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97
00396 2. 고백(2/2) =========================================================================
북 대륙, 그리고 연합군의 전쟁이 끝난 지도 어느덧 2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외적으로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전반적인 전후 처리가 슬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으로 대두되었던…. 그러니까 도주한 적들을 추격 및 포위하는 계획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딱 절반의 성공만을 의미했다. 서 대륙 사용자는 대다수 사로잡는데(혹은 살해하는데.) 성공했지만, 부랑자들은 총대장과 수뇌부를 포함해 대다수를 놓치고만 것이다.
사실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 대륙 사용자들은 북 대륙의 지형에 익숙하지 못했고, 부랑자들은 도망과 유격(遊擊)에 관해서는 도가 튼 놈들이었다.
그렇게 1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이후 추가로 1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제야 북 대륙은 포위망 유지를 무의미하다 여겼고, 한 번의 회의를 거쳐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놈들을 쫓는 것을 아예 중단한 건 아니었다.)
이제는 무너진 도시의 복구와 포로에 대한 처우 등등…. 여태껏 2차, 3차로 미뤄두었던 북 대륙 내부를 추스르는데 힘을 쏟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바바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회의가 개최됐고, 여러 클랜의 로드 또는 간부들이 항시 드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회의가 열릴 때마다, 나의 참석을 요청하는 서신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이런 쓸데없는 회의에는 참가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통보가 아닌 정중히 서신으로 요청한 만큼, 일단 참가는 해주고 있었다. 신분이 자유 용병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도 좋게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특히 오늘 개최하는 회의는 실질적으로 북 대륙의 방향을 결정하는 자들이 모이는 회의였으니,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춰줄 필요는 있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제 우리는 북 대륙 내부를 정비하고 가다듬는데 주력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이후부터는 당연히 바바라를 중심으로 많은 논의가 오고 가겠지요.”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 걸까?
단상에 선 이효을은 양손을 꼿꼿이 집은 채 전에 없던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정체는 북 대륙의 수호자로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베일에 감싸인 존재였다. 이 말인즉슨, 지금 이곳에 모인 클랜 로드 및 간부들은 모두 수호자와 인연이 있는 사용자라는 소리였다.
“끝내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당부하겠어요.”
뭔가 대단히 중요한 말을 발표하려는지, 잠깐 말을 멈춘 이효을은 강한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비로소 말을 이었다.
“모두 예전에 각 클랜에 숨어들었던 부랑자…. 그러니까 첩자들을 색출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그 말이 나온 순간, 제법 많은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걸 볼 수 있었다.
첩자 색출이란, 포로로 잡아온 백서연의 정신을 망가뜨려 부랑자 내부의 기밀을 토해내게 만든 사건을 일컫는 말이리라. 당시 각 클랜에 숨어든 첩자의 숫자는 그야말로 방대했고, 그만큼이나 조직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한 번 쏠린 시선은 쉽사리 거두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앞쪽을 주시했다.
“그때 한 부랑자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전쟁 후 각 클랜을 이간질해 북 대륙을 분열시킨다. 그리고 종래에는 서 대륙과 똑같이 무법지대로 만들 계획이었다.”
“…….”
“어떤 분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그것은 분명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여기서 확실하게 말하겠어요.”
고요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이효을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와 형형한 눈빛으로 전원을 응시했다. 천사에게 어떤 말을 단단히 들었는지, 그녀의 눈은 어떠한 의지로 강렬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여기서 제 2의 황금 사자를 꿈꾸는 분이 있다면, 일찌감치 꿈을 깨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클랜이 있다면…. 북 대륙을 수호하는 입장으로써 제 모든걸 걸고 최선을 다해 저지할 테니까.”
그리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이효을은, 이내 살짝 얼굴을 누그러뜨리는 것과 함께 말을 매듭지었다.
“이점 유념해주시고, 오늘 회의는 일단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이효을의 의미심장한 말을 마지막으로 길었던 회의는 막을 내렸다.
‘오늘은 시간 낭비까지는 아니었군.’
물론 앞으로 많은 것을 논의해야 하는 만큼 지속적인 자리를 가질 테지만, 아무튼 오늘만큼은 난 일찍 끝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오늘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회의가 끝나고 약간 기다리다가,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먼저 일어서서 문을 나가는 사용자들의 후미에 끼어, 얼른 약속 장소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형은…. 안보이네.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형에게는 오늘 회의가 끝나고 잠깐 만나자고 미리 언질 해둔 터였다.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진 반대편에 앉아있었던 만큼, 혼잡한 실내보단 밖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머셔너리 로드!”
그때였다.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신비로운 목소리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의아히 고개를 돌리자 내 옆으로 낯익은 한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한 손에 카드를 든채 몽환적인 분위기를 지닌 여인. 마법의 탑 클랜 로드이며 시크릿 클래스 타로 카드 마술사.
그녀의 정체는 바로 선율이었다.
“마법의 탑 로드.”
“…그냥 마탑 로드라고 불러주시면 안될까요? 마법의 탑 로드라고 하면 왠지 듣기 불편한 어감이라.”
“그러죠. 마탑 로드.”
“음. 훨씬 낫네요. 선율이라고 불러주시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말이죠.”
선율은 한결 만족한 얼굴로 다시 요청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러한 내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마주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어요? 몇 번 불러도 들은 척도 안 하시던데.”
“아.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그 약속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응? 약속이요?”
약속이 있다는 말에 선율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일인가 고민하고 있자, 순간 그녀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선약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예?”
“아. 얼마 전에 저에게 부탁하나 하셨잖아요. 그걸 빌미로 오늘 밥이나 한끼 사달라고 하려고 했거든요.”
“부탁…? 아.”
일순 부탁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졌지만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마 전 문득 한 물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수소문한 게 있는데, 워낙 희소 가치가 높은 물품이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러다 고연주를 통하여 한 클랜에서 해당 물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섭 후 간신히 물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물품을 보유하고 있던 클랜이 바로 선율이 클랜 로드로 있는 마법의 탑이었다.
“그거 우리도 별로 없는 건데…. 시세보다 싸게 드린 건데….”
“하하하.”
연신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멋쩍은 웃음만 짓자, 선율은 못마땅한 얼굴로 “체.” 혀를 찼다.
“이것저것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뭐, 선약이 있으시다니 어쩔 수 없네요.”
“미안합니다. 정말 중요한 약속인지라…. 다음에 제가 먼저 초대하도록 하죠.”
약간, 아주 약간 미안한 마음에 먼저 초대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선율은 바로 얼굴빛을 바꾸었다.
“아, 그래요?”
“…예.”
“먼저 초대라. 음. 음, 음. 좋아요. 그것도 좋겠네요.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으니, 기대할게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로군.’
상대하기 피곤하다는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젓고 있자, 이내 다시금 농염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럼 이만. 그래도 숙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겉으로는 정중히 인사를 건넸지만, 속으로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숙녀라. 선율의 진명이 정숙한 요희(妖姬)였던가?
스스로 사용자 정보를 살펴볼 수 있는 만큼, 나라면 창피해서라도 저렇게 말하지는 않을 텐데.
*
선율과 헤어진 후.
건물 밖으로 나서 입구에 다다르자,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약한 미소로 화답한 후 천천히 형과의 거리를 줄였다.
사실상 형, 아니 해밀 클랜은 일주일 전 본거지로 귀환할 수 있었다.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전력 이탈이 심하지 않아(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약간의 정비 후 포위망 구성 부대에 참가한 것이다.
그에 따라 전투 중 했던 약속은 뜻하지 않게 미루게 되었고, 이후 형이 돌아오고 나서 나는 약속대로 전령을 보냈다. 물론 용건은 간단히 “밥이나 먹자.”고 했을 뿐이지만, 형은 분명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연락 기다리고 있으마. 마음이 정리되면 먼저 연락을 줘.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워프 게이트에서 헤어지기 전 분명히 그렇게 말했으니까.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조금 늦었네?”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발길을 잡혔거든.”
“응? 누구?”
“있어. 그런 사람.”
내 이성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형이었기에, 나는 쓰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이윽고 나와 형은 입구를 나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밥을 먹자고는 했지만 딱히 어디로 갈지는 정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와 형은 계속해서 걸었고, 방향은 일치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 형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워프 게이트를 향해 걷다가,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사실상 지금부터 내가 말할 이야기는 극비에 해당하는 정보였다. 물론 나는 형을 믿고, 형도 나를 믿기에 이야기하는 것은 거리낌이 없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야기할게 너무 많다는 것. 살아온 인생이 워낙 굴곡이 크다 보니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
그렇게 워프 게이트로 도착할 때까지 형과 나는 한 차례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형의 입장도 나름 이해는 되었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형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갑작스레 긴장되는 마음에 지그시 입술만 깨물고 있을 즈음, 문득 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모니카로 갈까? 아니면 프린시카?”
“…프린시카로.”
“프린시카로? 나 너네 클랜 하우스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머셔너리 하우스는 나중에…. 프린시카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거든.”
“흐음. 그렇다면야.”
형은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고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른한 점심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용자들이라 해봤자 서너 명이 전부였다.
“다음 차례 들어오세요.”
이내 우리 차례가 다가오자, 나와 형은 조용히 포탈로 걸었다.
그리고 다시금 찾아온 침묵. 불편하거나 어색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한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대었다.
지금 내 품에는 일전 ‘마법의 탑’ 클랜에서 구한 ‘진실의 수정’이 들어있었다. 물론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일종의 보험으로 준비한 물품이었다.
나는 가슴에 손을 댄 채, 옷 위로 만져지는 동글동글한 구슬의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미 결단은 내렸다고. 그때 ‘뇌신’의 발동을 요청했을 때, 이미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그래. 이제는 말해야 할 때였다. 아니.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서 포탈 앞으로 다다랐을 때, 나는 한 번의 호흡과 함께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형.”
“프린시카로 두 명…. 응? 왜?”
“나…. 형한테 할 말 있어.”
“…….”
역시나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형은 담담히 나를 돌아보고는,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형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침착히 대답했다.
“그래.”
============================ 작품 후기 ============================
요즘 들어 쪽지로 많이 물어보시는 것들이 있는데,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
1. 지금 연재하는 부분은 2부가 아니라, 외전입니다. 1부 완결 후 원래 2주 동안 휴재 기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제가 12월 달 시험과 겹쳐 또 2주간 휴재를 해야 합니다. 그럼 너무 기간이 길어지니, 그동안 외전을 올리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2부의 시작에 2년 가량의 공백이 있는 만큼, 외전의 성격은 1부에서 2부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을 약간이나마 설명해주는 파트가 될 것입니다.
2. 외전은 쭉 이어지는 내용이 아니라, 여러 파트로 나눌 생각입니다. 즉 한 파트마다 독립적인 에피소드가 연재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면 고백, 모여드는 인재들, 얼어붙은 숲(탐험), 김수현과 101등등 1부 때 다루지 못한 것들이나, 소소한 일상들이 주가 될 것입니다.
2. 외전은 자유 연재입니다. 다만 자유 연재가 일일 연재가 아니라는 말이지, 연재 중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3. 2부 연재는 제가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 시작할 예정입니다.
4. 세라프에 관한 코멘트는 모두 잘 읽었습니다. 아쉽게도 ‘나머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결말에 드러날 예정이오니, 지금 곧이곧대로 밝히기 어려운 점 양해 부탁합니다. 음…. 그런데 지금껏 복선을 몇 개 알려드린 만큼, (121회, 카드.) 비슷하게 맞추신 분들은 몇 분 보이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