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22
00421 10. 마지막 이야기(9/9). =========================================================================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문득 잠에서 깬 한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저녁 짠 음식을 먹어서인지 무척 목이 말랐다.
“지금 시간이….”
한결은 창문을 흘깃 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몽롱한 정신이 약간이지만 맑아졌다.
잠시 후,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한결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온몸을 엄습하는 한기에 입술을 떨며 불평했다. 이런 날씨에 고작 물 한 잔 마시기 위해 정원을 걸어야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으으…. 추워, 추워, 추워.”
예상대로 정원은 굉장히 추웠다. 사정없이 불어대는 찬바람에 한결은 잔뜩 움츠린 채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간신히 본관에 도착하자마자 참았던 숨을 크게 토해냈다. 속에 가득 찼던 냉기가 조금은 새어나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1층은 역시나 휑뎅그렁했다. 오직 을씨년스러운 어둠만이 남아 텅 빈 카운터와 로비를 맴돌고 있었다.
한결은 한참 동안 1층을 둘러보더니 쓸쓸한 눈빛으로 걸음을 틀어 적막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어 식당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탕.
뭔가 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주변에 흐르던 고요를 깨뜨렸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한결은 일순 놀란 토끼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시에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식당에 한 인영이 테이블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던 것이다.
탕.
다시 한 번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한결은 마력으로 안력을 높여 등을 보이는 인영을 주시했다. 그리고 곧바로 인영과 소리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인영의 정체는 바로 안현이었다.
안현은 홀로 테이블에 앉아 손에 쥔 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결은 살며시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감싸 쥐었다. 곳곳에 진동하는 술내가 콧속을 물씬 찔러 들고 있었다.
안현은 아직 한결이 들어온걸 모르는 듯했다. 이내 한 쪽으로 병을 던지더니 금세 새로운 병을 집어 입에 가져간다. 뭔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고 이따금 속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기까지.
한결은 본능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자리에 서 안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테이블 한 쪽에 쌓이는 병의 개수가 점차 늘어날 즈음, 또한 한결이 물을 마시겠다는 목적을 까맣게 잊어갈 즈음. 술과 한숨을 반복하던 안현의 행동이 처음으로 변화를 보였다. 별안간 옆자리 고이 놓아둔 창을 들더니 빤히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한 칠흑 빛을 띤 창은 일견 어둠에 파묻힌 듯 보였다. 그러나 창 끝에 흐르는 섬뜩한 빛은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 어둠과의 동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문득 한결은 침을 삼켰다. 지긋이 창을 응시하는 안현. 그 모습은 한결이 평소 보아오던 안현과 비교해 뭔가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때 창의 끝에서 갑작스레 시퍼런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안현이 지그시 눈을 감아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결은 숨을 짧게 들이키며 생각했다. 이 야심한 새벽에, 그것도 식당에서 홀로 뭘 하려는 걸까. ‘그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보이는 얼굴이 너무나 진지하다.
이윽고 안현은 아무도 없는 허공으로 창을 비스듬히 겨누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도중에 조금씩 비틀거리긴 했지만 분명한 건 어떤 자세를 잡았다는 것.
그리고 그 자세를 보는 순간 한결은 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방금 안현이 잡은 자세는 얼마 전 차소림과 테스트를 치를 때…. 그러니까 안현의 자세가 무너지기 전 처음 잡았던 자세였다.
한결은 고민했다. 테스트 후 안현은 한동안 멍한 상태를 보였다. 오죽 심했으면 유정이도 다가가 위로를 건넬 정도였다. 이후 곧 정신을 차려 괜찮다고 웃었지만 왠지 모르게 억지 웃음이라 느꼈던 한결이었다.
창 끝에 서린 시퍼런 빛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한결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과연 말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고 또한 안현을 감싼 분위기가 워낙 진지했던 탓이다.
말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대로 보고 있어야 할까 나가야 할까. 아니면 수현 형님한테 말을 해야 할까?
한결이 어떤 것도 가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무렵. 안현의 눈이 번쩍 떠지며 시퍼런 불길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쾅!
일순 창과 안현의 전신에서 화려한 빛이 번쩍이더니 거친 폭음이 허공을 떨어 울렸다.
“크헉!”
동시에 들려온 외마디 비명. 매우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한결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하여 여태껏 꾹 눌려져 있던 한결의 말문이 반사적으로 터져 나왔다.
“형!”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내 폭발한 빛이 사그라지고 솟구친 연기도 옅어질 즈음, 비로소 상황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눈에 들은 건 폭발의 여파로 산산조각 난 테이블이었다. 그 옆에는 한껏 달구어진 흑색 창이 허연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한결은 반사적으로 안현을 찾았다. 테이블 주변에는 보이지 않아 얼른 고개를 들어 식당 전체를 살폈다.
“으…. 으….”
잠시 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신음에 한결은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주방 카운터에 부딪쳐 쓰러진 안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형! 괜찮아요? 괜찮은 거예요?”
큰 목소리로 불러봤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 순간 목마름도 여러 복잡했던 생각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형!”
한결은 더는 생각 않고 신속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많은 생각을 해서 그런지 머리가 약간 띵한 기분이었다.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전 가벼운 기분 전환이라도 할 생각에 창문을 열었다. 이윽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정원을 응시한다. 여기서 고연주가 만들어준 뜨거운 차 한 잔이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것 하나만 빼면 괜찮은 아침이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문득 며칠 전 선율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아직 자세한 사항은 확인 못해봤지만 그녀의 생각에 꽤나 구미가 당기는 건 사실이었다.
마지아를 재건한다. 그 말은 북 대륙에 도시가 하나 늘어난다는 단순한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외적으로는 현재 정체된 북 대륙 마법의 수준을 몇 단계나 끌어올릴 수 있고, 내적으로는 방어가 목적인 전략 병기 하나를 가질 수 있다.
생각해보면 선율의 말은 제법 아귀가 맞았다. 마볼로의 기록을 살펴보면 해답이 나와있다.
용사 로이드와 요정 여왕 마르가리타를 감금한 후, 둘을 되찾으러 온 성녀 그라치아의 군대를 단신으로 토벌했다.
또한 나를 상대할 때 도시 내에 떠오르던 무수한 마법 진들. 그때 양 옆으로 나를 덮쳤던 마법 진은 각각 만년설과 지옥 불 초열에 해당하는 기운을 뿜어냈다. 물론 어디까지나 흉내 낸 것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만해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어떤 마법 진들이 묻혀있을지 궁금해지는데.’
일이 선율의 말대로만 풀린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홀 플레인 최고의 방어 도시를 갖게 되는 거니까. 어쩌면 비비앙의 신분 상승을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아직 어디까지나 생각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는 건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는 일이었다. 도시를 재건한다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니까. 단순히 ‘질서의 오르도’를 꼽고 “재건 끝.”이라 외칠 수 있다면 아예 고민도 안 했을 터.
‘길도 뚫어야 하고…. 폐허가 된 건물도 되살려야 하고…. 사용자들의 호응도 있어야 한다.’
그때였다. 생각 도중 나는 슬쩍 고개를 틀어 문을 응시했다. 밖에서 서성대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멀어지는 기척에 나는 다시 상념에 빠졌다.
재건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갈 것이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아직 스무 명도 안 되는 머셔너리 클랜만으로는 감당키 벅찬 계획이었다. 선율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역사를 보면 어느 클랜도 혼자서 도시를 개척한적은 없어요. 모든 클랜이, 모든 사용자들이 합동해서 도시를 확장했고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갔지요.’
선율이 말을 마치며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도시를 재건하게 되면 사용자들의 입주를 허락해줄 것. 두 번째는 도시 지분을 배분할 때 마법의 탑을 머셔너리 다음으로 해달라는 것.
물론 그만한 협력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녀가 내건 조건은 조건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를 활성화할수록 다양한 경제 효과를 창출할 수 있고 발생한 이익은 고스란히 머셔너리의 것이 된다. 배분 또한 큰 문제는 없다. 우리가 50.1% 이상을 가져가면 되거니와, 기실 ‘질서의 오르도’가 핵심 열쇠인 이상 배분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고대 홀 플레인에서 마법의 최고 황금기를 구가했을 때 건설된 최고의 마법 도시.
군침 도는 계획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보이는 떡이 큰 만큼 조심해야 한다. 잘못해서 ‘나가리’가 되는 순간 돈도, 시간도, 노력도 낭비한 셈이 되는 거니까.
‘벌써부터 설레발하지는 말자. 조용히 다음 보고를 기다리고 확인하면 되는 거야.’
나는 한숨을 뱉으며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느긋이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한다 해도 짧은 시간에 이룰 수는 없는 계획이었다. 선율도 이 부분에는 동의했고 몇 달간 더욱 상세한 조사를 거치며 진행 경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이윽고 자리에 앉은 후 나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문 앞에 선 기척에 나직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언제 들어올래.”
기척이 움찔한 게 느껴졌다.
“그만 기다리게 하고 이제 적당히 들어오려무나. 사용자 안현.”
그렇게 5초가 흘렀을까. 이내 조심스레 문이 열리고 어색한 얼굴을 한 안현이 슬그머니 발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헤헤.” 웃기까지.
“와서 앉아.”
고갯짓으로 앞쪽 소파를 가리키자 안현은 냉큼 달려와 앉았다. 그러면서도 노심초사 눈치를 살피는 게 아마 불호령이 떨어질까 불안해하는 듯 보였다.
“그래. 몸은 좀 괜찮고?”
“아, 예. 이제 괜찮습니다. 형님이 바로 달려와서 치료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일날뻔했지. 회로는 꼬여있고 마력은 폭주하고 있었으니까. 나 말고 바로 알려준 한결이한테 고마워해.”
“예 형님. 그리고 죄송합니다. 이건 무조건 제 잘못입니다.”
그럼 네 잘못이지. 그 말이 맞기는 한데 벌써부터 머리를 숙이는 안현을 보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몸은 괜찮다니 다행이고. 그럼 이제 얘기를 해볼까? 한결이가 비교적 상세한 상황을 알려주더군. 술 잘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창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고. 이미지 트레이닝 중이었나?”
“그게….”
“왜 그랬어?”
“하하. 그냥…. 그게 실은 술주정이었습니다. 제가 주사가 조금 심한 편이라서요. 아마 아무 생각 없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안현은 다시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어설프게 웃는 걸로 보아 진실된 대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예 형님. 사실대로 말씀 드리려니 정말 창피하네요. 하하하.”
나는 안현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몇 번 더 테이블을 두드렸다가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그럼 다음부터 조심하도록 하고. 이만 나가봐.”
“예…. 예?”
안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다. 생각보다 가볍게 넘어가자 자못 놀란 모양이다. 나는 품속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 참. 오늘 아침 회의 있는 건 알고 있지? 늦지 않게 참석하도록.”
“…알겠습니다.”
안현은 멍하니 나를 보다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한 번 허리를 굽히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가만히 안현을 주시했다. 나를 보는 안현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홀가분해 보이면서도 쓸쓸해 보였다.
꺼낸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점화석을 들어 조용히 불을 붙였다. 일전에 화정으로 불을 붙인 적이 있는데 질색을 하는 바람에….
– 마침 생각 잘했네. 아주 한 번만 더 그래 봐? 그때는 진짜로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자제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몸을 돌린 안현은 느릿한 걸음으로 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막 문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나는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아.”
안현의 걸음이 멈췄다. 이어서 고개를 돌리기 전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리 분하더냐.”
돌아가던 고개가 중간에서 멈췄다.
“…예?”
“그리 분하냐고 물었다.”
답하는 안현의 목소리는 떨리는 음색이었다.
연기를 한 번 뱉어낸 후 나는 부드러이 입을 열었다.
“검술이 최고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검이 되고 검이 사람이 되는 경지가 있다. 그 경지를 바로 신검합일이라 부르지. 물론 창에도 예외는 없다. 창술사들의 사용자 정보에는 아마 신창합일로 표현될 거다.”
“그, 그렇군요….”
“사용자들이 합일에 이르는 때는 평균 4년 차.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균에 불과하다. 보다 빠르게 다다른 사용자도, 아예 다다르지 못하는 사용자들도 있겠지…. 아무튼 어제 네가 보인 행동은 아마 신창합일을 이루려는 기초 단계였을 거다.”
“자, 잠시만요 형님. 사용자들이 합일에 이른다는 말씀은…. 아, 아니. 그게 사용자 정보에 표현된다고요?”
“그래. 신창합일은 어빌리티가 아니라 특수 능력 또는 잠재 능력이라는 말이다.”
“!”
마침내 꺼낸 진실에 안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나를 응시했다. 잠잠했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는 게 아마 여러 의미로 놀란 듯싶었다.
사실 안현이 왜 그랬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마 차소림과의 대련 후 스스로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현은 단시간에 강해지기를 원했고 결국 어빌리티를 익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익힌다는 게 어빌리티가 아닌 ‘능력’이라는 점에서 에러였지만.
“알고…. 있으셨어요?”
“어느 정도는.”
그럼. 알고 있지. 왜냐하면 네가 하는 행동이 내가 저년 차였을 때와 완전 똑같거든. 1회 차를 회상하며 나는 슬며시 웃었다.
“그럼 왜 아무 말씀도….”
“행동은 잘못됐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느새 연초는 끝까지 타 들어가 있었다. 필터를 재떨이에 비비며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안현. 조금 있으면 한 번 더 탐험에 나가는 사실은 알고 있지?”
“예….”
“인선은 이미 정해놨다. 기존 인원 3, 새로 들어온 인원 7. 그 중에 너와 차소림을 발표할 생각이며 선두에 기용할 생각이야.”
“…선두요?”
그랬다. 선율과의 만남 후 개최한 회의에서 나는 마음을 바꿔 탐험 준비를 공지했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이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내 많은 말은 하지 않으마.”
그리고 침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안현은 아직 1년 차에 불과하지. 그래. 여태껏 누누이 말해왔지만 지금은 사용자 정보에 주력할 때다. 어빌리티는 네게 아직 일러.”
“하지만….”
“그러니까…. 이번 탐험에서 한 번 보고 느껴봐. 그리고 직접 배워봐. 그게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야.”
“해야 할 일….”
이내 눈만 끔뻑이는 안현을 보며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네 심정은 이해한다. 목적이 멀면 멀수록 빠르게 목적지까지 가고 싶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해하는 건 알지만 성급해하지 마라. 그리고 망설이지 말고 포기하지 마라.”
“성급히 굴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안현은 앵무새처럼 내 말을 따라 했다. 꼭 뭔가에 홀린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서서히 고개를 드는 안현을 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강해질 수 있다. 그러니 네가 목적한 곳에 다다를 때까지, 차분히 밀고 나가면 되는 거야.”
============================ 작품 후기 ============================
후유. 스키장은 잘 다녀왔습니다…. 아니요. 솔직히 잘 다녀오지는 못했어요. ㅜ.ㅠ 분명 재미있게 보내기는 했지만, 나름 상처를 받은 여행이었습니다.
실은 스키장에 관해 안 좋은 추억이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스키를 타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최상급 코스에서 내려오다가 한 번 구른 적이 있거든요. 약간 탈줄 안다고 만용을 부린 제 잘못이었지요. 그때 왼쪽 팔꿈치를 다쳐 이후 2년 동안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
이번에 간 스키장이 바로 그때 그 스키장이었습니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이제는 괜찮겠다 싶었지요. 그리고 애당초 초급에서만 놀 생각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생각이란 게 참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가 봅니다. 처음 타는 애들이 있어 몇 번 가르쳐줬는데 이놈들이 몇 번 타더니 더 재미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더군요. 그리고 리프트를 탔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다쳤던 코스 앞에 서게 됐습니다. 막상 경사를 보니까 애들이 무서운지 뜸을 들여 저는 극구 만류했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코스가 최상급, 중 상급, 초급으로 세 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겨우 초급으로 끌고 가서 한숨 돌렸습니다.(파xxx 코스라면 아시는 분 계실까요?)
그래서 타기 시작했는데…. 초급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경사는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간 긴장을 풀고 간만에 해방감을 느낄 겸 조금씩 가속을 시작했지요. 그렇게 중간중간 S자로 휘면서 적절히 속도를 조절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코스 중 가장 경사가 있는 곳에서 휙 내려가고 있는데…. 그러니까 방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중이었을 겁니다. 사선으로 쭉 내려가는 찰나 갑작스레 보드를 탄 분이 제가 가는 방향 앞으로 세차게 들어오더군요. 앞뒤로 떨어진 거리는 1미터? 그 정도도 안됐을 겁니다. 제가 가속하던 상황이라 그대로 내려갔으면 아마 그대로 부딪쳤을 겁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가장 경사진 곳이라 굴렀을 가능성도 높고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방향으로 틀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은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순간 눈앞이 번쩍했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까 저는 엎어진 채로 아래쪽으로 쭈르륵 내려가고 있었고, 겨우 고개를 드니 오른발이 휑하더군요. 장착했던 스키가 날라가 버린 겁니다. -_-a 그리고 오른 팔꿈치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
그 사람도 크게 놀란 듯 멈춰서더니 “괜찮아요?” 하셨습니다. 저는 대답 대신 스키를 찾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위쪽에 있어 올라가기 어려우니 대신 가져다 달라는 의미였는데…. 잠깐 주춤하시더니 그대로 내려가시더군요. 하.
한 1분 정도 끙끙대고 있으니 다행히 다른 한 분이 오셔서 스키를 주워주셨습니다. 감사를 표하고 스키를 다시 장착하려는데 아이고. 경사진 곳이라 몸이 자꾸 내려가 다시 스키를 장착하는데 엄청난 애로사항이….
그 순간 갑자기 무서워져서 일단 자리를 옮겼습니다. 가장 오른쪽 구석으로…. 그 주황색 기둥이랑 망이 쳐진 곳이 있거든요. 그곳까지 기듯이 몸을 옮겨가 일단 앉았지요. 그리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스키를 다시 장착해야 되나, 아니면 내려가서 비교적 평평한 곳까지 가야 할까.
아무튼 일단 아픈 몸이라도 추스를 생각에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쉬이이이이익.
“어어어어어어어어.”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까, 이번에 또 어떤 분이 보드를 타고 양팔을 허우적대며 직선으로 하강. 방향은 정확히 제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몸을 일으킬 틈도 없이 그대로 내려와 제 아래쪽 허리를 직격하더군요.
그대로 엉켜서 한 세 바퀴 굴렀을 겁니다. 커플로 왔는지 뒤에 어떤 남자가 허둥지둥 내려오더군요. 또 “괜찮아? 괜찮으세요?” 물어보길래 일순 짜증이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아 조심이 좀 타세요.”라고 말했는데, 뭐라고 우물쭈물하더니 여자를 데리고 슝 내려갑니다. 저는 그저 헛웃음만.
결국 어찌어찌 내려오는 데는 성공했는데 더는 못 탈것 같아 바로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숙소에서 자는데 왼쪽 허리가 아파서 왼쪽으로 눕지를 못하겠더군요. 그렇다고 오른쪽으로 누우려니 팔꿈치가 아프고….(동생아 맨소래담 사다 줘서 고마워. ㅜ.ㅠ)
참 파란만장한 스키 여행이었습니다. 다음 번에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가게 되면 절대로 그곳은 가지 않으렵니다. 뭔가 저한테 마가 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