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93
00392 Epilogue 3/4 : ‘부디 편히 잠들길.’ =========================================================================
고즈넉한 바바라의 밤.
어느덧 간간히 맴돌던 붉은 석양빛이 사라지고, 잿빛 땅거미들이 황혼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석음(夕陰)은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 깊숙이 파고들어 어스레한 빛을 뿌렸다. 그리고 도처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윽하게 변하였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창문을 응시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밝게 빛나는 달이 떠 있다. 마치 은으로 만든 쟁반처럼, 둥그런 달은 어두운 방안을 밝혀주는 은백색 월광을 비추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느껴졌던 소란은 달이 뜬 것을 기점으로 점차 사그라졌다. 그에 따라 벌집 같던 여관도 밤을 맞이하여, 어수선함이 사라지고 어둠과 적막으로 빠져들었다.
“흐흥…. 흐흐흥…. 흐흥…. 흐흐흥….”
고요한 정적 속에서 흘러 드는 미약한 콧노래. 창에 두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내리자, 살며시 눈 감은 채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 고연주가 보인다. 무에 그리 기분이 좋은지, 그녀는 나를 꼭 품에 안은 채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윽고 내 머리를 보듬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나는 온순히 눈을 감았다.
우정민과 헤어진 후, 나는 광장에서 고연주를 만나 바로 통제실로 직행했다. 그리고 일을 마친 후 그녀가 마련한 여관으로 향했는데, 고연주 왈 공교롭게도 방이 딱 하나 비어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고연주 개인의 사심이 듬뿍 묻은 의도가 엿보였지만…. 사실상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그녀와 같은 침대를 쓰는 게 별로 어색하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풀어헤쳐 진 옷깃 사이를 파고들어, 달빛이 머무는 젖 무덤에 고개를 묻었다. 그 순간 내내 머리를 보듬던 손길이 멈췄다. 그러더니 가느다란 숨결이 정수리를 간질이고, 내 머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는 고연주.
“후후…. 귀여워라….”
비록 얼굴을 거세게 압박해 들어오는 젖가슴에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좋았다. 안면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하면서 따뜻한 감촉은…. 지금 이순간만큼은 모든걸 잊게 해줄 정도로 아늑하고, 포근했다.
이내 머릿속을 차츰차츰 점령하는 안온한 기분에, 나는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졸음이 밀려오는걸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지 않았다고 해야 정답일까.
그렇게 깜빡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정적을 깨뜨리는 발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재빠르게 마력 감지를 활성화하자 한 인영이 마침 나와 고연주의 방문 앞에서 멈춘 기척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똑똑.
“실례합니다. 혹시 이 방에 사용자 김수현씨 계십니까?”
뜻밖에도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걸걸한 남성의 음색이었다.
“어머?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글쎄요.”
“흥…. 당최 무슨 일이람.”
한창 좋을 때 방해 받아서 불만인지, 고연주는 가시 돋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바삐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걸 보며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나가기 직전, 나는 벽에 기대어두었던 ‘무검’을 쥐었다.
그때였다.
“수현? 검은 왜….”
“…자고 있어요. 곧 돌아올 테니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완곡히 말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방문을 열자, 한 사내가 졸음 가득한 눈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오늘 본적 있는 사내였다. 입구에서 임시 관리 겸 보초를 서고 있던 사용자로 기억한다.
“제가 김수현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밤중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밖에 한 분이 찾아오셔서요.”
“?”
“원혜수라고 전해달라던데….”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난 입술을 꼭 물어야만 했다.
‘내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네. 그럼.”
사내는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시선을 방안으로 돌렸다. 그리고 부러움이 듬뿍 담긴 눈빛을 빛내었고, 이내 한숨과 함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나가기 전, 나는 잠깐 몸을 돌렸다. 침대에는 살짝 흐트러진 옷을 입은 고연주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조용히 방문을 닫았을 뿐.
이윽고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자,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여관의 문을 열고 나섰다.
이윽고 눈앞에 어두운 거리가 드러난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두운 거리를 비추는 달빛 아래, 한 여인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용자였다.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
1회 차 시절 매우 유명했던 사용자 중 한 명이며, 2회 차에서는 뮬에서 나와 악연을 맺은 여인.
나는 잠시 동안 유현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낯빛은 많이 상해있었지만, 예의 청순하고 포근한 미모는 어디 가지 않았다.
다만 예전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웨이브 진 연갈 빛 머리카락이 단발로 깎여있다는 것. 물론 그 모습도 꽤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절단면을 보면 억지로 잘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약간의 거리를 남겨두고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진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
“역시, 당신이었군요.”
예전 상냥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 찾을 수 없다. 그동안 모진 고초를 겪어서 그런지, 유현아의 음색은 잔뜩 쉰 상태였다.
나는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할 말이 있다고 들었다. 사용자 유현아.”
말을 하면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고, 동시에 유현아는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언뜻 걸음을 멈추자 그녀가 손을 꾹 말아 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적이 흐르고, 유현아는 주춤하던 걸음을 멈췄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지금 하면 되지 않나?”
“자리를 옮기고 싶어요.”
그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록 여관 앞이기는 했지만, 거리에 보이는 사용자는 적었다.
“그러지.”
이내 그 의도를 알 것 같아,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 한 걸음 내디뎠을 때, 그녀의 눈에 두려워하는 빛이 스쳤다. 아마 ‘조신한 숙녀’에서 있었던 일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다.
이윽고 유현아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등을 보며 발걸음을 맞췄다. 어느새 내 손은 ‘무검’의 손잡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사실상 이곳은 엄연한 도시 내부였고,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사용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현아가 명백한 적이 아닌 이상 나에게 명분은 없다. 지금 이곳에서 그녀를 죽이는 건 솔직히 많은 무리수가 뒤따르는 일이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애써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때처럼 명분이 나오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추후 기회를 보아 몰래 암살하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비록 명분이 없다 뿐이지, 나와 유현아의 관계는 이미 앙숙을 넘어선 적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덧 유현아가 걸음을 멈춤에 따라 나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이동한 곳은 워프 게이트 부근이었다.
시간대가 시간대인만큼 이곳도 많은 사용자가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용자들이 주기적으로 오고 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나름 머리는 굴렸다고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유현아가 몸을 돌렸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력 감지를 일으켰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
“…….”
하지만 이후 5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게 지루함을 넘어서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질 즈음, 비로소 유현아는 입을 열었다.
“그날 이후로….”
“…….”
“저는요. 그날의 일을 단 하루도 잊어 본적이 없어요.”
들려온 목소리는, 잔뜩 쉬긴 했지만 차분했다.
“당신…. 알고 있나요? 그 후로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에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유현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비디오였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도….
아니. 실제로 형과 한소영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벨페고르를 만났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알고 있냐고요. 네?”
그러나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 재차 묻는 음성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모르지만…. 지금 모습을 보아하니 대충은 알 것도 같은데….”
“…….”
“여전히 뮬에 있었나? 그럼 부랑자들에게 제법 험한 꼴을 당했겠군.”
“…그래요. 맞아요. 험한 일을 당했어요. 여자로서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들이요.”
유현아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더니 살며시 고개를 들어 내 시선과 마주했다. 비로소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젖어있었다.
“그렇군.”
“…그게 다예요?”
“그럼? 애도라도 해줘야 하나? 너와 나 사이에?”
“당신…. 때문이잖아요!”
유현아는 잠깐 말을 끊더니 이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거예요? 당신 탓이에요. 제가 그런 일은 당한 건 당신 탓이라고요.”
“그게 왜 내 탓이지?”
“…뭐라고요?”
“부랑자들이 습격한 게 내 탓인가?”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부랑자들이 습격했고, 너는 험한 일을 당했어. 그런데 그게 왜 내 탓이야?”
“그, 그건….”
내 말에, 유현아는 일순 말문이 막힌 얼굴이 되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정곡을 찔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여전하네. 그 떠넘기는 성격은.”
그러자 유현아가 입술을 꼭 깨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무척이나 분하다는 감정이 절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저 분하다는 반응만 보일 뿐이지, 발악적인 행동을 찾을 수 없다.
유현아가 나를 찾아왔을 때 혹시나 상황을 기대한 나로서는, 김빠지는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크게 심호흡한 유현아는 조금은 가다듬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좋아요. 그럼 그때 왜 그러셨어요?”
“왜 그랬느냐니? 당시 상황을 말하는 거라면…. 결과는 통보 받았을 텐데?”
통보란 황금 사자에서 실시한 조사를 뜻하는 말이었다. 당시 나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무죄로 판결 받았고, 그러한 결과는 유현아에게도 전송이 갔으리라.
“저는 그 종잇조각을 묻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할 대답은 그것뿐이다.”
“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곧바로 받아 치자, 유현아는 허탈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게 도의적인 면이란 눈곱만치도 없는 건가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그렇게, 똑같이 말할 거라 생각하세요?”
“지금 협박하는 건가?”
“협박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생각을, 진심을 묻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들리지는 않는데. 아무튼 해봐. 하고 싶으면.”
“당신 정말!”
그렇게, 유현아의 목소리가 높아진 순간이었다.
“별로 지금과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은데….”
툭 내뱉은 한 마디에, 유현아는 입을 연 그대로 말을 멈췄다. 그러면서 기껏 가다듬은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숨이 턱 막힌 모양이다.
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었다.
홀 플레인은 ‘사용자 정보’가 우선되는 세상이다. 즉 기본적으로 ‘힘’이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말. 그러한 점에서 보면, 현재 나와 유현아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지금의 유현아는 나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나를 찾아왔을 때 혹시나 하는 기대는 있었지만, 머리가 아주 미쳐 돌아버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뭔 말을 하나 했더니…. 아무튼 고작 신세 한탄을 하려고 온 거면 사양하겠어.”
“고작…?”
유현아는 혼잣말로 내 말을 되뇌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때였다.
“알고 있어요. 지금 와서 이런다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거.”
조용히 서 있던 유현아에게서, 바로 말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내가 미처 말하기도전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
“꼭 죽였어야 했나요?”
드디어 나온 질문.
그와 동시에, 나는 눈을 살짝 치켜 떴다. 다시 머리를 든 유현아는 비록 비척거리기는 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현아는 다시 한 번 내게 물었다.
“승현이 오빠. 다희. 알고 보면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둘을 꼭 죽였어야 했나요?”
“글쎄.”
그리고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사실상 “글쎄.”가 바로 내 진심이었다.
아마 처음 2회 차를 시작했을 때의 나라면, 두말 않고 “응.”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때는 괜히 쫓기는 기분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있었으니까. 더구나 1회 차를 떨쳐 울렸던 ‘성스러운 여왕’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클랜원들이 생기고, 한소영을 만나고, 형을 만나고, 클랜원을 잃으면서.
그러면서 내 생각도 차츰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최근에 들어와서 인지한 변화였다.
물론 아직도 부랑자나 악마 등 명백한 ‘적’에 대한 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용자들. 그러니까…. 고연주가 좋은 예였다. 원래 그녀는 내 적이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요 조력자였다.
문득 선율과 점을 쳤을 때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그래 왕이니까. 네 명의 여왕은 그렇다 쳐도….’
‘아. 세 명인가? 한 명은 스스로 밀어냈네. 어머 불쌍해라….’
그때 보았던 카드는 성스러운 빛이 그려진 배경에, 한 명의 여인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담담한 기분으로 유현아의 사용자 정보를 떠올렸다.
1. 이름(Name) : 유현아(3년 차)
2. 진명 • 국적 : 가시밭길을 걷다(Tread a Thorny Path) • 대한민국
3. 성향 : 상처 • 순수(Scar • Pure)
‘아직도 순수라.’
나는 새삼스런 마음으로 유현아를 응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꾸준히 나와의 거리를 줄여오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당신이라는 사람과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한 걸음.
“저는요. 신세한탄을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아니. 안 할게요. 안 할 테니까 대답해주세요.”
두 걸음.
“그때 왜 그래야 했는지.”
세 걸음.
“정말 그랬어야만 했는지.”
네 걸음.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어느덧, 유현아는 내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그리고 잠시 후.
떨리던 입술이 힘겹게 떼어졌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어요.”
마침내 말이 이어진 순간,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유현아는 바로 내 앞에서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유현아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느낀 새삼스런 마음은, 이제 새로운 감정으로 바뀌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지금껏 위선자로 생각했던 유현아에 대한 새로운 놀라움이었다.
나는 한때 미친 적이 있다. 그 결과 살육에 빠진 적이 있다.
원혜수는 지금 미쳤다. 그 결과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러나 유현아의 현재 상태는, 그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비록 성향 하나가 상처로 바뀌었지만, 하나는 그대로였다. 이 말인즉슨 유현아는 아직도 내면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과연 성스러운 여왕인가….’
누가 뭐라 해도 유현아는 홀 플레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물급 사용자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 그녀에게 인재가 붙는지 몰랐는데, 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기도 했다.
“…….”
“…….”
어느새 주변에 남아있던 모든 기척이 사라졌다. 언제 다시 잡힐지는 모르지만, 적기라면 지금이 적기였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상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 사람이라는걸.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
사과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유현아에 대한 내 생각도 변함은 없다. 그녀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더구나 지금에서야 약간 이해가 간다고는 해도….
이미 벌어진 사실을 뒤집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또한 만일 내가 사과한다고 해도 변하는 게 있을까? 그런다고 유현아의 내면에 변화가 생길까?
내 대답은 “아니올시다.”였다.
지금 유현아는 벼랑 끝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려다보고, 유현아는 올려다본다. 어느덧 그렁그렁한 눈망울에서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은, 애처로운 빛을 가득 띠고 있었다.
“너는 나에게 뭘 원하는 거지?”
“나에게 사과할 수 있어요?”
“사과를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건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역시나 유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저었다.
“너무 멀리오기는 했지.”
그것을 내 대답으로 알아들었는지, 유현아는 일순 고개를 푹 숙이었다.
“대답은 잘 들었어요.”
“…….”
“역시….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유현아는 위선자가 아니었다.
착하고, 순수하다.
이윽고 바닥에 점점이 찍히는 눈물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이제는 그냥 죽고 싶네요.”
“…….”
“죽여줄 수 있나요? 당신이 그때 그랬던 것처럼.”
“…원한다면.”
나는 마침내 무검을 뽑아 들었고, 아래로 겨누었다.
검신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는, 여전히 울고 있는 여왕만 보일 뿐이었다.
이내 무검을 천천히 치켜들며, 나는 생각했다.
나를 둘러싼 상황이 이러지만 않았다면. 아니, 나와 조금만 더 늦게 만났더라면.
‘어쩌면….’
유현아와 잘 지냈을지도 모른다고.
서로 힘을 합쳐,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
‘부디 편히 잠들길.’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있는 힘껏 검을 내리그었다.
============================ 작품 후기 ============================
“수현. 오셨어요?”
“아직 안자고 있었나요?”
“네.”
“…….”
“…어디 다쳤어요?”
“왜요?”
“피 냄새가 나서….”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요.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