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26
00325 미래, 뒤틀리다. =========================================================================
마치 우유를 발라놓은 것처럼 뽀얗고 하얀 피부는 달에서 비치는 찬연한 빛을 받아 한층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정자(亭子) 안의 여성이 푸른 월광을 담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한다. 나 또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여성의 아름다운 눈꺼풀이 위아래로 서너 번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며 찾아온 침묵을 삼킨 후, 나는 태연히 여성의 앞에 마주앉았다.
예상했던 대로 여성의 정체는 이효을이었다. 그녀는 냉정해 보이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껏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만히 얼굴을 살피고 있자 한순간 섬찟한 기운이 등골을 훑는다. 표정이 가식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어있다.
‘재미있네. 그래도 나름대로 짬은 먹었다는 건가.’
하기야 북 대륙의 수호자라면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은 사용자일 것이다.
1. 이름(Name) : 이효을(8년 차)
2. 클래스(Class)
① 북 대륙의 수호자(Guardian of the Northern Continent) : 활성화
②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 비활성화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해밀(Clan Rank : B Plus)
5. 진명 · 국적 : 빛을 인도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68.7cm · 49.3kg
8.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조금 회복했군.’
나는 이효을의 사용자 정보를 상기하며, 방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마, 말도 안 돼. 너는 도대체….”
이효을은 여전히 당황한 빛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천천히 품속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점화석으로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인다. 그리고 연기를 길게 내쉬며, 차분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들었는데…. 천사들의 따까리가 내게 무슨 볼일이지?”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는 기형적인 형태를 그리며 춤추듯 퍼져나갔다. 그리고 연기가 허공에 완전히 녹아들 즈음, 흐릿한 기체에 가려져있던 이효을의 낯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낯빛을 물들이던 당황이라는 감정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이윽고 이효을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고, 분홍빛 예쁜 입술은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그게 무슨 말일까…?”
이효을은 톤이 높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보다 훨씬 정돈된 목소리로,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는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서로 밀고 당기는 피곤한 짓거리는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시작부터 돌 직구를 날린 것이다.
“놀란 척, 모른 척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따까리.”
“호호. 누가 김유현 동생 아니랄까 봐 말 한 번 차갑게 하는구나? 그리고 아까부터 따까리 따까리 거리는 데 그렇게 부르지 말아줄래? 듣는 따까리 기분 나쁘거든.”
이효을의 재치 있는 대답에 나는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이내 뒷머리를 소리가 날 정도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니…. 어휴. 어쨌든, 우선 내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표해야겠지. 고마워. 물론 반말과 따까리라고 부른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은인이니까 그냥 넘어갈게.”
“반말은 네가 먼저 했고, 따까리는 사실이지.”
엄밀히 말하면 이효을을 비롯한 모든 사용자들이 따까리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하지만 이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었다. 북 대륙의 수호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녀의 접근 권한의 범위는 모르니까.
“…너 되게 얄밉게 말한다.”
“아무튼 쓸데없는 말들은 그만 집어치우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이효을은 잠시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어 날 흘겼지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에는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물어볼게. 왜 나를 보자고 한 거야?”
“그거야 간단해. 궁금해서 불렀어. 하도 요즘 네 말이 많이 들리길래 누군지 정~말 궁금했거든. 아니, 애당초 뮬의 홍보 기록을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불러놓고 어떻게 좀 살펴보려고 했는데….”
“…….”
“너무 그렇게 보지마. 너는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내 입장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어? 달마다 유적을 발굴하지 않나. 클랜원은 시크릿과 레어로 도배를 하지 않나. 내가 북 대륙의 수호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를 않나. 0년 차 사용자답지 않은 무위를 보이지 않나. 천사들에게 물어봐도 Tanay 어쩌고 거리면서 접근 권한이 없으니 알 수 없다고 하고, 오히려 친하게 지내고 최대한 도와주라고 하지를 않나. 이러한 상황인데 너라면 안 궁금하겠어?”
역시나 그냥 이 자리에 나온 건 아닌 듯싶었다. 사전에 자신만의 깜냥으로 나에 대해 조사한 게 분명하다. 물론 별로 건진 것은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나는 전부 타버린 연초를 톡 튕기곤 어깨를 으쓱였다.
“천사들도 알려주지 않은 건데, 내가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방법은 여러모로 생각해뒀어. 일단 고유 능력으로 너에 대해서 파악하고 북 대륙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드러내 뭔가 좀 있어 보이려는 척을 하려 했거든. 그리고 살살 꼬시려고 했는데…. 고유 능력은 네 알 수 없는 능력에 간파 당했고, 수호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네 능력에 대한 정체가 뭐야? 어떻게 수호자 전용 능력을 막을 수 있었던 거지?”
참 솔직한 만큼 궁금한 것도 많은 아가씨였다. 물론 이효을이 내게 가지는 호기심은 사용자로써 온당 당연한 것들이었지만, 그거야 그녀 사정이었다. 해서 코웃음으로 대답해주자 이효을의 얼굴이 샐쭉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후유. 그럼 이것만 알려줘. 도대체 내가 어떻게 북 대륙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거지?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항이니 꼭 대답해주면 좋겠어.”
“글쎄.”
“부탁해. 만약 네가 대답해주면, 나도 네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 대답해줄게.”
이건 조금 끌리는 제안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알고 있었어. 그리고 이미 네 담당 천사에게 다녀온 거 아닌가? 문제가 있었다면 천사들이 진작에 조치를 취했겠지. 보아하니 별문제 없이 넘어간 것 같은데, 그럼 된 거지.”
“…가브리엘이 전해달래. 비밀은 꼭 지켜달라고. 그리고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군.”
“아오 진짜 미치겠네.”
이효을은 처음으로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리더니 입술을 꾹꾹 짓씹기 시작했다. 그에 아랑곳 않고 나는 차분히 질문을 던졌다.
“넌 내 형과 무슨 관계지?”
한참 손해 봤다는 얼굴을 떨치지 못하던 이효을은 순간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이내 “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왜 웃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단은 살려놓기는 했지만 이효을이 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차후 처분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일단 살려둘지, 기회를 봐서 죽일지, 아니면 협력할지.
“푸.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아무튼 그 질문에 대답해보자면…. 난 올해로 수호자 7년 차야.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이끌어주는 것으로 선택한 사용자가 바로 네 형이고. 물론 최근이라고 해봤자 2년 전이지만.”
“……?”
“원래 수호자가 2년 동안 한 곳에 머무르는 일은 드물어. 진짜 길어봤자 1년? 물론 김유현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천사들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네. 아무튼 내 개인의 의지로 남은 게 가장 커. 나도 천상 한 명의 여성이잖아.”
“그렇군.”
‘이제 그것도 끝이네.’라는 말이 조금 걸렸지만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뭐, 솔직히 지금 그만둘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야. 그럴 수가 없어서 문제지. 후계자가 없어 후계자가…. 어휴, 망할 할망구.”
이효을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묘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저기 있잖아. 어쩌면 우리 형수 도련님 사이가 될지도 모르는데, 질문 하나만 더하면 안될까? 물론 너도 해도 좋아.”
“앞에 말은 인정 못하겠는데, 뒤에 말은 그러도록 하지.”
“좋아. 자세히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예 아니오 로만 대답해줘. 너 혹시 새로운 수호자니?”
“아니.”
즉답해주자, 이효을은 굉장히 실망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기대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내 차례. 너 조만간 제법 커다란 소집령을 개최할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응? 응. 그런데 그렇게 크지는 않아. 나를 알고 있는 애들만 부를 거니까.”
“그렇겠지. 그럼 물어보자. 도대체 너희들의 얘기는 어디까지 진행된 거지? 그리고 목적은 뭐지?”
“?”
내 질문에 이효을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범위를 포괄적으로 잡은 것 같아 약간 축소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얼마 전 별빛 클랜이 모니카로 들어왔다. 원래는 헤일로에서 활동하던 클랜인데, 이스탄텔 로우의 스카우트를 받았다고 하더군.”
“아하. 웬일이니. 이건 소영씨가 실수했네…. 아니, 아니다. 하긴 곧 일은 터뜨릴 거니 별 상관은 없으려나?”
이효을은 그제야 감을 잡았는지 토끼 눈을 떴지만 금세 빙긋 웃으며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아니, 뜻 모를 소리가 아니었다. ‘실수’와 ‘터뜨릴 거니 별 상관은 없으려나.’라는 키워드가 나왔다. 아마 그녀는 내가 한 번에 두 개의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눈치채곤 완곡히 돌려 대답해준 것 같았다. 그러면 두 개 모두 대답해주겠다는 말이었는데, 참 종잡을 수 없는 사용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목적이라…. 이건 조금 설명이 길어질 것 같은데…. 에이, 뭐 천사들 말도 있고 도련님이기까지 하니 대 출혈 서비스다. 너 혹시 할망구…. 어험. 너 대모님이 살해당한 것은 알고 있지?”
“알고 있다.”
“체. 딱딱하게 대답하기는. 아무튼 개인적으로 대모님의 사망에 석연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그것을 풀려고 행동에 나섰는데, 너도 알다시피 오히려 사경을 헤매는 꼴이 됐지. 네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지만, 깨어나보니까 일은 터져있더라고. 그래서 고민에 빠져있던 찰나에 네가 짠하고 부랑자들을 데리고 나타나 준거야. 소집령의 목적은 바로 네가 데려온 부랑자들이야.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오해는 하지 말아줘. 네 권한을 빼앗겠다는 게 아니라 엄연한 부탁이니까.”
‘석연찮은 점을 풀려고 행동에 나섰다고?’
형은 유적을 탐험하다가 당했다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이효을의 말은 달랐다. 그렇다면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거나.
나는 그러한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럼 네 말은 대모를 살해한 것이 부랑자라는 말인가?”
“똑똑해서 좋네. 응.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지금 상황과 결부시켜보면 냄새가 꽤 많이 나거든? 솔직히 부랑자 한 명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무려 백서연까지 잡아왔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정말 고맙지. 걔는 거의 수뇌부 급으로 볼 수 있는 애라서 이것저것 알고 있는 게 많을 것 같거든. 아마 내 생각이 맞는다면, 아예 걔가 대모 살해에 참가했을 수도 있고.”
오랫동안 말해서 입이 아픈지, 이효을은 잠시 입술을 매만지다가 이내 양손을 살며시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아 참. 나 혼자 김칫국만 마시고 있었네. 두 번째 소집령에 참가해줄 거지? 참가자 중에는 당연히 김유현도 있어. 응?”
그게 도대체 뭔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담담히 이효을을 응시했다. 그녀의 생각과 내 생각은 비슷하다. 아니 기억과 비슷하다고 해야 맞으려나. 아무튼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오늘의 대화로 한 가지 확신을 내릴 수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를 치료해주길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하다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살려둔다고.
============================ 작품 후기 ============================
오늘은 5분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개강을 하고 나니 갑자기 생활리듬이 어그러져 영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하하. 아, 그리고 조만간 공지에 걸려있는 고연주 사진은 교체할 생각입니다. 그려주신 분께 부탁해 가슴 부분을 조금 더 가린 그림으로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 그리고…. 예리한 매의 눈을 가지신 분들은 오늘 회에서 뭔가 감을 잡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알아차리셨더라도, 다른 분들을 위해 말을 잠시 담아주시면 굉장히 감사하겠습니다. _(__)_
『 리리플 』
1. 앙마처리다 : 1등 축하합니다. 혹시 그분이 맞으신 가요? 하하하. 🙂 만약 맞는다면, 만나 뵈어서 즐거웠습니다!
2. TrueEyes : 네! 여기 리리플 바치겠습니다. 넙죽! _(__)_
3. 월야수월 : 화정과 반시의 저주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능력이라고 다 같은 능력은 아니거든요. 🙂
4. 꿈속의활로 : 음. 둘의 사용처가 달라 비교하기 애매하지만, 만약 둘을 완전체로 가정한다면, 화정 > 제 3의 눈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5. 태양달그리고별 : 그렇죠. 이효을은 남부와 동부를 아우를 정도의 영향력이 있으니까요. 차후 소집령에서 차차 드러낼 생각입니다.
6. podytop : 이효을은 김수현의 기억에 없던 이입니다. 원래 1회차 때 이효을은 반시의 저주를 해결하지 못해 사망하고, 김수현이 형의 클랜에 들어간 것은 한참 후입니다. 혹시 대륙의 수호자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시몬과 부랑자 대장의 대화를 다시 읽어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
7. 유리켄느 : 효을 이름 참 예쁘죠? 하하. 수현의 현은 빛날 현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
8. 레필 : 단언컨대 제 3의 눈은 사기 능력입니다. 하하.
9. J.F : 수현의 경우엔 현재 검의 주인이죠. 그래서 모든 검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하.
10. 석양s : 이거 초 중반까지는 훈훈하게 보다가 갑자기 남자 주인공처럼 보이는 애가 피를 흘리면서 누워있어 깜짝 놀랐네요. -_-a 그리고 마지막엔 언뜻 보다가 또 놀라서 껐는데, 목을 안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