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24
00423 10. 마지막 이야기(9/9). =========================================================================
머셔너리 하우스, 본관 1층의 풍경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입구로 들어오면 정면에 카운터가 보이고 좌우로 기다란 복도가 트여있다. 그리고 정 중앙에는 테이블과 게시판 등을 배치해 논 매우 넓고 둥근 공간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다 목적용 로비였다.
평소 로비는 한산한 편이다. 클랜원 대부분이 개인 연구소 및 숙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모든 클랜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긴장된 낯빛을 비치고 있었다. 다들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게 정말로 고요한 분위기였다.
문득 이들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살며시 웃음지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눈앞에 놓인 수많은 장비들 때문일 터.
“흠, 흐흠.”
한두 번 헛기침을 하자 무수한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더는 시간을 끌면 안되겠다 싶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축제에 들어가기 전, 장비 결산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로비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이번 결산은 ‘얼음의 탑’, ‘발할라의 탑’, ‘잃어버린 낙원’에서 얻은 성과를 토대로 한 결산이다. 다만 모든 장비가 아닌 핵심 장비들만을 대상으로 잡았다. 축제 전 분위기를 띄우는 데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도 많은 편이긴 했지만.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1층 바닥에는 은은한 빛을 뿌리는 각양각색의 장비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이미 모든 장비에 구즈 어프레이즐(Goods Appraisal : 물품 감정서)이 붙여져 있었지만, 제 3의 눈이 훨씬 효과가 좋다.
‘일단 한나부터 챙겨주는 게 낫겠지.’
첫 시작을 한나로 끊을 생각에 나는 곧장 보자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짙은 남빛을 띠는 조막만 한 보석을 꺼내 들었다. 레어 클래스 ‘황혼의 무녀(Medium Of Twilight)’를 계승할 수 있는 장비였다.
시선을 마주치자 한나는 낯부끄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옆에 앉은 비비앙과 안솔은 벌써부터 부산을 떠는 중이었다.
나는 보석을 높이 들었다. 결산의 시작이다.
“이것부터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주인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비로소 주게 되네요. 레어 클래스 황혼의 무녀는 사용자 임한나에게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여’가 아닌 ‘완전 지급’을 선언했다. 곧바로 다가가 보석을 내밀자 한나는 머리를 꾸벅하며 양손으로 받았다. 가벼운 박수가 이어졌고 그녀는 활짝 미소 지었다.
“드디어 레어 클래스네. 나와 같은 반열에 올라선 걸 축하할게. 요호호호.”
“언니 축하해요.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레어 클래스를 받으셨네요.”
“내, 내가 언제 오매불망 기다렸니….”
한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입가에 배인 미소로 보아 꽤나 기쁜 듯싶었다.
조금 더 축하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나는 바로 다음 장비를 향해 걸음을 틀었다. 왜냐하면 결산을 최대한 일찍 끝내달라는 여성 클랜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축제를 주관한 사용자는 바로 머셔너리의 여성 클랜원들이었다. 사실 이번 축제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여성 클랜원들이 당일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고 자기들끼리 쉬쉬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도대체 뭘 준비했길래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바람대로 빨리 끝내주는 게 나으리라.
다음 타깃은 바로 ‘얼음의 탑’에서 얻은 로브와 뮬에 있을 적 발견한 활이었다.
『이아노르 라 에라헬의 루나리스 로브(Lunaris Robe).』
(일반 설명 : 고대 홀 플레인, 이아노르 왕국의 공주인 에라헬이 입었던 루나리스 로브입니다. 이아노르 왕국은 달을 숭배하는 신전을 국교로 삼았는데, 왕가의 혈족을 신전에 보내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루나리스 로브는 신전이 당시 이아노르 왕국의 꽃이며 성녀가 될 예정이었던 에라헬에게 바쳤던 물품입니다.
로브의 겉면에 달빛으로 음각된 보호 주문이 걸려있습니다. 달이 뜨면 미약한 빛을 발합니다.)
(상세 설명 :
1. 착용자의 능력에 재사용 대기 시간이 존재할 경우, 그 시간을 절반으로 줄여줍니다.
2. 로브에 보호 주문이 각인돼 있습니다. 착용자는 마력 능력치 50이하에 대해서 완전 방어 판정을, 60이하에 대해서 일부 방어 판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단, 달빛을 받을 경우 마력 능력치 10포인트 만큼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3. 루나리스 로브에 잠재된 능력 ‘달빛의 축복(Blessings Of Moonlight)’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파사(破邪)의 활』
(일반 설명 : 파사(破邪) – 첫 번째의 날개. 나쁘고 그릇된 기운을 깨뜨리는 권능이 담겨 있습니다.)
(상세 설명 :
1. 마(魔)와 관련된 기운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이는 파사의 활입니다. 다만, 파사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마력 능력치를 기반합니다.)
“이 두 장비도 역시 주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로브와 활을 들어 안솔과 선유운을 번갈아 보았다. 안솔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방실방실 웃었지만, 선유운은 눈만 끔뻑이는 게 꽤나 놀란 모양이다.
머셔너리에 사제는 두 명이다. 그러나 가슴 중앙 부분이 마름모꼴로 노출돼있고 다리 옆 선도 훤히 트여있는 게, 루나리스 로브는 완전한 여성용 로브였다.
궁수도 마찬가지로 두 명이지만, 한나는 이미 더 좋은 활을 갖고 있으니 파사의 활을 원하지 않으리라.
그 순간 갑작스레 장난기가 일어 나는 차분히 신재룡을 돌아보았다.
“사용자 신재룡. 혹시 루나리스 로브를 받을 생각이 있습니까?”
갑작스런 지목에 놀랐는지 신재룡은 한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곧 푸근한 미소를 보이더니 껄껄 웃었다.
“으음, 좋습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친히 주시는 물품인데…. 그럼 여기서 한 번 입어볼까요?”
이제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에~? 에에~?”
이윽고 안솔의 앙탈의 이어졌을 때 신재룡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사제가 되어 동료들의 안구를 치료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괴롭게 만들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거, 한 방 먹었네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클랜원들이 일제히 왁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 고요했던 1층 로비가 순식간에 웃음이 흐른다.
그 와중 흘끗 시선을 돌리니 “정말 주는 거야?” 전전긍긍하는 안솔과 “내가 받아도 될까?” 고민하는 선유운이 보였다.
“루나리스 로브는 사용자 안솔에게 대급하겠습니다. 또한 파사의 활은, 발할라의 탑과 잃어버린 낙원에서 많은 활약을 보여준 사용자 선유운에게 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이의 있으신 분 계십니까?”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저었다. 하기야 있을 턱이 없다.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장비도 아니었거니와, 이대로 묵혀두기에는 아까운 것들이었다.
“와아! 와아!”
안솔은 냉큼 달려 나오더니 누가 채갈세라 루나리스 로브를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잡고 있다가 한순간 놓아주었다. 결국 자기 힘에 못 이겨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녀는 넘어진 상태서도 헤헤 웃으며 로브를 꼭 끌어안았다. 어지간히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가…. 이걸 받아도 되겠습니까? 활이라면 저번에 주신 장비로도 충분합니다만.”
선유운은 뒤늦게 나와 쭈뼛쭈뼛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대답 대신 박수를 보내는 클랜원들과 로브를 들고 빙글빙글 도는 안솔을 가리켰다. 선유운은 머쓱히 웃더니 조심스레 파사의 활을 받았다.
여기까지 처리한 후 나는 잠시 숨을 돌렸다. 이제 남은 성과는 장비 세트 하나와 물품 하나 그리고 장비 하나였다.
사실 이번 결산은 어디까지나 축제 전 흥을 돋구는 과정에 불과했다. 하여 클랜원들이 배분에 납득할 수 있도록, 결산 때 보일 장비를 선택할 때 최대한 겹치지 않는 선에서 고른 것이다.
지금까지는 확실히 괜찮았다. 그러나 남은 장비들을 생각하면 과연 클랜원들이 납득할지 걱정이 이는 게 사실이었다.
『아르쿠스 발키리, 소환 세트(Arcus Valkyrie, Set)』
(일반 설명 : 무지개의 여신 플라비우스를 수호하던 친위대, 아르쿠스 발키리들이 착용하던 장비들입니다. 아르쿠스 발키리는 생전에는 영웅으로 전장에서 명성을 떨쳐 울린 여인들이며, 사후에는 플라비우스의 부름을 받아 전투 처녀로 거듭난 이들입니다.
평소에는 목걸이 형태로 봉인돼있지만 착용자가 해제할 경우 무기, 투구, 갑옷, 장갑, 부츠가 소환돼 신체에 자동적으로 장착됩니다.)
(상세 설명(이 모든 능력은 봉인을 해제했을 시 적용됩니다.) :
1. 아르쿠스 발키리들의 장비는 여인들만 사용할 수 있는 소환 세트며, 그 중 처녀만이 본래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2. 아르쿠스 발키리의 권능, 무지개 오오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3. 봉인을 해제했을 경우 착용자의 마력 능력치에 따라 유지 시간이 조정됩니다. 유지 시간 동안 근력, 체력, 내구 능력치가 1포인트 만큼, 민첩, 마력, 행운 능력치가 2포인트 만큼 상승합니다.)
『이브의 혈통(Eve’s Blood)』
(일반 설명 : 낙원은 폐쇄성이 짙은 지역이었지만, 한때는 지상 낙원이라 불릴 정도로 풍요로운 성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낙원을 시기한 주변 국가들이 어둠 속의 마물들을 움직여, 낙원은 침공을 받게 됩니다. 낙원의 주민들은 용감히 저항했지만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마물을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멸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브의 혈통은 낙원 최후의 생존자며 여왕이었던 이브의 피를 담은 병입니다. 반신이라 불린 아담의 아내였던 만큼 이브의 피에는 특별한 능력이 깃들어있습니다.)
(상세 설명 :
1. 이브의 혈통은 바로 효과가 일어나는 게 아닌, 복용자가 원할 때 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2. 효과는 두 개의 ‘경우’로 나뉘며 또한 한 가지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3. 첫 번째 경우입니다. 민첩 능력치 80포인트 이하, 행운 능력치 80포인트 이하인 경우 : 각각 2포인트 만큼 상승합니다.
4. 두 번째 경우입니다. 민첩 능력이 90포인트 이하, 행운 능력치 90포인트 이하인 경우 : 각각 1포인트 만큼 상승합니다.
5. 마지막 선택지입니다. 사용자의 여섯 능력치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정돼 2포인트 만큼 하락합니다. 그리고 차감된 포인트에 2를 곱해 4포인트 만큼 되돌아옵니다. 되돌아온 능력치 포인트는 자유롭게 올릴 수 있지만, 해당 능력치가 하락한 능력치의 십의 자리(일의 자리는 0으로 계산합니다.)에 해당하는 수치를 초과할 경우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피 묻은 스카프(Bloody Scarf)』
(일반 설명 : 낙원의 왕이었던 아담이 여왕 이브에게 선물한 스카프입니다. 아담은 밀려오는 마물의 군대에 맞서 용감히 저항했지만, 끝없이 몰려드는 군세를 전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아담이 최후를 맞았을 때, 이브는 왕의 옆으로 다가가 스카프로 흐르는 피를 닦았습니다. 낙원의 왕이며 반신이었던 아담의 피가 묻어, 스카프에 특별한 능력이 깃들었습니다.)
(상세 설명 :
1. 스카프를 두를 경우 착용자의 이동 속도가 한층 상승합니다.
2. 아담의 권능 중 하나인 ‘동화(Assimilate)’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3. 아담의 권능 중 하나인 ‘흡수(Absorb)’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피 묻은 스카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고연주에게 대급할 예정이었다. 효과도 잘 어울리고 그녀가 머셔너리에 공헌한 일이 많으니 다들 납득할 것이다.
다만 ‘아르쿠스 발키리 소환 세트’의 경우, 상황이 조금 복잡했다. 우선 가장 적합한 대급은 차소림이며 차선책으로는 유정이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유정의 클래스는 레어 클래스 묘족 용병을 기반으로 한 ‘여명의 검투사’였다. 즉 두터운 장갑과는 맞지 않는 사용자였다.
‘차소림이 진짜 어울리는데.’
차소림에게 주는 게 최선이라는 선택은 몇 번을 생각해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냉큼 주는 것도 문제였다. 결산할 장비가 좋아도 너무 좋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최근에 머셔너리에 들어왔으며 활동이라고 해봤자 ‘잃어버린 낙원’에 참가한 것밖에 없다. 사용자 정보는 인정하지만 공헌도를 따지면 주기 이래저래 눈치가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갑자기 말을 하지 않아서일까. 한껏 좋았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남은 장비들을 두고 고민하는걸 알아챈 모양이다. 하여 빠르게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 아르쿠스 발키리 소환 세트는 차소림에게 지급하자. 그리고 이브의 혈통으로 유정이를 달래는 거야.’
결국 짧게 숨을 뱉고서 나는 침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클랜 로드가 이런 모습을 오래 보이는 건 좋지 않다. 그러니 불화의 여지가 있더라도 소신껏 가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은은한 빛을 내뿜는 목걸이 앞에 섰다. 그리고 클랜원들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여러분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장비를 수집하려고 탐험하는 게 아니라 사용하러 탐험을 한다고요. 물론 무분별한 배분은 저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클래스에 관해서는 철저히 관리를 하고 있고, 장비도 완전 지급과 대급 방식으로 구분한 겁니다.”
이윽고 목걸이를 들어올리자 클랜원들이 시선이 따라 올라오는 게 보인다.
“이미 다들 보셨으니 알겠지만, 이 목걸이는 발키리 세트를 소환하는 아주 좋은 장비입니다. 어느 정도 제한은 있지만, 권능을 사용할 수 있고 능력치도 올려줍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예. 일단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이 장비는 사용자 차소림에게 대급할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가장 잘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여러 클랜원들이 유정을 쳐다봤다. 다들 그녀의 뾰족한 성격을 아는 만큼 혹시 모를 일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정의 얼굴은 매우 담담했다. 아니, 마치 목걸이에 관심도 없었다는 것처럼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기까지.
유정을 보며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여명의 검투사는 묘족 용병을 기반으로 한 레어 클래스입니다. 즉 신속한 상황 판단과 재빠른 몸놀림이 요구되는 만큼, 몸을 무겁게 만드는 아르쿠스 발키리 소환 세트는 맞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이 목걸이 보다는, 민첩과 행운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이브의 혈통을 지급하겠습니다.”
그 순간 유정은 설핏 시선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일견 담담해 보이지만, 눈동자에는 아쉬움 한 줄기가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3초 정도 지났을까? 유정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어슴푸레 웃으며 조용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클랜원들은 잠깐 조용했지만 곧 유정을 따라 박수를 쳐주었다. 이내 분연히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혹시 생떼를 쓰면 어쩌나 싶었는데 어느 정도 납득한 듯싶었다.
이윽고 유정에게 ‘이브의 혈통’을 건넨 후 나는 차소림에게로 이동했다. 어색한 얼굴로 자꾸 양 옆만 번갈아 보는 게 이러다 계속 기다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차소림. 축하합니다.”
“머, 머셔너리 로드. 이건…. 저에게 너무 과분합니다.”
“하지만 차소림 말고는 어울리는 사용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대급인데요.”
“하, 하지만….”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차소림. 나는 동기 부여도 잊지 않았다.
“그만큼 열심히 활동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창고에는 시크릿 클래스 아르쿠스 발키리도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열심히 활동하면 그것 또한 얻을 수 있겠지요.”
“아, 아앗…!”
나는 차소림에게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녀는 양손을 목으로 감쌌지만 이미 한 발 늦은 상태였다.
이윽고 환히 웃고 있는 클랜원들을 향해 몸을 돌리…. 아니. 왜 여성 클랜원들은 노려보고 있는 거지…? 아, 아닌가?
처음 돌았을 때는 분명 노려보는 것 같았는데 눈 한 번 깜빡이자 다들 웃는 얼굴로 변했다. 아무튼 박수가 잦아들어,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남은 피 묻은 스카프는 사용자 고연주에게 대급할 예정입니다. 이의 있으신 분 계십니까?”
클랜원들은 전원 “아니요.”로 합창했다. 클랜원들에 대한 고연주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한 번 머리를 끄덕인 후 결산을 마치기로 했다.
“그럼 이것으로 결산을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피 묻은 스카프’를 마지막으로 모든 결산이 끝났다.
“언니. 축하해요.”
“축하해요. 사용자 차소림.”
축하는 건네는 이들과 감사를 표하는 이들. 클랜원들의 얼굴은 다행히 밝고 활기차 보였다. 솔직히 약간 걱정한 감도 없잖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나름 잘 넘어간 것이라 생각됐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일단 핵심 장비들은 결산을 끝냈지만 남은 장비들은 더욱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앞으로 클랜원들에 한해 창고를 전면 개방할 예정입니다. 혹시 원하는 장비나 클래스가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한 후, 지급 또는 대급 여부에 대해 결정하겠습니다.”
남은 장비는 많다. 기존에 보류한 장비들부터, 이번에 새로 얻은 특수 보석, 낙원의 심장, 여러 장신구들, 요정 여 왕과 페가수스의 알 등등. 그것들 또한 매우 좋은 장비였지만 장착이 아닌 특수한 상황에서 사용할 것들이라 결산에서 제외한 것이다.
“오빠. 빨리빨리.”
“오라버니~.”
가만히 상념에 잠겨있을 때, 일순 유정과 안솔이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결산을 최대한 빨리 끝내달라고 했는데, 한시라도 빨리 준비한 걸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하여 알겠다고 대답한 후 박수를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들 주목. 결산이 끝났습니다. 지급 받은 장비는 나중에 보도록 하시고, 일단은 축제를 시작하는 게 낫겠지요?”
그와 동시에 여성 클랜원들 전원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흡시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잠시 동안 멍하니 보다가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 여성 클랜원들이 준비한 축제를 즐길 시간이네요.”
*
머셔너리 하우스 1층. 식당 앞 복도.
“아 배고파. 배고파 죽겠는데 왜 이렇게 문을 안 열어…. 도대체 뭘 준비했길래….”
“헤헤. 형님. 그래도 기대되지 않아요?”
“기대는 무슨…. 야, 한결아. 이쪽으로 와봐.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어…. 정말 그러네요? 와. 저 어제부터 굶었는데.”
안현이 배를 슬슬 문지르더니 식당 문에 딱 붙어 코를 벌름거린다. 녀석을 따라 코를 벌름거리는 한결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결산이 끝난 후 축제가 시작됐다. 아니. 정확히는 시작 바로 전이라고 할까.
현재 머셔너리의 남성 클랜원들은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식당에 들어가기 전 이구동성으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금방 준비하겠다고는 했는데 기다리는 게 벌써 2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안현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형. 그냥 확 밀고 들어가버릴까요? 영화에도 자주 나오잖아요. 형이 모두 조져! 이렇게 외치면 다들 우루루 몰려들어가서….”
“…네가 한 번 해봐.”
안현이 정말 하겠다는 얼굴로 문고리를 잡자, 한결은 죽겠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얘도 참 웃음이 헤퍼서 큰일이야.
이윽고 안현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차 형. 그러고 보니 연주 누님이요. 오늘 못 오시잖아요?”
“그렇다고 하더군. 결산 한 시간 전에 연락이 왔어. 내부 사정으로 아카데미 기간이 연장됐다고 하던데.”
그랬다. 고연주는 원래 당일 수료식을 마치고 바로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모종의 사정으로 귀환이 연기된 상태였다. 그때는 이미 축제 준비를 거의 끝낸 상태라 다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축제 불참을 선언했다.
“아하…. 그래도 엄청 아쉬워하실 것 같은데. 제가 통신용 수정구라도 가져올까요? 축제 구경이라도 하시라고요.”
“맞아. 안 그래도 구경하고 싶다고 하길래 이미 가져왔단다.”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자 안현은 킥킥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때였다.
“준비 다 끝났어요! 이제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유정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 안현이 반색하며 문을 열려는 순간 영감님이 한 발 앞서 제지했다.
“도대체 뭘 준비했는지는 모르지만 다들 고생했을 걸세. 그러니 설령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좋아해주고 기뻐해주는 게 어떤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안현은 머쓱히 머리를 끄덕였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윽고 문이 활짝 열리며 식당의 광경이 드러났다. 그리고 바로 안쪽에는 두 여인이 양손을 모은 채 얌전히 시립해 있었다. 그러더니 배꼽에 손을 모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머셔너리 축제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헤헤. 환영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비롯한 모든 남성 클랜원들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두 여인의 정체는 바로 유정과 안솔이었다. 안솔은 고용인들이 입는 메이드 복장이었는데, 그럭저럭 봐줄만한 정도였다.
그러나 유정의 복장은 가히 파격이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왜들 가만히 있어요? 어서 안 들어오고? 랄랄라.”
유정이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자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복장은 바로 바니 걸 복장이었다. 다만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 엉덩이에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달았다는 것 정도? 또한 노출이 굉장히 심했다.
안현이 입을 쩍 벌리더니 삿대질을 하며 물었다.
“너, 너! 그, 그 복장은 도대체 뭐야?”
“응? 이게 어때서? 히히. 조금 야한가?”
“아이고. 잘하는 짓이다. 가슴은 절반도 넘게 드러내고, 허벅지에는 망사 스타킹? 얼씨구. 등은 아주 작정하고 노출을 했네.”
“왜. 귀엽잖아. 그리고 한 번 입어보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너 보라고 입은 건 아니니 신경 끄시지?”
“아니. 신경 쓰인다고. 안 쓰일 수가 없잖아.”
“킥킥. 왜. 꼴리냐? 야~옹~.”
유정은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요염한 표정을 짓더니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렸다.
“아악! 내 눈! 내 누우우운! 재룡이 형! 솔아! 얼른 치료를!”
안현은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고, 꿈틀꿈틀 발광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는다. 결국 금세 벌떡 일어난 안현은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아. 난 그냥 갈래. 너 보니까 갑자기 입맛이 확 떨어졌어. 속도 이상하고.”
“그거 좋네. 나가. 나가서 너 혼자 밥 먹어. 아주 식당에 들어오기만 해봐. 죽여버릴 거야.”
어디서 났는지, 유정은 스쿠렙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상큼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진짜 나가는 건 싫었는지 안현은 슬그머니 발길을 돌렸다.
“에이. 이 좋은 날 그만 싸우세요. 문도 열었는데 얼른 시작하자고요. 꼬르륵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요. 자자. 모두 들어오세요.”
이윽고 둘 사이로 제법 근엄한 얼굴을 한 안솔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걸음걸이가 여전히 모델 워킹과 비슷한 게, 아직도 성녀 놀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비로소 눈에 잡히는 식당의 광경에 미약한 탄성을 질렀다.
식당의 구조가 변했다. 흡사 뷔페를 보는 느낌이었다. 홀 중앙에는 이곳 저곳 테이블이 보기 좋게 배치돼 있었고, 주방 쪽 외곽에는 수많은 음식과 음료들이 보기 좋게 쌓여져 있다.
그 중 가장 압권은 바로 여성 클랜원들이었다. 그녀들은 각자 앞치마를 입은 채 각자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의 탄성을 들었는지 유정은 뻐기는 미소를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일단 축제에 필요한 음식들은 대부분 만들거나 구매했어요. 종류별로 나눠놨으니 알아서 가져가 드시면 되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저기 우리 언니들 요리하는 거 보이시죠? 언니들이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서 접시를 내미세요. 그럼 즉석에서 직접 요리한 음식이 나온답니다? 어때요?”
“우우…. 나도 말하고 싶었는데…. 언니가 다 말해버리면 어떡해요….”
‘대단하군.’
나는 연신 속으로 감탄했다. 분위기 있게 식당을 개조한 거나 음식 준비도 좋았지만, 직접 요리한 음식이라는 말에 갑작스레 설레는 마음이 일었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다른 남성들도 한층 들뜬 얼굴이었다.
잠시 후, 유정과 솔은 한 쪽에 쌓인 접시를 집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에게 나누어주며 가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참고로 요리에 자신 없는 나와 솔이는 서빙 담당이에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아. 경고하건대, 눈으로 보는 건 자유지만 만지는 순간 각오들 하세요. 히히.”
“지랄. 만지라고 해도 안 만진다.”
안현은 불퉁한 얼굴로 투덜대더니 낚아채듯 접시를 받아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안현을 시작으로 남성 클랜원들도 한 명 두 명 접시를 받아 이동을 시작했다.
“아. 오빠는 마음대로 만져도 돼. 클랜 로드 특별 서비스야.”
“그런 서비스는 필요 없단다.”
유정이 어여삐 윙크하며 접시를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담담히 대꾸하고 접시를 받았다.
이윽고 주방 쪽을 향해 걸으려는 찰나, 앞에서 어색이 서 있는 우정민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원혜수의 손을 꼭 잡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하여 천천히 다가가 등을 찌르자 이내 깜짝 놀라 돌아보는 우정민을 볼 수 있었다.
“아. 클랜 로드.”
“사석입니다. 말 편하게 해도 됩니다.”
“그, 그런가. 하하하…. 후.”
“왜 가만히 있습니까. 축제는 이미 시작했는데.”
우정민은 알고 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근데 혜수가 잠깐 구경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우~.”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원혜수가 옹알이를 한다. 설핏 시선을 돌리자 아기 유니콘을 꼭 끌어안은 채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한 게 뭔가 무척 신기한 모양이다.
그러다 문득 원혜수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꽤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녀의 배는 볼록 솟아오른 상태였다.
우정민이 입을 열었다.
“…어색하군.”
“아직도 이곳이 어색합니까?”
“응. 모든 게 어색해. 하지만 나쁜 의미는 아니야. 방금했던 결산도, 또 이런 축제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행복이 찾아온 느낌이야.”
“뭐, 기분은 좋아 보이는데요.”
우정민은 원혜수의 배를 몇 번 쓰다듬더니 낮게 웃었다.
“그래 맞아. 기분 좋아.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감이라 그런지, 어색해 죽을 지경이라고. 흐흐.”
“우…. 우….”
그때 원혜수가 우정민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제 배가 고픈지 애처로운 얼굴로 배를 쓱쓱 쓰다듬는다.
“아무튼 고맙다. 클랜 로드. 너는 내 은인이다.”
우정민은 어깨를 한 번 툭 치더니 이내 원혜수를 데리고 한 쪽으로 향했다.
‘은인이라.’
은인. 좋은 말이지.
잠시 동안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다른 음식들도 많았지만 일단 여성 클랜원들이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음식부터 먹을 생각이었다.
‘그럼 어디부터 갈까?’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밤새 쓴다고 썼는데 여기까지가 한계였네요. ;ㅅ;
실은 뒤에 내용으로 4천자 가량이 더 있기는 한데, 손을 더 봐야 합니다. 즉 퇴고를 더 해야 하는데…. 지금 더는 글을 보는 게 힘들 지경입니다. -_-a 자꾸만 졸음이 와요. 휴.
원래는 내일 외전이 끝나는 날이지요? 피치 못하게 외전이 1회 더 늘어났지만, 끝나는 날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1회 추가로 올리고, 내일 마지막 회 올리면 예정했던 외전 종결 날짜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량 조절 실패에 다시 한 번 사죄 오늘 연참으로 예정했던 분량을 끝내겠습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