 : 정답입니다. 형이 죽은 건, 김수현이 ‘삽질’ 아니, 오히려 ‘민폐’라고 볼 수 있지요. 물론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도 할 생각입니다. 다만, 엘릭서는 대비를 위해서 구비하고 있습니다. 🙂
5. 천운처럼2 :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쳐낼 부분도 많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북은 아마 8월 이후로 나올 예정입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