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91
00390 Epilogue 1/4 : “기다려줄 시간은 없으니까요.” =========================================================================
“으음.”
얼굴에 부딪혀오는 아침 햇살에 난 약한 신음을 내뱉었다.
‘…아침인가?’
어느덧 날이 밝았다는 생각이 들자,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천천히 눈을 뜬다.
부스스한 눈으로 고개를 올리니 역시나 중천에 떠오른 해를 볼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비쳐오는 햇살은 제법 찬란하면서도, 강렬했다.
마음 한 켠으로 이대로 눈을 감아 다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습관이라는 건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언제나처럼 몸 내부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응?’
그렇게 회로를 따라 유영하는 마력의 흐름을 체크하던 도중, 난 고개를 갸웃했다. 복부에서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설핏 시선을 내리자 뭔가 하얀색 덩어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규우…. 규우….”
“…너.”
이윽고 살랑이는 꼬리를 보았을 때, 나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상 징후의 정체는 한창 달게 자고 있는 아기 유니콘이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헤.” 벌린 입에서 침이 졸졸 새어 나오고 있다. 나는 한동안 녀석을 응시했다.
‘얘도 이런 얼굴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생각해보면 아기 유니콘에게는 조금 미안한 게 있었다. 기껏 동료 무리를 버리고(?) 우리를 따라왔는데, 정작 난 바쁘다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소홀했었으니까. 더구나 녀석은 아직 유아기에 있는 아기 유니콘. 즉 더더욱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면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했던가?’
앞으로는 이전보다 더 관심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뀨?”
내가 일어나는 기척을 느꼈는지 아기 유니콘은 비척비척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나를 찾더니, 이내 한결 안도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내가 또 혼자 훌쩍 사라진 건가 걱정한 모양이다.
나는 그런 아기 유니콘을 살며시 보듬어 안아 들고는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일어나. 아침이다.”
“뀨웅…. 뀨우…?”
“옳지 옳지. 졸려도 아침은 먹고 자려무나.”
아기 유니콘은 그럼에도 여전히 내 품에서 고개만 비볐지만, 난 그런 녀석을 보며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덧 녀석의 귀는 쫑긋이 솟아있었고 꼬리는 살랑살랑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임한나의 말이 맞았던 모양이다.
잠시 후.
나는 아기 유니콘과 즐거운 세안 시간을 가진 후, 곧장 방을 나와 계단을 밟았다. 층을 내려갈수록 여러 명이 움직이는 기척이 잡히는 게, 아무래도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난 모양이다.
이윽고 1층에 도착하자 열심히 카운터를 보고 있는 고용인들이 황급히 인사를 해왔다. 그러면서도 슬쩍 눈치를 살피는 게, 어제 보였던 모습이 자못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이, 일어나셨어요.”
“예. 좋은 아침입니다. 클랜원들은 어디 있나요?”
“깨, 깨어나신 분들은 식당에 계세요.”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힐끔힐끔 쳐다보아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얼른 걸음을 돌려 식당으로 통하는 복도를 걸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으로 여러 클랜원들이 한 쪽 테이블을 잡고 앉아있었다.
‘영감님, 고연주, 정하연, 신재룡, 임한나, 안솔, 백한결…. 애들이 없군.’
“어머. 일어나셨군요. 클랜 로드.”
나와 마주보는 방향에 있던 임한나는 금세 아는 체를 해왔다. 그러면서도 상냥한 눈웃음을 보이는 게,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수현?”
“편안한 밤 보내셨어요?”
이내 따라 돌아보는 고연주와 정하연을 보며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임한나. 솔직히 껴안기만 했으면 나름 할 말이라도 있겠는데, 입술까지 맞춰버렸으니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아무리 자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는 클랜원들을 손짓으로 앉힌 후, 난 남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면서 슬쩍 어깨를 보자 언제 다시 잠들었는지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뀨우…. 뀨우우….”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아기 유니콘을 테이블에 놓으며, 나는 모두를 돌아보았다.
“잠들은 좀 주무셨는지요.”
“네? 아, 네. 오래간만에 푹 잘 수 있었어요. 역시 집이 최고죠. 수현은요?”
“저도 집만 한 곳이 없더군요. 아. 오늘 식사는 조신한 숙녀의 세트 메뉴 A인가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지금 바로 가져올게요.”
괜찮다고 말할 새도 없이 고연주는 수저를 놓고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이내 재빠르게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허허. 그렇게 씻으니 신수가 훤하니 정말 보기 좋습니다. 이제야 좀 클랜 로드답구려.”
식사를 거의 마쳤는지 영감님은 따뜻한 김이 피어나는 찻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 나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음식만 퍼먹고 있는 안솔을 응시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아직 충격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클랜원들은 어디 있습니까? 안현이나 이유정은 식사를 이미 마쳤나요?”
내 말에 정하연은 잠시 입을 오물거리곤, 목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으음. 잘 모르겠어요. 어제 숙소로 들어간 이후부터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때였다.
“제가 가봤어요.”
뾰족한 목소리로 대답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고연주였다. 벌써 주방에 다녀온 듯 양팔에 커다란 쟁반을 들고 있는 채였다. 이윽고 내 앞에 조심스레 쟁반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살짝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방에 콕 틀어박혀 있어요. 나오기는커녕, 불러도 대답도 안 해요.”
“그렇군요. 그럼 비비앙은?”
“비비앙은 숙소에 없던데요?”
‘숙소에 없다?’
“흐음. 숙소에 없으면 어디를 간 거지.”
나는 쟁반에 담긴 여러 음식들을 보며 아기 유니콘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녀석은 앞다리를 들어 얼굴을 비비고는 끔뻑끔뻑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일단 수프 먼저 먹일 생각에 막 숟가락을 쥐었을 때였다.
“저기…. 형님.”
여린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백한결이 전전긍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알고 있어?”
“혹시…. 그…. 연구실에 계신 게 아닐까요?”
“연구실? 걔가 지금 거긴 왜가?”
“그…. 예전에 항상 상용이 형이랑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실 적이 많아서요….”
그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용조용 식사를 하고 있던 클랜원들이, 일제히 백한결을 응시했다. 그리고 녀석은 흠칫한 얼굴로 입을 막았고.
“?”
그러더니 다들 하나같이 한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시선을 따라가 보았고, 이내 숟가락 질을 멈춘 안솔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어깨는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들 갑자기 왜….”
의아한 기분에 내가 입을 열은 순간이었다.
“…으윽.”
짧디 짧은 신음과 함께 갑작스레 안솔의 고개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드러난 얼굴을 본 순간, 난 그녀가 왜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벌써 한바탕 울었는지 안솔의 눈은 미약하게 붉어져 있었고, 젖살 어린 볼에는 눈부터 타고 흐른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안솔? 너 왜 그래?”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난 그래도 안솔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는 순간 입술을 꼭 깨물었다.
“끅…. 흐끅….”
그러한 모습은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아 보여도, 눈망울이나 어깨서 보이는 떨림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부뎨에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음식을 가득 퍼 넣던 중이었는지 울음소리 한 번 요상했다.
“어휴….”
“죄, 죄송….”
동시에 여기저기서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몇 명은 이리저리 내 눈치를 살피는 게, 아무래도 내 반응이 꽤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솔아. 뚝. 울면 안 돼. 오라버니 계시잖아. 응?”
이윽고 정하연이 달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곤 아예 신경을 끊어버렸다.
“흐어엉…. 흐어어엉….”
“아, 안되겠다. 수현! 잠시만….”
뭔가 허락을 구하는듯한 말에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정하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로 나와 안솔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그녀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울음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리고 다시 찾아 든 침묵에, 고연주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직 충격이 큰가 봐요. 하기야 뮬에서 캐러밴부터 함께 활동했으니….”
“그런가 봅니다.”
“그래도 애들도 참…. 눈치 없게….”
“눈치라…. 안현이랑 이유정도 저랬습니까?”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자 고연주는 살짝 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내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그냥…. 지금 다 데려올까요?”
난 대답 대신 수프를 한 숟갈 퍼 아기 유니콘에게 내밀었다. 녀석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고개만 빙빙 돌리다가, 이내 내가 내민 수프를 날름 받아먹었다.
이윽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기 시작한 아기 유니콘을 보며,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냥 놔두세요.”
“네?”
“그냥 놔두시라고요. 지금 이러는 게 본인들 문제이지, 다른 클랜원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 억지로 끌어내지 말고, 스스로 나올 때까지 내버려두세요. 지금 할 일 많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어색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다들 어색해하는 것쯤은 느낌상 알 수 있었다.
“수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사용자 고연주.”
“네, 네?”
내 말투가 심상찮음 을 느꼈는지, 고연주조차도 약간 당황한 음색이었다. 그러나 난 일부러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미 오늘 새벽 이후로 마음을 정리한 나였기에 굳이 애들을 데려와 어르고 달랠 생각은 없었다. 애초 그럴 생각이 없기도 했고.
“잠시만…. 이것도 먹어보렴.”
“뀨.”
나는 약간 뜸을 들일 요량으로, 따뜻한 빵을 찢어 아기 유니콘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녀석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오히려 그것을 내게로 밀었다. 그 모습이 꼭 나도 먹으라고, 같이 먹자고 말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아주 약한 미소를 짓고는 빵을 씹었다. 그리고 그것을 삼키고 나서야 다시 고연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상용씨의 시신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제가 잘 처리했어요. 그가 원래 사용하던 방에 보관하고 있는데….”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식사를 마치고, 그거 정원으로 가지고 나오세요.”
“…알겠어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고연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난 다시 아기 유니콘과의 식사에 집중했고, 클랜원들도 한 명 한 명 어색한 얼굴을 풀고 남은 식사를 시작했다.
*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난 바로 식당을 홀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고용인을 시켜 삽 하나를 챙긴 후, 곧장 정원으로 나섰다.
따뜻한 햇살이 감도는 정원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아 적당한 자리를 물색한 후, 이내 선정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랬다. 나는 신상용을 화장하는 게 아니라 머셔너리 하우스 안에 매장할 생각이었다.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바로 작업에 들어가기 전, 나는 그동안 정말 피고 싶었던 연초 한 대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지는 않았다. 점화석으로 불을 붙여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이내 연초를 입에 물은 채 삽을 들어 신상용을 매장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팍, 팍, 팍, 팍!
굳이 마력을 일으킬 것도 없이 근력의 힘만으로도 땅은 부드럽게 파졌다. 삽질을 불과 서른 번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평평했던 정원의 대지는 어느덧 조금씩 구덩이로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열 번 정도 더 파고 잠깐 땅을 고르려는 순간, 정문 입구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해서 삽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양손에 길고 넓은 관을 든 채 다가오는 고연주가 보였다.
나는 잠시 물고 있던 연초를 뺐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관을 내려놓는 고연주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 잘하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네. 저…. 수현.”
“?”
“다른 클랜원들은 잠시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할 말이 있어서요.”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나는 대충 대꾸하곤 고연주가 들고 온 관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일반적인 관이 아닌 반투명한 푸른 수정으로 되어있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상용이 보인다. 그의 시신은 상처 하나 없이 완전히 복구되어있었다.
잠시 동안 신상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문득 옆에 있던 고연주가 말을 걸었다.
“아까 속 많이 상하셨죠. 애들이 수현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예? 아. 아닙니다. 별로 안 상했어요.”
“…아까 놔두라고 하신 말. 진심이세요?”
나는 삽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연초를 입에 물고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물론, 대답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끄덕끄덕.
“그렇군요. 하지만…. 물론 수현 뜻이야 알겠지만….”
“…….”
“아직 0년 차 애들이에요. 전쟁도 처음이고, 지인의 죽음도 이번이 처음이라….”
어느덧 연초는 필터 끝까지 타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연초를 크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연기를 내뿜는 것과 함께 퉤 뱉었고, 한층 힘차게 삽질을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하니까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변하는 건 없습니다.”
“수현과 애들은 달라요. 저는 수현이 애들과 한 번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말에 고연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 난 결국 삽질을 멈췄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저기 멀리서 이쪽을 쳐다보는 클랜원들이 몇 명 보였다. 그들과 잠깐 시선을 마주쳤다가, 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사용자 고연주. 전쟁은 끝났습니다.”
“네.”
“다시 말하겠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말이죠…. 이제부터 무척, 정말로 바빠질 것 같습니다. 그것도 눈코 뜰 새 없이요. 그럼 왜 바빠지는지 아십니까?”
“그건….”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했는지, 고연주는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나는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가,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전쟁의 발발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왜 발발했는지, 또는 차후 어떠한 영향을 미치든지….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제부터 작게는 북 대륙, 그리고 크게는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이 조만간 크게 변하기 시작할거라는 것입니다.”
고연주는 아직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악마와 관련된 미래를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지 않은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까.
설명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한두 번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그런 변화에 발맞추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용자 고연주. 혹시 예전에 제가 뮬에서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
“저는 이곳에서 하나의 확실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전 말입니다. 홀 플레인에서 잘 먹고 잘살려고 이 머셔너리라는 클랜을 만든 게 아닙니다.”
고연주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아무런 대답도 않는 게, 일단 내 말을 듣고 판단할 생각인 모양이다.
나는 잠깐 동안 삽을 매만졌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네.”
“그동안 한두 번 생각한 게 아닙니다. 언제고 이 홀 플레인이라는 빌어먹을 세상의 끝을 봐서 지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래 누려야 했던 삶을 누리고 싶어요…. 다만, 그렇다고 혼자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려면 애초에 제로 코드를 얻었을 때 홀로 지구로 귀환했을 테니까.
“그럼….”
“형과, 클랜원들과, 또는 제가 아는 사람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게 지금 그리고 현재 이 홀 플레인에 존재하는 사용자, 김수현의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나는 말을 일단락지음과 함께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파여진 곳의 거친 부분을 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용자 신상용씨의 죽음은 분명히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저 또한 지금 애들이 느끼는 기분을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
“슬퍼해도 됩니다. 울어도 되고요. 다만, 그것에 발목을 잡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윽고 대충 고른 나는, 관의 크기에 맞추어 다시금 구덩이를 넓히기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이제는 애들이, 이 세상에 어떤지 확실히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느끼게들 되겠죠. 따라올지 아니면 도태될지. 결국 선택은 온전히 애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수현은 버리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극복하길 원하셨던 거군요.”
들려온 고연주의 목소리는, 전보다는 한층 밝아져 있었다.
나는 삽을 한 쪽에 치우곤 잠깐 허리를 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예.”
중천에 떠오른 해는 여전히 짱짱한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난 지그시 눈을 감아 햇살을 느끼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기다려줄 시간은 없으니까요.”
============================ 작품 후기 ============================
“호호.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네요.”
“걱정은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제 시트도 감사했습니다.”
“뭘요. 아. 그런데 시트 하니까 궁금한 게 생겼어요.”
“?”
“어제 목욕탕에 다녀오셨죠? 오늘 아침에 한나와 시선 교환이 미묘하던데.”
“예, 예? 아. 오, 오늘 날씨가 좋네요.”
“수현?”
“아차. 오늘 내일 바바라로 다시 떠날 생각이니, 미리 준비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흐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