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77
00376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
뿌우우…. 뿌우우….
미약한 뿔 피리 소리가 일대의 대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이런. 또 신호가 왔네. 그럼 얼른 가보겠수다.”
그러자 한 사내가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앞쪽으로 몸을 돌려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러자 스물 남짓한 부랑자들도 그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삽시간에 점으로 변한 그들을 보며 시몬 그라임스는 살며시 고개를 갸웃했다.
“흠.”
“왜 그래요? 시몬?”
“아. 뭔가 조금 석연치 않아서요.”
“응? 뭐가 석연치 않은데요?”
유리나의 질문에 시몬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뻘겋게 물들은 안구로 주변을 쓱 훑어봤을 뿐.
“신호는 확실히 들렸는데…. 혹시 저놈들이 거짓말이라도 했나요?”
“신호는 저도 들었어요.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고요. 그런데….”
시몬은 다시금 말을 끊었다. 그런 그의 눈에 일순 붉은 자위가 한 번 희번덕거렸다.
혹시라도 또 이성이 흔들릴까 봐 걱정됐는지 유리나는 얼른 다가가 시몬의 등을 상냥히 쓸어 내리었다.
“너무 괘념치 말아요. 지금은 우리들 도망치는 것만 신경 쓰자 고요. 그리고….”
유리나는 설핏 고개를 들어 오른쪽을 응시했다. 그러자 아까 사내를 따라가지 않은, 아직 남아있는 부랑자 몇 명이 은근히 시선을 피하였다.
“설마 도망이라도 쳤겠어요? 아직 이곳저곳에 남아있을 텐데.”
“쳤을 수도 있죠. 당장 이곳만해도 중요한 인물들은 다 빠졌잖아요. 그리고 의리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놈들이라.”
“시몬….”
“걱정 말아요. 약간은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할 말은 없네요.”
자신의 잘못이라는 시몬의 말에 유리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슬쩍 고개를 들이밀어 말했다.
“그럼 제가 한 번 가볼까요?”
“응? 유리나가요?”
시몬의 반문에, 유리나는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중요한 떠돌이가…. 강산이라고 했었던가요? 그자를 데려와 볼게요. 수뇌부 중 한 명이라고 했으니 뭔가를 알고 있을 거예요.”
“흠. 데려와 봤자 크게 변하는 건 없을 것 같은데…. 기다리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시몬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팔짱을 끼곤 미약한 고갯짓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무튼 상관없기는 하지만…. 기다리는 것보다는 미리 알아두는 게 좋겠죠. 유리나? 가고 있을 테니까, 대충 상황만 살피고 돌아오세요.”
시몬의 말에 유리나는 살포시 웃고 몸을 돌렸다.
*
15분 후.
“이거 이거. 왜 신호를 보냈나 했는데…. 보낸 이유가 있으셨구먼.”
한 사내의 으스대는 목소리가 주변의 공간을 떨어 울리었다. 그와 동시에 일견 스물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가 시작한다.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사내를 필두로, 그들은 하나같이 심상찮은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확인한 검후의 낯빛이 일순 흙빛으로 변하였다.
“설마 우리 다은이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로군. 으하하하!”
이어서 들려오는 너털거리는 웃음소리에 검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새로 들어오는 적들에 대응해, 검후는 사각지대에서 대응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차피 피할 곳이 없기도 했거니와, 그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어서 교전이 시작된 이후, 검후의 예상은 초반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는 듯했다. 그녀는 압도적인 능력을 선보여 대다수의 적을 쓰러뜨렸고, 안현을 비롯한 일행들의 지원으로 가볍게 승기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검후가 미처 예상치 못한 게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적들 중 뿔 피리를 가진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뿔 피리란 부랑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연락 수단 중 하나였다. 부는 횟수에 따라 신호 체계를 정해놓음으로써, 위급 상황 시 도움을 요청하거나 지시를 전달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사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검후와 그 일행들을, 그리고 부근을 응시했다.
“흠.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한 건가? 아무튼 다행이네.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어서.”
“정말 좋을 때 불어줬지 말입니다. 그럼 이제 동맹은 완전히 결렬된 겁니까?”
“거의. 총대장도 아까 누구 하나 정리한다는 핑계로 먼저 빠졌잖아. 지금쯤 아예 전장을 벗어났을걸. 우리도 알아서 빠져 나와야지.”
“예? 아…. 아까 그 기생오라비가 우리한테 성질 부렸을 때 말입니까? 현 님은 진짜 잡으러 가시는 것 같던데.”
“그놈은 백서연 잡혔을 때부터 이상해졌어.”
사내는 잠깐 잠깐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어느 한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널브러진 부랑자가 있었다. 피가 흘러나오는 입가에는, 뿔 피리가 꼭 물려있다.
“도대체 몇 명이 죽은 거냐…. 참 잘도 해주었네. 우리 다은이.”
사내는 기가 찬 목소리로 입을 열고는 방금 대화를 주고받은 부랑자를 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어이. 너. 저 뿔 피리 주워서 지금 바로 상황 종료 신호 보내.”
“예? 상황 종료 신호를 보내라고요?”
지시를 받은 부랑자가 반문하자, 사내는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다른 놈들이 오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상대는 검후인데…. 그리고 다른 놈들한테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알아서 빠져 나오라 그래. 그리고 혹시라도 서 대륙 놈들이 끼어있으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부랑자는 조금 망설였지만,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이내 얌전히 뿔 피리를 주워들었다.
뿌우우…. 뿌우우…. 뿌우우….
이윽고 세번의 뿔피리 소리가 대기를 울리었다. 상황이 종료됐다는 신호였다. 이윽고 서서히 이곳으로 모여들던 여러 기척이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금 서서히 방향을 돌려 돌아가기 시작한다.
“명령에 따르긴 했지만…. 검후에게 죽으셔도 전 모릅니다.”
“큭. 걱정 마라. 설마 우리가 지친 암캐 한 마리 상대 못할까.”
아까부터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부랑자들의 태도에, 검후는 한껏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암캐란 말이 신경을 긁었는지 한순간 그녀의 기세가 일변했다. 그것을 느낀 사내는 히죽 미소 지었다.
“자자. 그 기생오라비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처리하고 빠지자고.”
“헤. 그냥 지금 빠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쪽도 그리 상황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도 눈앞에 배신자가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 동안 찾아 다닌 것도….”
“누가 배신자야!”
그때였다.
검후의 날카로운 외침이 순식간에 사내에게 쏟아졌다.
아까부터 은근히 보내던 도발이 드디어 걸려들자,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검후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야. 우리 다은이. 나 기억하지?”
“닥쳐! 나를, 나를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분노로 떨리는 검후의 외침에 사내는 흐흐 웃어 보였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배신자’ 이강산이었다. 일전 아카데미에서 최고의 수재라 불리던 검후를 데려가고, 그와 동시에 부랑자로 전향한 사용자.
“아이고 우리 다은이. 많이 날카로워지셨네. 배신자 주제에 너무 기세 등등한 거 아니야? 그 동안 검후라고 주변에서 제법 떠받들어줬나 봐?”
“배신자는 너겠지…!”
“허허. 키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시크릿 클래스도 얻어주고, 또 매일매일 몸으로 위로도….”
“입 닥쳐! 죽여버리겠어!”
이강산의 능글능글한 말이 이어지려는 순간, 검후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질렀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고, 그는 여전히 유들유들한 태도로 되받아 쳤다.
“누가 누굴 죽여? 꼴에 피해자인척하기는. 가증스러운 년.”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그냥 인정하지 그래. 나중 가서는 너도 즐겼잖아?”
“……!”
“그러다가 내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지. 결국 체념하고 순종하는 척을 하더니, 틈을 봐서 도망을 가? 이 배신자!”
우우웅!
더는 참지 못했는지, 검후의 검, ‘설아’에서 청명한 검음이 웅웅 떨쳐 나오기 시작했다.
“너…. 마침 잘됐어…. 기필코 죽인다….”
검후의 고요한 눈동자에는 스산한 살기가 폭사되듯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현재 그녀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해주는 양, 소리 만들어도 주변을 씹어먹을 기세가 휘몰아쳤다.
이 정도면 도발은 충분히 먹혀 들었다 판단한 이강산은, 사뭇 진중한 얼굴로 대검을 앞으로 꺼내 들었다. 그 또한 엄청난 실력자임은 분명했지만, 아무래도 검후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다. 그나마 믿고 있는 구석은 한때 그녀를 가르쳤다는 사실과, 지금 힘이 많이 빠진 상태라는 것. 그리고 수적 우위였다.
그렇게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이강산은 보지도 않고서 살짝 고갯짓을 했다.
“거기 오른쪽 네 명. 뒤에 병아리들은 알아서 처리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검후를 합격한다. 죽이지 않고 잡을 거니까, 최소 절반을 죽을 각오하고 들어가. 적당한 상처는 용서하마.”
“하. 나를 잡겠다고?”
검후는 코웃음 쳤다. 그러나 부랑자들은 이강산의 명에 충실히 따라,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네 명이 마치 유령처럼 스르르 빠졌다.
“죽여버릴 거야!”
그와 동시에 일생일대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서, 이성을 잃은 검후가 16명을 향해 섬광처럼 돌진했다.
그리고’설아’에서 열 줄기의 검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럼 우리는 이쪽을 처리해볼 까나.”
빠져 나온 부랑자들은 남은 일행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 명은 남성이었고, 한 명은 여성이었다.
“푸. 떨고 있는 것 좀 봐. 진짜 병아리들이군.”
“아직 주문도 안 외워놨어. 혼자서도 가능하겠다 야. 저기 예쁘장한 붉은 머리카락은 내 것. 딱 내 취향이야.”
“그럼 저기 맨 뒤에 사제 년은 내 것. 진짜 귀엽고 예쁘게 생겼다. 아니. 청순인가? 몰라. 히히.”
“미친놈들. 정리하고 바로 뜰 거야. 죽일 생각이나 해.”
여성 부랑자의 핀잔이 이어졌지만 말 그대로 병아리들이라 생각하는지, 세 명의 남성 부랑자는 한껏 여유로운 얼굴로 시시덕거렸다.
도발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숫자는 4:6.
인원으로 따지면 사용자들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안현을 비롯한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아니, 사실상 부랑자들이 출현했을 때부터 그들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대꾸할 가치를 못 느껴서가 아니라 온몸에 긴장이 돈 탓이었다.
적어도 안현의 감각에는 눈앞 부랑자들이, 지금껏 상대해왔던 여느 적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도망칠 수는 없다.’
안현은 창을 꾹 쥐고는 자세를 잡았다.
챙! 끼릭!
그에 따라 이유정도, 그리고 검후가 데려온 두 명의 사용자도 비척비척 무기를 들어 보였다.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대로 순순히 쓰러질 수는 없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네 명은 고개를 돌려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쪽이 조금 밀리네.”
“와. 대 간부님이랑 중간 간부 열여섯 명이 밀린다고? 단 한 명한테?”
“그렇게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 검후잖아. 시크릿 클래스. 아무튼 빨리 처리해서 상황을 보자고. 불리하면 바로 합류해야지.”
“어휴. 각자 알아서들 하라고. 아니. 그냥 내가 다 처리할까?”
드디어 남은 네 명도 무기를 마주잡는다. 창, 도끼, 검, 검. 원거리 계열은 하나도 없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까.
안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슬쩍 곁눈질로 검후가 전투를 벌이는 곳을 살폈다.
도와주러 올 때까지 버티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이곳에 달려온 부랑자들은 한 명 한 명이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자로 느껴졌고, 이윽고 창을 든 부랑자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시 눈을 돌리자 마치 장난이라도 하듯이, 창 끝으로 일행을 겨누곤 살랑살랑 흔드는 게 안현의 눈에 보였다.
하지만 안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카운터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
안현은 부랑자의 공격이 들어오는 순간 바로 파고들기로 마음먹고 이를 깨물었다. 설령 크게 다치더라도 한 놈이라도 확실히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상대의 선공을 받아 칠 때는, 발을 주시해라.’
김수현의 가르침에 따라 안현은 가장 선두로 나온 남성의 걸음을 주시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더 이상 걸음이 이어지지 않을 때, 안현의 귓가로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안현은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젖히는 것과 함께 마주 창을 찔러 들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둥그런 옅은 빛이 생성되었다.
스팟!
서로의 창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한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찌르기였다.
그러나 속도는 부랑자의 창이 더 빨랐고, 이내 목표한 안현의 머리를….
파각!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감싸고 있던 옅은 빛을 깨졌지만, 머리는 무사했다. 안현의 잠재 능력, 호신강기가 창의 진로를 약간이나마 틀어준 것이다. 그에 따라, 안현은 창이 지체 않고 부랑자의 가슴을 향하였다.
그 찰나의 순간, 부랑자의 가슴에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그저 병아리라고만 생각했는데, 들어온 불의의 일격에 이마로 땀이 쭉 솟았다.
그때였다.
뻑!
막 창 끝이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안현의 눈앞이 번쩍하더니 이내 몸이 여지없이 왼쪽으로 붕 휘날렸다. 한순간 스치고 지나간 창이 그대로 머리를 후려갈긴 것이다.
분명히, 완숙한 실력자를 상대를 아직은 어설픈 기교로 상대하지 않는다는 선택은 괜찮았다. 하지만 안현이 아무리 레어 클래스라고 해도, 아직 능력치 개발도 끝나지 않은 0년 차였다.
그리고 상대는 바로 부랑자. 그것도 산전수전을 겪은, 중간 간부로 인정받을 정도로 노련한 부랑자. 한순간 위기를 느끼긴 했지만, 그는 곧바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이미 창이 닿은 순간 부랑자의 승리는 예정되어있었던 것이다.
“악….”
들어온 충격에 안현은 입을 벌렸다. 머리에 가해진 타격이 컸는지, 균형을 잃은 그는 그대로 몸을 허물어뜨렸다. 머리는 빙글빙글 돌고 귀에서는 미약한 소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한 와중에, 안현은 창을 꾹 잡고 다시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창신…. 사격…!”
창, 차차창!
이내 떨어져나가는 안현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부랑자는, 다시금 급히 숨을 삼켜 들었다.
푹, 푸푹!
“컥!”
갑작스레 떨어져 나온 네 줄기의 창에 그대로 가슴을 직격당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핫!”
채 창을 거두기도 전에, 안현의 뒤에 있던 이유정이 곧바로 달려 들어왔다.
남성은 재빨리 몸을 틀려고 했지만, 이유정 또한 교묘하게 몸을 틀어 양손의 단검을 휘둘렀다. 마치 한 놈이라도 완전히 끝내겠다는 듯 그녀는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어, 어?”
이윽고 X자로 교차하는 단검이 그대로 가슴을 그어 내리려는 찰나였다.
“병신 새끼.”
푹! 뻥!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옆에서 들어온 여성 부랑자가, 있는 힘껏 이유정의 옆구리를 찔러 차버렸다. 그리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것과 함께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허억.”
그제야 창을 든 남성은 삼켰던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가슴에는, 구겨진 갑옷과 기다랗게 파인 여러 줄기의 상흔이 보였다.
“너. 나한테 하나 빚졌다.”
“하, 하하하. 하, 씨발.”
“와. 너 지금 병아리들한테 당할뻔한 거냐?”
“이야. 정한이도 많이 죽었네. 자기가 다 처리하겠다고 거들먹거릴 때는 언제고 병아리한테 죽을뻔하냐.”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양쪽에서 부랑자들의 조롱하는 소리들이 들리었다.
정한이라 불린 부랑자는 발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언제 처리했는지 조롱한자들의 손에는 검후와 안솔과 동행한 사용자들의 목이 들려있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에이 썅!”
정한은 거칠게 욕설을 뱉곤 나란히 바닥에 누운 안현과 이유정의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복부를 지그시 밟아 내리자, 그녀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는 그대로 창을 올려 들었다.
“이 개새끼들이….”
“야. 잠깐 죽이지 말아봐.”
“뭐라고?”
그러나 이어지는 여성의 제지에,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반문했다.
“쟤 마지막에 이상한 기술을 쓰더라. 무슨 사격? 보니까 장비도 좋은 것 같은데…. 혹시 알아? 클래스에 관한 정보라도 나올지.”
“그걸 지금 이 상황에서 챙기자고?”
“지금 아니면 언제 챙겨. 그리고 저기 봐. 별로 합류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염병. 언제는 빨리 합류하자고 한 년이.”
“목숨, 목숨.”
그 말에 입을 다문 남성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후는 지금 대 간부, 그리고 중간 간부 열여섯 명을 맞아 한창 불리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우세한 듯 보였지만, 부랑자들은 최대한 격돌을 회피하며 철저한 차륜전을 펼쳤다.
그 결과, 지금은 제법 상황이 반전된 상태였다. 아직까지 쓰러진 부랑자들이 한 번도 없다는 게 그 증거였다.
“야. 발 치워.”
일단 발을 치우라는 말에 부랑자는 가슴을 한 번 쓱 훑고는 왼쪽 발을 들어 비켜주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는 여성을 보다가, 이내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래서는 앙칼진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이유정이 있었다.
“뭘 봐. 씨발년아. 너도 내가 우스우냐?”
“큭!”
그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한은 왼쪽 발로 이유정의 가슴을 세게 짓눌렀다. 제법 봉긋한 가슴이라서 그런지, 발바닥으로 뭉클한 감촉이 전해져 들어왔다. 그는 발을 연신 비틀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눈깔 보소. 아주 사람 하나 죽이겠네, 죽이겠어.”
“흑! 흐으윽!”
이어서 마력을 일으킨 창이 이유정의 배를 시작으로 위로 쭉 훑는다. 그에 따라 찌직 옷이 반으로 찢어지고, 살결에 새겨지는 얕은 상처가 길게 이어진다. 뾰족한 창 끝은 그녀의 목에서 멈추었다.
“드세 보여서는….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어어? 야! 하지마! 내 것이라고 했잖아!”
옆에서 다가오던 부랑자가 소리쳤지만, 정한이 그대로 목에 창에 힘을 주려는 순간이었다.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후루룩!
거센 돌풍이, 부랑자를 덮쳐 들었다.
*
후루룩!
간신히 외운 주문이, 신상용의 손끝에서 발출되었다. 이윽고 날아간 돌풍은 그대로 부랑자 무리를 덮치었고, 그에 따라 이유정의 위에 서 있던 놈은 몸을 허물어뜨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탄의 영향으로 주문 영창이 평소보다 늦어지기는 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더구나 위력도 평소보다 한껏 반감된 터라 그저 넘어뜨리는 선에서 그치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부랑자의 화를 돋구는 역할밖에 해주지 못한 것이다.
놀란 것도 잠시. 넘어진 부랑자는 이어지는 조롱에 새빨개진 일어났고, 이내 가슴에 피를 뚝뚝 흘리며 득달같이 달려왔다.
신상용은 절망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 다가오자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신상용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안솔을 보며 간신히 소리쳤다.
“아, 안솔양! 도, 도망치십시오!”
“어딜?”
퍽!
그 순간 얼굴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에, 신상용은 억 소리와 함께 한두 바퀴 몸을 굴리었다.
“병신 새끼면 병신 새끼답게 가만히 있던가. 아니면 도망이라도 치던가. 전투 중에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 와서 하는 건 뭔데?”
그리고 신상용이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정한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퍽, 퍽퍽!
정한은 화를 풀려는지 사정없이 신상용을 짓밟았다. 그는 최대한 몸을 웅크려 몸을 보호했지만, 결국 부상당한 허벅지에 발길이 닿은 순간 울음 섞인 비명을 토해내었다.
한순간 발길질이 멈췄다. 하지만 부랑자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결국에는 창을 들어 사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화 봤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업햄이라고 혹시 알아?”
“큭, 크윽….”
“난 너 같은 놈들이 제일 싫어.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병신 같은 놈. 야. 넌 그냥 죽어라. 너라도 죽여야겠다.”
“안 돼애!”
캉!
그 순간, 안솔이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뛰어들어 신상용을 끌어안은 것이다. 그런 안솔의 주위에는 새하얀 구슬이 떠올라 있었다. ‘개량형 수호의 방패’였다.
정한은 일순 창을 거두었다.
“하.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씨발, 그래 한 번 해보자.”
그러나 이내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고는 이내 신명 나게 보호막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캉! 캉캉!
웅! 우웅!
“어엉! 어어엉!”
이윽고 이리저리 튀는 불꽃에 안솔은 커다란 목소리로 울었다. 어떤 것을 할 생각도 못한 채 그저 눈물만 흘리었다.
신상용은 멍한 상태로 있다가, 고통이 약간 가시자 퍼뜩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들었다.
캉! 캉캉! 캉캉캉캉!
그러자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보호막 밖으로, 여러 광경들이 눈에 들었다.
‘헤헤. 형. 저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하나하나 장비를 해체당하는 안현.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이번 한 번은 인심 썼다. 자. 상용이 오빠. 아~. 해봐.’
자신의 이곳 저곳을 쿡쿡 찌르는 부랑자를 죽일 듯 노려보는 이유정.
‘꾸, 꿀꺽? 영약을 저한테 주시면 어떡해요오! 으아아앙!’
자신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안솔.
캉! 캉! 캉! 캉!
보호막의 진동이 점차 거세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신상용은 미안했다.
그저 미안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보호만 받는 처지에 절망했다. 그저 살 궁리만 했던 자신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캉, 파각! 캉캉, 파가각!
“오라버니이! 수현 오라버니이!”
안솔의 울음이 더욱 거세어졌다. 신상용을 껴안은 손길이 더욱 거세어졌다. 그럴수록 신상용의 머리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자신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대로 죽어야 하는 건가?
그때였다.
문득 하나의 여러 가지 복잡한 기억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망이라도 치던가.’
‘넌 병신이야, 병신. 그냥 죽어라.’
그 말들을 떠올린 순간, 캄캄한 절망 속에서 신상용은 처음으로 무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입술을 떼었다.
“─, ──. ─, ──. ─, ──.”
그것은, 반사적으로 나온 주문이었다.
비록 지금껏 단 한 번도 성공한적이 없고 상황도 최악이었지만, 현재의 신상용으로서 남은 유일한 방법.
‘마법사가 전장의 꽃이라면 시크릿, 레어 클래스는 전장을 판가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불리한 전쟁을 단번에 뒤집을 수도 있지요.’
“───. ───. ───.”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는 신상용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들이 동시에 흘러들었다.
‘네가 왜 항상 실패하는 줄 알아?’
‘마수 소환이란 건 말이지 엄연한 독자적인 주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계약이라고, 계약.’
‘마수들은 능력이 강력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존심도 세.’
‘그런데 애당초 마수를 무서워하고, 그렇다고 간절하지도 않고. 아니! 그전에 계약에 대한 의지가 없는데 나오겠니? 앙?’
그 순간, 생각이 멈춘 것과 동시에 영창도 끝났다.
“오라!”
신상용은 번쩍 눈을 떠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다. 그저 눈앞에는, 마치 금 간 달걀 껍질처럼 거의 깨지기 직전의 보호막이 보일 뿐이었다.
파창! 푸스스스!
아니. 이제 깨지기 직전이 아니라, 깨져버렸다.
“끝이다. 잘 가라 병신.”
이윽고 남성의 창이 크게 들렸다.
“오라! 오라!”
“뭘 와?”
내려꽂히기 직전, 들어 올린 창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이 찰나의 순간 신상용의 전신에 만감이 교차한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는 자신의 모든 마력을 한꺼번에 쥐어짜 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전에 없던 커다란 음성으로, 목놓아 크게 외쳤다.
“오라! 제발 오라아아! 임프리소오온!”
파자작! 파자자작!
그때였다. 비록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허공에 하나의 마법 진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와 동시에.
“제 49군단을 지배하는 강철의 구속자여어어!”
차르르르르르르릉!
일그러진 마법 진 에서, 비로소 응답한 수십의 묵 빛 쇠사슬이 도처로 뻗어나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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