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63
00362 단판 승부 =========================================================================
사실상 물어볼 것도 없었다. 이미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한 이상 돌출 행동은 크게 제한을 받는다. 그런 만큼 이곳 바바라 부근 구축된 진영의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클랜원들은 다들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 눈을 마주치려 하면 황급히 시선을 피하였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내디뎠다.
“클랜 로드로써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여 창피한 마음뿐입니다. 그래도…. 다들 한창 바쁜 와중에 이곳까지 와주신 건 정말 감사히 생각합니다.”
“수, 수현.”
“지금 몸 상태는 매우 양호합니다. 형과 검후에게는 제가 나중에 따로 찾아 뵙도록 하지요. 그럼 이제 다시 원래의 자리들로 되돌아가시는 게 나을 것 같군요.”
“그, 그럼. 가실 거면 같이….”
정하연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여전히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이는 클랜원들을 뒤로한 채 막사를 나섰다.
딱히 클랜원들을 탓하고픈 생각은 없다. 아니. 어떻게 보면 결국에는 최종 인선을 바꾼 내 잘못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신상용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용자였다. 하다못해 중간에 어떤 조치라도 취해주었다면…. 믿는다는 생각으로 놔둔 게 어쩌면 방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엄습했다.
그래. 일단 만나자. 만나서 이야기라도 들어보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제 3제대의 막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설령 저번과 같이 신상용 쪽에서 피한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만나리라 단단히 벼르며 막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제 3제대의 막사만 해도 2, 300개는 족히 넘어갔지만, 나는 돌아다니는 사용자들에게 물어 간신히 신상용의 막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가르쳐준 막사로 들어선 순간, 한 쪽 구석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늘은 막사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미동도 않은 채 누워있던 신상용의 고개가 일순 어렵사리 나를 돌아보았다.
“신상용씨.”
“으…?”
아직 깨어있다는 생각에 한 번 이름을 부르자, 이윽고 신상용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크, 클랜 로드?”
“누워있으셔도 괜찮습니다.”
이윽고 비로소 내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는지, 신상용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바로 팔을 미끄러뜨리는 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얼른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몸을 부축했다. 그 순간 갑작스레 코를 찔러오는 시큼한 냄새에, 방금 전 신상용이 구토를 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정말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군.’
가까이서 본 신상용의 얼굴은 더없이 심각해 보일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인다. 예전의 어수룩한 눈매는 퀭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상태였다. 잔잔함과 따뜻함이 머물던 눈동자는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오직 수척해진 얼굴과 나락까지 떨어져 내린 공허한 눈만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와 신상용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사용자 신상용. 몸은 좀 괜찮습니까.”
“…….”
“많이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큭.”
그 순간, 내 말이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신상용은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초췌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결국 꾹 깨문 입술로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한동안 소리 죽여 흐느꼈다.
차마 말을 걸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그늘지어있는 신상용을 보며,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3시간 같던 3분이 흘렀을 즈음, 그의 어깨에 일던 떨림이 서서히 가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숙인 고개 사이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로드께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말이었는지요.”
“스스로 한계를 느꼈을 때. 그 벽을 넘어가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 물론 넘어가는 과정은 많이 힘들겠지만…. 스스로 벽을 넘었을 경우, 그것은 자신의 발 아래를 받쳐주는 탄탄한 지지대가 되어줄 것이다.”
기억한다. 그것은 내가 아직 뮬에 있던 시절, 정하연과 신상용을 처음 가입 받을 때 해주었던 말이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로드를 만나기 이전 항상 목숨을 우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시를 나가는 일도 무척 드물었고, 최대한 안전을 추구하면서 생활했지요…. 하지만 로드를 만난 이후. 그리고 여러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저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한 번 바뀌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하게 되었다가, 하게 된 것 같다 라. 뜻 모를 의미심장함이 느껴지는 말에, 나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이번 전쟁에 참가한 것도 그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클랜 로드께 호기를 부렸고, 따라오게 되었지요. 하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호기가 아닌 객기였다는 것을요.”
“…….”
“어떻게 서든 입증하고 싶었는데….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하하. 안될 놈은 안되나 봅니다.”
“사용자 신상용.”
내 부름에 신상용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에 미약한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자기를 비웃는, 자조(自嘲) 짙은 웃음이었다.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달려가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신상용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얼굴을 보였다. 그의 입가에는 서글픈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윽고 멈췄던 입이 다시 열리었다.
“클랜 로드에게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
하늘에 희미한 달이 떠 있다. 어둑한 먹물을 머금은 검은 구름과 동그란 띠 형태를 보이는 달무리는, 내일의 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나는 막사에 들어가기 전, 담담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싸늘한 밤바람이 온몸을 휘감아오는 게 느껴졌다.
고요한 기운이 감도는 동부의 진영.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우중충한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마 그 이유는 어제 치른 전투의 여파가 남아있어서 그럴 것이리라.
동부는 전투를 시작한 이래로 어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일단 확인된 사망자수는 22명. 결국에는 최전방에 폭발적으로 퍼부어진 적들의 공격을 일부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적들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겠지만, 현재로서는 자세히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사실상 22명의 사망으로 이런 우중충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건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결국 요지는 사기였다. 지금껏 시종일관 우세한 전투로 일관했던 만큼, 이번에 대패를 당할뻔했다는 사실이 자못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용염을 되돌림으로써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하니, 사기가 반전되는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은듯했다.
‘내일이 문제로군…. 유지나, 반전이냐. 그런데 또 그런 공격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머셔너리 로드.”
그때였다. 상념은 그만두고 내일을 위해 이만 잠자리에 들자고 마음먹었을 즈음, 한껏 농염함을 품은 음성이 들리었다.
“아직 주무시고 계시지 않았군요. 다행이에요.”
“마법의 탑 로드?”
나를 부른 여인은 바로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이었다. 그녀는 한 번 어깨를 으쓱이고 나서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르기 힘들지 않아요? 그냥 선율로 불러주면 참 고마울 텐데.”
“밤이 깊었는데, 이곳까지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이런.”
바로 용건을 묻자 선율은 입가에 쓴웃음을 띄웠다. 그러더니, 내 기대에 부응하려는지 무척 빠른 속도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래요. 머셔너리 로드에게는 총 세 가지 공적, 개인적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 첫 번째는 머셔너리 로드께서 요청한 사용자 차출 요청. 두 번째는 개인적으로 사과할 것이 있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전할 소식이 있어서예요.”
“차출 요청이라면…. 지금 제대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네. 원래 소식을 전하는 건 다른 분이 하실 예정이었는데, 마침 제가 볼 일이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맡게 되었어요.”
물 흐르듯 말을 꺼내는 선율을, 나는 새삼스런 기분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일거리 남겨두고 자는 성격은 아니라서. 실례일까요?”
이윽고 선율이 눈매를 살며시 치켜 올리자, 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해서, 실례가 아니라 오히려 환영이었다. 왜냐하면 나도 비슷한 성격이었으니까.
“후유. 차출 요청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법의 탑 로드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사용자 신상용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 동안 관심 깊게 지켜봤으니까요. 아무튼…. 뭐, 차출은 허락할게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머셔너리 로드.”
“어떤 것을….”
“혹시 신상용씨를 둘러싼 소문을 들으셨다면, 헛소문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그건 제가 보증할게요.”
신상용을 둘러싼 이상한 소문이란, 바로 행군을 하면서 자주 자리를 이탈한 행동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이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은, 아니 ‘못한’ 태도와 이어져 현재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진 상황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상용씨는 지금껏 벌어진 공방전에 빠짐없이 참여했거든요. 그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 정말로, 있는 힘껏 싸웠어요.”
하지만 소문이 사실이 아니란 것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대답으로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내 반응을 봤는지, 선율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차출 문제는 됐고…. 이제 개인적인 사과를 해야겠군요.”
“혹여 저한테 잘못하신 거라도?”
“네. 혹시 저번에 저에게 점을 보신 것을 기억하시나요?”
“기억합니다.”
“그때 떠나신 이후로, 제 멋대로 나머지 카드를 펼쳐보았어요. 물론 해석은 못했지만…. 죄송해요.”
‘난 또 뭐라고.’
고작 카드를 봤다는 사실로 사과를 하러 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직업 특성상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해석도 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렇게 신경 쓸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재미로 본 겁니다. 딱히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후.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고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선율은 미묘한 웃음소리를 흘리었고, 이내 나와의 거리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걸음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갑작스레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런 선율의 손에는 네모난 카드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이건 선물이에요. 드릴게요.”
“이건…. 마법의 탑 로드의 전용 마법 카드가 아닙니까?”
“이것은 그때 펼치셨던 열다섯 장의 카드 중 가장 마지막 카드에요. 열두 장 까지는 제가 항시 사용하는 카드이지만, 열세 장부터 열다섯 장까지는 아니에요. 그때 보여드렸던 시계처럼, 점을 도와주는 도구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래도….”
“중요한 건. 저에게는 쓸모 없는 카드지만, 머셔너리 로드에게는 필요할 수도 있어요.”
갑작스레 뜬구름을 잡는 말이었지만, 나는 거절하려던 말을 다시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시간을 끌다가 이내 카드를 향해 차분히 손을 내뻗었다. 어떠한 마력 반응도 느껴지지 않고, 제 3의 눈으로 봐도 특이한 정보는 표시되지 않는다. 이런 카드가 도대체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 받아두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건네 받은 카드는 뒷면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손에 쥔 채 살짝 흔들자, 선율은 마음대로 하라는 양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한순간 볼까 말까 고민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왕 받은 거 그림만 보는 건 큰 상관이 없겠다 싶었다. 연결되는 다른 카드를 본 것도 아니고, 내가 카드를 해석할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았으니까.
해서, 나는 곧바로 카드를 뒤집었다.
카드에는 총 두 명의 남녀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특히 여성이 무척 두드러져 있었는데, 날개가 달린 걸로 보아 천사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천사는 언뜻 보면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천사의 품에는 한 명의 남성이 안겨져 있다.
이 중 한가지 특이한 점을 꼽자면, 천사의 날개가 검은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는 것이다.
“아차. 머셔너리 로드. 그러고 보니 전할 소식이 있다고 했죠?”
너무 집중해서 본 걸까. 꿈결처럼 들리는 선율의 목소리에 마지막으로 천사를 보고 고개를 드려는 찰나였다. 그리고 얼굴에 시선이 꽂힌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
“아직 사용자들에게 밝히지는 않았는데…. 후후. 희소식이에요. 드디어 북부와 남부에서 소식이 들어왔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사의 눈동자를 본 순간, 불현듯 하나의 익숙한 누군가가 머릿속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건….
‘세라프?’
============================ 작품 후기 ============================
우헤헤. 오늘 휴일이 지나갔네요. 저는 또 우울 모드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저랑 비슷하신 분들이 많으시겠죠? ^_ㅠ 오늘 후기와 리리플은 하루 쉬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합니다.(리리플은 내일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