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29
00428 10. 마지막 이야기(9/9). =========================================================================
눈을 뜨자 환한 햇살이 시야를 가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려 했지만, 그냥 시선을 내리는 걸로 대신했다. 몸에서 정체 모를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나가 빙긋 웃고 있었다. 내 목에 팔은 두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있다. 무에 그리 좋은 꿈을 꾸는지, 입가에 배인 미소가 참 기분 좋아 보인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우리는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다. 한나가 첫 경험이라 조심스러운 게 없잖아 있었는데, 그래도 무사히 마쳤다는데 안도감이 들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바로 한나를 절정에 이르게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 그래도 마지막에 연신 야릇한 신음을 흘렸던 걸 생각해보면 나름 성공적인 첫 관계가 아니겠는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자, 한나의 훤한 나신이 눈에 들었다. 최대한 살살했다고 생각했는데 흔적은 생각보다 확실하게 남아있었다.
젖가슴 곳곳에 새겨진 입술 자국과, 하복부에 묻어있는 핏빛 섞인 하얀 덩어리. 그것은 한나의 소중한 곳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연초를 한 대 꺼냈다가, 문득 한나가 눈에 밟혔다. 나는 다시 연초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연초를 피려던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으으응…. 색…. 색….”
한나는 잠깐 뒤척였지만, 다시 고른 숨을 내쉬더니 양손을 기도하는 듯 모아 얼굴을 받쳤다.
나는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옷가지 몇 개를 옆에 가져다 논 후, 소리 나지 않게 숙소를 빠져 나왔다.
복도에는 네모난 빛과 그림자가 그려져 있었다. 사늘한 한기와 밝은 햇살이 동시에 섞인 게 이제 막 아침이 오른 모양이다.
나는 한껏 기지개를 피었다가 아까 넣어둔 연초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일단 식당으로 내려가볼 생각에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렸다. 잔잔하고 조용한 게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연초를 거의 모두 피웠을 즈음.
“어헉.”
식당 문을 밀어젖힌 나는 기함할 수 밖에 없었다.
‘진짜 난장판이다…. 그런데 쟤들은 뭐야?’
식당이 난장판이 됐으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쪽 테이블에서 한별과 유정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 건 예상외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의 사이가 어떤지는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다급히 외쳤다.
“둘이서 지금…?!”
그 순간 한별과 유정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둘 모두 새빨개진 얼굴이 어지간히 취한 듯싶었다.
그때였다.
“오빠….”
한별이 팔을 살며시 내밀더니 아련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왜?”
“몰라…. 이 바보….”
“?”
쿵!
한별은 이내 쿵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았다.
뜻 모를 상황에 가만히 눈만 끔뻑이고 있자, 유정이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이히히히! 이겼다! 내가 이겼어! 이로서 머셔너리의 최고 주당은 바로 나, 이유정이다! 다들 나를 경배하라! 짝짝짝짝!”
순간 치솟은 긴장감이 맥없이 풀려버렸다. 그러고 보니 테이블 주변으로 여러 클랜원들이 엎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단체로 술내기를 벌인 모양이다. 그것도 밤새도록.
한동안 자축하던 유정은 이내 비틀거리듯 내게로 다가왔다. 여전히 한 쪽 손에는 술병을 꼭 쥔 상태였다.
“어흐…. 오빠~. 나 갑자기 열나는 것 같아…. 더워 죽겠어. 아, 오빠는 도대체 어제 언제 가버린 거야?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놓곤.”
유정은 여전히 바니 걸, 아니 캣 걸(?) 차림이었다. 그 상태서 한 손으로 옷을 쭉 빼더니 고개를 내려 안으로 숨을 후 불어넣는다. 봉긋한 가슴이 슬쩍슬쩍 보이는 게, 외간 남자 앞에서 참 잘하는 짓이라 생각되는 행동이었다.
“오빠오빠. 나 머셔너리 배 술 내기에서 우승했다? 잘했지? 이히히!”
“…축하해.”
“아 참. 우승자에게는 오빠를 하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 이용권이 주어져.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이나, 어떤 일이든.”
“뻥 치지마.”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유정은 “단 호박이네.”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병을 찰랑찰랑 흔들며 눈을 찡긋했다.
“그러고 보니 오빠가 남아있었네.”
“아침부터 술 마실 생각은 없단다. 오늘은 푹 쉬게 해줄 테니, 너도 인제 그만 들어가 자려무나.”
“아잉~. 이번 축제 때 오빠랑 술 한 잔도 못했잖아. 딱 한 잔만. 응?”
그러나 연거푸 조르는 탓에 결국 한숨과 함께 허락했다. 물론 딱 한 잔이라는 조건을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히히. 기다려. 내가 잔에 예쁘게 따라올 테니까.”
이내 유정이 비척비척 멀어지고 나는 천천히 식당을 둘러보았다. 몇몇 클랜원들이 중구난방으로 엎어져 있었지만 하연, 우정민, 원혜수, 영감님 등 보이지 않는 이들도 몇 명 있었다. 아마 그들 또한 적당히 빠져나갔을 거라 생각됐다.
이윽고 아직도 크로스로 엎어진 안솔과 한결을 보고 있을 즈음, 문득 유정의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고개를 휘휘 돌리며 이곳 저곳을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가슴으로 뭔가를 집어넣는다.
혹시 술잔을 가슴에 끼워오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이 들었다. 옷차림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몸을 돌은 유정을 보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는 병을, 다른 한 손에는 잔을 든 상태였다.
유정이 잔을 든 손을 내밀었다.
“짜잔~! 자, 오빠. 우리 같이 건배! 원 샷으로 안 넘기면 아까 말한 자유 이용권 사용할거야!”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마라. 그럼 건배.”
나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이내 서로 잔과 병을 들어올리고, 날카롭게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 오빠. 실은 나 할 말 있어. 내가 어제 축제 내내 생각해봤는데….”
‘응?’
이제 할 말이 있다는 얘기만 들으면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든다. 나는 일단 잔을 들어 단번에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꿀꺽 삼켰을 때였다.
『’이브의 혈통’을 복용했습니다! ‘이브의 혈통’은 세 가지 조건에 따라 사용자의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물품입니다. 바로 효과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원할 때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앞을 쳐다보았으나 유정이 보이지 않는다.
“할 말이 뭐냐면! 아무래도 그건 오빠가 마시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거! 이히히히~!”
그때 상큼한 목소리가 뒤에서 흘러들었다. 하여 급히 몸을 돌리자, 손에 든 술병을 쉴 새 없이 흔드는 유정이 보인다. 히히 웃어젖히는 게 무척 신이 난 모양이다.
내가 할 말을 잊어 멍하니 서 있을 즈음, 갑작스레 유정은 뚝 웃음을 멈췄다.
이어서 눈을 부릅떠 주먹 쥔 손을 얼굴에 붙였다. 그러더니, 얌전하게 무릎을 굽히며 나직한 소리로 울었다.
“야~옹.”
‘…….’
“꺄하하하! 성공했다! 성공했어! 오빠를 속였다고! 꺄하하하하!”
이내 발랄하게 식당 밖으로 도망치는 유정을 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진짜…. 내 능력치도 모르면서….’
물론 이해는 간다. 아직 연차가 연차인 만큼, 유정은 설마 내 모든 능력치가 90을 넘어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능력치는 모두 90포인트를 넘는다. 그리고 ‘이브의 혈통’의 효과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갖고 있었다.
따져보면 첫 번째 조건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고, 두 번째 조건은 일부만 해당된다. 그리고 세 번째 조건은 나름 여러 길이 생기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탁 까놓고 말해서, 지금 상태로 효과를 일으키면 행운이 1포인트 오르는 게 끝이었다.
물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1. 김수현 : 564/ 600~
(잔여 능력치는 자유 능력치 포인트로, 총 6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마지막 선택지입니다. 사용자의 여섯 능력치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정돼 2포인트 만큼 하락합니다. 그리고 차감된 포인트에 2를 곱해 4포인트 만큼 되돌아옵니다. 되돌아온 능력치 포인트는 자유롭게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당 능력치는, 하락한 능력치의 원래 능력치 포인트의 십의 자리에 해당하는 능력치를 초과할 경우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기준 값은 하락하기 전 능력치를 대상으로 잡습니다. 또한 십의 자리는 하락한 능력치를 따르되, 일의 자리는 0으로 계산합니다).)’
내 능력치와 이브의 혈통의 세 번째 선택지. 선택지 중 마지막을 잘 살펴야 한다.
이 말인즉슨, 조건이 하락한 능력치의 일의 자리는 0으로 계산하고 십의 자리는 그대로 가져온다. 즉 저 조건을 나에게 적용하면 기준은 ’90을 초과하는 능력치는 올릴 수 없다.’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91이상의 능력치 포인트는 올릴 수 없다는 말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절반의 가능성이다. 근력, 민첩, 마력이 하락하면 아무 의미 없이 능력치가 깎이는 셈이 된다. 행운이야 나에게 필요한 능력치가 아니니, 되돌아온 4포인트가 쓸 데가 없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내구, 체력, 행운이 하락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각각 90, 90, 88 능력치로 하락한다. 즉 되돌아온 4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가장 좋은 경우는 체력이 하락하는 경우다. 현재 남겨놓은 포인트는 총 6포인트. 여기서 되돌아온 4포인트를 합치면 10포인트. 그러면 최소 체력 능력치 포인트를 100까지 확보할 수 있다.
더해서 추후 업적을 얻었을 때 얻는 포인트까지 합하면? 어쩌면 체력 능력치를 정말로 101이상으로 이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장 잘 풀렸을 얘기였다. 성공 가능성이 절반이란 건 실패 가능성도 절반이라는 소리였다. 앞으로 상대할 악마들이나 강철 산맥을 생각하면 단 1포인트도 허투루 여길 수 없다.
나는 곧 상념에서 깨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바삐 식당을 나섰다. 보아하니 엄청 술에 취한 것 같은데,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다칠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유정의 흔적은 복도를 지나 입구 밖까지 이어져 있었다. 일단 잡히면 볼기짝을 때려주겠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문을 밀어젖혔다.
추운 바람이 불어와 몸을 시원하게 식혀준다. 이어서 얘가 어디 있나 하고 정문 방향을 쳐다본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곳에는, 고연주가 서 있었다.
“고, 고연주? 언제 온….”
“조금 전에요. 그리고 수현? 잠시만요.”
고연주는 잠시 손을 들더니 흘끗 옆을 응시했다. 그녀의 어깨에는 바로 유정이 걸쳐져 있었다.
이윽고 고연주는 주먹을 들고는 있는 힘껏 유정의 복부를 후려갈겼다.
퍽!
“끄엑!”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발버둥치던 유정의 몸이 축 늘어진다. 고연주는 쯧쯧 혀를 차며 유정을 내던지더니, 살랑살랑 나에게 다가왔다.
“수현. 쟤가 어제 나 놀렸어요.”
“놀렸다니요?”
“어제 갑자기 저한테 통신을 걸더니, 축제 현장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요. 그것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메롱 메롱 놀리면서…. 흑.”
“…맞을 짓을 했군요.”
“그렇죠? 안 그래도 복장이 터지는데, 아주 속을 뒤집어 놓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꼴은 또 왜 저래? 아주 난리를 쳤나 보네.”
떨떠름히 머리를 끄덕이자 고연주는 반색하며 외쳤다. 물론 기절까지 시킨 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속으로 묻어두었다.
“아무튼, 수현.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윽고 고연주는 팔을 활짝 벌려 내 품에 안겼다. 나도 마주 그녀를 안은 후 가볍게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말도 마요. 나 다시는 사용자 아카데미로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흥.”
“하하. 축제는 다음에 또 개최할 테니, 그때는 꼭 참석하도록 합시다. 아. 아침 식사는 했나요?”
“아니요. 안 먹고 바로 왔어요.”
“식당에 남은 음식이 있을 겁니다. 시장하겠습니다. 저도 식전이니 일단 식사부터 함께 하도록 하지요.”
나는 고연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고개를 들이밀더니 킁킁 냄새를 맡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연주?”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얼굴을 비비던 고연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눈꼬리는 초승달을 그리고 입 꼬리는 잔뜩 올라간 게…. 돌연히 까닭 없는, 아니 까닭 있는 불안감이 들었다.
고연주의 입술이 열렸다.
“수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예, 예? 뭐가 말입니까?”
“내 남자에게서, 익숙한 여인의 향기가 나는데요?”
“…원래는 낯선 여인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난다 가 아닙니까?”
“맞아요. 그런데, 솔이나 한나가 낯선 여인은 아니잖아요.”
순간 귀신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경직을 눈치챘는지 고연주는 더욱 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를 바드득 갈기 시작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이가는 소리가 들리니, 여간 공포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겠나요? 호호, 고것들이…. 안 그래도 불안했는데,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기어코 일을 벌여?”
“고연주. 그게 아니라….”
“네~? 그게 아니라 뭐요~?”
고연주는 얼굴을 쭉 들이밀며 한껏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고연주는 크게 웃더니 눈을 부릅떠 고개를 들었다.
“오호호호! 호호호호! 날씨가 좋아요? 저는 추워 죽겠는데요? 봐요. 하늘도 우중충한데, 어디서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
그때였다. 나도, 고연주도 동시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든 채 시선을 하늘에 고정했다.
툭, 뭔가 차가운 게 얼굴에 닿더니 금방 녹아 흘러내린다.
“눈?”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네. 눈이네요.”
고연주는 전보다 훨씬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눈이 내리는걸 보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들었다.
하여 차분히 걸음을 옮겨, 유정 옆에 떨어져있는 병을 집어 들었다. 살짝 흔들어보자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아직 남은 양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어느 한 곳을 향해서.
“수현? 어디가요?”
“고연주. 오자마자 시켜서 미안한데, 식당에서 음식 몇 가지 좀 가져와주지 않겠습니까?”
“흠~. 하기야 눈 내리는걸 보며 식사하는 것도 나름 무드는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 식사할 기분이 아닌데요?”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른 나는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는 무덤이 있었다. 나는 바로 몸을 돌려 고연주를 응시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로 노려보는 게 아닌 곱게 흘기는 눈길이, 진짜 화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일종의 고연주식 앙탈이랄까?
“그게 아니라, 고연주 말고 한 명 더 잊은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네?”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나는 술병을 기울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신상용씨요.”
주르륵, 병에서 흘러내려온 액체가 무덤 위 풀을 적신다. 고연주는 일견 멍하니 무덤을 응시하더니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치, 치사해! 이, 이러면 왠지 모르게 할 말이 없어지잖아요!”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습니다. 자세한 말은 나중에 하연이 깨면 하도록 합시다.”
“하…. 그래요. 좋아요. 알았어요.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는 말이죠?”
고연주는 힘차게 투덜대고는 정원에 쓰러져있던 유정을 들쳐 엎었다. 그리고 일부러 바닥을 세게 밟으며 입구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견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배인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무덤 곳곳에 골고루 술을 뿌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했는지,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술병을 입가에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주저앉아 무덤에 등을 기대었다. 눈 때문인지 흘러내린 술 때문인지, 등에 축축한 액체가 느껴졌다.
한참 동안 하늘은 보던 나는, 다시 한 번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허공으로 조용히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눈 한 송이가 떨어져내려 순식간에 녹아 흐른다.
문득,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
웃는 와중에도, 나는 차분히 고개를 돌려 머셔너리 하우스를 응시했다. 사방에서 내리는 눈이 건물 전체를 덮으려 폼을 잡는 게, 제법 괜찮은 광경이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갑자기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덕분에 일단은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휘이잉….
문득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괜찮다고 해주는, 신상용이 잔잔히 웃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사용자 신상용. 만약에 2회 차를 끝내게 되면…. 돌아가기 직전, 다시 살려드리겠습니다. 만약 제로 코드가 안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아마 비비앙과 있는 것도 즐거울 겁니다. 아, 새로운 클랜원인 사샤 펠릭스도 들어왔으니, 그와 친해져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느끼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냥, 괜찮은 기분이었다.
============================ 작품 후기 ============================
외전이 끝났습니다.
외전이 끝났으니, 기념으로 어느 분께 사사 받은 노노츄 댄스를 추고 오겠습니다.(…….)
…네. 오늘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집필이 끝난 시간은 1월 2일(목요일) 23시 43분 이었습니다. 원래는 한 편으로 전부 올릴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베드 신을 싫어하는 분들을 배려해 내용을 따로 나눴습니다. 하하.
그리고…. 전전 회 코멘트가 많이 어지러웠는데, 글쎄요.
일단 코멘트는 전혀 연재에 지장을 주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400회를 넘게 연재했는데, 비난도 아닌 정당한 비평을 들었다고 힘들다 징징대는 건 조금 많이 어불성설이겠지요. 연재 중지는 말도 안되고요. 또한 제 기준으로는 딱히 악플러라 부를만한 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 의견에 스스로도 일부 공감했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남다은 얘기를 마치면서 고민은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남다은의 두근두근 파트를 마치고 바로 이번 회를 썼다면, 나름 마무리가 깔끔하겠다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임한나를 넣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독자 분들과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적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그려보고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한 번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갈등부터 베드 신까지, 임한나 파트는 호불호가 매우 심하게 갈리더군요.
따지고 보면 제 잘못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심히 구상하고 집필한걸 떠나서, 결국 제가 구상한 내용이 독자 분들께 잘 와 닿지 않았다는 소리니까요. 남다은 파트에 달린 코멘트와 비교해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 분들께 깊이 사죄합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납득하실 수 있도록, 제가 조금 더 노력하고 조금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흥분은 가라앉혀주셨으면 굉장히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노블레스 성인란에 무조건 베드 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만, 메모라이즈는 베드 신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품입니다. 물론 베드 신이 난무하는 건 저도 사양이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베드 신이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게 아닌, 감초 역할로 집어넣을 계획입니다.
이 부분 일부 독자 분들께 양해를 구하며, 긴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정신 없이 적느라 새해가 간 것도 몰랐네요.
늦었지만, 독자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내 두루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쪽지가 많이 쌓였네요. 1월 5일(일요일)안으로 전부 답신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