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83
00382 마족 네르갈 =========================================================================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나오자마자 어지러운 난전의 광경이 나를 맞이했다. 난전이라 함은 주로 근접 계열 클래스들이 활약하는 전장이다. 이곳저곳에서 금속음이 울렸고, 눈을 아프게 만들 정도의 불똥이 난무했다.
언뜻 보긴 했지만 전황은 엇비슷했다.
연합군은 지금껏 이어온 기세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어떻게든 밀어붙이려는 중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들판을 지나쳤던 것처럼 쉽사리 돌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연합군에 반해, 동부의 사용자들은 매우 안정적이고 정돈된 대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전황이 수평으로 보이는 것도 단순한 인원 차이일터. 지나쳐온 곳에서 보았던 연합군의 시체를 생각해보면 동부의 손을 들어주어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생각은 여기까지.
나는 늘어뜨렸던 검을 곧추세우고 눈앞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느새 적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멀리서 점으로 보였던 놈들의 모습이 거리가 줄어들수록 커져만 갔다. 그 중에서 적들 중 한 명이 나를 발견했는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 떠돌이들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스칵!
그대로 지나치며 목을 베자 머리가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찰나의 순간 당황한 빛이 스친 게 나를 부랑자로 오해한 모양이다.
그때였다.
– 캬오오오오오오오!
마치 괴물이 부르짖는듯한 괴성이 전장을 떠르르 울렸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빽빽한 밀집 대형을 이루던 동부의 대형에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변화의 중심에는 진짜 ‘괴물’이 서 있었다.
키는 5미터 정도 될까? 전신에 비늘이 덮인 그것은 흡사 도마뱀과 비슷한 형상을 한 채 거세게 날뛰고 있었다.
길쭉한 손톱을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전방을 후비자, 꽉 막혀있던 대형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적들은 괴물 도마뱀을 앞세워 틈이 생긴 곳으로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중이었다.
괴물은 자신이 다치든 말든 미친 멧돼지처럼 날뛰었고, 그 결과 동부의 진형이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주변으로 거친 폭음과 고함 소리가 뒤섞여 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그 순간, 나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전력으로 내달렸다.
“사제! 사제는 어디 있나!”
“집중 사격! 괴물에게 집중 사격을 하라고!”
괴물 도마뱀과의 거리는 40미터. 놈이 날뛰는 주변으로 나는 낯익은 사내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복부를 감싸 쥔 채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틀림없는 성현민이었다.
슈슉, 슈슈슉!
– 캬오오오! 캬오오오!
사방에서 날아든 화살이 괴물 도마뱀의 비늘을 파고든다. 하지만 화살로는 놈을 저지할 수 없었다. 약간의 타격은 있을지언정, 괴물 도마뱀은 더욱 괴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쿵!
일순 들판의 흙들이 높게 솟구쳤다. 미약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흔들린다. 그에 따라 부근의 사용자들은 균형을 잃어 무너졌고, 괴물 도마뱀은 잽싸게 손을 내뻗었다.
“엄마아아!”
앳된 비명이 허공을 왕왕 울렸다. 결국 잡혀버린 한 여인이 하늘 높이 들린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보는 내가 아찔할 정도로 순식간에 대지에 내리 꽂혔다.
꿍!
푸칵!
뭔가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시뻘건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이어서 드러난 광경은 처참했다.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머리에 으스러진 뇌수가 사방팔방에 늘어져 있었다.
이윽고 괴물 도마뱀의 눈이 다른 먹잇감을 찾기 시작할 즈음.
내가 도착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이쪽이다.’
나는 괴물 도마뱀 너머로 보이는 쭉 갈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양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어서 마력을 가득 불어넣는 것과 동시에, 힘차게 발을 굴러 대지를 박차 뛰어올랐다.
훙!
몸이 솟아오른다. 슬쩍 고개를 내리자 괴물 도마뱀의 모습이 더욱 확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도약의 최고점에 닿고 번들거리는 머리 비늘이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손을 최대한 뒤로 젖혔다. 그리고 그대로 하강을 시작하여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쑤아아악!
찬란한 빛을 뿌리는 검기는 내려치는 궤적을 따라 새하얀 상(像)을 그리었다.
– 크아아아아아아아!
순간 괴물 도마뱀의 눈에서 고민의 빛이 보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정했는지 곧바로 몸을 움직여 피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확실히 도마뱀 종은 빠르다. 그리고 민첩하다. 그러나 ‘민첩’이라는 두 글자는 내 앞에서 논해선 안 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팟!
다시 눈을 뜬다. 이형환위(移形換位)를 발동하자 순식간에 비늘 덮인 머리가 눈앞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미 내려쳐진 ‘빅토리아의 영광’은 놈의 정수리를 깔끔하게 쪼개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뿌뜨뜨뜨뜨뜨뜨뜩!
쇳덩이를 자르는 감촉.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그대로 아래로 내려간다. 시선이 주르륵 내려갈 때마다 좌우로 갈라져 붉은 속살을 드러내는 광경이 보였다.
이윽고 대지에 발을 안착했을 때, 깨끗하게 반으로 나뉜 괴물 도마뱀의 신체가 각각 나누어 떨어지는걸 볼 수 있었다.
풀썩, 풀썩!
촤아아아아아아악!
온몸을 적시는 비처럼 내려오는 뜨끈한 액체는 덤이었다.
한두 번 눈을 깜빡인다. 이윽고 한 줄기 불어온 바람에 괴물 도마뱀의 시체는 재가 되어 흩날렸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던 신체는 온데간데없고, 반으로 잘라진 사람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수인을 결합한 사용자였나…. 들어본 기억이….’
“그만! 공격하지 마라! 아군이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나를 둘러싼 채 무기를 겨누고 있는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약간 어이없는 기분이 드려는 찰나, 한 사내가 내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성현민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가 아니십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남성치고는 부드러운 손길이 내 얼굴을 쓸었다. 붉디붉던 시야가 조금이나마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 맞는군요. 후유. 정말 대단합니다! 그리도 애먹었던 괴물을 단번에….”
“한 로드. 혹시 시몬이 이쪽으로 빠져나갔습니까.”
“예?”
성현민은 일순 의아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시몬. 서 대륙 총 대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마 놓친 것 같습니다. 저도 익히 주시하고 있었는데,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시몬이 이쪽으로 빠져나갔습니까.”
말을 끊고 다시 묻자, 성현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지그시 나를 응시하고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인지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막 사로잡기 직전 적 중 한 명이 방금 괴물로 변신했고, 그 틈을 타 한 무리의 호위를 받는 사용자가 빠져나갔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추격하실 생각이라면 지원군을…. 머, 머셔너리 로드!”
“필요 없습니다.”
아직 난전이 한창이었고, 성현민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나는 다가오는 사제를 향해 그를 약하게 밀쳤다. 그리고 갈라졌다가, 이제 서서히 닫히기 시작한 길로 지체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다.
그럼 이 길만 빠져나간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아무런 방해 없는 추격뿐이었다.
등 뒤서 들리는 성현민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
탁탁탁탁! 탁탁탁탁!
한 무리의 사용자들이 숲을 달리고 있었다. 수는 약 백 명 가량 될까. 온몸에 덕지덕지 피를 묻힌 채 달리는 그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못하다. 이유는 바로 중앙에서 호위를 받으며 달리는 한 청년 때문이었다.
– 헉, 헉! 잠, 잠시만요!
청년이 입을 열자 나머지가 일사분란이 움직임을 멈췄다.
– 헉! 더는, 헉, 헉! 더는 못 달리겠어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죠.
– 기다린다고요?
한 사내의 반문에 청년은 헉헉대는 와중에도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 아. 네. 혹시 뚫고 나온 친구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겸사겸사 체력도 회복할 겸 말이죠.
사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마법사 클래스는 체력 부족의 대명사였고, 뒤따라오는 동료들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전력을 상승시킬 수 있다.
– 다들 편하게 쉬세요. 아직 탈주는 끝난 게 아니니까요. 하하.
청년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리자, 한 명 한 명 눈치를 보며 바닥에 앉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그들의 얼굴은 고뇌 어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조금 전의 사내가 몸을 일으켜 청년에게 다가섰다.
– 시몬.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랬다. 청년의 정체는 바로 성현민이 이룬 회심의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빠져 나온 시몬 그라임스였다.
– 글쎄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이 난리에 퇴로를 차단할 생각을 하다니….
시몬은 입맛을 다시며 말끝을 흐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분명 처음 성을 깨고 나왔을 때만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황이 조금씩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지원 부대가 도착한 순간 순식간에 뒤집혔다. 사실상 자기들이 지나쳐온 곳을 통해서 들어올 줄 알았지, 퇴로를 차단당했을 줄을 꿈에도 몰랐던 연합군이었다.
비록 어찌어찌 뚫고 나왔다곤 해도 피해가 너무 크다. 처음 일만 오천 명에 이른 연합군은 어느덧 백 명으로 줄어 있었다.
물론 백 명만 살아남은 건 아닐 테고, 난전 중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졌으리라. 그러나 과연 서 대륙까지 무사히 돌아갈 사람은 얼마나 될까?
스스로들 생각해도 부정적으로 느꼈는지, 서 대륙 사용자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 자. 그럼 슬슬 일어날까요?
그때 별안간 느긋한 목소리가 주변을 흘렀다. 음성은 너무도 여유로워, 마치 아직 숨겨둔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투로 들렸다.
– 다시 달릴 수 있겠습니까?
그에 힘입은 사내가 번쩍 몸을 일으키자, 시몬은 미미하게 웃었다.
– 아. 기다리던 손님이 왔거든요. 솔직히 조금 더 쉬고는 싶은데, 곧 도착할 것 같아요. 어디 보자….
한순간 시몬의 안구가 빨갛게 변하였다. 뭔가를 주시하는지 검은색 동공이 세로로 삐죽해졌다.
파직!
– 윽.
그러나 시몬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고, 눈을 살살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어느덧 안구는 다시 본래의 색깔을 되찾은 상태였다.
– 기다리던 손님이라니요? 설마 동료들이….
– 아니요. 괴물.
돌아온 대답에 사내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규칙적인 발소리가 고요한 숲을 울린다. 모두 소리를 들었는지 잠깐 풀어졌던 얼굴에 경계가 잔뜩 차 올랐다.
– 경계!
이윽고 백 명 전원이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검은 머리의 남성이 서서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확인한 사용자들의 입가에서 나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남성은 말 그대로 혈인이었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정도가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마치 피의 바다에서 헤엄치다가 잠깐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꾸준히 이어지던 남성의 걸음이, 백 명을 앞에 두고 우뚝 멈췄다.
척 봐도 아군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기운에, 서 대륙 사용자들은 한층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빼어 들었다. 그리고 총 대장의 명령을 기다리려는 찰나, 갑자기 시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다들 그만.
– 시몬 그라임스?
– 눈앞의 남자는 괴물이에요. 당신들은 상대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덤벼봤자 개죽음이죠.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했겠지만, 사내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눈앞의 남성은 외형도 외형이었거니와, 풍기는 기운도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고양이를 앞에 둔 생쥐의 심정이랄까.
– 그, 그럼 어떻게….
– 어쩌긴요. 그래도 명색이 총 대장인데 제가 상대해야겠지요. 저 괴물의 목적도 저인듯하니.
– 시몬? 설마 혼자서 상대하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 물론이에요. 당연히 당신들의 도움도 받을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한순간 시몬의 말이 멈췄다. 그리고 왼손을 들더니, 이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죽어주세요.
– 예? 그게 무슨….
– 걱정 말아요. 불나방 같은 개죽음이 아니라, 조금 더 가치 있는 죽음이 되는 겁니다.
뜬금없이 터져 나온 말에 사내는 의아히 반문했다.
우웅!
그러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 시몬이 왼손에서 검붉은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삽시간에 남성을 비롯한 주변 사용자들을 덮쳤다. 빛은 사용자들의 몸을 칭칭 휘감았고, 형형한 색채를 내뿜었다.
– 어? 어, 어?
그리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그것은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빛에 휘감긴 사용자들의 몸이 흐물흐물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물 흐르듯 전신이 녹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 흐아악! 흐아아악!
고요했던 숲에 때아닌 비명이 울렸다. 이윽고 녹아 내린 살은 피에 섞여 검붉은 빛에 흡수되었고, 백여 명에 다다르던 사용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으로 퍼졌던 빛이 다시금 시몬에게 되돌아와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내었다. 그의 왼손에 피와 살로 이루어진 한 권의 책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 두 명. 시몬과 남성이었다.
– 이야. 역시나 곱게 죽어주지는 않네요. 설마 저항할지는 몰랐는데 말이에요.
“…….”
– 하하. 그거 알아요? 당신 정말 짜증나는 거? 기껏 세운 제 계획을 망치질 않나, 죽어라 고 쫓아오지를 않나. 그리고 제가 아끼는 부하들도….
“…….”
남성은 묵묵부답이었다. 다만 눈길이 조금 묘한 게 마치 서커스 한 번 잘 봤다는 눈초리였다.
– 뭡니까? 그 눈초리는?
그때 남성의 눈동자가 한 번 깜빡였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떠한 해도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무척 더러운 기분을 느낀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히 들춰내는 것 같은….
남성의 정체는 바로 김수현이었다.
사실상 성현민의 포위망을 벗어난 이후, 시몬이나 김수현이나 피차 전장에서는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김수현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이상 마법사 클래스를 따라잡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
“예상대로군.”
저벅저벅. 저벅저벅.
한 마디 뱉은 남성이 다시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몬의 얼굴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아까 지쳐있던 기색은 어디 갔는지, 백여 명에 이르는 사용자들을 흡수한 뒤로 전신에서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제 10미터 안으로 들어온 김수현을 보며 시몬은 핏빛으로 물든 안광을 번뜩였다.
촤라라라라라라락!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소환된 책이 저절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책을 보면 잠깐 걸음이라도 멈출 법도 한데, 그래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 담담한 얼굴에 시몬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넘어가던 페이지가 저절로 멈췄다.
우웅!
그 순간 시몬의 주위로 성인 남성의 주먹만한 구체가 우수수 떠올랐다. 족히 수십이 넘는 그것들은, 하나같이 진한 피 색을 띠고 있었다.
– 블러드 벌컨(Blood Vulcan).
그리고 시몬의 입술이 떨어진 순간, 핏빛 구체는 일제히 남성을 향해 쇄도했다.
씨잉! 씨잉! 씨잉! 씨잉!
포탄처럼 달려간 구체는 남성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그 찰나의 순간, 곧 이어질 폭음의 향연을 기대하며 시몬은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시몬이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휘리릭!
구체는, 순식간에 허공에 휘날렸다. 그것도 마치 물에 탄 피처럼 가느다랗게 번져서.
– 뭐?
시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그리고 김수현은 티끌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여전히 담담히 걸어오고 있었다.
– 브, 블러드 랜스(Blood Lance)!
시몬은 발악적으로 외쳤다. 그러자 이번엔 길쭉길쭉한 핏빛 창이 서른 개가 생성되더니, 다시금 김수현을 향해 세차게 쇄도한다.
끼기긱! 끼기기긱!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랐다. 하릴없이 스러진 구체와는 다르게, 쏘아진 창은 고슴도치처럼 주변을 빽빽이 둘러쌌다. 어떻게든 마법 저항을 뚫고 들어가려는지, 끝이 부르르 떨리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우직, 우지직!
그러더니, 이윽고 어느 한 점에서 미약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어느덧 멈춰버린 김수현의 걸음은 본 시몬은 비틀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흠.”
잠깐 콧숨을 내쉰 김수현은 오른손에 쥔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둘렀다.
위로 한 번.
싹둑!
오른쪽으로 한 번.
싹둑!
왼쪽으로 한 번.
싹둑!
그에 따라 싹둑싹둑 잘라진 창들은, 이내 먼젓번 들어온 구체를 따라 조용히 허공에 퍼지었다.
김수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었고, 상식을 벗어난 현상에 시몬은 경악했다. 믿고 있던 수가 이해할 수 없는 수단에 막히자, 비로소 그의 차분하던 얼굴에 감정이 찾아 들었다.
– 마, 말도 안 돼! 아, 아무리 마법 저항력이 높아도! 배, 백 명을 제물로 삼았단 말이야!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김수현의 걸음이 더욱 빨랐다.
“후유. 너도 참 애먹인다.”
어느덧 시몬의 앞에 다가선 김수현은 천천히 왼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책을 잡았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책을 맞잡았다. 그러나 이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그대로 책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윽고 책을 빼앗은 김수현은 흥미로운 눈길로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눈이 깜빡인다 싶더니, 이내 꾹 닫혔던 입술이 열렸다.
“시크릿 클래스라. 예상치 못한 수확인데.”
이윽고 책을 소중히 품 안으로 집어넣는 것을 보며 시몬은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눈앞의 남성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너는 애당초 내 상대가 아니다라는 눈빛? 그것을 생각하자 머리 끝까지 차가운 분노가 치솟았다.
그렇게 왼손을 들어올려 책을 다시 소환하려는 찰나였다. 순간 김수현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우지직!
화륵, 화르륵!
– 끄아아악!
갑작스레 왼손이 우그러지는 느낌에, 시몬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 내, 내 손! 내 손!
어느덧 시몬의 왼손은 김수현의 손에 잡혀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가 손을 놓아주자, 손목 위로 허공만이 보였다. 왼손은 형체도 없이 불태워졌다.
왼손에서 떠난 김수현의 손은 이윽고 시몬의 머리에 얹혔다. 그걸 그대로 잡고 끌어올리자, 시몬의 몸도 덩달아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대로 걸음을 옮긴 김수현은, 이내 숲에 널린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몸통에 시몬을 댄 후에 복부로 거침없이 칼을 꽂아 넣었다.
– 크엑! 쿨럭!
무력해진 시몬의 입에서 한 움큼 피가 토해졌다. 김수현은 그에 아랑곳 않고 양손을 탁탁 털었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확인은 했는데…. 어떻게 끄집어내야 하지?”
– 쿨럭, 쿨럭!
“말도 안 통하고. 영어 좀 배워둘걸 그랬나.”
– 이, 이…!
그 와중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눈길은 흰자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뻘건…. 마치 악마와도 같은 눈동자였다.
김수현은 뚱하니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 책 내놔!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난 마족의 눈만 보면 몸서리가 쳐지거든.”
김수현은 말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양손을 내뻗었다. 뻗어나가는 그의 손에는 각기 엄지가 치켜세워진 상태였다.
이윽고 엄지는 시몬의 양 눈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 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눈동자가 거칠게 짓눌리는 감각에, 시몬은 다시금 격한 비명을 내질렀다.
김수현이 손가락을 빼자 한 줄기 핏줄기가 따라 튀어나왔다. 뭉개진 눈구멍 사이로 눈물 섞인 피가 흘러내렸다. 시몬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이대로 죽이기엔 불안한데…. 일단 하나씩 뜯어야 나오려나?”
잠시 동안 고개를 갸웃한 김수현은 이번엔 시몬의 두 팔을 잡았다. 그러자 시몬은 흠칫 몸을 떨었다. 비록 두 눈이 보이지는 않아도, 팔을 잡은 감촉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어렴풋이 직감했다.
– 하, 하지마! 하지마!
시몬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끙 힘을 주어, 잡은 팔을 좌우로 세게 잡아당겼다.
찌이이익!
– 으, 으아아아!
그러자 잠시 늘어나던 팔에서, 점차 살이 찢어져 늘어지는가 싶더니.
뿌지지지지지지직!
이내 그대로 뼈와 함께 속살을 드러내며 몸에서 뜯어졌다.
–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몬의 비명이 다시금 숲을 울렸다.
============================ 작품 후기 ============================
후유. 겨우 1시 이전에 맞췄습니다.
분량이 많으니 용서해주시어요. (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