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0
00030 왜 그러시는 거에요? =========================================================================
“오두막을 발견한 후 오빠가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고 나가셨잖아요. 그때 우리들끼리 오빠 얘기를 했어요.”
“무슨 얘기를 했는데요.”
“오늘 만난 다른 생존자들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 한 남자가 유정이 언니한테 단검을 던졌잖아요. 그리고 그때 오빠가 화살로 그 남자의 손을 맞추셨잖아요?”
김한별의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 당시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우정민과 선유운이 죽자고 덤볐다면 내가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한 우리도 분명 한두 명은 죽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차하면 일단 한 놈 묶고 시작할 생각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현 오빠는 방패로 단검을 막았고요.”
“그렇죠.”
“다들 안현 오빠는 대단해, 고마워. 치켜 세워주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오빠의 행동을 보고는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나요?”
“…….”
순간 뒤에 나올 얘기가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한별이 먼저 말문을 열고 말았다.
“다들 앞에서 말만 안하고 있지 놀란 기색이 역력해요. 안솔 걔는 무섭다고 울먹거릴 정도였어요. 안현 오빠랑 유정이 언니도 어느 정도 충격을 먹은 얼굴 이에요. 그게 끝이 아니에요. 오늘 그 여자한테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다고 탐탁지 않아 하고 있어요.”
“흠. 그렇군요.”
내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김한별은 일순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흠. 그렇군요 가 아니에요. 억울하지 않아요?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 그때 다들 말하기 싫어 나한테 떠넘긴 거면서 너희들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이런 마음도 들지 않나요?”
그랬던가. 아마 깊은 생각을 하느라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읽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섭섭한 것도 있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홀 플레인에 들어가면 이르나 늦으나 그들도 사람을 죽일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김한별은 태평한 내 얼굴이 답답한지 달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빠는 항상 혼자 고민하고, 혼자 생각해요. 버거운 일은 대부분 혼자서 떠맡으려고 해요. 물론 오빠한테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건 알아요.”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잠시만….”
“오해를 문제 삼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저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오빠의 판단은 항상 믿음직스러웠어요.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요.”
김한별의 말에 나는 마음속에 돌이 쿵 하고 내려 앉는걸 느꼈다. 도시를 떠난 이후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걸 종종 볼 수 있었다. 특히 나와 안현이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 상의를 하고 있을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때는 별 일 없을 것 같아 그냥 그러려니 넘겼는데 아무래도 오늘 한별이한테 단단히 걸린 것 같았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오빠. 말 편하게 놓으세요.”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김한별에 나눈 일순간 말을 더듬고 말았다. 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보자, 불만 어린 얼굴로 나를 쏘아 보고 있다.
“응, 네?”
“반말하시라고요. 다른 언니 오빠들이랑은 다 편하게 하시면서 왜 저랑은 그렇게 안 하시는데요.”
“…알았어.”
한순간 이지만 기백이 밀리고 말았다. 내가, 이 내가 말이다. 홀 플레인 10년 차 사용자….
그만두자. 김한별만 보면 한소영이 생각나 저절로 마음이 흔들리고 만다. 단순히 고유 능력 카리스마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확실히 내가 그녀를 보는 시선에는 미묘한 감정이 담길 적이 많았다. 그 정도로 처음 봤을 때의 분위기가 누군가와 비슷했으니까.
헛기침을 하고 아까 못다한 말을 잇는다.
“항상 내가 판단을 내린 건 아니잖아. 너도, 나도, 현이도, 솔이도.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거지.”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으신지 유정이 언니는 포함 시키지 않으셨네요.”
“나보다는 현이가 더 고생하지 않았어? 오늘 그 원숭이들과의 전투에서도 대단했고.”
“또 그러시네요. 안현 오빠나 유정이 언니한테는 먹힐지 몰라도 저한테는 그러지 말아주세요.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려고 하지 말아요. 안현 오빠는 저랑 협동해서 간신히 두 마리를 잡았죠. 오빠는 혼자서 두 마리를 처리 했잖아요. 그것도 모자라 유정이 언니 전투하는걸 도와주기도 했고.”
한별의 말은 내 아픈 곳을 구석이 찔러왔다. 역시나 닮았다. 절로 얕볼 수 없다는 마음이 들고 있었다. 가끔 나를 보던 시선은 결국 나를 관찰하던 시선이었나.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온 모양 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말았다.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직구를 던지기로 마음 먹었다.
“항상 그랬어요. 숲에서도, 도시에서도, 그리고 오늘 그 낯선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요. 평소에는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지만 정말로 위험할 때는 항상 오빠가 나섰어요. 우리를 하나의 팀으로 가정한다면 우리 팀을 이끄는 것도, 기둥도 오빠라고요. 안현 오빠가 아니고요. 그래서 저는 분했어요. 왜 오빠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나를 생각해주는 건가?’
“글쎄. 나는 생각이 달라. 안현은 확실히 훌륭해. 행동력도 있고, 추진력도 있고, 결정도 과감하게 하는 편이고. 그리고 그 말은 그렇게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다 리더고, 통과의례는 협동이 중요시되는 곳이야.”
“그만하세요. 오빠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에요?”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모르겠다 말하면서도 나는 속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김한별의 고요하면서 차가운 눈동자를 더 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주위에 한기가 흘렀는데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그 정도였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진짜로 의견을 결정하고 앞장서 행동하는 건 수현이 오빠라고요! 오빠는 쉬우면서 대놓고 드러나는 일은 안현 오빠한테 맡기고 정작 어려운 일은 왜 혼자서 묵묵히 하잖아요. 왜 다른 사람들이 안현 오빠만 고맙고, 대단하다고 하는 거죠? 왜 정작 혼자서 궂은 일은 다 한 수현이 오빠를 두려워 해야 하죠? 그리고 오빠는 어째서 그런걸 애써 숨기려 하시는 거죠?”
“너….”
“이대로라면 오빠는 똑같은 상황에서 또 똑같이 행동하고 말겠죠.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가능성도 있어요. 중요한 건 지금 우리 모두가 은연중에 오빠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거에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빠가 우리 팀의 리더가 되어주세요. 앞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혼자 생각하든, 같이 의논하든 행동만큼은 꼭 같이 해요. 오빠가 리더라면 모두 불만 없이 오빠를 따를 거예요.”
김한별이는 이제 거의 애원하는 어조로 나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솔직히 아직은 얼떨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차라리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이유정이었다면 원래 그런 성격이구나 하고 웃어 넘길 텐데 김한별은 도통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그녀가 이 얘기를 나한테 꺼낸 이유를 계산하고 있었다.
서로간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새벽의 한기는 우리들의 몸 곳곳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김한별은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대답을 듣기 전에 나를 보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
6일차 아침이 밝았다. 마지막 말 번을 서고 온 안현은 모두를 깨운 후 분주히 출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피곤한 얼굴로 온 몸의 관절을 비트는 게 어지간히 뻐근한 모양 이었다. 나 또한 거의 자는 둥 마는 둥 뜬 눈으로 밤을 샜지만 하루 정도 안 잤다고 피로를 느끼는 육체는 아니었다.
“안녕. 잘 잤어?”
일부러 밝은 아침 인사를 건네본다. 안솔은 내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허허 웃으며 넘기겠지만 막상 면전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니 쓴웃음이 밀려왔다.
안현이 그런 안솔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어디 하늘 같은 오라버니한테 버릇없이 고개만 까닥 숙이냐고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울먹. 그 뒤로 어느새 이유정이 다가와 그녀를 감싸준다. 둘이서 티격태격 하는걸 보며 안솔은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서 그런 광경을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따뜻했다. 정말로 따뜻한 풍경이었다. 아마 삼 남매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들의 모습은 이곳이 지옥 같은 통과 의례라는 곳을 잊게 해줄 만큼 따뜻하고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나는 저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들과 나는 아예 본질이 다른 사람이었다. 과거 일백 명의 사용자를 베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잠깐 그들의 품에 취해 내 자신을 잊어 버린 건지도 몰랐다.
‘예전에 나를 알던 사람이 지금 나를 보면 기절하겠군.’
자조적인 마음에 키득 웃어버렸다. 어두운 과거를 회상하자 분위기마저 우울해진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뒤에서 이유정이 투덜투덜 거리는 게 아마도 오늘의 오전 말다툼 승자는 안현인것 같았다.
“형. 오늘이면 그 워프 게이트인가 뭔가에 도착할 수 있겠죠?”
“…응.”
“그럼 후딱 도착해버리죠. 여기서 먹는 마지막 아침일지도 모르는데 오늘 아침은 좀 거하게 먹는게 어때요? 형도 많이 드셔야 해요.”
넉살이 넘치는 안현의 말에 나는 미약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아침을 먹자는 제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 난 괜찮아. 오늘 아침은 너희끼리 먹어.”
“네? 하지만….”
“원래 중요한 날을 앞두고는 밥을 안 먹는 버릇이 있어서 그래. 그만큼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 수 있거든.”
내 말에 안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김한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냉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오늘 새벽 김한별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한별아 너는 아침….”
“안 먹어요.”
“어? 그러지 말고….”
“안 먹어요.”
김한별은 안현이 말하는걸 다 듣지도 않고 단문으로 받아 치고 있었다. 안솔도 의외의 광경에 놀랐는지 안절부절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안현은 어색한 얼굴로 나와 한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이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뒤에서 보던 이유정도 감히 지금의 분위기를 거스를 생각을 못하고 평소보다 훨씬 조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하하…. 그럼 우리끼리 먹어야겠네.”
“어, 어쩔 수 없지 뭐. 우리들 몫이 더 늘어나는데. 호호…. 호. 오빠, 한별아. 이거 정말 우리가 다 먹는다…?”
당연히 나와 김한별의 대답은 없었다. 어지간한 이유정도 우리의 반응에 충격을 먹었는지 입을 비죽비죽 거리며 닭 부리를 내밀었다. 순간 김한별이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 고개를 돌릴 생각이 없어 그녀의 시선을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분위기는 한층 더 싸늘해졌다.
활기찬 6일차 아침.
그날의 아침은 아침 식사부터 3명이 2명의 눈치를 보는 걸로 시작 되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