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97
00296 분기점(分岐點) =========================================================================
7일 전.
한밤의 숲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칠흑 같은 어둠. 하늘에 뜬 달은 찬연한 빛을 뿌리고 있었지만, 빽빽이 자란 나무와 검푸른 빛의 무성한 수풀은 숲을 비추는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부스럭, 부스럭.
그때, 마른 잎과 검불을 밟는 소리가 숲의 고요를 나직이 깨뜨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숲 안 어딘가의 언덕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곳엔 한 명의 남성이 언덕을 조심스레 오르고 있었다.
조심히 언덕을 오르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그러자 소리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남성은 근 10초 동안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살금살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성의 사위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벌레 소리, 새소리 등 어디서 들리는지도 모를 여러 울음소리가 이따금 그의 귓가로 흘러 들었다. 그리고 싸늘한 바람이 언덕을 한 번 지나칠 즈음, 남성은 비로소 언덕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칠흑의 장막이 내려앉은 숲. 너무나 어두워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남성의 움직임은 시야가 탁 트여있는 것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언덕 중앙에 자리를 잡더니, 눈을 크게 떠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순 남성의 눈동자에 연한 호박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번개 같은 속도로 한쪽 방향에 시선을 고정했다. 곧이어 뭔가를 관찰하는 듯 한동안 먼 곳을 바라보던 인상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남성이 바라보는 곳에는 미약한 불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빛의 주위는 고요한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낯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길쭉한 나무 위 나뭇가지에 세 명의 여성이 알몸으로 매달려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배는 될법한 무리들이 나무를 둘러싼 채 낄낄거리며 희롱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남성은, 이내 한심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친놈들.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네가 이해해~. 벌써 이곳에서 대기한지 7일이나 지났잖아? 저 정도 재미 보는 건 너그러이 넘어가 줘야지.”
“아까 느꼈던 기척이 너였군.”
“히히. 들켰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남성은 담담히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시선을 둔 곳엔, 몸에 달라붙어 꼭 끼는 타이츠(Tights)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남성이 언제 왔냐는 시선을 보내자, 여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런 말도 않고 남성 옆으로 다가온 여성은 이내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후유. 다음 이동 시간은 언제야?”
“2일 후. 그때 미개척 지역을 벗어날 예정이다.”
“그럼 2일째 되는 날에는 칠흑의 숲으로 들어가는 거야?”
“얼마 전 본대에서 연락이 왔다. 드디어 죽음의 늪지대에 들어섰다고 한다.”
남성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여성은 생각에 빠진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럼 얼추 시간은 맞겠네.” 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동안 남성의 눈치를 살피던 여성은, 곧 대지에 벌렁 드러누우며 말을 이었다.
“근데 걔네들 있잖아, 제법 빠르지 않아? 서 대륙에서 출발한지 이제 두 달 하고도 조금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벌써 죽음의 늪지대면….”
“북 대륙과 서 대륙의 통로는 이미 개척된 상태니까. 그래도 죽음의 늪지대를 벗어나면 조심해야 할거다. 사용자 놈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아져.”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여기 온 거잖아.”
“그래 봤자 사나흘 차이야. 아무튼 당분간은 본대에 신경 끄라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잘하면 돼.”
뭔가 심기가 불편한 게 있는지, 남성은 무뚝뚝히 대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조용함이 찾아 들었다.
남성의 시선은 여전히 무리들이 여성을 희롱하는 광경에 꽂혀있었고 여성은 대(大)자로 누운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둘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이어지던 침묵은 여성이 먼저 말문을 엶으로써 깨져버렸다.
“있잖아, 현. 우리들 성공할 수 있을까…?”
“기습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면 성공할 수 있다.”
“고작 2000명을 간신히 넘는데? 아무리 개척 도시라고 해도….”
“아직 모두 모인 것은 아니다. 결행 그날까지 인원은 계속 모일 거고, 내부에서 호응하는 인원도 기백 명은 된다. 무엇보다 우리들은 한 명 한 명이 미개척 지역을 넘어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설령 도시에 두 배, 아니 세 배가 있다 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
남성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깃들어있었다. 그러한 반응에 여성은 소리를 죽이며 웃다가, “그래, 기습이 성공한다면.” 이라 되뇌며 더욱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실컷 웃었는지, 여성은 허리를 올려 펄쩍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탄력적인 몸놀림으로 남성의 목에 팔을 휘감으며 그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 그놈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날이.”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걱정하지 말고 믿고 있어라.”
“후후. 믿음직스럽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대장의 말에 따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
여성은 익살스런 목소리로 말하곤 까르르 웃으며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 버렸다. 남성은 그런 그녀를 무심한 눈길로 쓱 훑고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까 보고 있던 곳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숲 속의 밤은 깊어만 갔다.
*
“사용자 김수현?”
“오랜만…. 은 아닌가.”
소환의 방으로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제단에 앉아있는 세라프가 보였다. 끝소리를 묘하게 올리는 것이 내가 두 번 연속 스스로 방문했다는 게 꽤나 놀라운 모양이다. 하기야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은커녕 세 달에 한 번 찾아올 정도였으니 의아히 여길 만도 했다.
세라프는 얼른 표정을 회복한 후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와주신 겁니까?”
“응.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따로 호출도 드리지 않았는데 찾아와주셔서 놀랐습니다.”
“최근 방문도 호출해서 찾아온 건 아니었잖아.”
나는 대충 대꾸해주며 세라프와 마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연초를 한대 꺼내며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무튼, 화정에 대해서 물어볼게 있어서.”
“예. 말씀해보십시오. 성심 성의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그래, 간단히 말해서. 예를 들어 반시의 저주에 걸린 사용자가 한 명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용자의 저주를 화정의 힘으로 해주 할 수 있을까?”
“가능합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하지만 그 정도는 나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세라프는 바로 추가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반시의 저주는 굉장히 효력이 강한 고 랭크의 저주입니다. 어지간한 마력, 행운, 항마력으론 대항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화정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저 또한 간단히 말씀 드려보면, 격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정의 격과 반시의 저주의 격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입니다.”
“좋아. 그럼 화정은 전투용이 아니라, 치료용으로도 꽤나 쓸만하다는 소리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화정을 치료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
방금 전 세라프의 말이 바로 내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이었다. 지금껏 전투를 제외한 다른 용도로는 막연히 사용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경계를 명확히 해둬야 앞으로의 사용에 차질을 빚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화정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전투용 또는 치료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조금 애매한 감은 있습니다만. 만일 치료용으로 사용한다고 가정해보면, 그것은 단순 정화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즉 완전한 치유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령 사용자 김수현이 아까 말씀해주신 사용자를 치료했을 경우, 반시의 저주는 확실히 태워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로 인해 발생한 후유증은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
“다른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용자가 정신 오염에 걸린 상태라면 오염을 정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용자가 오염으로 인해 정신병이 발생했을 경우 자체적으로 발생한 정신병은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뭐야, 생각보다 제한이 많잖아.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문득 마르가리타에게 화정의 힘을 사용했을 때가 떠올랐다. 나는 그때 분명 나쁜 기억을 태워달라고 의지를 불어넣었다. 후에 요정 여왕의 반응으로 보아 잘하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는데, 눈앞의 세라프는 그 가능성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는 정말 우연이었다는 말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에 잠겨있자, 세라프의 차분한 어조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화정의 이명은 영원히 타오르는 염화입니다. 모든 것을 불태울 순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불태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파괴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치료는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현재 사용자 김수현이 지닌 화정의 등급이 S랭크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결국 목숨은 구할 수 있으되, 그 이후의 일은 장담하지 못한다 이 소린가…. 쯧.”
그렇다면 완전 치유는 엘릭서밖에 해답이 없다는 소리였다. 품에 넣어둔 엘릭서를 꺼내며 혀를 차자, 세라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엘릭서? 설마 사용자 김수현은 엘릭서를 사용할 생각이십니까?”
“그럴까 생각 중이야.”
“구하려는 사용자가 사용자 김수현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일단 지금 하고 계신 생각은 보류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후유증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갈수록 증세가 심해질 수도, 현 상태를 유지할 수도, 아니면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호전될 수도 있습니다. 엘릭서, 그것은 하나의 목숨과도 같은 천고의 물약. 도대체 누구에게 사용할지 모르겠지만, 허튼 사용은 확실히 지양해야 할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응.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기야, 일단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여유는 생기니까. 이후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세라프의 눈동자에 오묘한 빛이 떠올랐다.
세라프 말은 확실히 일목요연했다. 지금 가장 급한 건 목숨이니 급한 일부터 해결하고 여유를 챙겨라. 그리고,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다짜고짜 사용해서 엘릭서를 낭비하지 말자는 소리였다.
아무튼 세라프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어느 정도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쯤이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었기에, 나는 사뿐히 몸을 일으키며 무심코 한마디 툭 뱉었다.
“잘 들었어. 아무튼 이만 가볼게. 고맙다.”
“예, 예?”
“응?”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용자를 돕는 것은 도우미의 역할입니다.”
‘갑자기 왜이래.’
세라프의 반응이 조금 미묘했지만, 결심이 섰기에 얼른 몸을 돌렸다.
“사용자 김수현.”
“?”
그리고 포탈로 몸을 던지려는 찰나, 등 뒤로 예의 고요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저…. 다음에 또 찾아와주시겠습니까…?”
“…….”
나는 곧장 포탈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세라프와의 만남을 끝내고 신전을 나왔다. 그리고 광장으로 이동해 공용 게시판을 살펴보는 것으로 볼일을 마친 후, 나는 클랜 하우스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새벽이 지나고 완연한 아침이 찾아와있었다. 임한나는 내 지시를 충실이 이행해놓은 상태였다. 본관으로 들어가 바로 3층 소회의실에 들어서자, 열 자리에 앉아있는 클랜원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중 몇 명은 부스스한 얼굴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른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셨어요?”
“신전, 광장에 볼일이 있었습니다.”
상석에 앉은 후 나는 안현이 안솔과 이유정을 흔들어 깨우는 것을 구경하며, 고연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순간 문득 생각이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고연주는 언제나와 같은 태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호호. 네, 일은 잘 풀리셨어요?”
“잘 풀렸습니다.”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고연주의 마지막 말은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현재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읽어주었는지, 고연주는 살포시 미소 짓고 있다. 간밤에 그렇게 심하게 범해졌음에도 여전히 웃어주는 그녀를 보자 마음 한구석에서 뭔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나는 괜찮다. 마치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반응을 보자 한결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살짝 부어있는 눈가를 보면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
‘사과는 하되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하자. 지금은 집중하자.’
고연주도 이런 태도를 원하고 있으리라. 그녀의 속 깊은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클랜원들을 모두 돌아본 후, 힘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눈동자에 졸음이 가득하네요. 굳이 깨우진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일찍 모여주니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규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여러분들을 모이게 한 이유는, 한가지 급히 말씀 드릴게 있기 때문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를 비롯한 몇몇 클랜원들은 이틀에서 삼일 정도 클랜 하우스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엑! 왜? 요?”
클랜 하우스를 떠난다는 말에 놀랐는지 비몽사몽 하던 이유정이 후다닥 잠에서 깨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반응이 가장 심하긴 했지만, 비단 이유정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여겨 나는 차분히 어젯밤부터의 일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해밀 클랜에 반시의 저주에 걸린 사용자가 있고, 그곳에서 다방면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 그들의 부탁을 받아 이스탄텔 로우에서 도움을 찾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정으로 반시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고, 오늘 아침 담당 천사를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왔다는 것까지.
물론 있는 그대로를 설명한 것은 아니었다.
‘엘릭서는…. 일단 넣어두자. 일단 상황을 보고 정 필요하다 싶으면….’
형이나 한소영이 위험한 것은 아니니까. 조금 서운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만일 후유증이 호전되는 성질이라면 아까운 한 병을 날리게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품에 넣어둔 엘릭서는 일단 창고에 되돌리기로 속으로 결정한 후, 나는 비로소 설명을 끝맺을 수 있었다.
이윽고 모든 설명을 들은 클랜원들은 한 명 두 명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첫 타자는 단연 정하연이었다.
“클랜 로드. 하지만 그 힘을 사용하면….”
“얼마 전 체력 능력치를 올린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치료용으로 사용할 때의 출력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정하연은 곧바로 걱정의 목소리를 내었지만, 바로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었다. 그때, 지금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고연주가 조용히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락해주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대강 알아들었어요. 해밀 클랜에서는 반시의 저주에 걸린 클랜원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클랜 로드께선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고요.”
“그렇죠.”
“그러면 궁금한 게 있어요. 클랜 로드께서는 이번 일을 도와줌으로써 해밀 클랜에게 어떤 것을 원하시고 있는 건가요? 보상인가요 아니면 동맹인가요? 물론 잘 아시겠지만, 목숨 값은 제법 귀하답니다.”
“물론 그러한 이유도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표면적인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 말고도 한가지 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 아직 자세히 밝힐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하게 말씀 드리면, 개인적인 이유가 제 공적인 판단에 영향을 줄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딱 잘라 말해주자 고연주는 만족한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고연주의 말인즉슨 이왕 해주는 거 공짜로 해주지 말고 챙길 것은 챙기자는 소리였다. 그리고 한 클랜의 클랜 로드로 있는 이상, 그 책임감은 나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보류 물품이 내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사용하기 전에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정도는 클랜원들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어찌됐든, 해밀 클랜은 동부 도시에서 굉장히 유명합니다. 일전에 제가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용자가 모여 클랜을 만들고, 클랜이 모여 도시를 이룬다. 머셔너리로서는 해밀 클랜에 거의 공짜로 빚을 지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가 조금의 수고를 감수한다면 앞으로 해밀 클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초석을 닦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클랜 로드의 몸에 무리만 가지 않는다면, 저는 찬성하겠어요.”
“확실히 클랜을 만든 이상 주변의 관계도 중요하죠. 뭐, 동부 도시의 클랜인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이스탄텔 로우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니 걸릴 건 없어졌네요. 저도 찬성이에요.”
“좋군요.”
내 말이 일리가 있다 여겼는지 고연주와 정하연은 밝은 낯빛으로 찬성해주었다. 사실상 현재 클랜 내에서 나 다음으로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둘이 찬성했으니, 반대하는 인원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여전히 졸지 않으려 용쓰는 안솔만 빼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애당초 나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몇 명을 데리고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미 데려갈 인원은 정해져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네~.”
“사용자 김한별.”
“네?”
고연주는 여유 있게, 김한별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죠.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두 명은 이 회의가 끝나고 바로 떠날 준비를 해주세요. 아, 아무리 많이 걸려도 3일 이상은 걸리지 않을 테니, 그에 맞춰서 준비해주시면 됩니다.”
“잠깐 해밀에 갔다 오는 거면 하루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해밀 클랜은 동부 일반도시 프린시카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볼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뮬에 한 번 더 들를 예정입니다.”
“뮬에요?”
고연주의 의아한 목소리. 나는 차분히 고개를 주억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잠시 김한별을 쳐다보자, 아직도 얼떨떨해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흥. 1000골드네. 조금 더 넣었네.’
‘혹시나 보석 마법사를 영입하게 된다면, 한 번 데리고 와주겠나?’
뮬에서 아직도 보석상을 하고 있을 영감님을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뮬에서 만나고 싶은 사용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할 때 한가지 약속을 한적이 있거든요. 아, 약속이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깝지만…. 아무튼 저에게 제법 잘해주신 분입니다.”
물론 겸사겸사 영입제의를 할 생각도 있었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영감님 또한 ‘보석 감정사’라는 레어 클래스를 가진 사용자였다. 영감님을 영입할 수 있다면 어쩌면 김한별에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비록 영입에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그때의 기반과 지금의 기반을 비교해보면 그만큼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자, 그럼….”
“에? 뮬에요오…?”
그때였다. 지금껏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안솔은, 흡사 찬물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고개를 치켜 올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로유진 “꿈을 꾸었습니다.”
Reader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로유진 “아닙니다. 메모라이즈 독자분들에게 성애 내용에 관해 칭찬을 듣는 꿈을 꾸었습니다.”
Reader “허허, 칭찬이라. 그거 좋구나.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로유진 “그것은, 어제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PS. 표지가 바뀌었습니다. 표지의 주인공은 세라프입니다. 표지, 공지, 뜰, 작품설정에 올려두었으니, 크게 보시고 싶으신 분들은 구경하러 오세요! 그리고 감상 평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일러스트레이터 SILVESTER 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 리리플 』
1. 한방모드 : 1등 축하합니다. 1등에서는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BandSVIVA : 아, 죄송해요. 코멘트 도중 ‘조으다.’ 라는 말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귀엽게 느껴졌어요. ;ㅅ; 조으다 조으다 완전 조으다~. 😀
3. 패깊 + 무영서귀 : 감사합니다. 덕분에 3년 약정 하시려는 거 2년 약정으로 맞췄습니다. 🙂
4. 소울소울 : 감사합니다. 오늘 총 다섯 곳 들렀어요. 발이 많이 아팠지만, 다행히 만족스러운 가격에 좋은 기기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
5. 요수리 :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닉네임이 안솔이라니요!
6. 이비앙 : ……. 네! 비웃으세요! 마음껏 비웃으시라고요! 엉엉! ;ㅇ;
7. GradeRown : 고연주와의 감정은 다음 회에 잠깐 풀 예정입니다. 🙂 하하. 정글의 게임 보셨군요! 저도 그거 재밌게 봤어요!
8. 안식. : 아, 아니요. 중심이 아니라, 염두에 두고 들어간 작품이라는 말이었어요. 🙂
9. 미월야 : 푸하하하하. 아 보고 나서 엄청 웃었습니다. 세상에 소금이라니요. ㅋㅋㅋㅋ.
10. 압권 : 하하, 김수현은 아직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굳이 예를 들어보면, 임한나가 스스로(?) 플래그를 꼽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고 보시면 될듯합니다. 🙂
11. 위태위태 : 하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연주와의 관계도 되새김질하고 싶었고, 체력을 드러낸 단발성 이벤트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실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만, 아무래도 수현의 내면이 독자분들께 잘 와 닿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제 능력 부족이겠지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준비를 철저히 해서 다시 한 번 독자분들께 접근을 해보고 싶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