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03
00302 부랑자의 눈물 =========================================================================
워프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나는 ‘영감님 보석상’으로 직행했다. 시간도 많이 늦었지만 뭣보다 안솔의 말이 자꾸만 걸렸기 때문이다. 대충 처리할 일만 처리하고 바로 모니카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런 내 마음과 달리 뮬의 거리는 지나칠 정도로 평화로웠다. 오죽하면 한껏 긴장하고 있는 내가 우습게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대비는 아무리 지나쳐도 나쁠 게 없다는 게 평소 지론이었기에,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가에 들어서도 주변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약 15분의 시간이 흘러, 우리는 목표했던 보석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 저곳 흠이 가있는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자 예의 날카로운 인상의 영감님이 어떤 기록을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찌나 열중하고 있는지 내가 들어온 기척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영감님.”
“으, 응…?”
기록에서 눈을 떼고 한숨을 폭 내쉬던 영감님은 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차분히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시선이 마주치고 3초의 시간이 흐르자 이내 영감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자, 자네?”
“오랜만입니다. 그간 기체 후일 향만 강(氣體 候一 向萬 康) 하셨는지요.”
“…그 특이한 인사말은 여전하군 그래?”
“하하. 다행히 기억해주시는군요. 뭐, 자주 쓰지는 않습니다.”
“그, 그렇군. 그나저나 요즘 한창 바쁠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왔나? 여기 뭐 볼게 있다고…. 흠흠.”
말씀은 저렇게 하셨지만, 이미 몸을 일으켜 손수 의자를 내어주는 중이셨다. 나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클랜원들을 데리고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래도 살아있는 것을 보니 반갑기는 하구먼.”
“예. 예전에 약속한 것도 있고, 잠시 다른 도시에 방문할 일이 생겨서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아이고. 뭐 그리 대단찮은 약속 때문에 이곳까지…. 오기 좀 찜찜했을 터인데.”
“아. 알고 계셨습니까?”
찜찜했다 함은 대표 클랜과의 충돌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의아한 기분에 되묻자 영감님은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제법 떠들썩했으니까. 대표 클랜과 칼부림이 일어난 것이 흔한 일은 아니잖은가?”
“그렇군요. 혹시 뭐 그때 영감님께서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는지….”
“없네. 하여튼 추후 정당방위로 처리되었으니 다행일세. 욕 봤네.”
영강님은 대수롭잖은 태도로 화제를 돌렸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주억였다. 이미 무죄 판결이 나온 이상 크게 상관은 없지만, 계속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에는 민감한 화제였다. 그것을 알기에 영감님도 이쯤에서 화제를 돌렸을 것이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려 진열대를 훑었다. 진열대는 아까 영감님이 읽고 있던 기록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뭘 읽고 계셨습니까? 저희가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하실 만큼 열중해서 읽고 계시던데요.”
“응? 이, 이것들 말인가? 아무것도 아닐세! 보, 보지 말게.”
영감님은 급히 기록들을 그러모으셨지만, 이미 내 눈은 기록들을 상당부분 훑은 상태였다. 그리고 진열대에 있던 기록들은 모조리 머셔너리 클랜에 관한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어흠! 어흐흠!”
“…….”
문득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영감님은 재빨리 기록을 덮으셨지만 이미 내가 봤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목덜미가 벌겋게 변한 상태였다. 나는 호흡을 조절하여 웃음을 참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갑작스럽지만, 그때 그냥 같이 가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무, 무슨 말인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저 심심해서 읽은 것뿐이라네.”
“오호. 그렇군요.”
“그, 그래. 요즘 들어 손님도 없고 해서….”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냥 순수히, 그때 같이 가셨으면 좋았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나만한 참을성은 없는지, 좌우로 쿡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끼. 못 본 사이 넉살만 늘었구나. 그래도 그때는 제법 시원시원하고 기개가 보였건만.”
“농담입니다.”
농담 한 번 던졌다고 기개 없는 청년이 되어버렸다.
어찌됐든 분위기는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해후로 인한 환담은 이 정도면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김한별.”
손짓하여 부르자, 김한별은 즉각 몸을 일으켜 옆쪽으로 다가오더니 약간 거리를 남기고 걸음을 멈췄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자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김한별을 천천히 내 쪽으로 잡아 이끌며, 나는 영감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영감님. 이 아이가 바로 보석 마법사입니다. 한별아, 인사 드려.”
“아, 안녕하세요….”
조금 말을 더듬긴 했지만, 김한별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영감님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안경을 치켜 올리고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호. 이 참해 보이는 처자가 보석 마법사라니. 그래, 반갑구나…. 그나저나 황금 사자에서 용케도 데려왔구먼. 대단하이.”
“오. 그것도 알고 계셨군요.”
“이익!”
영감님은 콧김을 세게 내뿜으며,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
붉게 물든 하늘은 끝자락부터 서서히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태양은 서쪽으로 넘어갈 준비를 마쳤고, 대지에는 어슴푸레한 땅거미가 지고 있다. 곧 있으면 저녁이 찾아오고 칠흑 같은 밤을 맞이할 준비의 시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발길이 오고 가던 상점가의 거리는 어느새 드문드문해진 상태였다. 하기야 저녁 시간대에 활성화되는 거리라 하면 딱 세 군데일 것이다. 잠을 자는 여관, 술을 파는 주점, 아니면 성매매. 상점가에 있는 모든 건물의 불이 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수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갑작스레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와 똑같이 보석상의 벽면에 몸을 기대고 있는 고연주가 보였다.
현재 나와 고연주는 보석상 내부에서 잠시 나온 상태였다. 물론 안에 있어도 상관없겠지만 영감님이 김한별과 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라는 나름의 배려였다.
물론 나 또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이라 함은 고연주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솔의 거취(?)가 문제였는데, 다행히 내부를 가득 채우는 보석을 조용히 구경하겠다는 조건으로 안에 두고 나올 수 있었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할게 있어서요.”
“그렇구나…. 그런데 저 할아버님이랑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예전에 뮬에서 활동할 때 알게 됐습니다. 저한테 잘해주신 분이에요.”
“하긴 겉보기와는 달리 귀여운 면이 있으시더라고요. 호호. 아, 그나저나 정말 놀랐어요. 설마 보석 감정사라는 레어 클래스가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요?”
김한별이 보석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힌 이후, 영감님은 곧바로 자신의 클래스를 밝혔다. 물론 나야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냥 가벼이 놀라는 척만 해주었다. 하지만 클랜원들은 비 전투 클래스처럼 보이는 직업에도 레어 클래스가 있다는 사실이 자못 충격적이었는지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심지어 고연주마저도.
하지만 나는 보석 감정사라는 클래스를 천사들이 괜히 만들어놓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어딘가에 쓸 데가 있었기에 레어 클래스라는 설정을 부여하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감이기는 했지만 보석 마법사라는 클래스와 좋은 짝꿍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영감님을 영입하는 것은 추후 클랜 운영면에서 보아도 확실한 이득이었다.
아무튼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영감님의 영입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아직 클랜의 규모도 크지 않으니 벌써부터 운영을 생각하는 것은 김칫국을 마시는 일이었다.
대강 생각을 정리하고 옆을 바라보자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발장난을 하는 고연주가 보였다. 나는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연주.”
“네~?”
고연주는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윽고 연한 잿빛 눈동자 한 쌍이 나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눈가를 응시하고 있자, 곧이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에 대한 한 점의 섭섭함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만약 여성이었다면, 그리고 그렇게 짐승같이 당했다면 분명히 기분이 불쾌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연주는 눈물까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연주는 아침에 일어난 이후로 지금껏 일말의 원망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미안한 걸지도 모른다.
“미안해요.”
“수현…?”
“미안합니다. 오늘 새벽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고연주는 아주 잠시 동안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다가 이내 연하게 미소 짓더니, 슬금슬금 나와의 거리를 줄였다. 이윽고 그녀는 문을 한 번 슬쩍 바라보고는 양 팔을 쭉 내밀어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난 또 뭐라고. 사과는 오늘 아침에 충분히 받았어요. 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요.”
“우는 것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이 아팠어요?”
그 순간 고연주는 킥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늘게 어깨를 떨던 그녀는, “하여간 둔감한 건 유전이라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파서 울었던 게 아니에요.”
“…….”
“뭐랄까…. 실은 저는요, 관계하는 내내 수현과의 첫날밤을 떠올렸어요. 그때의 수현과 오늘 새벽의 수현의 눈동자는 달라도 너무 달랐죠. 그냥 까닭 없이 슬프고, 무서웠어요. 그리고 관계가 끝나는 순간 갑작스럽게 서글픔이 봇물처럼 터지더라고요. 그래서 눈물을 흘린 거예요. 뭐, 솔직히 실금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호호. 그러고 보니 오줌싸개가 되어버렸네? 비밀로 해주실 거죠? 아, 소금이라도 얻어올까요?”
고연주는 애잔한 눈빛으로 하나씩 말하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까르르 웃었다. 마지막을 농담으로 끝낸 것으로 보아 그냥 이쯤에서 덮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천천히 마주 껴안아주었다.
“고연주.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심이에요. 그때는….”
“저야말로 정말 괜찮다니까요? 수현의 마음은 잘 알고 있어요.”
“제가…. 읍.”
“그 얘기는 이제 그만. 수현은 정말 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거예요? 자꾸 그러니까 부끄럽잖아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제가 먼저 도발한 것도 있는데요 뭐.”
그저 진심을 전달하고 싶었을 뿐인데, 고연주는 한 손으론 내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리고 이내 내 손을 살며시 쥐곤 보석상의 문을 향해 사뿐히 이끌었다.
“정 뭐하면 하연씨 말고 나한테 더 잘해주던가~. 아무튼 이제 그만 들어가요.”
“네? 하지만 아직 얘기가….”
“얘기 끝났어요. 실은 아까부터 엿듣고 있었거든요.”
벌컥!
그때였다. 문 부근으로 다가간 순간 공교롭게도 보석상의 문이 활짝 열리며 김한별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오빠. 얘기 끝났어…요?”
그리고 문 앞에 바로 서있는 우리를 보고는, 말끝을 미묘하게 올렸다.
*
한 남성이 숲 밖으로 비죽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한 번 쓱 훑더니 이내 가볍게 손짓했다.
사삭! 사사삭!
이윽고, 숲에서 수백은 되어 보이는 사용자들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었다.
남성은 뒤에 서있는 사용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에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갑수, 백서연.”
이윽고 남성이 조용히 두 명을 호명했다. 그러자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닌 남성과 꽉 조인 타이츠를 입은 여성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제 본대에서 연락이 왔다. 사전공지는 이미 했겠지만, 결행 일은 오늘 밤이 넘어가기 전. 다들 각자 맡고 있는 부대에 확실히 전파해두었겠지?”
“완료했습니다.”
“그럼~.”
시원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남성은 곧 우락부락한 남성, 김갑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갑수. 내부 인원들은 어떻게 됐지?”
“지금 다들 북문 근처, 그리고 워프 게이트 근처에서 숨죽이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북문이 뚫리는 순간, 각각 문을 열고 워프 게이트를 점거할 예정입니다.”
“좋아. 내가 먼저 부대를 이끌고 북문을 들이친다. 북문이 뚫리고 안에서 한바탕 휘저어 놓을 테니, 너는 문이 뚫리는 순간 바로 서문을 공략을 시작한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는…. 확실히 전했겠지?”
“예. 확실히 전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성은 이번에는 여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연. 솔직히 네게 이 임무를 맡겨야 될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머, 서운하네. 내 실력 못 믿어서 그래?”
“실력이 문제가 아니다. 너는 정이 너무 많아. 부랑자답지 않게 말이지.”
“그만큼 효과도 확실하지? 걱정 말고 맡겨나 두셔. 현이나 갑수보다 내가 먼저 동문을 뚫고 워프 게이트로 도달할 테니까.”
서연이라 불린 여성은 자신 있다는 듯 단검을 휘휘 돌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김갑수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내 현의 눈치를 보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명심해라. 이건 전쟁이야. 전쟁인 이상 죽을 수 밖에 없어. 그때처럼 또 대책 없이 날뛰어버린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남문은 남겨둔다. 생각 같아서는 한놈도 남김없이 깡그리 몰살시키고 싶지만, 그래도 구멍 하나는 틔워주어야겠지. 그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은 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칼날같이 사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갑수. 백서연. 지금 바로 각자 부대를 이끌고 목표지점으로 이동해. 신호는 확실하게 줄 테니, 혹여나 먼저 행동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주의해라.”
그 말이 끝난 순간 김갑수와 백서연은 번개같이 좌우로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숲 안에서 느껴지던 수천의 기척 또한 좌우로 갈라졌다.
바야흐로 복수를 위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독자님들 죄송합니다. 곧 후기와 리리플을 올리려고 했는데…. 방금 전까지 잠깐 누워있었습니다. 머리가 여전히 무겁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네요. 죄송합니다. 오늘 딱 하루만 더 후기, 리리플 쉬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하루 자면 웬만큼은 회복되는데, 이상하게 요즘 컨디션이 계속 난조를 보이네요. 내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대로 된 후기와 3회 합친 리리플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를 부탁합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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