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27
00426 10. 마지막 이야기(9/9). =========================================================================
남다은과 1층 로비에서 헤어졌다.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급할 건 없다.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쭉 볼 사이니까.
하여 따라오려는 남다은을 식당으로 보낸 후, 나는 신속히 4층으로 올랐다.
예상대로 집무실 문은 자그맣게 열려있었다. 나는 빠르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대로 테라스 문을 밀어 발코니로 나서자,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한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은 조각난 병에서 흘러나온 액체로 흥건했고, 웃옷으로 바닥을 닦는 중이었다.
나는 오도카니 한나를 응시했다.
“!”
한나 또한 멍한 눈길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순 급히 얼굴을 돌리더니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발간 눈동자와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확인한 뒤였다.
‘봤구나.’
그리 직감하자 괜스레 속이 불편해진다. 왠지 모르게 한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잠시 동안 고민해봤지만, 우선 침착히 겉옷을 벗어 한나를 감싸주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꿇어앉아 그녀가 쥐고 있는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고 보니 이 옷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내, 내가 치울게.”
목멘 음색이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기어코 옷을 빼앗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목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소리가 들렸다.
“미, 미안해. 나 멋대로 들어와버리고…. 방도 어지럽히고….”
“괜찮아. 치우면 그만인걸….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숙소로 간다고 해놓고 정원으로 나갔잖아. 혹시 많이 찾아 다녔어?”
“으응, 조금…?”
한나는 미소했다. 그러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슬픔을 감추려 억지로 짓는 미소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지었다.
“이리 줘….”
한나는 계속해서 옷을 가져가려고 했지만 나는 가볍게 그녀의 움직임을 제압했다.
쭉, 주르륵.
흠뻑 젖은 옷을 한 번 쭉 짜내고 나서, 나는 다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마저 치울 테니까 먼저 내려가있어.”
“아니야. 그냥 내가 치울 테니까, 차라리 네가….”
“정말로 괜찮다니까? 너 오늘 축제도 별로 즐기지 못했잖아.”
“축제….”
옥신각신. 그러다 결국 포기한 모양인지, 한나는 허탈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게, 여전히 그 자리서 나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이후, 한참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왜 이렇게 어색한지는 알고 있다. 뭔가 해야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저 겉만 빙빙 도는 기분이었으니.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자줏빛으로 물들었던 바닥은 어느덧 본연의 색깔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액체에 잔뜩 젖은 옷을 한 쪽에 밀어 넣은 후, 가지런히 모아둔 조각 더미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가녀린 목소리가 한 줄기 흘러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나도 이번 축제 정말 기대했는데…. 기대한 만큼은 즐기지는 못한 것 같아.”
“지금 내려가도 늦지 않을걸. 아까 보니까 밤샐 기세더라.”
“다들 술에 취해있을 텐데 뭐…. 생각해보니까, 아까 그냥 바로 이야기할걸 그랬어.”
“왜. 누구랑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었어?”
되물으며, 나는 조각 더미를 단번에 움켜잡았다. 손바닥 곳곳을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지만 아프지는 않다. 고작 병 조각에 아파할 정도로 나의 내구 능력치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루를 만들어버릴 생각에 살며시 마력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응. 수현이 너랑 대화하고 싶었어. 너와 꼭 얘기하고 싶었던 게 있거든.”
가벼운 마력 폭발을 일으키려던 찰나, 나도 모르게 회로를 도는 마력을 멈추고 말았다.
조용히 옆을 돌아보자 아련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한나가 보인다. 애처로운 눈빛을 빛내는 게 흡사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떤 게 미안한 걸까?
“…어떤 얘기?”
“너한테 고백하고 싶은 게 있거든.”
나는 숨을 삼켰다.
고백. 참 많은 뜻을 의미하는 단어.
갑작스레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한나가 어떤 의미로 고백을 말했는지, 대충은 눈치채고 있는 상태였으니.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백이라. 무단 침입과 방을 어지럽힌 거라면 이미 들키지 않았어?”
순간 한나의 눈망울의 거세게 흔들렸다. 나는 무심히 그녀를 응시했다.
농담이라면 농담이지만, 웃자고 한 농담은 아니었다. 최후 통첩, 아니 선택권을 넘겼다고나 할까.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든 웃고 넘어가면 된다. 그러면 그만이다.
그러나,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아마 한나는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결정은 예상외로 신속했다.
잠시 후, 한나의 입술이 열린 것이다.
“그것도 있지만…. 실은…. 아까 봤어. 너랑 다은씨랑 서로 연못에서….”
그리고,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다.
나는 살짝 입술을 물었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우연히 만난 거야.”
“그렇구나. 그, 그럼 둘이서 무슨 얘기했어?”
“어디서부터 봤는데?”
“시, 실은 전부…. 인 것 같아.”
“다 보았다고….”
“…아까 다은씨가 고백한 거야? 너한테?”
그렇지 않았다면 입맞춤도 하지 않았겠지. 나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보았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다.
아직 볼에 남아있는 선명한 눈물 자국을 보자, 왠지 모르게 미안해졌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는 한나가 웃고 넘어가기를 바래었고, 이쯤에서 그만두기를 원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한 번 말문이 터진 한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너는 받아들였어? 그래서 입맞춤을 한 거고?”
“한나야.”
지긋이 부르자 한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나와 남다은의 문제잖아.”
다시, 침묵이 흘렀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테라스는 굉장히 추웠다. 그러나 추운 이유가 단순히 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문득 연초 한 대의 생각이 간절해졌다.
“후후. 그러네. 내가 너무 꼬치꼬치 물었나 봐.”
약간의 뜸을 들였다가, 한나는 고요히 수긍했다. 그리고 또다시 어설프게 웃음 짓는다.
그러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는 게, 자꾸만 입을 달싹이는 게….
“그냥…. 걱정돼서….”
꼭, 바로 눈물을 쏟을듯한 모양새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자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
“이미 네 옆에 두 여인이 있잖아…? 하연이 언니랑, 연주 언니…. 그런데 다은씨까지 이러면…. 후, 후후…. 인기 많은 남자는 정말 힘들겠네….”
얘가 울먹이면서 정곡을 찔러오네.
나는 입맛을 다셨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것 또한 내 문제야.”
“그, 그래. 그런데. 아, 아니. 그리고 있잖아. 후….”
그때였다. 횡설수설하던 한나는 한순간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면서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이내 날 정면에서 응시하는 게, 뭔가 단단히 결심한 얼굴이다.
이윽고, 한나가 크게 숨을 내뱉었을 때였다.
“나도…. 이제 고백할 거거든?”
불시에 들려온 고백에,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럼…. 어떡하지? 그러면 어떡할 거야?”
파스슥!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자 조각이 바스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주먹이 터져라 더더욱 세게 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상처를 주기 싫었는데, 주어야 한다.
사실 한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목욕탕 사건 때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느꼈고, 마지막에 스스로 입을 맞춰오는걸 보며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 나는 한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아니,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명 좋게 생각하는 건 맞지만, 그녀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수현씨도, 저를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하나요?’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고백을 들었음에도 한나의 앞에서는 가슴이 뛰지 않는다. 이게 바로 현실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완곡히 말하려 애썼다.
“한나야. 너는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 정말로.”
“왜? 너는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아니야. 넌 누가 봐도 반할만큼 예쁘고 상냥해.”
“하지만 다은씨의 마음은 받았잖아. 하연이 언니도, 연주 언니도 있는데 받아준 거잖아. 나도 그러면 안 돼?”
가슴이 뜨끔해졌다. 단순히 “좋은 여자.”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어질 말들을 예상했는지, 그녀가 내놓은 답은 이미 몇 수를 뛰어넘고 있었다.
갑작스레 말문이 막혔지만 나는 얼른 속을 가다듬었다.
아니. 가다듬을 것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진실만을 말해주면 되는 일이니. 설령 그게 잔인한 말이라 할지라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난간으로 다가가 주먹 쥔 손을 활짝 폈다. 잘게 쪼개진 조각들이 바람에 흩날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너는 그럴 수 없어.”
그리고 한두 번 손을 털며 말을 잇는다.
“하연은…. 하연과는 보호를 요청으로 시작한 관계였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어. 지금은 우리가 단순한 보호 관계가 아닌 조금 더 깊은 관계라고 생각해.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내 첫 여자라고 생각하거든.”
“응.”
“고연주와의 시작? 사실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거야. 나도, 그녀도. 하지만 이후 고연주는 내게 놀랍도록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 모습에 지금 내 마음이 변한 것 같아.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이따금 그녀를 보면 사랑스럽다고 느껴.”
“…응.”
“그리고 남다은은….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솔직히 두 여인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그녀의 고백을 받으니까 심장이 뛰고 가슴이 설레더라.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응.”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한나의 답이 반 박자씩 늦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차분히 몸을 돌아 그녀를 응시했다. 뭔가에 홀린듯한 눈길이 멍하니 나를 마주한다.
“네 말대로 내 옆에는 두 명, 아니 어쩌면 앞으로 세 명이 될지도 모르는 여인들이 있어.”
“…….”
“이런 상황에서, 보호를 명목으로 너를 안을 수는 없어. 상황도 맞지 않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호기심으로 너를 안을까? 싫어. 단순히 남녀라는 이유로 그러고 싶지 않아.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냥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끊는다면 모든 게 애매해진다.
나는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한나야. 아까 고백을 들으면서 설레는 감정이 들지 않았어. 미안해.”
그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
한나의 눈이 일순 크게 떠지는가 싶더니 바로 눈을 감는다. 이어서 목울대에 한 번 고저가 생기고 입술을 잘끈 문다.
“그래…. 그렇구나…. 내가…. 한 발 늦은 거네.”
글쎄 라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나가 남다은보다 먼저 말했다고 해도 받아들였을지는 미지수였다.
시간이 흐른다.
이윽고 한나는 서서히,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테라스 문 앞에 서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
충격을 받은 건지, 추운 건지. 한나는 천천히 양팔을 끌어안았다. 이제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덜덜 떠는 모습에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고맙긴. 미안하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냥 이대로 두고 갈까 생각했지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나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고 힘주어 끌었다.
“얘기 끝났으면 일단 들어가자. 춥다.”
“자, 잠시만.”
한나는 저항했다. 담담 하려 혹은 태연 하려 애쓰는 듯 보였지만, 빛 잃은 눈을 보니 아무래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수현아. 그냥…. 너 먼저 가면 안될까?”
“한나야. 이러지 말자.”
“아,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나 잠깐 여기 있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나 한나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흑.”
이내 가늘게 어깨를 떠는 게 결국 참지 못해 눈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이러할진대, 내가 어찌 그냥 놔두고 가겠는가.
“…일단 들어가자. 여기 있지 말고.”
나는 한나의 팔을 강제로 잡아 끌었다. 그녀는 약간 저항했지만 곧 무너지듯 내게로 끌려왔다.
탁.
집무실로 들어오고 나서 나는 바로 테라스 문을 닫았다. 찬바람이 사그라지고 따뜻한 방안의 온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한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속이 착잡해졌다.
한나는 분명히 매력적인 여인이다. 얼굴, 몸매, 성품, 사용자 정보.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여인. 그런 만큼 오만 감정이 들었다. 이런 여인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준 게 고마웠고, 정말로 미안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이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한나를 받을 자신이 없다. 다시 말해서, 나는 차후 한나를 하연이나 고연주처럼 대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잡았던 팔을 살며시 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이 말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같이 내려가자. 식당으로 내려가서 기분 전환이나 하자고. 너 오늘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잖아.”
“…미안. 지금 그냥 혼자 있고 싶어….”
그러나 한나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고,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다시 들려오지 않는 대답.
나는 더는 말을 않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터. 애당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계속 옆에 있느니 얼른 몸을 비켜주는 게 낫겠지.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진정되면 내려와.”
잠시 후,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달칵.
이윽고 어두컴컴한 복도가 눈앞에 드러났다. 그곳을 향해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가지마….”
그 순간 미약하게 들려온 울음 섞인 목소리. 한없이 서글프고 애처로운 음색이 떠나려는 내 발길을 붙잡는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나는 다시 몸을 돌리고 말았다.
“가지마…. 제발….”
어느새 한나는 양손을 내린 상태였다.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지 자꾸만 목울대를 움직이면서도,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가지 말라는 듯, 양손을 내밀어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손을 들어 한나의 눈을 닦았다.
“울지마.”
“왜, 왜에…. 도대체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울면서도 한나는 서러운 눈빛을 들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시작부터 꼭 시작부터 설렐 필요는 없잖아. 처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할 필요도 없잖아. 응? 여기는 홀 플레인이잖아…. 하연이 언니처럼, 연주 언니처럼…. 나도 언니들과 똑같이 시작하면 안 돼?”
“한나야. 아까도 말했잖아. 나는….”
“알아.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러면 나눠달라고 하지 않을게. 정 부담스러우면 나, 네 안으로 들이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수현아.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될까? 응?”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불이 갑작스레 타올랐다. 한나의 감정이 점차 격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로 모든걸 버리고, 매달리고 있었다.
“임한나.”
하여 진정시킬 목적으로 이름을 불렀지만, 한나는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그냥,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좋아. 옆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만 해줘. 네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응?”
이제 여기까지 왔다면, 나라고 계속 가만히 있기도 그런 상황이었다.
“왜? 도대체 네가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화내지마….”
“화내는 게 아니라 모르겠어 서 그래. 정말로 모르겠어. 임한나 너, 혹시 아직도 스스로를 마녀라고 생각해? 아니면 아직도 나를 그 사람과….”
“아니야!”
그때였다. 한나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나와 그녀는 서로 아차 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 또한 말을 지나치게 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런 적은 있지만…. 지금은 아니란 말이야….”
애처롭다 못해, 이제는 애틋하게 보이는 눈초리.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설마 한나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해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나는 한숨만 푹푹 뱉었다.
“수현아….”
저렇게 나를 보는데,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여기서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여자가 없었다면…. 아니,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러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터. 하지만 한나는 아는 사람이며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용자였다. 또한 앞으로 계속 함께할 사용자이기도 하다.
‘머리 아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나는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만. 어지러워. 그러니까 생각 좀….”
하지만 한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내 팔을 잡은 상태였고, 더더욱 세게 잡았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형형히 눈을 빛내어 말을 이었다.
“알아. 알고 있어. 내가 지금 이러는 게 엄청 구질구질하다는 것도, 또한 무척 이기적이라는 것도. 그리고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그런데 나, 너를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아. 아니. 네 말을 들으니까 더 놓치기 싫어졌어.”
“…거듭 말하지만 너는 좋은 여자고, 너만을 사랑해줄 좋은 남자 또한 많아. 그런데 왜 그렇게 나한테 스스로 묶이려는 거야?”
그때였다. 쉴 새 없이 열리던 한나의 입이 멈췄다. 그리고 나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또 불안해지고 싶지 않으니까.”
이윽고, 팔을 잡은 손이 약간이지만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한나의 말이 이어졌다.
“러브 하우스에 있을 때부터 너를 봐왔으니까. 이제 그만 다른 건 잊고, 한 곳에 정착하고 싶으니까.”
“거봐. 너….”
“그리고, 너를 좋아하니까.”
“…납득이 안 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나는 예의 서글픈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꼭 그렇게 이유가 필요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꼭 백 퍼센트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해?”
“그게 아니라…. 후, 아니야. 아니다.”
지쳤다. 정말로 지쳤다. 전투를 하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녹초가 된 느낌이다.
내가 힘들어하는걸 느꼈는지, 한나는 시무룩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더욱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내 품에 자신을 묻었다. 가녀린 줄이 등을 죄고, 따뜻한 숨결이 가슴을 간질인다.
“미안해. 힘들게 해서. 하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야.”
돌연히 여인 특유의 향기가 코를 물씬 찔러 들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그랬으니까. 동료들이 죽었고, 오빠가 죽었고, 너도 죽었다고 생각했지. 그 정도 되니까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되더라. 아. 나는 마녀구나. 그때 이후로 내 운명에 살이 끼었구나.’
‘또 불안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한나는 과거에 의한 트라우마가 있다. 통과의례에서 한 번 모든 동료를 잃었고, 홀 플레인에 들어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또한 운명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녀는 한때 자신을 동료를 잡아먹을 마녀라고 생각했다.
머녀서리에 들어와서도 트라우마는 여전했는데, 그렇게 생각할만한 상황이 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한나의 과거 동료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어떤 일을 겪어도 보란 듯이 살아남았고, 클랜원들을 구출했다.
한나는 아마 그때부터 나를 특별히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어떠한 감정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시작부터 꼭 시작부터 설렐 필요는 없잖아.’
‘처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할 필요도 없잖아.’
‘여기는 홀 플레인이잖아…. 하연이 언니처럼, 연주 언니처럼…. 나도 언니들과 똑같이 시작하면 안 돼?’
‘그냥,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좋아. 옆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만 해줘.’
설핏 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얼굴을 묻은 채 덜덜 떠는 한나가 보인다. 예의 상냥하고 기품 넘치는 자태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마치 살짝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를 품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모르겠다.’
아까 그냥 가버렸으면 모를까. 아니, 아예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몸을 돌린 이상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는 것.
이제는 정말로 모르겠다.
나는 이마를 매만지던 손을 느릿하게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나의 정수리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정지했다. 뭔가를 느낀 걸까. 그녀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한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수현아…?”
그런 한나의 눈동자는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더는 돌이킬 수 없을 테지.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아직도 확신은 없지만, 나는 힘주어 한나의 머릿결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눈을 감아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한나야.”
“응?”
“진심이야? 정말로, 괜찮겠어?”
비로소 한나는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응. 진심이야.”
“…힘들 수도 있어. 후회할 수도 있고.”
“힘들면 참을게. 후회해도 티 내지 않을게. 지금은 그냥…. 내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어.”
한나는 힘들지 않다는, 후회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가 조금 전 뱉은 말들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끄덕끄덕.
대답은 없었지만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허공에서 멈췄던 손을 움직여 한나의 정수리에 살며시 얹었다. 이내 부드러이 쓸어 넘기자 그녀는 곧장 얼굴을 묻어 기다란 숨을 토해냈다. 왠지 안도의 한숨처럼 느껴지는 숨결이었다.
“하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다행이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붙잡았는데…. 정말 그냥 가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한나의 머릿결을 보듬고, 쓸어 내렸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까치발을 들은 듯 한나의 얼굴이 살짝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윽고.
“…….”
은근한 목소리가, 귓가로 속삭이듯 흘러들었다.
*
방안으로 스며든 달빛이 유난히 밝은, 어느 날 밤과 새벽의 사이.
탁, 달칵!
살며시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문이 잠기는 소리.
“정말, 괜찮겠어?”
여전히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조용히 몸을 돌자 눈물 젖은 눈으로 숫접게 머리를 끄덕이는 한나가 보인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한나의 어깨에 부드러이 손을 얹는다. 그대로 살짝 끌어당기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우리는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가던 도중, 아래서 자꾸만 나를 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하여 설핏 시선을 내리자, 조마조마한 얼굴의 한나가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돌연 한나가 내 머리를 읽은 것 같아 가슴이 따끔했다. 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였다. 마지막 매달림에 허락하긴 했지만, 아직도 고민하는 중이었다.
문득 여러 여인들이 뇌리를 스쳤다. 정하연, 고연주, 그리고 남다은….
‘그만두자.’
나는 그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나의 고백을 받은 건 이미 번복할 수 없는 일. ‘앞으로 어떡하지’ 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은 한나에게 집중하는 게 나을 터.
어느새 책상에 도착했다. 침대가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책상도 나쁘지는 않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좋다.
더는 망설이지 않는다. 살그머니 허리를 들어올리자, 그녀는 조용히 책상에 걸터앉았다. 한나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날 계속 쳐다보며 하라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라도 할래?”
혹여 오해하지 않도록 고르고 고른 말이었다.
다행히 의미는 잘 전달된 모양이다. 한나는 사뿐 웃음 짓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으응.”
“꼭 해야 할 필요는 없어.”
“아니. 이왕 밀어붙인 거 오늘 아예 마침표를 찍고 싶어.”
그러더니, 민망해하는 낯빛으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나…. 오늘 되게 지저분했지? 막 억지도 부리고…. 이기적으로 굴고….”
“괜찮아. 네가 생떼 쓰는 게 처음도 아닌데.”
“새, 생떼?”
“전쟁에서 따라오겠다고 난리 친 거. 설마 기억 안나?”
기억이 안 날 턱이 있나. 그때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는데.
한나는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이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게, 창피한 줄은 아는 모양이다.
아무튼.
놀리는 건 이쯤하고, 이제 그만 슬슬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나는 이번이 처음이다. 첫 관계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리드와 배려가 필요할 듯싶었다.
“그럼 시작할게? 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
“아, 안 했거든. 그리고 그냥 말하지 말고 해…. 부끄러우니까….”
허락이 떨어진 순간 나는 가볍게 한나를 감싸 안았다. 색색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안 했다고는 했지만, 나름대로 긴장한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재빠르게 손을 놀렸다.
테라스에서 걸쳐준 외투는 바로 끌러 내렸다. 손가락 끝으로 마력을 일으켜, 한 겹 남은 얇은 셔츠를 세로로 베어 내렸다. 이내 마지막 남은 속옷은 부드러이 풀어 내렸다.
이윽고 상의를 완전히 해체했을 때였다.
“참 좋다….”
한나는 눈을 감은 채 잔잔한 음색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삽시간에 상의가 해체된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곧 터져 나올 그녀의 비명을 기대하며, 나는 천천히 몸을 떼었다.
온기가 떨어져나가는걸 느꼈는지, 한나는 아쉬운 눈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사르르, 사르륵.
외투를 벗기자 등이 잘린 셔츠가 스르륵 떨어진다. 이어서 가슴을 가린 천마저 나풀나풀 허벅지에 안착했다.
이윽고 한나의 아름다운 젖가슴이 눈앞에 드러났다. 중간에 길게 그어진 가슴골의 좌우로, 예쁘게 모인 물방울 형태의 가슴이 자신의 크기를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흰 무덤의 정점에는,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연분홍색 젖꼭지가 꼿꼿이 돌출된 상태였다. 그녀의 가슴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음에도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응?”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아니면 뭔가 휑하다고 느꼈을까.
한나는 의아한 눈동자로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이내 얼굴을 떨궈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미처 예상치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앙!”
“푸.”
한나가 펄쩍 뛰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비명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뜬금없고 웃겼기 때문이다.
“도, 도대체 언제 벗긴 거야?”
“으하, 으하하!”
“그, 그만 웃어!”
“하하, 하하하!”
한나는 고운 아미를 한껏 치켜 올리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최대한 웃음을 참으려 애쓰며, 가슴을 가린 그녀의 양팔을 부여잡았다.
“정말 예상치 못한 비명이었어. 끄앙.”
“씨, 너 진짜. 놀리지마. 정말 깜짝 놀랐단 말이야. 그냥 안으려고 한 건 줄 알았는데, 언제 옷이….”
이번에는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팔을 풀어내자, 크고 아름다운 가슴이 다시 한 번 모습을 보였다.
“자, 잠깐만.”
“안 들려.”
나는 간단히 대꾸한 후 세로로 그어진 가슴골을 향해 차분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내 코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이 닿은 순간 나는 가는 콧숨을 내쉬었다. 후.
“항!”
가벼운 자극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몸을 뒤트는걸 보니, 역시나 처음이 확실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끝까지 얼굴을 돌진했다.
이윽고 양 볼을 부드러이 압박하는 포근한 감촉과, 코끝이 어딘가에 막혀 더 나아가지 않을 때. 나는 한나를 꽉 끌어안아 천천히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없이 아늑하고 포근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한나의 젖가슴은 어머니의 품을 연상케 할 정도로 한갓지고 편안했다. 도중에 약간 숨이 막혀, 나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여성 특유의 육향(肉香)이 콧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으응. 으으응. 수, 수현아?”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자.”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한나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곧 나긋한 손길이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살 내음에, 그녀의 손길에 취했다. 그러다 아까의 비명이 생각나서 다시 한 번 킥.
“아 진짜~. 그만 좀 웃으라니까~.”
어지간히 부끄러운 듯 한나는 내 머리를 콩콩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지, 그녀의 음색은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나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한나와 마주했다. 예상대로 그녀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배어져 있었다.
“그래. 이제 좀 너답다.”
“응?”
나는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손으로 한나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깨를 잡았다. 그 상태서 슬슬 몸을 기울이자 그녀의 몸도 자동적으로 기울어진다.
“아.”
이윽고 나는 한나를 완전히 책상에 눕힐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온 빛이, 흩뿌려진 머리칼에 스며들어 유유히 흐르기 시작했다.
“봐. 그렇게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그, 그런가?”
“한나야.”
“으, 응?”
살짝 놀란 듯, 한나는 떨떠름히 대답했다. 눈을 동그랗게 만든 채 아래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나는 스르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이윽고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은 고운 이마가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쪽.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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