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1
00031 보스 몬스터. =========================================================================
날씨는 맑았다. 숲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말간 햇빛이 우리들의 머리를 보듬어주고 있었다. 분명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행이 아무런 말도 없이 걷고 있는 게 유일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오두막에서 출발한지 약 여섯 시간 정도 지난 것 같다. 그 동안 우리는 꼭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나와 김한별 사이의 분위기가 냉랭한 것도 있지만 일행의 내면을 본다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오랫동안 걸었으면 지칠 법도 한데 우리는 한 번의 휴식도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이제 절반 이상이 눈에 잡힐 만큼, 아니 절반만 보임에도 불구하고 큼지막하게 보이는 워프 게이트가 눈에 들어온다. 워프 게이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수록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다. 들리는 건 색색 조용한 숨소리 뿐. 다들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속으로 흥분 감이 오른 상태일 것이다.
힘을 내서 가는 건 좋지만 마냥 마음 편하게 갈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예상대로 우리들은 워프 게이트로 가는 길목에서 단 한번도 괴물을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다들 알게 모르게 느슨해진 것 같았다.
마음이 심란했다. 보스 몬스터가 출현하게 되면 그때는 정비나 상의를 할 시간이 없다. 귀신 같이 우리가 있는 곳을 눈치채고 달려들 텐데 다들 우왕좌왕 흩어지지만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아무리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신의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면 분명히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워프 게이트가 눈 앞에 있다. 조금만 더 가면 통과의례는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눈에 보일 정도의 조금의 거리를 남겨두고 지금껏 지켜온 컨셉과 계획을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까웠다.
남은 거리를 어림으로 짐작하니 대충 600미터가 남은 것 같았다. 우정민은 300미터를 남겨두고 보스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고 했으니 절반만 더 가면 우리도 만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최대한 천천히 가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내 바램과는 반대로 일행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안현도 그걸 느꼈는지 한동안 유지하던 침묵을 깨고 들뜬 목소리로 안솔에게 말을 걸었다.
“솔아.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저기 눈 앞에 보이는 커다란 타원형 건물까지 가면 분명 이 지긋지긋한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조금만 더 참아.”
“응!”
부드러운 안현의 말에 안솔도 밝은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히 미소도 보이는 게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 이었다. 막 잠깐 쉬자고 말하려던 나는 바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들과 보폭을 맞출 수 밖에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워프 게이트와의 거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괜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그냥 얌전히 워프 게이트로 들어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건 맞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상처 받지 않는 행복한 길.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어딘가 마음속 한곳에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통과 의례에 들어온 이후 가장 광범위하고 세밀한 마력 감지를 펼치고 있었지만 보스 몬스터의 낌새는 조금도 잡을 수 없었다.
어느새 목표 지점까지 500미터를 남겨둔 상태. 워프 게이트는 서서히 그 완연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듯한 제단이 거대한 타원형 건물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웬만한 건물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웅장한 모습이었다. 중앙은 도넛처럼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있어 연 푸른빛 구체가 둥실둥실 부유하고 있었다. 이따금 가느다란 파란 전류를 흘리는 게 워프 게이트를 가동하는 마력 구임이 분명했다.
겉보기에는 제법 아름다운 구슬이라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은 구슬로 향했다. 안솔은 순수한 표정으로 감탄하고 있었고 김한별도 신선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게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 이었다. 특히, 이유정은 몽롱한 얼굴로 영롱한 빛깔을 내뿜는 구슬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정말 예쁘다…. 조각조각 쪼개서 귀걸이 만들고 싶어. 귀에 걸고 다니면 진짜 아름답겠다. 갖고 싶다.”
“언니. 저는 있는 그대로 두고 보고만 싶어요.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오.”
이유정과 안솔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자 안현은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귀걸이를 한 유정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끔찍하군.”
“어머? 우리 현이 그건 무슨 뜻일까…?”
“네가 귀걸이라고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조금 웃겨서. 차라리 우리 솔이한테 더 잘 어울리겠다.”
“뭐야?”
안현의 심드렁한 얼굴로 조잘거리자 유정이 발끈한 얼굴로 그의 허리를 세게 쳤다. 보아하니 안솔은 얼굴이 방긋하게 변한 게 귀걸이가 어울린다는 말을 들어 그런 것 같았다.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수줍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하렘 왕이 될 기질이 다분한 놈이 시스콘이라는건 어떻게 보면 불행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든 시답잖은 생각에, 절로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남은 거리 400미터. 주변을 둘러보니 처음 우리가 시작했던(스타팅 포인트) 공터와 상당히 유사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군데 군데 근소하게 자란 풀 뿌리와 대지의 대부분을 덮은 흙 무리들. 다만 가끔 색깔이 유난히 짙은 흙 무리들이 눈에 띄었는데 발로 밟고 지나가자 다른 흙들처럼 부드러운 느낌 보다는 딱딱하게 굳은걸 밟는 것 같았다. 피가 스며들어 흙이 굳어버린 걸까?
그렇다면 아마도 앞선 통과 의례에서 워프 게이트를 앞두고 당해버린 예비 사용자들일 것이다. 눈치챈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지만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300미터가 남았다. 이제 우리들은 거의 빠른 걸음 수준으로 뛰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은 우리는 살았다는, 그리고 해냈다는 환희에 흠뻑 젖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으르렁 거리던 안현과 이유정이 서로 미소를 짓는다. 안솔을 대놓고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한별이도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지만 알게 모르게 어딘가 안도한 것 같았다.
300미터에 돌입했음에도 보스 몬스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결국 우정민 일행은 운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행운 100을 자랑하는 안솔이 있으므로 이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살핀 후 감지에 걸리는 게 없자 나도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마력을 풀려고 할 찰나였다.
나는 그때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것을.
파츳! 파츠츳!
200미터를 남겨둔 시점에서 공간을 찢는듯한 소음이 내 귀에 들렸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고, 허공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무언가 거대한 마력이 이동할 때 나타나는 현상 이었다. 일행들도 뭔가 불안한 기운을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빠르게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역시나 공터를 둘러싼 급작스러운 마력 파장이 발생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그냥 사방으로 퍼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고 차분히 마력이 그리고 있는 문양을 분석하려는 순간.
온 공간을 웅혼히 울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걸어왔던 길목 중간에 거대한 하나의 진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문양을 보는 순간 나는 아차 하고 말았다. 그건 바로 고등 소환 마법 진이었다. 얼른 내 마력을 암암리에 보내 진의 형태를 훼손하려고 했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어느새 허공에 완전하게 떠오른 마법 진은 말간 빛을 뿜어내며 가동을 시작했다.
그런가. 보스 몬스터는 이런 식으로 소환 마법 진을 통해 나타났던 건가. 어느새 나를 포함한 일행은 멍한 얼굴로 마법 진이 떠오른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법 진이 그들의 눈에도 보이는 게 틀림 없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마법 진은 악하고, 불길한 기운을 뭉클뭉클 쏟아내고 있었다.
우우웅! 우우웅!
드디어 마법 진이 소환을 시작했다. 맨 처음 선을 보인 건 보스 몬스터의 얼굴과 손가락 이었다. 그 놈의 얼굴은 말 그대로 그로테스크 그 자체였다. 길쭉한 얼굴에는 눈은 없지만 쭉 찢어진 입과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거대한 낫이라고 착각할 만큼 날카로운 예광을 뿌리는 손가락도 보였다. 칠흑 강철을 두른 듯 거무튀튀한 갑판부도 나오고 기다란 꼬리도 불쑥 튀어 나왔다.
이윽고 소환을 마친 보스 몬스터는 장장 5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의 출현이었다.
으적, 으적, 으적, 으적. 꿀꺽!
막 사냥감을 식사하고 있었는지 놈의 입가에는 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족한지 우리를 보며 입맛을 쩍쩍 다시는 중 이었다.
나는 얼른 일행의 얼굴을 살폈다. 보자마자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뛰어가지 않은 건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이유정도, 김한별도, 안솔도 패닉 상태에 빠진 모습 이었다. 다들 얼음 동상처럼 몸이 굳은 듯 한 발자국도 땅에서 떨어뜨리지 못한다. 놈이 내뿜는 무지막지한 살기에 압도 당한 것이다.
오직 안현 홀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마…. 말도 안돼…. 이, 이건 도대체….”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
안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스 몬스터의 광호한 울부짖음이 우리의 전신을 때렸다. 아마도 살기를 담은 음파를 맞았으니 온 몸이 저릿저릿 할 것이다. 마법에서 풀린 듯 다들 주춤주춤 몸을 움직였지만 한두 발자국이 전부였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모두를 보며 나지막하지만 그러나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정신 줄 놓지마. 당황 하지도 말고. 침착하게 대응하라고.”
“혀, 형…. 무리에요. 이번만큼은 무리에요. 이길 수 없어요. 도망쳐야 해요!”
석궁에 시위를 거는 내 모습을 보며 내 말을 곡해했는지 안현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스 몬스터가 주는 엄청난 위압감에 다들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리치고 다그쳐봤자 오히려 혼란만 조장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애들과 같이 잡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나긋한 마력을 담은 목소리로 모두의 굳어버린 신체를 보듬어주었다.
“싸우자는 소리가 아니다. 저놈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거리나 다름 없어. 네 말대로 우리는 도망친다. 하지만 아무데로나 가면 각개 사냥 당할 뿐이거든. 그러니 워프 게이트 방향으로 도망칠 거다.”
“그, 그래요. 얼른….”
수긍은 하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안현과 김한별은 서서히 공포에서 깨어나는지 눈에 굉장히 미약하지만 생존을 열망하는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력으로 전신을 보듬어주고 지금껏 믿고 의지해온 내가 담담한 반응을 보이자 뭔가 모를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지금부터 다들 짐 또는 무기를 모두 버려. 최대한 몸을 가볍게 만들고 워프 게이트를 향해 전력으로 뛴다.”
“에, 에…?”
보스 몬스터가 다시 한번 울부짖는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아직도 얼떨떨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안솔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치솟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매고 있던 가방을 강제로 벗기며 입을 열었다.
“안현 뭐해! 칼이랑 방패 빨리 떨궈! 그거 들고 뛸 생각이야?”
“네…. 네!”
안현과 이유정 김한별은 모두 자기가 들고 있던 짐과 무기를 버렸다. 어느새 보스 몬스터는 네 발을 이용해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땅에 발을 짚을 때마다 쿵 소리가 울리는 게 마치 미약한 지진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첫 번째 지진을 신호로, 나는 안솔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 일행 모두 전속력으로 워프 게이트를 향해 질주했다.
달린다.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모두들 있는 힘껏 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들리는 쿵 소리는 점점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이유정이 불안한 얼굴로 슬쩍 뒤를 보려고 하자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고개 돌려 확인할 생각 하지마. 무조건 앞으로 뛴다는 생각만 하라고.”
보스 몬스터가 소환된 지점은 워프 게이트로부터 300미터. 우리는 200미터를 남겨둔 상태. 100미터 차이가 있었지만 분명 한 번은 따라 잡힐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한 번을 넘기는 게 내 목표였다. 보스 몬스터는 뛰면 뛸수록 가속이 붙는 것 같으니 한번만 자리에서 멈추게 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속력을 무로 되돌릴 수 있다.
그렇게 다시 처음부터 돌리면 비교적 느린 속도로 우리를 쫓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우리는 그 틈을 타 워프 게이트로 들어간다. 나는 왼손에 장착한 석궁을 꾹 쥐었다.
쿵! 쿵! 쿵! 쿵!
남은 거리 180미터.
쿵! 쿵! 쿵! 쿵!
남은 거리 160미터.
쿵! 쿵! 쿵! 쿵!
남은 거리 140미터. 소리의 주기가 짧아지는 게 녀석의 속도가 본 궤도에 오르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계속 달린다고 해도 보스 몬스터를 뿌리치는 건 요원한 일일 것이다. 나는 때가 왔음을 느꼈다. 다들 달리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 나는 일정량의 마력을 장전한 화살로 스며들게 했다. 일반 화살로는 강철 같은 놈의 갑판을 뚫을 수 없을 것이다. 마력 전달을 끝내자 왼쪽 팔목에서부터 전보다 배는 날카로운 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일련의 준비를 끝냈다. 이제는 정말 내가 나설 차례였다. 어물쩍거리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달리던 다리를 멈추며 꾹 잡았던 안솔의 손을 풀었다.
갑자기 정지하는 나를 지나치며 안솔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 반사적으로 이상한 기분을 느낀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고개를 돌리기 전 강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뒤 돌아보지 말고 달리라고!”
처음 들어보는 내 화난 목소리에 다들 찔끔한 것 같다. 하지만 엉거주춤했던 고개가 다시 전방을 향하는걸 확인하자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멈춘 나를 보며 첫 타깃은 나라는 듯 달려오는 보스 몬스터를 보며 나는 신속하게 왼 팔을 들어올렸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