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26
00425 10. 마지막 이야기(9/9). =========================================================================
도대체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는 것.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은, 사용자 정보라는 것으로 인간의 가치를 척도하고 가늠한다. 그 중에서 나는 높은 잠재성을 인정받아 괜찮은 수준의 사용자 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
– 저 사용자가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 수석이라며? 이름이 남다은?
– 응. 이미 여러 클랜에서도 눈독들이고 있다고 하더라. 좋겠다~.
그래. 홀 플레인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는 분명히 주목 받는 사용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사그라졌다.
그걸 도대체 누구를 탓해야 할까? 나? 아니면 가해자?
정답은 나였다. 사람을 함부로 믿은 나의 잘못이고 그릇된 선택을 한 나의 잘못이다.
그 한 번의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내가 사는 세상은 사용자 쪽에서 부랑자 쪽으로 강제로 변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변절자’ 이강산.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 누구보다 포근하게 웃어주던 그였다.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을 때만 해도, 초기에는 많이 힘들 거라며 귀찮을 정도로 챙겨줬던 그였다.
–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가 끝나면 나는 새로운 클랜을 창설할 생각이야.
– 다은아. 나와 함께 하지 않을래? 네가 나와 함께 해준다면 정말로 기쁠 거야.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때의 그는, 나에게 있어 이 척박한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식이 끝나고 나서, 내 기대는 철저히 빗나갔다. 앞으로 같이 활동할 동료들이 ‘부랑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안식처는 순식간에 지옥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회유와 협박.
– 밖에서 나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배신자라고 하더군.
– 너 또한 마찬가지야. 이제 그만 순순히 포기하고 네 운명을 받아들이지 그래? 부랑자 남다은. 크하하하!
부랑자들에게는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온갖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하루가 지날수록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했다.
다음에는 풀어달라고 애원했다.
그 다음에는 아니라고 발악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굴복하고 받아들였다.
사용자를 포기하고 부랑자의 운명에 순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아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언젠가 똑같이 뒤통수를 쳐주겠다고, 내가 받은 모든 수모를 되갚아주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그러려면, 일단 힘을 길러야 했다.
이후로 나는 철저히 부랑자 남다은이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연기에 불과했다. 겉으로는 순종하고 따르는척했지만 가슴속으로는 항상 서늘한 칼을 갈았다.
1년이 지나고, 시간이 흘렀다.
내가 포기했다 생각한 걸까?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한 부랑자들의 의심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부랑자 교육을 실시했다. 실력자들이 나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실전 경험도 풍부하게 쌓았다. 정말 이를 악물고 실력을 높이자, 주변 생활이 개선되고 대우도 점차 나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적을 통해 발굴한 시크릿 클래스 ‘검후’도 받았으며, ‘설아’라는 검도 받을 수 있었다.
대 간부 육성 계획에 희생된 사용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아마 그 즈음일 것이다.
나는 그때에 이르러서야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부랑자들 사이에 심한 알력이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이강산이 나를 부랑자의 대 간부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나를 대 간부로 만들어 ‘어떤 일’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나는 비로소 기다리던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감시가 풀리고, 동시에 이강산에게 한 가지 ‘지령’이 떨어진 것이다.
– 극비를 요하는 임무다. 최대한 소수로 움직여야 하니 너도 따라오도록.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이강산을 비롯한 다섯 명은 임무에 나섰다. 그리고 남은 부랑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비로소 가슴속 몇 년간 갈아왔던 칼을 꺼내 들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때 이강산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
그래도 괜찮았다. 비록 이강산은 죽이지 못했지만 사용자들의 도시가 눈앞에 있었다. 도시에 있을 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에, 이제야 다시 처음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살해한 부랑자들의 목을 베어 도시로 들어갈 때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일단 부랑자들의 목을 베어온 점은 인정받아 도시로는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 저 사용자 누구였더라? 상당히 낯이 익은데.
– 아아, 남다은. 시크릿 클래스 검후라고 하던데?
– 아~. 그 배신자?
– 배신자라니?
– 몰라? 쟤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하고 배신자 이강산이랑 사라졌잖아. 아, 그러고 보니 배신자의 첩이라고 해야 하나?
– 진짜? 그럼 백 퍼센트 부랑자랑 붙어먹었다는 소린데…. 도대체 왜 돌아온 거야?
도시는 내 생각만큼 따뜻한 곳이 아니었다.
도시에서 이강산은 ‘변절자’로 불리고 있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나를 보는 ‘사용자’들의 시선은 이강산을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이 꼬리표도 벗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부랑자로 다시 돌아오라는 전령도 무시했고, 전령을 전달한 첩자도 살해했다.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였다.
그러나 ‘변절자’라는 꼬리표를 벗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소문 들었어? 저 사람…. 아무래도 불안하지 않아?
– 왜 혼자서 행동하는 거지?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가 부랑자의 첩자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위장으로 전향을 했다는 말이 알게 모르게 퍼졌고, 사용자고 클랜이고 모두가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부랑자가 나에 대한 정보를 흘렸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용자들이 나를 불신하게 만들고, 동시에 내가 설 자리를 없애려는 수작이었다.
물론 ‘검후’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 이상, 이따금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곳도 있었다.
그날 클랜 가입 문제로 만났던 사내는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히 남는다.
– 사용자 정보는 인정하지만…. 솔직히 검후를 둘러싼 소문이 좋지 않은 게 사실이지요. 내부에서 반대가 심합니다. 글쎄요…. 이걸 어떡해야 하나….
– 정 그러시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검후. 저를 한 번 믿어보시겠습니까?
말은 빙빙 돌리고 있었지만 사내의 눈동자는 추악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강산이 본색을 드러낸 후 나에게 드러냈던 눈동자와 흡사했다.
그 순간 예전 비참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눈앞의 남자가 한없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도시로 들어오며 간신히 묻어둔, 아니 묻어두려 했던 감정이 일거에 폭발한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랑자에서 몸은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부랑자라는 생각이. 부랑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부랑자였을 때 기억을 잊지 못하고, 사용자들마저 나를 부랑자로 본다.
결과적으로 어찌어찌 한 클랜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나를 감시하기 위해 급조한 클랜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변한 게 없다. 간신히 사용자로 되돌아왔는데, 나는 이쪽에서도 감시 받는 처지였다.
그제야 뒤늦은 후회가 찾아 들었다.
너무 성급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나왔어야 했다. 간부가 되면 부랑자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을 더 많이 알 수 있었을 터. 최소 사용자들 틈에 섞인 첩자 리스트만 알았더라도, 이렇게까지 몸이 꽁꽁 묶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랑자들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첩자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 활동을 제한시켰고, 감시의 시선도 늦추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부랑자 말살 계획’의 참가 요청을 거절당한 후, 나는 결심했다.
‘은둔’하기로.
사실 따로 대안이 없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그렇다고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그래도…. 이대로 계속 살 수는 없으니 조용히 지내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려보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부랑자들의 감시를 최대한 피하며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어느 날, 북 대륙이 전쟁 소식으로 한창 떠들썩할 무렵. 부랑자 대 간부 중 한 명인 백서연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에게도 새로운 요청이 들어왔다. 서 대륙, 부랑자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두고 동부 진영으로 참가해달라는 전령을 받을 수 있었다. 도시로 들어온 후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기회가 온 것이다.
이윽고 동부 진영으로 이동했을 때, 나는 비로소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백서연의 자백으로 사용자들 틈에 섞여있던 ‘첩자’들이 낱낱이 밝혀졌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지령을 받은 ‘첩자’들이 곁다리로 일부를 실토한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결백이 완벽하게 밝혀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사용자들이 태반이었다. 이해는 간다. 아무튼 그곳에 있을 때는 놈들 또한 나를 완벽한 부랑자로 알고 있었을 테니.
하지만 ‘첩자’가 깡그리 색출됨으로써 전보다 모든 게 좋아졌다. 더는 감시를 받지 않고, 더는 행동에 제한도 받지 않는다. 선입관은 여전했지만 최소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길은 열린 셈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하루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를 둘러싼 상황이 완벽하게 풀려있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호기심도 일었다. 누구일까?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루지 못한 일을, 누가 이렇게 간단히 해낸 걸까?
도대체 누가,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준 걸까?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이라는 사용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
“솔직히 처음 봤을 때, 정말 이상했어요. 예전에 남자들을 볼 때마다 일었던 혐오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제가 어땠길래요?”
“그게…. 어땠느냐면….”
싸늘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우수수, 정원이 풀들이 서로의 몸을 비비는 소리가 듣기 좋은지 남다은의 눈꼬리가 빙그레 휘었다.
“동질감을 느꼈어요.”
“동질감?”
“그래요 동질감. 깊은 상처를, 깊은 슬픔을 담은 눈동자. 저를 보는 시선이 딱 그랬거든요. 분명 처음 보는데,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시선이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남다은과 비슷한 상처와 슬픔이 있는 사용자라는 건가?’
남다은은 설핏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없이 진지한 눈동자를 들어 고요히 입을 열었다.
“아마 수현씨는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때 프린시카에서 보았을 때, 처음 보는 여자가 계속 빤히 쳐다보니 말이에요.”
첫만남이라면 고려 클랜의 통제실을 말하는 건가. 확실히 그때 나를 빤히 쳐다보기는 했다.
“실은 한 마디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말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그러면서 한 가지 궁금함도 일었어요. 저 사람은 과연 어떤 일을 겪었길래 저런 눈동자를 하고 있는 걸까?”
“그리 생각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또 저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았거든요. 하하.”
한없이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막고자 던진 농담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다은은 내 말이 맞는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턱을 괴어 부드럽게 웃었다.
“네. 맞아요.”
“…아 그런가요?”
“궁금하고, 또 궁금했어요. 사용자 김수현을, 머셔너리 로드라는 사람을 한 번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몰래 조사도 해봤고요. 아마 관심이 없었다면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나는 입을 매만졌다. 언제나 이 입이 문제였다. 왜 가끔씩 내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는 걸까? 자꾸 이러느니 그냥 흘러가는 데로 놔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수현씨한테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바로 사용자 아카데미 때였어요. 수석을 차지하고 수많은 클랜들의 오퍼를 받았음에도, 통과의례 때 만난 애들을 데리고 세상으로 나섰죠.”
“그건….”
“수현씨 생각이 어떻던 간에, 제 입장에서는 정말로 멋있어 보였어요. 제가 만일 그 애들 중 한 명이었다면, 아마 굉장히 행복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제가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 바랬던 꿈이었으니까.”
남다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까 웃는 게 예뻐 보인다 말을 했을 때부터 여태껏 시종일관 웃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얘기해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전쟁 때, 특별 조원을 들어 수현씨를 테스트한 것도 같은 이유였어요. 한 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핑계가 생긴 거예요.”
“그때의 대련은 저도 기억합니다.”
“저도요. 어이가 없었죠. 0년 차 사용자가 첫 교환 때 힘으로 저를 압도하는데, 설아를 놓칠뻔했다고요.”
“하하….”
“그리고 설마 설마 했는데 패배하기까지.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갑자기 설아가 수현씨를 보고 난리를 치지 않나. 제가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요?”
“관심 있던 남자가 한순간 이상한 남자로 변해버렸군요.”
남다은은 어떻게 그리 잘 아냐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와 그녀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하하!”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어깨에 머리가 살며시 닿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까처럼 긴장되지는 않는다. 남다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이제는 그저 편안한 기분만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요. 왜 자꾸 이 남자에게 시선이 가는 걸까. 단순한 관심으로 시작된 감정이, 나중 가서는 스스로 물어봐도 모를 정도로 복잡해졌거든요.”
“그래서 도중에 시선을 피하기 시작한 겁니까?”
“네. 안 그래도 복잡해죽겠는데, 앞에만 서면 설아가 자꾸 진동을 보냈으니까요.”
“그럼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복잡하고, 잘 모르겠습니까?”
보통 때라면 내뱉지 못할 대담한 말.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음이 잔잔하니 말도 술술 나오는 기분이다. 어느새 처음의 불편한 기운은 사라지고, 묘한 기류가 나와 남다은의 사이를 감돌았다.
남다은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은 아니에요. 그때 느꼈던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알아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거든요.”
“계기라면….”
“바바라, 바바라에서였어요.”
이윽고 어깨에 기대었던 머리가 천천히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려는 듯, 남다은은 힘껏 숨을 들이켰다.
“후. 회의가 끝나고 수현씨와 만났잖아요?”
“그랬지요.”
“그때,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수현씨 앞에서 저를 영입하겠다고 밝혔을 때. 이상하게 싫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 보였습니다.”
“그리고 수현씨가 머셔너리에 오면 환영하겠다고 말해주었을 때. 그때는 반대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어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기분이 좋았답니다. 그렇게 상반된 기분을 느끼면서 겨우….”
그 순간, 남다은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동자에 흐르는 은은한 눈빛이 꼭 어떤 중요한 말을 하기 직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말을 해보라는, 해도 된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이후 포위에 참가하면서 저는 그날의 감정을 계속해서 곱씹었지요. 그리고 확신했어요.”
“…단순한 호의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다은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고요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호의를 넘어선 건 확실해요. 왜냐하면 한 가지가 더 있거든요.”
한 가지가 더 있다고 한다. 이윽고 남다은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 순간, 갑작스레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 내리는 정원. 어느새 땅거미가 진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물결을 따라 흐르는 반사광은 연못 주변을 반짝반짝 밝히고 있었다.
어두운 정원, 환히 밝혀진 공간 속에서.
“그러니까….”
마침내, 남다은이 입을 열었다.
“두근두근해요.”
그리고 나는, 멍하니 물었다.
“두근두근…. 이요?”
남다은은 크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차분히 내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팔에 힘을 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끌렸다.
이윽고 손가락에 닿은 보드라운 젖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두근.
그와 동시에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미약한 진동.
“머셔너리에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거든요.”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랬다. 두근거리는 이 느낌은 확실히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였다.
“그 이후로 수현씨를 볼 때마다, 수현씨 말을 들을 때마다, 수현씨 옆에 있을 때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어요.”
“사용자…. 남다은.”
“왜 머셔너리를 선택했느냐고 물으셨죠? 이게 제 대답이에요. 클랜 로드, 그리고 수현씨.”
남다은의 절절한 고백이 이어지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으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홀 플레인 1, 2회 차를 통틀어 처음 겪는 상황에 그저 하얀 백지가 된 기분이었다.
하연과도, 고연주와 있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이 생소한 감정. 그래. 지금의 나는 분명히 설레고 있었다.
나는 멀거니 남다은을 응시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활짝 웃어 보였다.
“수현씨는 어때요? 수현씨도 저를 보면 두근두근, 하나요?”
나는 남은 팔 하나를 들었고,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 느껴보았다.
두근.
그러자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지만.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의 고동 소리가 서서히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왼손에서 느껴지는 고동이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고동과 속도가 비슷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까 전에는 이러지 않았습니다만.”
침을 삼키고, 말을 잇는다.
“조금 전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속도가 빨라지네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걸요.”
“…그런가요?”
“그렇고 말고요. 또한, 저를 기쁘게 하는 현상이기도 해요.”
남다은은 다시 내게 바짝 다가오더니 오른 어깨에 얼굴을 걸쳤다. 빨아들일듯한 시선에 절로 눈길을 빼앗겼다.
“고마워요. 수현씨.”
“고맙…. 긴요.”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에 닿은 손을 빼었고 대신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아주, 살짝.
이내 갸름한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남다은이 지그시 눈을 감는다. 가늘고 기다란 속눈썹과, 어여쁜 콧마루와, 꼭 다물어 오므린 도톰한 입술이 눈에 밟혔다.
들어올린 턱을 엄지와 검지로 약하게 고정한다. 그리고 흡사 홀린듯한 기분으로, 나는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입술을 다물어 마주 눈을 감는다.
이윽고 서로의 숨결이 섞이는 것과 함께,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달콤함 접문(接吻). 이내 온몸으로 퍼져 흐르는 미칠듯한 감미로움에 입술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입술도 떨리고 있다.
그때였다.
쨍그랑…!
한 쪽에서 미약한 소음이 울렸다. 곧바로 눈을 뜨자 똑같이 토끼 눈을 뜬 남다은을 볼 수 있었다.
이내 단숨에 떨어진 우리는 동시에 소음이 들린 곳, 본관 4층을 응시했다.
“아하하. 들…. 켰나?”
남다은의 어색한 음색이 흘러들었다.
*
탕.
임한나는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로 몸을 뒤돌아서, 그대로 벽에 몸을 기울였다.
“하아, 하아.”
숨이 차다.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손은 까닭 없이 축축했다. 그리고 찾아 드는 뜻 모를 서글픔. 임한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나…. 왜 이래….”
자조 어린 목소리가 고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이윽고 창문에 기댄 여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몇 달 전, 임한나는 김수현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입까지 맞췄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로 관계는 조금도 진전되지 않았다.
임한나는 이해하려 노력했다. 항상 바쁜 사람이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 번쯤은 찾아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누르고 기다렸지만, 찾아오기는커녕 얘기를 꺼낼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축제가 열리니 이번 기회를 노리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이번 축제 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또는 “잠깐 얘기 좀 할래?”.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하려 할 때마다 번번히 무산됐다. 단 몇 마디에 불과한 말인데 어찌 이리도 꺼내기 어려운 걸까.
그러다 축제 중 겨우, 간신히 기회를 잡았다 싶었는데 기껏 올라와 보게 된 광경은…. 다른 여인과 입을 맞추는 김수현이었다. 그것도 누구처럼 여인 쪽에서 일방적으로 한 입맞춤이 아니라, 김수현이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다.
임한나가 목욕탕에서 입을 맞추려고 했을 때, 떨떠름히 받았던 것과는 극명히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다시 광경을 떠올리자 임한나는 씁쓸히 미소 지었다.
‘혹시 일부러 피하는 건가?’
그리고, 슬프게 웃었다.
사실 임한나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정하연이나 고연주라면 모를까. 방금 본 상황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광경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직 김수현과 어떠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하긴, 나도 나쁜 년이지.’
또한 임한나도 좋은 입장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김수현의 옆에는 이미 정하연과 고연주가 있었다. 그리고 임한나는 그 사이로 파고들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 둘의 입장에서 보면 임한나도 크게 할 말은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서운하고 서글픈 기분이 드는 이유는 대체 무얼까.
“후유.”
임한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설핏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응시했다. 어느덧 연못 주위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내와 여인은 이미 그곳에서 떠난 상태였다.
“치워야겠지….”
임한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테라스에는 깨진 병 조각과 흘러나온 액체가 바닥에 한껏 번진 상태였다.
무단침입도 확실한 실례인데, 깔끔한걸 좋아하는 김수현이 보면 분명히 싫어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한나는 힘없이 웃옷을 벗었다. 1층으로 천을 가지러 내려갈 힘이 없었다.
달칵.
휘이이잉, 휘이이이잉.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서자 살을 에일듯한 추위가 강하게 들이닥쳤다. 이내 조용히 꿇어앉은 임한나는 곱게 접은 옷으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쓱…, 쓱….
조각을 모으고 손을 쓸자, 깨끗했던 옷에 삽시간에 자줏빛으로 젖어 들었다. 중간중간 작은 조각들이 피부를 찌르는 게 느껴졌지만 아프지 않았다.
임한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닦고 치우는데 집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었다.
툭.
“어….”
아직 액체가 묻지 않은 옷 윗면에, 일순 자그마한 물방울이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툭, 툭툭.
“어…?”
얼룩은 자꾸 늘어났다. 하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세 개에서 네 개로. 그리고 계속해서.
임한나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 흑….”
다시 한 번 찬바람이 불어와 임한나의 전신을 덮쳤다. 그녀는 한껏 떨면서도 옷을 반대로 뒤집었다. 그리고 액체와 조각이 묻은 면에 손을 얹었다.
“흑…. 흑…. 흑….”
혹여 들킬세라 소리 죽여 울며, 다시 조심스레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달칵!
테라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일단 여러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없이 죄송합니다. 또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ㅜ.ㅠ
어떻게든 오늘 안으로 끝낸다고 마음먹었는데, 생각대로 되지가 않네요.
굳이 변명하자면, 남다은 때문이었습니다. 코멘트를 보던 도중 남다은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는 분들이 여럿 계셨고, 하여 과정을 집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질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솔직히 그냥 대충 마무리 짓고 빨리 끝낼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기보다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제대로 유종의 미를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나름대로 의미도 부여하고 싶었고요.
그래서, 결론은 이제 언제 끝나겠다고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분명히 외전이 거의 끝에 다다른 건 맞지만, 또 약속을 지키지 못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하겠지요.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마음만 급하니, 글이 제대로 나오지 않더군요. 저번 회는 몇몇 분은 내용이 산만하다 느끼셨을 겁니다.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자꾸 외전을 끝내겠다고 했는데, 끝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2부를 기다리시는 분들께는 다시 한 번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다만 저 또한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지으려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고 있으니, 이점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로 다음 회 적으로 가겠습니다. 회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PS.
1. 앞으로 본문에 따로 경고 내용은 삽입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원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그냥 적당히 읽으시다가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조아라 쪽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성실 연재상을 받게 됐습니다. 독자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_(__)_
3. 쪽지는 제가 지금 답장을 못 드립니다. 외전이 끝나면 일괄적으로 답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