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25
00424 10. 마지막 이야기(9/9). =========================================================================
즉석 음식 부스는 총 여섯 곳이 아닌 네 곳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간중간 부스 안으로 두 명이 보이는 게 서로 힘을 합쳐서 요리하는 곳도 있는 모양이다. 뭐 아무려면 어떠랴. 직접 음식을 만들어 준다는데.
발걸음이 처음 다다른 곳은 바로 하연과 한나가 있는 부스였다. 고소한 냄새가 물씬 흘러 들었고, 한나의 실력이야 ‘러브 하우스’때 이미 맛본 적이 있었다. 즉 검증된 실력이라고 할까.
“고기! 고기!”
“고기~! 고기~!”
먼저 도착한 선객이 있었다. 안현이 접시를 탕탕 두드리며 고기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결이 따라 하는 게 자못 마음이 걸렸지만, 즐거워하는 얼굴로 보아 이번 한 번은 넘어가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수현. 우리 쪽에 먼저 오신 거예요?”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자 설핏 고개를 든 하연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예. 냄새가 좋아서 절로 이끌리게 되더군요.”
“호호. 좋은 선택이에요. 우리가 이겼다 한나야. 그렇지?”
“그럼요. 역시 우리 클랜 로드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요. 후후. 아, 언니. 다 구웠어요.”
“좋았어. 수현! 접시 이리 주세요. 담아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 먼저 온 게 그렇게 중요한가? 어차피 모두 가볼 생각인데.
아무튼 얼른 접시를 내밀자 하연이 하나씩 하나씩 고기를 덜기 시작했다.
“어! 하연 누님! 우리가 먼저 왔잖아요!”
그러자 선객인 안현이 강력한 불만을 제기했지만.
“얘는. 찬물도 위아래가 있잖니. 아니면 다른데 가서 먼저 먹고 오던가.”
“기다리렴. 곧 새로 구워줄게. 후후.”
하연과 한나의 답변에 눈물을 터뜨렸다. 아니. 왜 우는 걸까. 괜히 미안해지게.
예상대로 고기는 상당히 맛있었다. 적당히 퍼지는 고소한 향기와 부드러이 씹히는 육질이, 정말 요리사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나는 의외의 기분을 느끼며 하연을 쳐다보았다.
“하연. 원래 이렇게 음식을 잘했나요?”
“절 어떻게 보신 거예요? 저도 요리할 줄 아는 여자….”
그 순간 한나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일순 눈치를 보더니 곧 어색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호호. 실은 못해요.”
“하지만 이건 맛있는데….”
“축제 계획을 짜자마자 바로 한나를 붙잡았죠. 요리를 못하는 사람은 잘하는 사람 옆에 붙어서 도와주기만 하면 되거든요.”
“아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나는 마주 웃었다. 한나는 예의 상냥한 미소를 보인 채 어깨만 으쓱였다.
나는 남은 고기를 안현에게 넘겼다. 마저 먹고 싶기는 했지만 녀석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다음 부스로 이동하자 이번에는 영감님과 신재룡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느긋이 야채를 먹고 있는 게 이번 부스 요리는 야채 종류라는걸 알 수 있었다.
“여기들 계셨습니까.”
“허허, 이거 클랜 로드가 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클랜 로드. 마침 잘 오셨습니다. 갓 볶은 야채가 아주 맛있습니다. 한별이 솜씨가 아주 좋아요.”
‘한별이라고?’
신재룡의 말에 얼른 부스 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에이프런 차림의 한별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불을 줄이고…. 반 숟갈 양념을 넣어서….”
내가 온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다. 예의 쌀쌀맞은 눈동자는 어디 갔는지, 한별은 코에 양념을 묻힌 채 열심히 야채를 볶고 있었다. 꽤나 신선한 풍경이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한별아.”
한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는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오셨어…. 오, 오빠?”
“가만히.”
한별은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요리 중이라 그런지 상체만 살짝 휘었을 뿐이었다. 이내 그녀의 매끈한 콧마루를 가볍게 훔쳐주었다.
“여기 양념이 묻었거든.”
엄지에 묻은 양념을 보여주고 나서 나는 살짝 혀로 핥았다. 약간 짜긴 했지만 맛은 나름 괜찮았다.
한별이 기함했다.
“오, 오빠! 그, 그걸 드시면 어떡해요…!”
“응? 왜? 나름 맛있는데?”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양념 맛은 나쁘지 않았어. 아무튼 부스 평가가 좋던데, 나도 한 접시 줄래?”
천연덕스레 접시를 내밀자 한별은 발갛게 물든 얼굴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연신 힐끔힐끔 쳐다보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에 그리 창피할까. 한별은 시시각각 얼굴을 붉히면서도 용케 야채 볶음을 올려주었다. 이내 한 젓가락 들어 입안으로 가져가자, 톡 쏘는 향과 함께 상큼한 내음이 물씬 흘러들었다. 솔직히 어르신들 말처럼 아주 맛있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한창 야채를 우물거리고 있자 한별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때요 오빠?”
“생각보다 괜찮네. 먹을만해.”
“정말이요?”
“응.”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한별은 한결 안도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영감님과 신재룡은 동의 못하겠다는 듯 뚜벅뚜벅 걸어와 재차 접시를 내밀었다.
“허허. 클랜 로드. 생각보다 괜찮다니요. 이 정도면 매우 맛있는 거지요. 안 그런가 신재룡?”
“맞습니다 영감님. 양념이 톡 쏘고 야채 향기도 아주 좋은 게, 아무래도 한별양이 요리에 재능이 있나 봅니다.”
영감님과 신재룡이 주거니 받거니 하자 한별의 몸이 살짝살짝 비틀린다. 과한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아,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한별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영감님은 편애는 멈추지 않았다.
“으음, 아니기는. 당장 시집 보내도 되겠는데. 안 그렇습니까? 클랜 로드?”
“그렇습니다. 한별양의 미래의 남편은 분명 무척 행복할겁니다. 클랜 로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물론 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한창 맛있게 야채 볶음을 먹고 있는데 갑작스레 이상한 질문이 들어왔으니.
“할아버지…. 재룡 아저씨…. 우리 오빠한테 왜 그러세요…. 제발, 그만 좀….”
한별의 몸이 비틀리다 못해 배배 꼬인다. 그 모습이 자못 신선했는지 두 어르신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신재룡, 들었나?”
“하하하하. 들었습니다. 우리 오빠 라네요. 이거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아 진짜 왜들 그러세요…!”
음색이 울먹울먹하는 게 이제 거의 애원 조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나마저 웃으면 정말 울릴 것 같아,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는 길을 선택했다. 어차피 거의 다 먹어서 이제 슬슬 이동해야 할 때였다.
다음 부스의 요리사는 바로 차소림이었다.
“오. 클랜 로드 왔는가. 후루룩.”
가자마자 사샤 펠릭스가 아는 체를 해왔다. 동시에 가는 면을 후루룩 빨아들이는 게 이번에는 국수 종류인 듯싶었다. 국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요리라 한껏 기대감이 감돌았다.
이윽고 부스 앞에 서자 얌전히 재료를 다듬고 있는 차소림을 볼 수 있었다.
“사용자 차소림.”
“어서 오세요. 클랜 로드.”
“사샤가 맛있다고 하더군요. 국수 한 그릇 가능할까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차소림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손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조용하면서도 정확한 칼 소리가 귀를 즐겁게 만든다. 나는 조용히 차소림을 응시했다. 희고 고운 목에 걸린 목걸이가 눈에 밟혔다.
차소림 또한 에이프런을 단정히 차려 입었는데 아주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차분한 이목구비와 곱게 틀어 올린 머리가 꼭 남편을 맞이하는 새색시 같다고나 할까.
“크크. 기대해도 좋다. 우리 주인의 음식 솜씨는 정말로 좋으니까.”
멀거니 차소림을 보고 있자 옆에서 사샤의 우쭐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연주도 만만찮다 는 투로 응수했고, 사샤는 언제 한 번 먹어보고 싶다는 말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고 있자, 부스서 “완성했습니다. 접시를 주십시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차소림은 정성스레 국수를 담더니 이내 접시를 잡은 팔을 쭉 내밀었다.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예쁘게 하는데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는 않는다. 고개는 옆쪽으로 틀었고, 눈은 반쯤 감아 시선을 내리깐 상태였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의례적으로 대꾸한 후 젓가락을 들었다.
후루룩.
‘어?’
이윽고 국수를 빨아들인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면발은 살살 녹아 혀로 부드럽게 녹아 들고, 면에 섞인 야채는 아삭아삭 씹혀 식감도 뛰어났다. 그리고 온몸에 퍼지는 따뜻한 국물까지.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정말로 고연주와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눈을 크게 떠 쳐다보자, 어느덧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얌전히 손장난만 하는 차소림이 보였다.
“어떠세요?”
이내 평가를 물어와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아주 대단합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소림은 조신이 머리를 숙이고는 다시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리드미컬한 칼 소리를 반주 삼아 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한 접시 더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부스 한 곳이 남아 그곳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하여 다시 오겠다고 말한 후 다음 장소로 걸음을 틀었다. 이제 남은 인원은 비비앙과 남다은이었다.
‘다들 음식 솜씨가 좋네.’
잘은 모르지만, 비비앙과 남다은의 음식 또한 맛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가 들었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부스 앞에 서려는 찰나.
철퍽!
“크, 클랜 로드!”
누군가 갑작스레 튀어나오더니 내 허리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
의아히 시선을 내리자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비틀거리는 박현우를 볼 수 있었다. 다리는 덜덜 떨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는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모습이었다.
“사용자 박현우?”
“가, 가시면 안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이 앞쪽 부스로 가시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남은 장소가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 절대로 가시면 안됩니다! 클랜 로드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습니다!”
박현우는 나를 더욱 세게 부여잡았다. 마치 이 앞으로 절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듯이.
그때였다.
“어! 김수현 왔네?”
“어머. 우리 클랜 로드가 오셨어요?”
두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박현우는 “히익!”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하여 당최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꺽꺽…. 그, 그만…! 보글보글….”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선유운이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입에 게거품을 문채로. 비비앙은 옆에 쭈그려 앉아, 검은 덩어리를 그의 입안으로 꾹꾹 밀어 넣는 중이었다.
퍽! 퍽! 퍽! 퍽!
그리고 검후는 에이프런은 두른 채 설아를 힘차게 휘두르고 있었다. 한 번 도마를 내려칠 때마다 재료가 사위로 크게 튀어 오른다.
“클랜 로드. 기다렸어요. 열심히 만들었다고요. 그러니, 부디 맛을 한 번 보아주시겠어요? 아하하!”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김수현! 빨리 안 오고 뭐해? 여기는 말이야, 직접 먹여주는 서비스도 해준다고. 요호호호.”
그러나 비비앙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나를 끌어당겼다. 여지없이 끌려가면서, 나는 본능적으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정체불명의 음식.』
(일반 설명 : 여러 재료가 복합적으로 들어간 음식인건 알겠습니다. 그러나 요리사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상세 설명 : 어쩌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냥 먹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먹지 않는 것을 권한다 라.
나는 멍하니 정보를 응시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병신 같은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거지?’
나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야, 잠시만. 나 갑자기 배불러.”
“에이. 그러지 말고 한 입만 먹어봐. 정말 맛있다니까? 봐봐! 얘도 한 입 먹고 실신했다고.”
“실신할 정도로 맛있나 봐요. 아하하.”
선유운의 고개가 툭 떨구어졌다.
‘…….’
이건 만행이다.
“김수현! 아~.”
“수현씨! 자, 아 하세요.”
그러나, 어느새 정체불명의 검은 덩어리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양쪽에서 내밀어진 덩어리를 보며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이 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식사 시간이 지나고, 축제는 다음 장으로 돌입했다. 사실 다음 장이라고 해봤자 별거는 없다. 비치된 음료를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바로 그게 필요한 거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자 목을 받치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올리니 사분사분한 미소를 내려 보내는 한나가 보인다.
“일어났어? 속은 좀 괜찮아?”
“아직도…. 죽을 것 같아.”
아까 강제로 음식을 흡입한 탓에 기절할 만큼 속이 뒤집혔지만, 조금 쉬니까 약간 나아진 것 같다.
“후후. 조금 더 쉬어.”
보들보들한 허벅지에 한껏 머리를 비비다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얘는 왜 축제는 안 즐기고 이러고 있는 걸까.
허벅지 아프겠다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식당 벽에 기대어 축제의 현장을 응시했다.
가장 처음 눈에 보인 건 바로 안현이었다. 녀석은 꽤나 긴장한 얼굴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걸음을 힘차게 내디디며 차소림 앞에 섰다. 걸음걸이가 꼭 군대 제식 훈련을 보는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사용자 차소림! 저는 안현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네?”
차소림은 일순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지만,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반색하는 안현을 보며 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혜수는 여전히 아기 유니콘과 즐겁게 노는 중이다. 우정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연초를 피우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유정은 사샤 펠릭스와 술 내기 시합을 하고 있었고, 심판은 하연이었다.
안솔은 비틀비틀 걷다가 픽 쓰러졌으며, 먼저 쓰러져있던 한결은 그녀의 침대가 되었다.
영감님과 신재룡은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껄껄 웃고 있었다.
비비앙은 아까 만든 음식을 담은 접시로 이곳 저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누군가가 걸렸다. 공교롭게 앞을 지나가던 선유운이었다.
“이봐! 너…!”
“으아아악!”
선유운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쫓아가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떠들썩한 소란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다행스럽게도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수현아. 있잖아….”
그렇게 한참 동안 축제를 지켜보다가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엇차!”
“어? 어디가?”
“후, 힘들어서. 잠깐 쉬고 올게.”
“으, 응? 그럼 축제는?”
“글쎄. 숙소에서 조금 쉬다가 괜찮아지면 내려오마. 어차피 밤샐 것 같은데.”
“…마실 거라도 좀 챙겨서 가져다 줄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이내 십자가 형태로 쓰러진 안솔과 한결을 넘어 신속히 식당 밖으로 나섰다. 이어서 복도를 지나쳐 계단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핏 얼굴을 들이밀자 가만히 서 있는 여인과 고개 숙인 사내를 볼 수 있었다. 한별이와 박현우였다.
“미안하다. 한별아. 용서해다오.”
“…왜 지금 와서 이러시는 거예요?”
“머셔너리에 왔으니까. 그리고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제대로 활동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네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머리 드세요.”
그러나 박현우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 한별은 기다랗게 숨을 내쉬더니 차분히 그의 손을 잡았다.
“황금 사자에서 현우 오빠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오빠 뜻이 아니었다는 것도요.”
“한별아….”
“우리는, 잠깐 길이 갈라졌을 뿐이에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렇죠?”
“…고맙다.”
나는 조용히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사실상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고 더 보는 건 예의가 아닐 터.
‘잠깐만. 이러면 숙소에 못 가는데.’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나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속은 여전히 안 좋았지만 축제는 더 즐기고 싶었다. 찬바람을 쐬어 속을 진정시키고 겸사겸사 정신도 차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정원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세찬 바람을 들이키자 가슴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복잡했던 속이 가라앉고 헝클어졌던 머릿속이 정리된다.
한동안 바람을 맞던 난 연못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친김에 간단한 세안이라도 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정원을 가로질러 막 연못에 도착했을 때였다.
“응?”
연못에는 선객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클랜 로드?”
먼저 와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남다은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달빛으로 반짝이는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찬란한 빛에 휩싸인 그녀가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는 어떻게….”
“왜 이곳에….”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남다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잠깐 생각할 것도 있고.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이하 동문입니다.”
그러자 남다은은 잘됐다는 얼굴로 한 손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와. 그럼 같이 바람이라도 쐴래요?”
“좋습니다.”
잠시 후, 나는 남다은의 옆에 앉게 되었다. 조용한 밤. 달빛이 비치는 연못. 그리고 어색함이 흐르는 침묵.
이 까닭 없는 적막함이 불편했는지 남다은이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실은 몸에 좋은 것만 잔뜩 넣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음식인지도 모르고….”
“하하. 괜찮습니다.”
사실 속으로 “정말 알고는 있니?”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간신히 가라앉힌 속이었고, 생각만해도 구토가 쏠리는 음식이었다. 하여 얼른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나는 말문을 열었다.
“아. 혹시 저번에 로비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십니까?”
“로비라면…. 아하하. 그때 저한테 쓴 소리 하셨던 거죠? 괜찮아요. 이미 잊었는걸요.”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검후가 생각하는 그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음? 그래요? 그럼…. 어떤 뜻으로 말씀하신 건데요?”
남다은의 반문에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날을 회상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그녀는 웃는 모습이 정말로 예뻤다.
나는 솔직히 입을 열었다.
“그때…. 남다은이 비비앙이랑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거든요.”
“…네.”
“그뿐입니다. 그냥 자주 그 모습을 보았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얘기한 거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남다은은 잠깐 생각하는 듯싶더니 손바닥을 짝 치며 입을 열었다.
“아하. 그러니까 제가 웃는 모습이 예뻤고, 자주 그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시죠?”
“예.”
“진짜요?”
“예.”
왠지 모르게 들뜬 음색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검후는 미약한 비음을 내더니 갑작스레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주억인다. 입가에 진한 미소가 배인 게 매우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검후의 시선을 느껴, 나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해해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축제는 어떻습니까? 제법 즐거워 보이던데.”
“그럼요. 즐겁고말고요. 홀 플렌인에 들어와서 처음 경험하는 축제인걸요.”
“아. 축제가 처음입니까?”
“클랜내에서 하는 축제는 처음이에요. 후후. 비단 축제뿐만이 아니라 여기는 매일매일이 즐거운 곳이에요…. 그래요. 지금 생각해보면, 머셔너리에 들어오는 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고 느껴요.”
남다은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얘기 후, 나를 보며 자꾸 웃어주는 모습에 절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군요. 저도 검후를 받아들인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때는 저도 조금 놀랐어요. 저를 둘러싼 소문 때문에 안 좋게 보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해주셨거든요.”
“솔직히 약간 고민하기는 했습니다. 다만 소문 때문에 고민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남다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스탄텔 로우의 요청을 뿌리치고, 굳이 머셔너리로 온 게 조금 궁금했습니다.”
“음…. 제가 왜 머셔너리로 왔는지 그게 궁금하셨다고요?”
“예.”
“흠.”
사실이었다. 지금이야 꽤나 잘나가는 클랜일지몰라도, 그때 당시 이스탄텔 로우와 머셔너리를 엄연한 격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격차는 지금도 존재한다.
검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뭔가를 생각하는지 살짝살짝 입술을 깨물고 있다.
휘이잉, 휘이이잉.
문득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남다은은 살짝 나부끼는 머리에 손을 대어 가지런히 아래로 내렸다. 그 상태서, 그녀는 연못 중앙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조금 전 말을 들으니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어요.”
“경청하겠습니다.”
진지한 검후의 목소리. 나는 침착히 속을 가다듬으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아까처럼 들뜬 기색이 아닌, 한껏 가라앉은 눈동자가 눈에 들었다.
이윽고 남다은은 고요히 입술을 떼었다.
“질문하신걸 되물을게요. 클랜 로드. 제가 왜 머셔너리로 왔는지. 그 이유를 모르시나요?”
뜻밖의 말에 나는 의아히 고개를 돌렸다. 검후는 여전히 연못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살짝 엉덩이를 들어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왔을 뿐. 갑자기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왜 머셔너리에 왔을까요?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시는 건가요?”
“하하. 검후….”
“클랜 로드. 아니 수현씨….”
아련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비로소 남다은이 고개가 돌아 나를 정면에서 응시한다. 서로의 어깨가 맞닿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문득 땅으로 내린 손등을 덮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다시 한 번 여쭐게요. 정말로, 정말로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아주 조금이라도 짐작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검후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나고 있었다.
*
“여기도 없네.”
한나는 4층 숙소 방문을 닫으며 아미를 좁혔다. 분명 숙소에 올라가 쉬고 있겠다고 들었다. 그러나 김수현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나는 한동안 계단을 쳐다보다가 치, 혀를 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계단이 아닌 반대쪽 집무실이었다.
똑똑.
“수현아. 혹시 집무실에 있니?”
예의상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자고 있어? 일단 들어갈게.”
달칵.
한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집무실 또한 텅 비어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진한 아쉬움이 흘러나왔다.
“쉰다면서….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한숨을 푹푹 내쉬는 한나. 그녀는 이대로 몸을 돌릴까 하다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집무실 책상 너머로 달빛이 들어찬 창문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앞쪽에는 훤히 트인 테라스가 있었다.
“정원으로 나갔나?”
일리 있다는 생각에 한나는 슬며시 안쪽으로 들어섰다. 무단 침입인건 알지만, 창문을 통해 슬쩍 정원만 볼 생각이었다. 만일 김수현의 모습을 찾으면 정원으로 내려가고 없으면 다시 식당으로 복귀하리라.
한나는 금세 창문에 도착해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열린 틈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흘러들었다. 가져온 음료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품에 안으며, 그녀는 밖으로 나섰다. 하늘에 떠오른 달은 찬연한 빛을 뿌려 정원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나는 마력을 일으켜 안력을 돋웠다. 그리고 차분히 정원을 훑기 시작했다. 문득 음료 하나 갖다 주려고 별일을 다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싱겁게 웃었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한나의 눈길이 어느 한 쪽에서 멈췄다. 그곳은 유난히 빛이 반사되는 곳으로 바로 연못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연못에는 한 쌍의 남녀가 서로 사이 좋게 어깨를 기대어 앉아있었다.
꼴깍.
한나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안력을 크게 돋웠다. 그러자 손톱만하게 보였던 인영이 크게 다가오고, 흐릿했던 시야가 정확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어…!”
그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연못에 앉아있던 남성과 여성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맞닿은 것이다.
한나는 숨을 멈췄다.
쨍그랑!
그와 동시에,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적막한 테라스를 울렸다.
============================ 작품 후기 ============================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일단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 다음 회 자정 업데이트가 힘들 것 같습니다. 아마 오늘과 비슷한 시간에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마지막 회에도 들어갈 내용이 많거든요. 아무튼 최대한 빠르게 적겠습니다.
2.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다 거짓말.
3.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