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87
00386 전쟁의 끝 =========================================================================
“사용자 김수현.”
한동안 닫혀있던 세라프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나는 일말의 불안감을 억누르면서도,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세라프는, 이내 예의 고저 없는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하겠습니다. 홀 플레인에 소환된 사용자는 영혼을 구별하는 고유한 정수를 지닌 존재…. 즉 원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윽고 이어진 세라프의 대답은 내가 바라왔던 것과는 한참이나 어긋나 있었다. 순간 이전부터 느껴왔던 어렴풋한 불안감이 서서히 구체화하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을 잇는 중이었다.
“영혼의 정수란 고유한 개체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망한 사용자를 되살리는 건…. 정수의 복원 또는 재구성이 아닌, 새로운 생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세라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살짝 숨이 거칠어진 모양인지, 언성이 높아졌다.
세라프는 잠깐 입술을 꼭 물었다. 그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결론을 말했다.
“사망 전 사용자의 정수는 지구인으로서의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홀 플레인에서 사망 후 부활한 사용자의 정수는, 더는 지구인이 아닌 거주민으로 인식됩니다. 즉 둘은 서로 동화할 수 없는 성질이라는 말입니다.”
“…….”
“완전히 다릅니다. 다르기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이 언급한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홀 플레인에서 사망한 사용자들…. 다시 말하여, 그들을 포함한 귀환 요청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알려드립니다.”
이어지는 결론을 들은 순간, 나는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복잡했던 머리가 망치에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스타로트에게 직접 들었을 때도 설마 설마 했던 것들이, 이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뭐라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내면에서 무언가가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와중에도, 나는 현실을 부정했다. 아니 세라프의 말을 부정했다.
아닐 것이다. 아니. 설령 맞는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상반된 감정 속에서, 나는 점차 얕아지는 희망의 끈을 더욱 부여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미리 말씀 드리지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아니. 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아니지? 내가 잘못들은 거지?”
“사용자 김수현….”
그러자 세라프는 감았던 눈을 찬찬히 뜨더니 이내 나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연록 빛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잠잠했다. 그러나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한 속내는, 그러한 시선을 “네 사정은 알 바가 아니다.”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폭발해 터질 것 같은 속을 꾹꾹 눌러 담으며,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는 찰나였다.
“사용자 김수현은 제 말을 이해했습니다.”
“너….”
“일단은 진정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현재 사용자 김수현의 정신 상태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이해는 했으되,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추측….”
“내가 잘못들은 거지?!”
세라프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해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세라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목구멍이 메말라가는 게 느껴진다. 나는 한두 번 숨을 가다듬은 후, 손에 쥔 구슬인 제로 코드를 내밀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GP를 이용하려는 게 아니야. 소원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내 말을 제로 코드를 말하는 거였어. 만능의 힘이 담긴 제로 코드.”
“…….”
“세라프? 응?”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애원 조까지 담아가며, 나는 세라프에 간청했다.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이제야 끝에 왔다. 드디어 오매불망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그러한데, 한 발짝 남겨두고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멈추고 말았다.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세라프를 응시했다.
그러나.
“…….”
“세라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라프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까처럼 고요히 나를 응시하고만 있을 뿐….
‘인정할 수 없어.’
그래. 세라프의 말대로 이해는 했을지 몰라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인 순간….
지금껏 실낱같은 줄기로 간신히 지켜온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질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침착 하려 애쓰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또 뭘 해야 내 요청이 정상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걸까? 이제 퍼스트 코드라도 찾아야 하나?”
“사용자 김수현.”
“좋아. 말해. 경청하겠어.”
“…하….”
일순, 세라프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아까 언급한 김유현, 한소영…. 이 두 사용자는 이미 사망한 상태입니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든 부활은 가능합니다. 제로 코드를 사용해도 좋고, 보유한 GP로 소원을 이용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잖아?”
“…어떻게 보면 제로 코드는 소원의 상위 호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결국, 결과는 똑같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한 번 사망한 사용자는, 다시 살렸을 경우 거주민으로 재설정됩니다. 제로 코드든 소원이든 근본적인 문제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혹시나 하고 가만히 들어보았지만 아까와 똑같은 이야기였다. 결국에는 변하지 않은 세라프의 확답은 나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기껏 내밀었던 팔이 힘없이 떨어져 내린다.
그런 내 반응을 보았는지, 세라프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사용자 김수현은 한 번도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구로의 귀환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럼…. 이대로 나 혼자 가라고…?”
“…홀 플레인에서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사용자들은 여전히 지구에 존재하고 생활합니다. 비록 그들이 사본이라고 할지언정….”
그때였다.
그 순간, 나는 여태껏 간신히 가라앉혔던 내면이 한순간 와장창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스르릉!
“사용자 김수현?”
나직이 흘러들어오는 세라프의 의아한 목소리.
문득 정신을 차리자, 눈앞으로 세라프를 겨냥한 검이 보인다. 나도 인지하지 못한 새에 반사적으로 뽑아 겨눈 모양이다. 이내 검 끝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불현듯, 애써 외면해왔던,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머리를 스쳤다.
‘결국에는 이렇게 돼버렸나…. 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지금이라도 마음껏 좋아해라. 축하한다. 사용자 김수현. 그리고 애도하마.’
‘갑자기 뭔 개소리냐?’
‘곧 알게 될 거다…. 결국, 너도 이용당했다는 것을. 그리고 천사들도 우리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야.’
‘미친놈. 죽기 직전이 되니 별 헛소리를 다하는군.’
“사용자 김수현. 어떤 생각으로 이러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행동은 굉장히 적절치 못합니다. 설령 저를 죽인다고 해도 결론은 불변입니다.”
“…세라프. 다 필요 없으니까, 하나만 대답해줘.”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흘러나온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놀랄 만큼 착 가라앉아있었다. 마치 터지기 일보 직전의 무언가처럼.
세라프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고,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럴까? 후후.’
‘너랑 농담 따먹기 할 시간은 없어. 아스타로트.’
‘글쎄? 이봐, 김수현. 궁금하지 않아? 제로 코드가 뭔지? 그리고 왜 너희가 홀 플레인으로 끌려와, 제로 코드를 놓고 우리와 싸우는지…?’
‘그게 무슨….’
“나. 제로 코드 얻었잖아. 사용자로서 홀 플레인의 끝을 이룬 거잖아.”
“Yes.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확한 사실입니다.”
곧바로 이어진 즉답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왼손을 활짝 피어 보이며, 쥐고 있던 파란 구슬을 드러내 보였다.
“그럼…. 대체 이게 뭐지?”
“예…?”
“왜 내가…. 아니. 우리가 너희를 대신해서 제로 코드를 얻어야 했던 거지? 이 물건이 너희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에?”
“!”
그 순간 세라프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빛이 스쳤다.
*
워프 게이트의 차례를 기다리던 도중.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천에 올랐던 해는 시간이 흐를수록 서쪽으로 떨어져, 도시에 붉은 황혼을 드리우고 있었다.
잠깐 동안 입맛을 다셨다가, 나는 남은 줄을 세어보았다. 그리고 머셔너리의 차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곤, 여태껏 옆에 있던 형을 돌아보았다.
“형. 이제 그만 가볼게.”
“응? 아아. 그러네. 우리는 아마 거의 끝에 가게 될 것 같다.”
“그래도 이만 가봐. 클랜 로드가 계속 자리 비우는 것도 안 좋아.”
“흠. 그건 그렇지.”
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갑자기 내 어깨를 잡더니, 이내 자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수현아.”
“응?”
“고맙다.”
“?”
뭐가 고맙다는 걸까?
내가 의아해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형은 빙긋 웃었다.
“애들한테 얘기 들었어. 전부 네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이야. 해밀 클랜은 덕분에 기적적으로 인원 손실은 없다. 다들 너에게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어.”
“…잘됐네.”
애들이라 함은 해밀 클랜원들을 말하는 거였나.
“그래. 다른 말은 몰라도, 이 말만은 꼭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
“연락 기다리고 있으마. 마음이 정리되면 먼저 연락을 줘.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연락을 기다린다는 말은 아마도 ‘그일’을 말하는 것인가. 나는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말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별로 거리낄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내 반응을 확인한 후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리고 “힘내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차분히 몸을 돌렸다.
나는 서서히 멀어져 가는 형의 뒷모습을 본다. 형은 아까부터 별로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내 옆을 지키고 있었을 뿐. 아마 형 나름대로 나를 배려하는 방식이리라.
이윽고 나는 기다란 한숨과 함께 상념에 잠겼다.
새벽에 시작된 전쟁은, 점심 즈음에 이르러 끝이 났다. 이후 시간이 흘러 지금 시간대는 오후와 밤의 경계선에 놓여 있었다.
비록 서 대륙의 예기치 못한 승부수로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만, 일단 전쟁이 끝났으면 가장 우선시되는 일은 전장 정리 및 전후 처리였다. 그에 따라 슬픔에 젖어있던 사용자들은 조금씩, 그러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먼저 남부와 북부에 연락해 현재 상황을 전달했으며, 최대한 빠른 지원을 요청했다.
두 곳은 탈환한 도시를 추스르고, 바로 지원을 오겠다고 답신했다. 아마 이르면 오늘밤, 늦으면 내일 아침에 도착할 것이다.
사실 지원 요청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바바라의 도시 상태가 말이 아니었고, 핏물이 흐르고 시체가 쌓인 들판은 말한 것도 없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로로 잡힌 서 대륙 사용자들도 처리해야 했으며, 피해 상황도 집계해야 했고, 바바라 내부에 살아있을 사용자들을 관리하는 일도 있었다.
한 마디로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동, 남, 북문 부대를 제외하고, 서문 부대는 며칠간 추스를 수 있는 대기 및 정비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왜냐하면 쏟아져 나온 서 대륙 사용자들을 맞아 가장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비록 ‘기적’으로 상태가 최악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라고 볼 수 있는 조치였다.
어찌됐든 거기에는 당연히 머셔너리 클랜도 포함되어 있었고, 현재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혼잡한 바바라에 억지로 남아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추스르는 시간은 오늘을 포함해 총 3일이 주어졌다.
3일 동안 정리를 일단락 지은 후, 아마 다시 회의가 열릴 것이다.
“다음 차례 준비하세요.”
어느덧 줄이 바로 앞에까지 왔다. 나는 한 번 뒤를 돌아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클랜원들이 대부분 침묵을 지키고 있기도 했고, 여기서 말할 기분도 아니었다. 더구나 아직 남은 줄이 긴 만큼 최대한 빨리빨리 이동해야 한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래. 일단은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내 파란빛이 일렁이는 워프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휴. 집필 완료했습니다. 하하하. 오늘도 일일 연재를 세이브해서 무척이나 기분 좋습니다.(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슬럼프 꺼져! 네가 찾아온다고 내가 글을 안 쓸 것 같니? 오기로라도 써주마.
아. 위에 말은 혼잣말입니다. 하하하.
하. 이제 클랜 하우스로 돌아갑니다. 이제 진짜로 1부 완결까지 몇 회 안 남았네요. 한두 번 죽고, 자그마한 복선 하나 풀면 끝이에요. 🙂
PS. 수험생분들 모두 수능 잘 보세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