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84
00383 마족 네르갈 =========================================================================
짓눌린 눈동자. 찢어 뜯겨진 팔. 뚫린 복부.
시몬은 세 부분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언제나 침착했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있다. 항상 미소가 흐르던 입가는 하얀 거품투성이였다. 어찌나 비명을 질렀는지 간간이 나오는 비명은 잔뜩 쉰 상태였다.
– 끄어어….
시몬은 후회했다.
상대가 괴물인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 있었다. 자신도 괴물이라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가히 상식을 뛰어넘는, 아니 파괴할 정도의 무력.
이건 그야말로 ‘격’이 다르다.
그것을 인정했을 때 시몬의 내면에 하나 둘 복합적인 감정이 찾아 들었다.
절대 이길 수 없다.
무섭다.
수치스럽다.
살고 싶다.
좌절. 두려움. 굴욕. 욕망.
어떻게….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킬킬킬킬킬킬킬킬….
아랫배를 울리는 아릿한 감각.
– 아무래도…. 다시 거래의 시간이 도래한 것 같군.
그리고 이어진 나직한 음성에, 한순간 시몬의 생각이 멈췄다.
시몬은 반문했다.
– 거래의…. 시간?
– 킬킬! 그래. 하나만 물어보지. 시몬 그라임스.
하나만 물어본다는 말에 시몬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잠깐 뜸을 들인 목소리는 이내 낮디 낮지만, 달콤한 음색으로 그의 내면을 울렸다.
– 힘을 원하는가?
– 힘…. 이라고?
– 이 곤란한 상황을 뒤바꿀 힘을 말이야!
시몬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방금 전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시몬을 보다가, 나는 잠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쟁을 시작한 직후 ‘제 3의 눈’은 계속 활성화해 둔 상태였다.
1. 이름(Name) : Simon Grimes(6년 차)
2. 클래스(Class) : 피의 군주(Secret, Monarch Of Blood,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네뷸라(Nebula)
4. 소속 단체(Clan) : Tyrant
5. 진명 • 국적 : 피에 미친 폭군, 악마의 씨앗을 받은 자 • 미국
6. 성별(Sex) : 남성(22)
7. 신장 • 체중 : 174.4cm • 62.3kg
8. 성향 : 악 • 혼돈(Evil • Chaos)
(파괴의 악마 베엘제붑(Beelzebub)의 첫 번째 피조물, 마족 네르갈의 씨앗을 받은 상태입니다.)
‘악마의 씨앗을 받은 자.’
내가 이번 전쟁에 참여한 목적은, 추후 서 대륙을 장악할 사용자 시몬 그라임스를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바로 놈의 진명 ‘악마의 씨앗을 받은 자.’에 있다.
1회 차 시절. 동부와 벌인 두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시몬은 무사히 서 대륙으로 돌아간다. 그 이후 놈은 모종의 이유로 ‘첩자의 마족 네르갈(Nergal)’로 각성을 하게 된다.(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는 굉장히 뒤늦게 밝혀졌다.)
그리고 각성한 네르갈은 차후 조용히 지내다가, 어느 순간 서 대륙을 기점으로 전 대륙에 혼란을 일으키는 주범 역할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벨페고르가 소환된 것은 우연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고대 거주민들의 욕심이 불러일으킨 의도치 않은 재앙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네르갈은 벨페고르와 결단코 같은 경우로 볼 수 없다. 증거는 명백하다. 진명 악마의 씨앗을 받은 자. 우연히 마족이 소환된 것과 씨앗이 발아해 몸을 점령당하는 건….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죽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숙주가 죽는 순간 씨앗은 본 기능을 상실해버린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할 뿐이지, 씨앗이 마족의 본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발아를 거쳐 숙주의 몸이 점령당하는 순간 비로소 본체가 세상에 드러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우…. 우….
귓가에 들려오는 신음에 나는 설핏 시선을 돌렸다. 시몬은 당장에라도 넘어갈 듯 숨을 껄떡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약간이지만 걱정이 일려는 순간이었다.
– 크르르르….
그때, 갑작스레 시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리고 놈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이상 징후가 발생한걸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내가 눈동자를 짓뭉갰을 터인데, 구멍 안으로 검붉은 빛이 번쩍인걸 보았기 때문이다.
‘설마…. 시작된 건가?’
떠오른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때맞춰 시몬의 몸에 변화가 찾아 들었다.
하얀 피부에 검붉은 반점이 우후죽순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점은 이내 전신을 뒤덮어 까맣게 물들였고, 그와 동시에 살갗이 불룩히 치솟아 오른다.
– 크아아앙!
한순간, 갑작스레 커다란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더는 시몬의 목소리라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하고, 또한 포악했다.
투둑! 투둑, 투둑!
어느덧 불룩 솟아오른 몸이 마치 풍선처럼 끝없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살가죽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게,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보기 힘들 정도의 끔찍한 광경이었다.
찌직! 찌지직!
이윽고 한 군데 찢어진 틈으로, 검붉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절로 불쾌해지는 기분에 나는 바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빼어 고쳐 잡았다. 그때였다.
털썩!
푸확!
바닥에 떨어진 전신이 쩍쩍 갈라지는 것을 확인한 순간, 드디어 시몬의 몸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신체는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터져 나왔고 시꺼먼 연기가 삽시간에 주변을 뒤덮는다. 이내 뭉클뭉클 덮쳐오는 연기에 파묻히며, 나는 똑바로 눈을 떠 나무를 직시했다.
“…….”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전방을 물들였던 연기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 확보된 시야 속에서 검붉은 안광이 번쩍이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지체 않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둘렀다.
후웅!
검에서 일어난 풍압에 남아있던 연기가 일거에 흩어진다. 그러나 검 끝에 걸리는 느낌이 없다. 잠시 고개를 갸웃할 때, 허공에서 비열하게 들릴 만치 짜증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끼끼끼! 끼끼끼끼!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다! 끼끼끼끼끼!”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허공까지 올라간 검은 연기가 어딘가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서서히 옅어진 연기 사이로, 비로소 시몬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아니. 시몬이 아니었다.
키는 얼추 2미터는 될까.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집에 색은 칠흑처럼 검었다. 등에는 박쥐 날개와 비슷한 모양의 날개가 달려있었고, 머리 윗부분으로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다. 그래. 저것은….
“그런데 세상에 나오자마자 칼질을 당하다니…. 끼끼끼. 간덩이가 부은 인간이로구나! 끼끼끼끼!”
마족, 네르갈이었다.
“끼끼끼…. 원래대로라면 죄를 물어 갈기갈기 찢었겠지만, 너는 한 번 특별히 용서해주도록 하지. 이 긍지 높은 몸을 나오게 해준….”
“오랜만이야. 네르갈.”
“뭐, 뭣?”
이름을 부르자, 네르갈의 눈을 물들이던 검붉은 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인간?”
“어떻게 알고 있긴.”
나는 한 마디 툭 대답하곤 슬쩍 무릎을 굽혔다.
“대답해라! 이 하찮은 벌레야!”
“하찮은 마족을 죽이려고 알고 있…. 지!”
그리고 “지!”라고 말한 것과 동시에, 있는 힘껏 대지를 박차 올랐다.
“무슨…!”
말을 하면서도 네르갈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찰나의 순간 놈이 손을 두어 번 주먹 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아직도 주변을 떠돌고 있던 연기가 삽시간에 나에게로 쇄도한다.
그야말로 기습을 기습으로 받아 친 격이지만, 나는 내 마법 저항력을 믿었다.
사실 깨어져도 상관없다. 본체가 드러난 것을 확인한 이상, ‘그나마’ 힘을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죽이는 게 이득이다. 그런 만큼 약간의 타격을 감수할 용의는 있었다.
사사삭! 사사사삭!
이윽고 검은 연기가 나를 칭칭 휘감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우웅!
휘류루루루루!
그러나 지척에 도달한 순간 잠시 멈칫하더니, 일부는 그대로 흩어지고 또 일부는 주변을 빙빙 휘돌기 시작했다. 마법 저항이 연기의 접근을 막아낸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내 눈은 순식간에 네르갈을 앞에 두게 되었다. 나는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려 ‘빅토리아의 영광’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검붉은 안광과 마주한 순간, 놈의 정수리를 향해 세로로 검을 내리쳤다.
스칵!
뭔가 베어진 느낌과 동시에, 네르갈의 오른팔이 공중에 흩날렸다.
‘쯧.’
나는 혀를 찼다. 검은 목적한 지점을 정확히 베었지만, 주변의 검은 안개가 한순간 진로를 방해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안개의 일부로 스스로의 발을 잡아당겨 순간적으로 회피했다. 그러한 두 상황이 맞물린 결과, ‘빅토리아의 영광’은 정수리가 아닌 팔을 쪼개었고.
쿵!
“끼이이이!”
이윽고 네르갈은 대지에 착지한 것과 함께 거센 비명을 울렸다.
이어서 나 또한 바닥에 발을 닿자, 보이는 놈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팔이 잘렸다는 고통보다도 오히려 부르르 떨리는 분노 감이 가득했다. 그것은 아마 종족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에서 비롯된 감정이리라.
“내, 내 팔이…! 이놈! 무슨 잔재주를 부린 거냐!”
길길이 날뛰는 네르갈을 보며 나는 다시 검을 겨냥했다.
세상에 나온 마족은 제한상 본체의 7할에 해당하는 힘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오자마자 7할의 힘을 내는 게 아닌, 개인차에 따라 약 2할에서 3할부터, 서서히 힘을 회복하는 성질이었다. 즉 마족은 출현한 순간 가장 약한 상태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이번 전쟁에 참여한 이유였다. 추후 벨페고르와 함께 마족의 대대적인 출현에 혁혁한 공을 세울 네르갈을, 가장 쉽게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감히…!”
네르갈은 여전히 분노에 찬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혹시나 ‘첩자의 마족’이 전심전력으로 도망쳐버리면, 나로서도 꽤나 성가신 일이 될 테니까.
“시끄럽다.”
“뭐라고!”
“긍지 높은 마족 님께서는 입으로만 싸우는 모양이군.”
“끼끼끼! 하! 지금 나를 도발하려는 것이냐! 하찮은 인간 놈 주제에?! 끼끼끼끼!”
역시나 교활한 녀석이었다.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네르갈은 곧바로 태도를 바꿔 오히려 나를 도발했다.
그러나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피조물에 불과한 마족을 도발하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놀고 있네. 역시나 벨제부브의 피조물다워.”
“!”
“머릿속에 든 게 파괴밖에 없어서 그런가? 하여간 멍청한 건 주인을 빼다 박았네. 하하하!”
“인간이 어떻게 주군의 존함을…. 아, 아니. 뭐라고…?”
“네가 멍청해 보이니 네 주인도 멍청해 보인다고. 이 벌레 같은 새끼야.”
그 순간, 네르갈의 주변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
나를 응시하는 놈의 안광이 제법 사늘하게 느껴진다. 일전에 벨페고르때도 그랬던 것처럼, 피조물은 조물주에 대해 목숨을 걸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진다.
그렇게 15초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크아아앙!”
한 번 거센 포효를 내지른 네르갈은, 한층 진해진 안광으로 입을 열었다.
“…좋다.”
“뭐가 좋아?”
“이죽대지 마라. 비록 네가 한 가락 실력이 있고,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네르갈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주변에서 검은 연기가 빠르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돌풍은 놈의 전신을 가릴 만큼 크게 일어났고, 그것은 이내 검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네르갈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 지껄인 것을 기필코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끼끼끼!”
쿠쿠쿠쿠쿠쿠쿠쿠!
잠시 후. 돌풍의 사이사이로 검붉은 불 줄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자세히 보니 네르갈의 몸에서 뭉클뭉클한 염화(炎火)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것은 휘도는 돌풍에 따라 핑그르르 도는 원을 그리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하나의 불의 폭풍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안면에서 뜨거운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흘러들어오는 기류에는 역겹고 비릿한 피 내음이 섞여 있었다. 항상 맑은 화정(火正)만 보아오다가, 간만에 거지 같은 기운을 보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내 반응에 착각했는지 네르갈은 사늘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끼끼끼! 왜 그러지? 왜 그런 얼굴이야?”
“이건…. 불?”
“그렇지. 벨제부브님의 권능, 크림슨 템페스트! 이제 좀 후회가 드는 건가? 끼끼끼끼!”
크림슨 템페스트?
“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한 번의 심호흡으로 몸을 점검했다. 그리고 안솔의 ‘기적’에 감사하며, 심장의 힘을 한껏 폭발시켰다.
‘태고의 격으로 명할지 어니.’
화륵! 화르륵!
내 말에 따라 전신에서 맑은 불꽃의 기류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이어진 네르갈의 외침에, 나는 왼손을 들어 올려 대답했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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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유진 부! 활!
정말 오랜만에 정시에 업데이트했습니다! 하하하하하! |ㅇㅇ/
*
…그러나 메모라이즈가 다시 자정에 업데이트되는 일은 없었다.
주말 집필에 모든 힘을 쏟아낸 로유진은, 이어지는 화요일에 거짓말처럼 늦어버리고 말았다.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