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81
00380 늦어버린 한 걸음 =========================================================================
문득,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머리카락을 세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아직 미동도 않은 채 서 있는 적에게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노엘 유리나.”
이름을 부르자, 유리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 나…? 나를 알고 있어?
알고 있고말고.
적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친다. 나는 대답 대신 검을 상단으로 들었다. 그리고 손목을 살짝 비틀어 ‘빅토리아의 영광’을 세로로 돌렸다.
회의 때도 몇 번 거론됐었고 제 3의 정보로도 확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회 차 때 ‘악녀’로 불리며 시몬의 최 측근으로 활동했던 여인…. 아니 적.
그러나 내가 유리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알고 있든 알고 있지 않든, 죽여야 할 수많은 적들 중 하나 일뿐.
결국 ‘죽인다.’라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생각과 동시에 몸을 활처럼 휘었다.
– 너는 누구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대답해!
그리고 일거에 마력을 터뜨림과 동시에, 궁신탄영(弓身彈影)으로 튕기듯 앞으로 짓쳐 들었다.
순간 유리나의 얼굴에 낭패한 빛이 떠올랐다.
문답무용. 찰나의 순간 거리는 지척으로 줄어들었고, 유리나는 침착히 손을 움직여 채찍을 들어올렸다.
우우우우웅!
휘리릭!
‘빅토리아의 영광’이 검음을 울리는 아슬아슬한 순간, 내뻗어진 채찍은 정확히 검 끝에 닿았다. 그러더니 뱀이 기어오듯 구불구불한 궤도를 그리며 재빠르게 파고든다. 삽시간에 절반이 넘게 감겼을 즈음, 그녀의 얼굴에서 일말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때, 나는 주저 않고 검을 놓았다.
– 뭐?
검에 고정돼있던 시선은 곧바로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기 전 나는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었고, 머리와 몸통을 잇는 잘록한 부분으로 왼손을 내뻗었다.
– 아!
그리고 손바닥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 순간, 나는 손에 잡힌걸 지체 않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휙!
강제적으로 구부러지는 유리나의 상반신.
그리고 머리가 굽혀지는 궤적에 따라, 나는 있는 힘껏 왼발을 박차 안면이 떨어지는 곳으로 무릎을 들어올렸다.
뻑!
무릎에 둔중한 충격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여전히 쥐고 있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찌직! 뿌드득!
– 껙…!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손안 가득히 잡힌 살점과 뼈가 느껴졌다. 반대로 튕겨나가는 적의 얼굴은 중앙이 깨져 움푹 들어간 상태였고, 거칠게 찢어진 목구멍에는 피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쿵!
이윽고 적은 완전히 몸을 쓰러뜨렸다. 아직 살아있는지 한두 번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축 늘어지고야 말았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서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구해내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부족했다. 곧바로 원수를 갚았음에도 불구하고, 목을 어지럽히는 갈증이 가시질 않는다.
나는 무심히 시체를 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한 번 고연주를 돌아보자, 멍한 얼굴로 바닥을 응시하는 그녀가 보인다.
“클랜 로드로서 명합니다. 지금 바로, 여기 있는 인원을 데리고 전장을 이탈합니다.”
“아.”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연주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크, 클랜 로드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다시 한 번 시체를 보았다. 시체의 정체는 ‘악녀’ 노엘 유리나. 서 대륙의 수장 시몬의 최 측근. 그녀가 여기 있었다는 소리는….
나는 잠시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몬은 이미 지나쳤을까.’
그리고 오른쪽을 본다.
‘아니면 아직 오고 있는 걸까.’
그때였다.
“오라버니….”
바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애절한 목소리로 내 옷깃을 꾹 잡는 기척을 느꼈다. 차분히 고개를 돌리자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안솔이 보인다. 어깨는 가늘게 들썩여 흐느끼고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 가실 거예요?”
“놔….”
지금 이 상황에 어리광을 피울 거냐 란 생각에, 바로 뿌리치려는 찰나였다.
안솔이 천천히 왼팔을 들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여기….”
이윽고 안솔의 팔 끝으로 시선을 옮기니, 검지가 한 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가려는 방향이랑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너…?”
“혼내…. 혼내주세요.”
나는 그제야 안솔의 상태를 정확히 살필 수 있었다. 음색은 목소리 반 울음 반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기 그지없다.
멍하니 안솔을 응시하다가, 나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이윽고 그녀의 팔이 저절로 툭 떨어졌다. 나 또한 머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안솔이 가르쳐준 방향에서 비릿한 바람이 불어온다. 앞에 어떤 일이 있을지, 누가 있을지는 모른다. 그저 피 내음이 감도는 들판을 하염없이 달릴 뿐이었다.
‘신상용.’
문득 신상용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첫만남부터 전쟁의 기억까지.
신상용은 있는 듯 없는 듯 언제나 조용했다. 비록 존재감은 옅었지만 매사에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는 사람.
‘폐허의 연구소’ 탐험 중 보물을 발견했을 때, 신상용은 스스로 자청해서 경계 역할을 맡았다.
‘절규의 동굴’에서 강행군을 펼쳤을 때, 신상용은 스스로 자청해서 불침번 역할을 맡았다.
보상으로 마력 영약을 주었을 때, 결국에는 갖지 않고 안솔에게 먹였다.
그래. 첫 만남부터 신상용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유난히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것을 보며 1회 차의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나는 신상용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 과연 그는 죽어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원망했을까? 후회했을까?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의 복잡한 생각이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그 와중에, 나는 계속 안솔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달렸다.
아직도 바람은 불고 있었다. 다만 미약했던 피 내음이 가면 갈수록 더욱 짙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어디 한 군데 선을 기점으로, 다시금 여러 기척들이 우수수 잡히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휩쓸고 지나간 걸까? 붉게 물든 들판을 밟고 달리는 발에서, 끈적끈적한 점성 있는 액체가 흐른다.
“마력 제한이 풀렸다!”
– 가,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쌩쌩해진 건데?
이윽고 앞쪽에서 여러 명이 고함치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설핏 고개를 들었다.
‘역시.’
멀리서 서서히 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곳으로 가장 많이 몰린 모양.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빽빽한 숫자가 잡히는 게, 이곳저곳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광휘의 사제의’ 고유 능력 ‘기적’은 나뿐만 아니라 아군 전원에 영향을 미친 게 틀림없었다. 아까 전과 같은 일방적은 학살이 아닌, 동부 사용자들은 밀리면서도 치열하게 전투하고 있었다.
서로의 병장기가 시끄럽게 부딪치고, 비명이 도처를 날아다닌다. 화살이 사방으로 뿌려진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폭음은 아마 마법의 잔재이리라.
조금 전 신상용의 생각으로 약간 가라앉았지만, 막상 전장을 보자마자 격한 감정이 일었다. 잠시 잊었던 갈증이 되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우우웅! 우우우웅!
한 폭의 지옥도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을 한 번 크게 휘둘렀다. 마력을 가득 먹은 검은 이내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피로 물든 전장을 환하게 밝혔다.
– 기습이다!
그 순간 가장 후미에 있던 적들이 등을 돌려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살짝 몸을 틀어 옆으로 파고든 창을 피하고 좌우로 검을 흐르듯 베었다.
푸확!
곧이어 튀어나온 시뻘건 핏줄기가 내 앞을 X자로 교차하고, 눈을 물들였다.
후웅!
– 크아아악!
그때, 정면에서 도약한 한 사내가 괴성을 지르며 양팔을 높게 들어올렸다. 햇빛에 반사된 날이 한 번 번쩍인 순간, 나는 허공에 잽을 날리듯 한 번 가볍게 검을 쳤다.
뻥! 파각!
허공으로 날아간 파동은 막 내려치려던 사내의 머리를 곧바로 쳤다. 허공에 떠 있던 몸 위로,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한다.
그러자 다른 방향에서 나를 돌아보던 적들이 일순 움직임을 멈칫했다.
‘걸리적거리는 건 무조건 벤다.’
이미 직진하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그게 바로 신상용을 위한, 적에게 내가 내민 최소한의 타협점.
그때였다.
“드디어 찾았군. 머셔너리 로드.”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와 함께, 마력 감지에 누군가 재빠르게 옆으로 파고드는 기척이 잡혔다.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한 호흡 돌리고 고개를 돌리기 전, 기척은 이미 범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내 사정거리 안에도 들어와 있음을 의미했다. 순간 ‘빅토리아의 영광’을 고쳐 잡은 나는, 재빠르게 비스듬히 세워 오른쪽 가슴 위로 올려 쳤다.
깡!
붉은 불똥이 튀겼다. 들어온 무기의 정체는 창이었다. 검 끝은 정확히 창 끝을 가격했고, 이내 창은 여지없이 위로 솟구쳤다. 그럼에도 적은 나에게로의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
이윽고 내 어깨를 짚는 감촉과 함께 귓가로 낮은 음성이 재차 흘러들었다.
“과연. 대단한데. 백서연이 당할만하군.”
‘부랑자인가?’
동시에 창의 움직임이 기형적인 변화를 보였다. 마치 막을 것을 예상했다는 듯 허공에서 휙 돌더니, 이내 핑그르르 회전하여 턴을 그리며 짓쳐 들었다.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검은 돌풍을 일으키는 창은 정확히 내 사각을 노리고 있었다.
“일단 구멍 하나 뚫고 잠시 이야기 좀 하도록 하지.”
예전이었다면.
마음속으로나마 주의가 분산된 틈을 노려 연타를 날린 점을 칭찬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방해다.’
그저 방해라는 생각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심장에 잠재된 힘을 한껏 폭발시켰다.
화륵, 화르륵!
가슴팍에서 화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맑은 불꽃은 지체 않고 창을 집어삼켰고, 내 의지에 따라 깡그리 불태웠다.
이윽고 드러난 공간에는 언제 창이 있었냐는 듯 허공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어깨를 잡은 손에서, 미약하지만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손 치워. 꺼져.”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을 그대로 쭉 밀어 올렸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뭔가가 작렬한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나는 손을 털듯 앞 방향으로 세게 검을 털었다. 그러자 혀를 빼문 채 바닥에 나자빠지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현이라고 했던가? 전투 전 성벽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놈이었다.
어떻게 방어했는지는 모르지만,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뒹구는 사이 손을 내뻗어 바닥을 짚는 게 그 증거였다. 나는 바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칼을 내려찍어 바닥을 짚은 손을 쑤시고, 마력을 가득 담은 발로 배를 걷어차 버렸다.
뿌지직!
“아아악!”
다시금 대지를 구르는 놈은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그대로 또 달려가, 이번엔 공을 차듯 얼굴을 걷어 찼다. 수박처럼 터지는 머리를 확인한 후에야 놈의 비명이 비로소 멎었다. 이내 몸을 축 늘어뜨리는 놈을 보다가, 나는 한 호흡을 돌리며 고개를 들었다.
– …….
– …….
적들이 공격해오지 않는다. 사방에 널린 게 적들인데, 나를 보고 있는 놈들도 제법 있는데. 호전적인 성향의 서 대륙 사용자들이 지천임에도, 다들 나와 주변을 번갈아 보며 주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상태서,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적들이 한 걸음 물러났다.
문득 머리카락과 볼에 흐르는 따뜻한 액체가 느껴졌다. 그것을 인지하자 왠지 모르게 심한 갈증이 일었다. 아까부터 일어난 목의 메마름이 더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면 후련해질 것 같았다. 방금 전도 부랑자를 죽일 때 잠깐이지만 타오르던 목이 시원했다.
그래. 오지 않으면 내가 간다.
피핑! 피피핑!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휜 찰나, 몇 발의 화살이 나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앞으로 튕기면서 쏘아진 화살에서 벗어났다. 등 뒤로 애꿎은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 젠장!
낮게 허공을 날았던 발이 바닥에 닿은 순간, 눈치만 보던 수 명이 횡 열로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검을 비스듬히 세워 첫 번째로 들어오는 공격을 걷어내고, 그와 동시에 몸을 숙여 날아온 힘 그대로 몸을 미끄러뜨렸다.
후웅! 후웅!
허공만을 가르는 당황한 무기의 궤적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나는 주워담듯 검을 크게 한 번 쓸었다. 그러자 뭔가 싹둑싹둑 걸리는 느낌이 나는가 싶더니, 이내 전부 빠져 나왔을 때.
– 아아악! 아아아악!
동시에 몸을 허물어뜨리는 놈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멍하니 서 있던 한 놈이 나를 보며 입을 쩍 벌리는 게 보였다.
그대로 옆을 지나치면서 나는 단숨에 허리를 갈랐다. 중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검은 부담 없이 강철을 베어 허리를 잘랐다.
그리고 놈의 비명과 함께 허리를 굽히는 순간, 나는 머리를 손으로 짚어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등을 박차고 재차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대지가 순식간에 멀어지며 아래로 격렬한 전장이 한 눈에 잡힐 듯 보였다.
여기저기서 전투를 벌이는 놈들도. 발목이 잘라진 채 신음하는 놈들도. 방금 전 찌른 놈이 그대로 고꾸라지는 것도. 그리고 일부 나를 잡기 위해 모여드는 적들도.
이윽고 몸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착지 점에는, 한창 전투를 벌이는 사용자들과 적들이 엉겨있었다.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막 하강하기 직전, 누군가 익숙한 얼굴을 한 사내가 눈에 들었다. 그 또한 허공으로 고개를 올린 상태였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 순간 사내는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더니 착지 점을 향해 손을 내뻗어 있는 힘껏 뭐라고 소리질렀다.
뻥!
그러자,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폭음과 함께 검붉은 대지가 한 번 크게 풀썩거렸다. 시커먼 연기가 대지에 둥그렇게 솟아오르며 적들을 덮친다. 연기에 맞은 적들은 순식간에 몸이 부풀더니 이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녹아 내렸다.
하강을 시작한 순간 연기는 순식간에 걷히었다. 이어서 드러난 공간에는, 녹아 내린 적들과 확보된 공간이 있었다.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어쨌든 좋았다.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에 마력을 보내며 하늘 높이 들었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리며 떨어졌다.
검에서 흘러나온 궤적은 돌리는 그대로 잔상을 남기었고, 이내 확보된 공간으로 안전하게 떨어져 내린 순간에는, 회오리와 비슷한 형태가 만들어져 있었다.
쿵!
이윽고 대지에 착지한 순간, 나는 검을 비틀어 이어지던 궤적을 끊어냈다. 그리고 비어있는 왼손으로 허공을 후려갈겼다.
뻥!
그러자 궤적의 잔상에 남아있던 마력은, 한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사방으로 넓게 퍼졌다.
스칵, 스칵, 스칵, 스칵! 스칵, 스칵, 스칵, 스칵!
마치 넓게 퍼지는 회오리처럼, 칼날의 폭풍이 주변의 적들을 가차없이 찢어발긴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사방으로 신체의 파편이 거세게 휘날렸다. 그와 동시에 후드득, 뜨거운 피가 비처럼 쏟아져 몸을 적신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깐 정리된 전장으로 나를 보는 수많은 사용자들이 보였다. 그 중에는 아까 내 공간을 확보했던 ‘저주술사’ 강태욱도 보였다.
‘그렇군. 그래서 제법 버티고 있었던 건가.’
아마 내가 뒤를 치는 것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한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직 한 놈이 잔해 속에 묻혀 내가 걸어가려는 틈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막 검을 늘어뜨리려는 때였다.
“위험!”
– 죽어! 칵!
잔해 속에 묻혀 있던 한 명이 시체 사이서 솟아오르려는 순간, 목이 크게 꺾이며 몸을 허물어뜨렸다.
설핏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 한 명 보인다.
“머, 머셔너리 로드!”
진혼의 암살자. 이찬희라고 했던가? 그는 투척한 단검을 회수하고는 곧장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때였다.
『악마의 눈, 마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제 3의 눈으로 대응합니다. 간파했습니다! 마안의 사용자 시몬 그라임스를 확인합니다. 위치는….』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혹시 그림자 여왕님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나는 대충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를 밀어젖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머, 머셔너리 로드! 어디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달렸다.
이제야 안솔이 이쪽 방향으로 가라고 했던 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시몬 그라임스.
나는 놈을 죽이기 위해 이 전쟁에 참가했다.
안솔은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준 것이다.
*
“비비앙? 이제 적들이 보이지 않아요. 슬슬 이동해도 되지 않을까요? 클랜 로드가 걱정 되요.”
“…….”
“비비앙?”
임한나의 물음에, 비비앙은 멍한 얼굴을 고치곤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그렇네.”
“어디 아파요? 혹시 탈진….”
이어지는 임한나의 말에, 비비앙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냐. 몸은 거뜬해. 아까 빛을 맞은 이후로 갑자기 마력이 충전돼서. 하나 더 소환할 수 있을 정도야. 그런데….”
“희소식이네요…! 그런데…?”
비비앙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곤 한 쪽 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냥. 아까부터 조금 이상해서. 왜 갑자기 이렇게 슬퍼지는 걸까?”
============================ 작품 후기 ============================
전쟁은 거의 끝났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다음 회는 지원 부대가 도착하고, 전투는 반전된 상황의 묘사와 함께 전반적인 흐름이 설명문으로 들어갈 겁니다.
남은 건 현재 수현의 목표인 시몬 그라임스를 비롯한 서 대륙의 수뇌부들을 추격해 잡는 것뿐입니다. 물론 써봐야 알겠지만, 지금 구상을 보면 다음 회 혹은 다 다음 회 안으로 대부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부 완결이 눈앞으로 다가왔네요. 아마 전쟁 부분까지 합쳐서 남은 회는 10회 전후가 될 예정입니다.
11월의 시작입니다.
11월의 목표는 1부 완결 전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일일 연재를 하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1부 완결 후에는 차후 어떤 식으로 연재를 할지 잘 생각해보고, 그때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