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92
00391 Epilogue 2/4 : 다시 만난 붉은 송곳니 =========================================================================
워프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낯익은 도시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바라에 도착했네요.”
곧바로 따라 나온 고연주의 말에, 나는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후였다. 그것도 늦은 오후.
점심 후 잠깐 오침을 하고 나서 출발해서 그런지, 어느 틈에 해는 서편으로 넘어가고 어둑한 땅거미가 차츰차츰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현. 그냥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요? 어차피 회의도 또 지연됐는데, 내일 오전에 다시 오면 되잖아요.”
“으음.”
일리 있는 말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전투가 끝나고 어느덧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타격을 심하게 받은 서문 부대는 전장 정리에서 빠지게 됐고, 정비를 명목으로 사흘간의 휴식 시간을 받았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바바라에 모여 회의를 하기로 했고.
오늘이 바로 나흘째였다.
그러나 원래 오늘 아침 열렸어야 하는 회의는, 전장 정리 사정으로 오후로 밀리고 말았다. 그래서 시간에 맞춰 다시 출발을 했는데, 막 워프 게이트에 다다랐을 즈음 또 다시 내일 오전으로 회의가 밀렸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전장 정리라는 구변은 좋은 핑계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아직 준비가 덜됐다는 소리였다.
어찌됐든 그에 따라 적어도 오늘까지 쉴 순 있었지만, 나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바바라로 오는 것을 선택했다.
클랜 인원수가 적어 정비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고, 휴식도 충분히 취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궁금했다. 거듭 말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다가 아니다. 전후 처리 과정이 궁금했고, 황금 사자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고, 이번 전쟁에서 사망한 명성 높은 사용자가 있는지 궁금했고, 전투의 피해 정도도 궁금했다.
뭐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아무튼 내일 회의에서 대부분 알게 될 사실들이지만, 그래도 한 발 앞서 아는 게 나쁘지는 않은 일이잖은가.
“수현?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는 워프 게이트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고 결국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이대로 뜻 없이 시간을 죽이느니, 이왕 나온 거 대충이라도 살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연주는 돌아가도 좋습니다.”
“…….”
“저는 오늘 바바라에서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회의를 마치고 다시 돌아가도록 하죠.”
“…후유. 못 말려 정말.”
과연 저 한숨의 의미는 무엇일까?
해답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워프 게이트를 나서자, 내 뒤를 종종 쫓아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돌아가도 상관없는데….’
사실상 다른 클랜원들의 동행도 전부 거절한 나였기에, 나 홀로 바바라에 있어도 상관없었다. 지금 와서 전장 정리에 끼어들기도 그렇고, 회의에 참가하는 것도 나만 있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연주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수현~. 같이 가요~.”
이내 조심스레 팔짱을 끼어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약간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거리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이 좋게 거리를 거닐었고, 나는 걸으면서 찬찬히 주변 거리를 살폈다.
중간중간 듣기로는 원래 서부 도시에 거주하던 사용자들도 바바라로 끌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곧 밤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거리는 소란스럽고 사람이 넘쳤다.
그렇게 하염없이 거리를 걷던 도중, 문득 고연주가 말을 걸었다.
“수현. 일단 통제실에 가보는 건 어때요? 거기라면 어느 정도 통계가 나왔을 텐데.”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일단 도시를 돌아보다가…. 밤이 오기 전에 한 번 가볼 생각입니다.”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자 고연주는 슬그머니 팔짱을 풀어버렸다.
“그래요. 그럼 다녀오시고, 나중에 중앙 광장에서 뵈어요.”
“예? 고연주는요?”
“오늘 바바라에서 지내신다고 하셨잖아요. 밖에서 잘 수는 없으니 오늘 하루 지낼 방이라도 알아봐야죠.”
나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말인데 고연주는 꽤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왕 도시에 도착한 거,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오전에 혼잡할 워프 게이트를 생각하느니, 정말로 이곳에서 하루 지내고 바로 참가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그래요. 저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겠습니다. 나중에 중앙 광장에서 만나도록 하죠.”
“네. 그런데요. 방이 없으면 어떡해요?”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마세요. 그냥 해본 말이었으니까. 방이 없으면 모니카로 돌아가면 되죠.”
“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저를 뭐로 보는 거예요? 제 명함 정도면 여관 방 하나쯤이야 우습다고요. 아무튼 빠르게 다녀올게요.”
고연주는 앙큼하게 대답하고는 금세 자리를 떠났다.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일단 한 번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나서, 고연주의 말을 따라 통제실로 가는 게 낫겠지.
‘그렇다면 광장을 거쳐야겠군.’
아마 황금 사자의 클랜 하우스가 통제실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여, 나는 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홀로 남고서야 비로소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때 북 대륙의 대 도시로서 엄청난 번영을 누렸던 바바라는, 이제는 그 모습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무혈입성으로 점령당했다는 걸 가정했을 때, 생각보다는 상태가 괜찮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보다’였지만, 완전히 무너진 서쪽 성벽을 제외하고는 나름 도시의 구색을 갖추고는 있었다.
‘하기야 자기들도 지낼 공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이윽고 보이는 광경에, 나는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광장에 들어섰다.
넓은 빈터에는, 조용한 분위기와 함께 서른 남짓한 사용자들이 이곳 저곳에 앉아있었다.
“…….”
“…….”
거진 스무 명이 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다들 힘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사실상 비단 광장만 이런 게 아니었다. 지금껏 거쳐왔던 모든 곳이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물론 간간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제들이 있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앞 사용자들처럼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렇게 봐서는…. 누가 패배했는지 분간하지를 못하겠군.’
나는 잠깐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1회 차 시절을 생각하곤 고개를 주억였다. 그때는 정말로 패배나 다름없는 전투였고 상황도 지금보다 배는 심각했다. 당시 난 0년 차라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도 지금보다 훨씬 심각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그때보다는 훨씬 낫다. 언제나와 같이 시간이 약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더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기도 했으니….
해서, 나는 그대로 광장을 지나칠 생각에 바삐 걸음을 놀렸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조용한 광장을 울리는 발소리가 거슬린 모양이다.
부서진 분수대 주변으로 앉아있던 사용자들 중, 몇 명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 또한 그들을 흘끗 보았다가 그대로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어.”
“어.”
한 사내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것은, 그 사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죽어있던 눈동자에 한순간 이채가 스쳤다. 생기 없는 낯빛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러면서도 알게 모르게 낯익은 얼굴에 나는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얼굴은 갸름했지만 생김새는 분명 남성이었다. 길게 기른 머리는 허리까지 닿아있고, 몸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생각.
“우….”
“김수현?”
순간적으로 이름을 내뱉을뻔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아. 상관없나?’
하지만 이내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됐든 같은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왔으니까.
그랬다. 눈앞의 사내는 나와 통과의례에서 한 번 마주쳤으며, 1회 차 ‘붉은 송곳니’ 클랜의 클랜 로드였던 우정민이었다.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사용자 우정민.”
이름을 부르자 사내는 확실히 반응했다. 나는 광장을 지나치려던 발걸음을 돌려 우정민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내가 다가오는걸 보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는지, 우정민 또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우리는 의례적으로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오랜만이다. 사용자 김수현.”
“오랜만이군요.”
간만에 듣는 우정민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쉬어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내 전신을 훑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좋아 보이는군.”
“서문 부대에 참가했었습니다. 모니카에서 정비 후 지금 들어온 길입니다.”
“서문 부대?”
우정민은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가, “아.”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지. 머셔너리 클랜…. 소문은 들었어. 서문 부대라면 힘들었겠군.”
“이제 좀 괜찮아졌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
순간 우정민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얼굴에 한 줄기 수심이 어렸다.
그것을 보자, 우정민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얼굴도 그렇고, 아직 마주 잡고 있는 손에서 미미한 떨림이 일어나는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쪽도 이번 전쟁에 참여한 겁니까?”
우정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0년 차는 강제 참가가 아니었을 텐데. 자원하셨나 보군요.”
그러자 우정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비로소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글쎄. 참가했다고 해야 하나…. 뭐, 하긴 했지. 나는 헤일로에 거주하고 있었거든.”
그 순간 나는 약간이나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정민은 동부에 참가한 게 아니라, 서부에 있다가 습격을 받은 것이다.
마주잡은 손이 떨어졌다. 시야를 가리는지, 우정민은 앞머리를 걷어내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눈이 멀은 거지. 젠장. 빨리 도망쳤어야 하는 건데.”
“도망? 아. 설마….”
“흐흐.”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우정민은 멍하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는 이틀 전 바바라에 들어왔다. 헤일로가 함락 당한 이후, 그 동안 쭉 포로로 잡혀있었어. 그놈들한테.”
우정민의 말은 조용한 광장을 왕왕 울렸다. 중간중간 몸을 웅크리는 사람이 몇몇 보이는 게, 아마도 몇 명은 비슷한 처지인 듯 보였다.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힘들어? 힘든 정도가 아니었어. 지옥 그 자체였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놈들은 악마야, 악마.”
“…….”
“가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 살아 생전 그런 대접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해왔던 동료들도 하나 둘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지. 어떻게 됐는지 알아? 결국 혜수는 미쳤고, 승현이는 자살했다.”
우정민은 이제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공허한 눈빛으로 말을 하는 모양새는 흡사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문득, 나는 같이 있던 한 명에 대해 의문이 일었다. 추후 10강 중 1인이 되는 사용자. 이름이….
“둘 말고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명 더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루하루가 정말로 지옥이었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누구?”
“…선유운씨?”
“아. 유운이….”
우정민은 여전히 혼잣말을 하듯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나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걸 보면,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이후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혹시 죽은 건가 까지 생각이 미쳤을 즈음,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서서히 떼어졌다. 그러더니, 우정민은 한순간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김수현.”
“?”
“잠깐 시간 좀 있어?”
나는 잠깐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우정민이 안내한 곳은 하얀색으로 된 널찍한 건물이었다. 문 앞에서 사제들이 돌아다니고, 이곳 저곳에서 신음이 나오는걸 보니 구호소의 일종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내부는 제법 넓었는데, 급조한 티가 물씬 풍기는 자리들이 부지기수로 보였다. 바닥에는 간이 침대나 천 등이 곳곳에 배치돼있었고, 그 위로 여러 사용자들이 누워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 중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눈에 띌 정도의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정신 없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로 앞에는 몸에 하얀 천을 걸친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여인과, 그녀를 돌보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은 전쟁에 참가한 사용자라는걸 알려주고 있었다.
여인을 앞 에두고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는, 이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제에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분도 임신한 것 같은데요.”
“쯧. 저쪽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이어서 축 늘어진 여인을 부축한 채 한 쪽으로 걸어가는 사내를 보며, 나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이쪽이야.”
이윽고 난 우정민이 잡아 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혹여 밟지 않도록 약 서른 명 정도를 거치며 조심조심 걸었을까. 이내 그가 걸음을 멈춘 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고른 숨을 내쉰 채 잠들어 있었다. 선유운이었다.
“몸은 괜찮은 겁니까?”
“유운이는 그나마 괜찮아. 워낙 정신력이 강한 놈이다 보니…. 그런 일을 당해도 어찌어찌 버티더군.”
“그런 일이라니요?”
물음에 우정민은 일순 고민하는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내 자조어린 웃음을 짓고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랑자 놈들은 그렇다 쳐도…. 서 대륙 놈들 중 남색을 즐기는 놈들이 꽤 있더군.”
“그런….”
“아무튼 살아서 다행이지. 바드득!”
“…….”
“가자고. 조금 전 겨우 잠들었으니.”
확연히 들릴 정도로 이를 간 우정민은, 곧 다시 내 손을 이끌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역시나 온몸에 천 하나를 걸친 여인이 있었다. 역시나 얼굴이 낯설지 않은 것은 아마 그녀가 원혜수일 것이리라.
“헤헤. 헤헤헤.”
여인은 깨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자세히 응시했다.
눈동자는 한없이 풀려있고 입은 헤 벌어져 침이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거기다 이따금 터져 나오는 실없는 웃음소리는,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통과의례였었나?’
– 시끄러! 혜연이는! 거,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죽었을 리 없어! 거짓말이지? 그렇지? 응?
– 그래. 나 미쳤어. 차라리 미치고라도 싶어. 그러니까 이거 놔. 노라고 그만!
“히히. 히히히.”
‘미치고 싶다더니…. 진짜 미쳤네.’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즈음, 우정민은 침착히 허리를 숙여 원혜수의 입을 닦아주었다. 다시 바로 몸을 일으키고서, 그는 음울히 입을 열었다.
“임신했다더군.”
“…….”
“본인에게 물어볼 수 없으니, 나보고 낙태할지 놔둘 건지 결정해달래. 큭. 여기서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난감하겠군요.”
나는 명료히 대답하면서도 제 3의 눈으로 둘의 상태를 살폈다.
‘선유운은 확실히 정신력이 강해. 그런데 원혜수 이 사람은….’
그나마 선유운의 경우에는 회생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원혜수는 말 그대로 미쳐있는 상태였다. 성향만 봐도 답이 나온다. 지금 당장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나아질 수 있을까?”
“…….”
“나아지겠지?”
“글쎄요….”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괜한 희망을 주는 것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이것은 육체의 상처가 아닌 정신의 상처였다. 더구나 이지를 상실했을 정도로 거대한 상처인 만큼, 치료에 대한 방법은 요원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문득 우정민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솔직히 그들이 초반에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나중에 ‘붉은 송곳니’ 클랜으로 유명세를 떨치는걸 보면, 지금이 또 하나의 통과의례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히이. 히이히. 흐후으. 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원혜수를 내려다보던 우정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넌 여기 어쩐 일이지? 클랜 하나 만들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내일 회의가 있어서요.”
“회의?”
“예.”
“거기에 네가 참가한다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만들었다는 소문까지만 들었나 보군.’
잠시 후, 옆에서 가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흐으. 같은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왔는데. 내 신세가 비참하군.”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모르겠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마침내 원혜수에서 시선을 떼어 우정민을 쳐다보았다. 그녀를 아련히 응시하는 그의 눈길은, 1회차의 날카로움은 온데간데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모니카에 제 클랜 하우스가 있습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우정민의 웃음이 뚝 멈췄다. 그 상태로 잠시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동정하는 건가?”
“그거야 당신 선택에 달렸습니다. 사용자 우정민.”
“?”
“동정을 받을지, 다시 마음을 먹을지, 아니면 무시할지. 선택은 오롯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우정민은 일순 말문이 막힌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곧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는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에게 달렸다 라….”
이건 나로서도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일종의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성공하면 대박인 도박. 우정민과 선유운이라면 확실히 쓸만한 카드들일 테니.
“나에게 달렸다….”
이후 우정민은 한동안 혼잣말을 되뇌다가, 한순간 번쩍 눈을 떴다. 그러더니 낮은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러니까 만약에 가게 되면….”
“예.”
“…혜수를 데려가도 되나?”
“환영합니다.”
나는 바로 즉답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능성은 생겼다는 생각에 속으로 웃었다.
‘그럼 이제 슬슬 떠나야겠군.’
너무 오래있는 것도 부담일 테니, 나는 이만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 계속 있어봤자 자존심 강한 우정민이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며, 스스로 생각할 시간도 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쯤 고연주가 광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해서,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곤 눈짓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가려고?”
“예. 이제 슬슬 가봐야 해서요. 아무튼 힘내십시오.”
“가려고?”라고 말했으면서, 우정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나는 바로 몸을 돌렸고, 건물 입구 쪽을 응시했다. 그렇게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찌릿!
‘응?’
그것은, 제법 강렬한 시선이었다.
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
기척을 잡아 고개를 돌리자, 입구 방향으로 세 명 건너서, 천 위에 앉아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눈망울. 청순하면서 선한 인상. 연한 연갈 빛이 감도는 하늘하늘한 머리카락…. 아니, 이제 더는 하늘하늘하지 않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깨를 넘던 머리카락은 목 부근 단발로 잘려있다.
‘여기에 있다는 것은….’
여인의 눈은 썩은 동태처럼 한껏 죽어있었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한 순간, 텅 빈 눈동자가 이내 서서히 연갈 빛을 되찾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허공에 떠오르는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여,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전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여인에게 들릴 수 있도록.
“사용자 우정민. 한 가지 알려드릴게 있습니다.”
“아직 안 갔…. 응?”
“지금쯤 제 클랜원 한 명이 바바라에서 잠자리를 잡았을 겁니다. 오늘밤은 그곳에서 지낼 생각이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주변 여관에서 저를 찾으십시오. 성심 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이윽고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눈망울을 확인한 후,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설령…. 한밤중일지라도요.”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새벽에 초고는 완성했었는데, 퇴고를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일단 울트라 북을 갖고와서 공강 시간에 급히 퇴고하고 올립니다. 2시 강의라서 바로 들어가야할것 같습니다.
독자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