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82
00381 마족 네르갈 =========================================================================
챙!
무기와 무기가 맞부딪치는 철성(鐵聲)이 사방을 흔들었다. 그것은 비단 한 곳에서만 발생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세찬 진동은 곳곳을 울리며 전투의 격렬함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는, 정말로 제각각 이었다.
포효하는 괴성도, 고통에 젖은 비명도, 욕설 섞인 고함도, 발악하는 외침도.
사방에서 치솟는 폭음과 불길에 물기 어린 흙 모래가 흩날렸고, 그 사이로 어김없이 살점이 떨어지고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난전이었다. 이제는 적과 아군의 식별이 힘들 정도로, 동부와 서부는 서로 뒤엉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진형을 지켜! 도망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철퍽!
– 아악!
어디 푸줏간에서나 쓸법한 도가 허공을 가르자, 구슬픈 비명과 함께 한 명의 부랑자가 몸을 허물었다. 이윽고 목과 몸이 분리된 시체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함께 사내는 일부러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덤벼라 덤벼! 부랑자 학살자 김덕필님이 상대해주마!”
도의 주인공은 ‘부랑자 학살자’ 김덕필이었다. 그의 앞으로는 하나같이 목이 달아난 시체 수십이 쌓여 있었다. 이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를 든 채 눈을 번뜩이자 몇몇 적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 오오오오오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아군의 함성에 힘을 얻었는지, 다시금 슬금슬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현재 전장은 여전히 서대륙과 부랑자 연합군에게 유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세나 숫자 등 여러 요소들에서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동부 사용자들이 지금까지 버티고 저항하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실제로 기적이 이루어졌다.
초반 김수현이 최대한의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동부는 아주 최소한의 정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솔의 고유 능력 ‘기적’은 전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아군의 모든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것도 모자라, 남아있던 ‘마탄’의 잔재를 깡그리 지워버렸다.
지금 비록 우세를 점하고 있다곤 해도 연합군 입장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속이 탈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거의 다 뚫려나가던 마당에 마지막에 이르러 동부의 저항이 거세어졌다.
그것도 정말로 뜬금없고, 갑작스럽게.
결국 이러나저러나, 단숨에 서문 부대를 관통하려던 연합군의 계획은 지금에 이르러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대로 지원 부대가 도착하는 순간 전황이 반전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 뚫어라! 어떻게든 뚫어라! 안되면 그냥 지나쳐!
“니미럴.”
다시 해일같이 몰려오는 적들을 보자마자, 김덕필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들어 적들이 몰려오는 저 너머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빛에는 광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눈빛도 약간이나마 섞여 있었다.
이윽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를 다잡으며 김덕필은 기합 찬 목소리로 외쳤다.
“뭉쳐라! 그리고 버텨라! 조금만 더 버티면 지원 부대가 온다!”
비록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는 몰라도, 동부 사용자들에게 남아있는 희망은 그것뿐이었다.
이윽고 동부 사용자들이 마주 소리를 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서로의 함성과 함성이 맞부딪쳤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전쟁에 새로운 양상을 가져다 줄 변화는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
척척척척.
척척척척.
치열한 전장에서는 어느 정도 비껴난 곳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지나친다. 그러자 적들이 거칠게 밟고 지나간 물 젖은 대지에, 다시금 수천의 발자국이 아로새겨진다.
(더 빠르게.)
이윽고 증폭된 음성이 울려 퍼지자, 발소리 주기가 점차 짧아지기 시작했다. 행군 속도가 한층 상승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척척척척!
이어서 보이는, 발맞추어 진군하는 사용자들의 숫자는 거의 6천에 다다를 정도였다.
그랬다. 오와 열을 맞춘 채 질서 정연히 진군하는 사용자들의 정체는 바로 남문과 북문을 맡았던 사용자들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정비를 마친 지원 부대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후유. 상황이 장난 아닌데요. 완전히 엉망이에요.”
“으음.”
한 사용자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멀리서 어렴풋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전황은 아슬아슬했다.
사내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살아계시면 좋으련만….”
“클랜 로드님. 동문 부대에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많이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클랜 로드가 아니라, 지휘관이다.”
한 마디 툭 내뱉은 사내는 이내 다시 음성을 증폭했다.
(돌격전에…. 우리가 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니,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뜬금없는 명령에 사용자들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사내가 앞서서 달리기 시작하자, 그에 발맞춰 더욱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반듯한 직사각형의 형태를 보이던 전열이, 조금씩 중앙이 앞으로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사내를 비롯한 제대 장들이 가장 앞으로 나서고, 근접, 원거리 클래스 순으로 뒤따른다.
척척, 쿵쿵! 척척, 쿵쿵!
서서히, 6000명 사용자들의 진군이 빠른 걸음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서리고, 심장은 쿵쿵 뛰었다.
쿵쿵, 쿵쿵! 쿵쿵, 쿵쿵!
이제, 완전히 뛰는 걸음으로 바뀌었다. 더불어 이쯤이면 되었다고 여겼는지 사내는 검을 번쩍 뽑아 소리쳤다.
(지금부터 서문 부대의 구원을 시작한다. 모두 전투 준비!)
음성에 맞춰 이곳저곳에서 무기를 치켜드는 것과 함께, 주문을 영창 하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그리고 전장이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다가왔을 즈음. 사내는 그대로 검을 내려치며, 전에 없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공격!)
와아아아아아아아!
쿵쿵쿵쿵쿵쿵쿵쿵!
그와 동시에 남문, 북문 부대는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체 사이를 달려나간 6천명의 사용자들이 연합군의 후미에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한편, 같은 시각.
와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들판의 전체를 뒤흔든다. 소리가 들린 순간 성현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앞으로 나서자 그의 옆으로 얼른 한 명이 따라붙었다.
“한 로드. 아무래도 시작된 것 같은데요?”
“네. 연락을 보내고 나서 바로 움직인 모양입니다. 빨라서 좋네요. 하하.”
넉살 좋게 웃는 성현민을 보며 여인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후회라뇨?”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반문에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성현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신념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작전에 따랐을 뿐인걸요.
“…그래도.”
“그러니까 대답은…. 네. 후회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후. 성현민은 느긋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동문 부대의 인원은 약 3500명. 현재 그들은 어느 한 지점에 모여 직사각형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사실상, 성현민은 이변이 발생했을 때부터 바로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성벽이 허물어지고 적들이 서문으로 모두 달려나간 것을 확인했을 때는 눈치가 확신으로 변했다.
그러나 성현민은, 3500명으로 바로 구원에 나서는 것보다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다. 바로 남문과 북문 부대에 전령을 보내 상황을 알리고, 자신들은 전장을 우회해 적들의 예상 퇴로에 새롭게 진을 친 것이다.
물론 작전을 따지면 크게 어긋나지는 않은 행동이었지만, 논란이 있을만한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 성현민은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했다.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지는 본인만이 알뿐이었다.
이윽고 지축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자, 한동안 전방을 응시하던 성현민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드디어 오는가 보네요.”
“이길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보다 많을 것 같은데.”
“지금의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말을 하는 성현민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뜻 모를 자신감에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조용히 음성 증폭 마법을 시전했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사용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제각각 이었다. 어떤 사용자들은 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사용자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아직까지 적들과 난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서문 부대가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성현민은 그들을 빠르게 훑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한없이 가라앉았던 분위기에 비로소 긴장이 샘솟기 시작한다.
(긴장하실 거 없습니다. 준비는 완벽하니까요. 다들 탐험 한 번씩은 해보셨죠? 언제나 하던 것처럼 똑같이 해주시면 됩니다.)
성현민이 농담 비슷한 어조를 던졌지만 누구 하나 웃는 사용자는 없었다. 그 사이 지축의 떨림이 점차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고, 멀리서 뭔가 움직이는 기색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드디어 전장을 뚫은 연합군의 선두 부대가 조금씩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성현민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적들이 이대로 좌우로 선회해서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대로 짓쳐 들거나.
사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동문 부대의 입장에서 급한 건 어디까지나 연합군이었다. 자신들은 완벽히 정비를 마쳤다. 더 이상 마구잡이 식 난전이 아닌, 정돈된 전투를 할 수 있다. 북 대륙이 자랑하는 사용자들의 실력을 이제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지만.
잠깐 생각한 성현민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자. 기다리던 복수의 시간이 도래했네요. 다들 많이들 참으셨습니다. 모두 준비하세요.)
이윽고 적들의 선두가 서서히 확인되기 시작함에, 성현민은 지체 않고 음성을 퍼뜨렸다.
끼릭, 끼리릭!
“───. ───. ───.”
그러자 궁수들이 화살을 재는 소리와,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장엄히 울리기 시작한다.
성질 급한 사용자들은 위협 사격을 날리려고도 해보았다.
(아직 대기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제지한 성현민은 날카롭게 전방을 주시했다.
연합군은 퇴로에 진을 친 동문 부대를 인지한듯했다. 그에 따라 잠시 움직임을 멈췄지만,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곧바로 정면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적들을 보며 성현민은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돌격한다는 소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 곳에 돌파를 성공한 적들이 제법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대기, 대기합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역시나 성현민의 예상이 맞았는지, 선두의 뒤로 제법 많은 수의 연합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얼핏 헤아려도 동문 부대의 1.5배는 되는 숫자였다.
비록 마구잡이로 달려오기는 했지만, 그 모습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그에 따라 일부 사용자들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시위를 잡은 손이 떨리고,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에 잡음이 섞여 들어갔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영웅이 되는 겁니다!)
이윽고, 적들의 선두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 우오오오오오오오!
그리고 범위에 들어온 순간, 성현민은 지체 않고 외쳤다.
(들어오는 놈들은 한 놈도 놓치지 않습니다! 모두 공격!)
슈슈슉! 슈슈슈슉!
그와 동시에, 먼저 장전된 화살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쏘아진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더니, 달려오는 적들에게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
‘뭐지?’
한창 달리던 도중, 나는 갑작스럽게 늘어난 시체에 의문을 느꼈다. 사방에는 화살과 마법이 휩쓸어 대지가 파헤쳐져 있었고, 그 위를 장식한 시체는 거의 연합군이었다.
사실상 시몬을 추격하는데 있어서, 나는 지금 달리는 곳을 돌파하는걸 가장 난관으로 여겼다. 직선으로 돌파한 만큼 빠르게 가로지를 수는 있었지만, 앞으로 나아갈수록 앞서 전장을 지나친 적들이 더욱 많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군은 더더욱 줄어들 테고.
하지만 적들 또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소리는….
‘아.’
해답은, 시체더미를 돌파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저기 멀리서 어지러이 전투를 벌이는 광경에 눈에 잡혔기 때문이다. 사용자들과 연합군이 한 바탕 어우러진 광경은 지원 부대가 도착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기야 도착할 때도 됐지만….’
그렇다면 전방으로 보이는 부대는 구원이 아니라 부랑자들의 퇴로를 차단했다는 소리.
뭔가 석연치 않은 의문이 남았지만,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나는 곧바로 고개를 털었다.
아무래도 좋다. 아니, 서문 부대의 사용자들은 야속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더없이 나이스를 외칠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시몬에, 적들이 곳곳에서 가로막는 와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적들의 신경을 돌릴 곳이 생긴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대로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한순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나는 전장을 그대로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간파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몬의 마안은 꾸준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걸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내 기억에 따르면, 시몬은 근접 계열이 아니다. 굳이 따지면 마법사 클래스에 가깝다고나 할까?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적들의 방해가 없다면 10분 안에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다.
눈앞으로 거친 흙먼지가 일어났다. 밟고 달리는 대지에서 이제는 더 이상 물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윽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흙먼지 속으로, 나는 지체 없이 뛰어들었다.
2년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
============================ 작품 후기 ============================
시몬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걔 아니더라도 나올 애들은 많으니까요.(?)
아 진짜 다음 회 쓰고 싶어 죽겠는데, 결국에는 잡기 직전에 끊었습니다. 더 내용을 추가했다가는 진짜로 늦을 것 같아서요.(절대로 절단은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지금 생각하건데 10월이 저에게 슬럼프였던 것 같아요. 이래저래 힘든 일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글을 쓰면서 느꼈는데, 서서히 벗어날 기미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마 독자분들이 한결같은 응원과 따끔한 지적 덕분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독자분들에게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에요. 아이. 갑자기 이런 말 하려니 부끄럽네요. 갑자기 왜 이럴까요. ㅋㅋㅋㅋ.
아무튼 감사, 그리고 또 감사합니다.
1부 완결까지 더욱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PS. 다음 회는 제법 잔인할 수 있습니다. 얘 또 한 번 광기 터뜨리거든요.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은 감안하고 보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