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98
00397 2. 고백(2/2) =========================================================================
창문 사이로 희미한 빛 줄기가 느껴졌다. 성큼 솟아오른 술기운 때문일까.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었지만 벌써부터 눈이 가물가물하다. 어른거리는 시계(視界)를 붙잡으려 한두 번 눈을 깜빡이자, 아주 약간 선명해진 시야 속으로 어질러진 방안의 풍경이 눈에 밟혔다.
자리잡은 곳 주변으로 텅 빈 병들이 나뒹굴고 있고, 그릇에 담겨있던 안주거리는 사방팔방 볼썽사납게 흐트러져있다. 바닥에 깔린 천은 병 입구에서 흘러나온 술에 젖어 끈적하게 엉켜있었다. 말 그대로 엉망 그 자체. 형이나 나나 평소 유난히도 깔끔을 떠는 성격이라 평소라면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진하 누나가 보면 기절하겠군.’
안줏거리를 가져다줄 때만 해도 형 몰래 “도련님, 도련님.”하며 상냥히 눈웃음치던 진하 누나였는데, 과연 이런 방안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올까? 아. 그래도 잘 보이려고 여전히 눈웃음치려나? 하하하.
돌연 떠오른 실없는 생각에 잠깐 숨죽여 웃다가, 나는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멍하니 입을 벌리자, 뱉어낸 숨결이 벌어진 입 속으로 스며들어 달콤한 내음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피곤해?”
하품을 하는 걸로 착각한 걸까. 한두 번 입맛을 다시고 옆을 돌아보자 여전히 쌩쌩한 얼굴을 한 형이 보인다. 형은 나를 정면으로 향한 채 침대에 편하게 앉아 있었고, 한 손에는 거의 다 비운 술병을 들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아마 형이 나보다 훨씬 술이 셌던 걸로 기억한다. 현대에서나 홀 플레인에서나 말이지.
“피곤하면 한숨 자도 돼. 어차피 여기 빈방이니까.”
형은 무척이나 자상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취하지 않았어.”
“알아. 그래서 취한걸 물어본 게 아니라 피곤한지 물어본 거잖아.”
“이런.”
형은 조용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뭔가 말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나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한 쪽으로 팔을 내뻗어 아직 마개도 따지 않은 새 술병을 집어 들었다. 뽕! 이어서 느릿한 손길로 마개를 잡아떼자, 문득 휑했던 등을 맞대어오는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엇차. 그런데 여기는 왜 오자고 한 거야? 술은 그렇다 쳐도…. 오고 싶다는 데가 고작 이곳이었어?”
“그냥. 옛날 생각이 많이 나는 곳이라.”
“옛날 생각?”
“…혹시 현대에 있을 때 기억나?”
나는 까닭 없이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영민한 형은 곧바로 내 의도를 알아들었다.
“현대? 어떤 기억?”
“예전에 형이랑 나랑 한창 미국 드라마에 빠진 적이 있었잖아. 그때 드라마 보겠다고 방을 영화관 비슷하게 꾸몄던 게 기억나서.”
“아. 기억난다. 빅뱅 이론이었던가? 하하. 그땐 정말 난리도 아니었는데.”
“난 재미있었어. 팝콘 용기 하나 구해서 과자를 채워 넣었던 거나, 누워서 보려고 모니터 앞으로 끌어와서 최대한 기울였던 거나….”
“그러다가 모니터가 떨어져 금이 가기도 했지.”
서로 등을 맞댄 상태라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깨 부근에서 미약한 떨림이 전해져 오는 것으로 보아 형이 웃는 중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하여 나도 가벼운 웃음을 흘린 후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입을 닦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즌 4까지 봤던가? 지금은 몇까지 나왔으려나….”
“더 나왔겠지. 만약 돌아가게 되면 실컷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나저나. 그 이유 때문이야?”
“응? 뭐가?”
“오고 싶다고 한 장소로 굳이 이 방을 선택한 거. 현대에서 겪었던 향수를 느껴보고 싶어서?”
형은 방을 둘러보는 듯 잠깐 말을 멈추더니, 이내 낮은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별로 비슷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때였다.
“…아니. 그건 아니야.”
돌연히, 정말 갑작스럽게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그리고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며 뭔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는….”
“응.”
“예전에 내가 해밀 클랜원이었을 때 사용했던 숙소였거든.”
“…응?”
“지금이 거의 1년 차니까…. 내가 해밀 클랜에 가입했던 게 벌써 9년 전일이네.”
“수현아?”
뒷목이 따끔따끔하다. 이제야 형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게 무슨….”
“형.”
하지만 나는 형의 말을 곧바로 끊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의아한 눈으로 나를 직시하는 형이 보였다. 눈동자에 서로의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 알고 있어. 그래도 중간에 끊지 말고, 잠깐만 내 말을 들어줘.”
“너….”
“부탁할게. 제발.”
“…….”
형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차마 그 시선과 더 마주할 자신이 없어,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의 벽을 응시했다.
“…….”
“…….”
그리고 이어지는 불편한 침묵. 그러한 침묵을 조용히 음미하고 있자, 불현듯 한 생각이 들었다.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어쩌면 난 지금까지도 망설이고 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그럼 시작할게.”
그래. 여기서 굳이 형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렇게 마음먹은 즉시 나는 조용히, 그러나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한 청년이 있었어. 그 청년은 막 전역 신고를 마친 청년이었고,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깜빡 잠이 들었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내가 홀 플레인에 들어오기 직전의 이야기.
“잠에서 깨어 눈을 뜨자 청년은 자신이 이상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틈도 없이 통과의례라는 시험을 치러야 했고, 그곳에서 등장한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했어. 그렇게 7일을 간신히 보낸 후, 일종의 자격을 얻은 청년은 홀 플레인이라는 곳에 입장하게 돼.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게 말이야.”
아까 잠깐 떼어졌던 등은 어느새 다시 맞닿아있는 상태였다. 이면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나는 뜻 모를 안온함을 느끼며, 나는 결심했다.
지금 바로 결론을 말하자고. 혹시라도 내가 중간에 견디지 못해, “실은 농담이었어.” 이 한 마디로 돌아갈 수 없도록 미리 선을 그어놓자고.
“그리고 이후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청년…. 아니 남자는 헤아릴 수 없는 우여곡절 끝에 홀 플레인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지. 남자는 결국 끝에 다다라 마침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어.”
“…….”
“하지만 남자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았어. 아니. 지구로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을 되돌려 홀 플레인에 처음 들어왔던 때로 돌아오는걸 선택했다? 왜냐고? …남자에게는 하나의 목적이 있었으니까.”
“…….”
“그 남자가 바로 나야.”
혹여 마음이 변할까 나는 쉴 틈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론의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내 난 무릎을 모아 천천히 양팔로 감싸 안았다. 그와 동시에 등을 통하여 몸을 흠칫 움츠리는, 갑작스레 놀라는 기척 또한 전해졌다.
이윽고 난 차분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형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저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게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마주치고 있자, 마주하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형의 입술 또한 천천히 떼어졌다.
“수현아.”
“형은…. 네 말이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를 않는구나.”
그 말이 들린 순간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물론 스스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왜 이렇게 허탈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때였다.
“그러니까….”
형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조금 더. 아니, 조금 전 말보다 훨씬 자세한 얘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늘그막이 이어진 말에 나는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
그래.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형은 뭔 헛소리냐는 반응이 아니라, 일단 한 번 말을 들어보겠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내 말을 가벼이 여기지는 않는다는 방증이었다. 당연히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태도만으로도 내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약간씩 떨려오는 입술을 잘끈 씹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난 결정했어. 이대로 홀로 지구로 되돌아가느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과거를 바꿔서, 그 모두를 살려서, 모두와 함께 귀환하겠다고.”
마지막으로 말을 끝맺고 난 후에야, 나는 내내 땅만 쳐다보던 시선을 들어 창문을 응시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맑은 빛을 비추고 있었는데, 어느덧 해가 기운 모양이다. 바닥에 드리운 옅은 황혼 빛 노을을 보며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마디였다. 정말 한 마디에 불과했다.
자세히 말해달라는 한 마디에 나는 일말의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하여 그동안 겪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놓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걸 말한 것은 아니었다. 살인, 강도, 강간 등 내 입장에서 말하기 부끄러운 부분은 철저히 삭제했으며 오직 굵직굵직한 흐름을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이야기할 것은 차고 넘쳤고, 형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요약해서 말하느라 설명이 충분치 못한 곳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0년이라는 굴곡진 세월을,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온전히 담아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물론 중간중간 끊긴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내가 상처를 입은 내용에 관해서였다.
예를 들어 벨페고르에 당해 복부에 칼이 찔려 기절했다는 얘기를 했던 순간, 형은 “뭐라고?” 심히 분노하여 말을 끊은 정도였다.
어찌됐든.
그래도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형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런 이야기구나.”
이윽고 형은 한 손으로 검지를 피어 톡톡 바닥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이나 나나, 서로 머리가 복잡할 때 하는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그런 형의 얼굴은 생각보다는 담담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굳어있는 게, 마치 태연한 척 애쓰는 모습이랄까? 아무래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중간중간 내가 알아맞힌 여러 사실들이 내면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을 테지.
한동안 형을 보다가, 나는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괜찮으니까 어떤 말이라도 해봐.”
“…잘 모르겠어.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면…. 그것도 바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말이라 잘 와 닿지가 않아.”
형은 솔직히 대답했다.
“하….”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순간 검지의 움직임을 멈췄다.
“수현아. 네 말을 그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믿기지가 않아. 하지만 네가 들어오기 전의…. 그러니까 너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여러 사실들을 알고 있는 거나, 네가 들어오고 난 이후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정황상 맞는 말 같기는 해.”
“정황상이라….”
“못 믿겠다는 말이 아니야.”
형은 딱 잘라 대답했다.
“단…. 지….”
그러나 뭔가 망설이는 게 있는지 곧바로 말을 잇지는 않았다.
문득 목이 바짝 타는 기분에, 난 황혼 빛으로 타오르는 술병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입안으로 침범한 액체는 메마른 목구멍을 적셔주었지만, 갈증이 가시질 않는다. 오히려 가뭄이 든 논밭처럼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내 텅 비어버린 술병을 보며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단지?”
형은 그 특유의 고독한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양에 물들은 얼굴이 무척이나 벌겋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형의 입술이 열렸다.
“모르겠다. 그냥 네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시종일관 불안하던 가슴이 먹먹해졌어.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갑자기 이리도 답답해지는 걸까?”
형의 말을 들으며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형은 지금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황상 인정은 해야겠는데, 한순간 체감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힘든 상태였다.
그리고 난 형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도, 만일 안솔이 갑자기 “저는 미래에서 시간을 되돌렸어요!”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리 맞는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긴가민가한 감이 없잖아 있을 것이다.
잠시 후.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진실의 수정’을 꺼내어 형이 볼 수 있도록 꺼내놓았다. 솔직히 웬만하면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형. 이게 뭔지는 알고 있지?”
“그건…. 진실의 수정이잖아.”
“맞아.”
그리고 수정에 손을 얹은 난 그대로 마력을 불어 넣었다. 이내 수정구 안으로 자그마한 연한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진실의 수정’ 간단히 발동 완료되었다.
고요히 흔들리는 푸른 불꽃을 보다가, 나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말은 사실이야.”
“…너.”
형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바로 시선을 내려 수정구를 확인했다. 이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걸로 보아, 색깔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모양이다.
나는 한 차례 더 확인을 위해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할게. 내가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 형에게 한 말들은 전부 사실이야. 나는 홀 플레인의 끝을 본 사용자고, 과거를 바꿀 목적으로 시간을 돌려 지금 이 자리로 다시 되돌아왔어.”
여전히 똑같이 타오르는 푸른 불꽃.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형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형의 태도는 처음부터 한결 같았다. 건물 밖에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똑같았고 행동도 똑같았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낯빛이 확실하게 변했다. 뭔가 굉장히 차갑게 굳어있으면서도, 맥이 풀린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후….”
이윽고 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살짝 벌려진 손 틈 사이로 숨의 마찰하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렇게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형은 처음으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진짜였구나.”
“응.”
“응? 하. 하하…. 진짜, 진짜였어. 너. 이 세상을 이미 클리어했었구나.”
“맞아.”
곧 있으면 ‘진실의 수정’의 지속 시간이 끝날 시간이었다.
“그리고 뭐 같지도 않은 이유 때문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고.”
“응…. 응?”
그때 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양손을 아래로 내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눈빛과 마주하자, 왠지 모르게 형이 뭔가를 정리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왜 불안했는지 이제 알겠다. 김수현. 설령 네가 그랬다고 해서. 다시 되돌아왔다고 해서 내가 기뻐할 거라고….”
뭘 말하려던 형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다. 후. 그래. 이왕 ‘진실의 수정’을 발동한 거 하나만 더 물어보자. 손은 그대로 얹고 있어.”
“…….”
조금 전 형이 하다만 말을 곱씹고 있어서 그랬을까. 잠시 후에야 형이 내 말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선 나는 황급히 말했다.
“뭔데?”
“네가 그랬었잖아. 내가 너를 구하려다가 죽었다고. 그 부분을 다시, 자세하게 말해줘.”
“어, 어떤걸.”
말을 하면서도 나는 속이 따끔해지는걸 느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내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제외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은 여지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이 가차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수현아. 혹시 내가 죽을 때 너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니? 아니면 어떻게든 나를 살려서 같이 돌아갈 방법을 찾아달라고 했어?”
“…….”
“대답해.”
“아니. 그러지 않았어.”
담담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속은 철렁했다. 다시 목이 말라오는 기분에 술병을 찾아봤지만, 이미 이야기를 하면서 대부분 결딴낸 상황이었다.
“그럼.”
“살리지 말라고 했어. 그리고 나보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끝을 보라고 했어.”
화륵! 화르륵!
그 순간, 형의 질문을 마지막으로 ‘진실의 수정’의 지속 시간이 끝나버렸다.
나는 이제 정말 끝났다는 생각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자 어느새 형이 꼿꼿이 선 채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형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려는 찰나였다.
쨍그랑!
“!”
“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얼 떨떨히 고개를 내리자 조각조각 부서져 파편으로 나뉜 ‘진실의 수정’이 보인다. 순간 상황 파악이 안되어 격한 혼란이 일었지만, 비로소 형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형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막 뭔가를 말하려던 얼굴이었는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억지로 입을 다문듯했다. 그 표정은 그야말로 복잡해 보였고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때 형이 말했다.
“왜, 왜….”
“왜…. 그래?”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과연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도대체 어떤 얼굴이길래 형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이익…!”
형은 자꾸만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것을 꾹꾹 눌러 담는지 힘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그대로 주저앉아 나와 비슷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이…. 멍청한 놈아…!”
간신히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 덜덜 떨리는 음색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형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 모든 것을 조금 전 한 마디에 담았다는 것을.
그러더니 이내 정수리에 부드러이 얹히는 형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나는 얼른 이를 악물었다.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형의 모습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여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기분인지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지금껏 10년 동안 겪었던, 겪어야 했던 온갖 고통이 형의 단 한 마디에 한꺼번에 보상받는듯한 기분이었다.
비로소 형의 조금 전 기분이 약간이나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아주 똑같은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겠지만. 아니. 오히려 정반대의 기분을 느꼈겠지만.
나는 형처럼 모든 하고 싶은 말들을 눌러 참고,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니. 괜찮아.”
이윽고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감촉이 느껴진다. 나는 살짝 눈을 떴다가, 여전히 살아있는 일렁임에 다시 눈을 감았다.
한동안 곳곳을 훑는 형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랬고, 동시에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랬다.
그렇게 상반된 감정 속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고백하는 게 아주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잠깐 자고 일어났을 때는 몸이 가뿐했는데, 집필하면서 다시 상태가 안 좋아져서요. 눕다가 글 쓰다 눕다가 글 쓰다 하다가 까무룩 잠들었습니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업데이트가 늦어진 점 양해 부탁합니다. _(__)_
PS. 등록을 누르니까 갑자기 접속자가 많아 접속이 원활하지 않다고 뜨더니, 한 네 번 클릭하니까 되더군요. 그리고 보니까 네 편이 한꺼번에 올라와 있어서, 세 편은 얼른 삭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