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32
00431 응어리진 마음. =========================================================================
북 대륙 바바라, 구 황금 사자 클랜 하우스.
“지금껏 북 대륙은 부랑자들에 대해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미사여구로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을 다시 사용자로 또는 도시로 돌아오게 하는데 초점을 두었죠.”
여기서 잠시 말을 끊은 후 나는 차분히 좌우를 둘러보았다. 회의가 거의 끝나기 직전 새로 발언을 했지만 다행히 따가운 눈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다들 호기심 어린 시선들로 나를 보고 있다.
‘나를 벙어리고 알고 있던 건가?’
하기야 여태껏 수호자의 소집령에 쭉 참여는 해도, 회의를 시작하면 내내 침묵을 지켰던 나였다. 그러다 갑작스레 건의가 있다고 하니, 이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생소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관대한 정책의 결과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이곳에 계신 분들은 너무나 잘 아실 겁니다. 가령 예를 하나 들어보면…. 각 클랜에 숨어있던 첩자들만 봐도 알 수 있겠지요. 서 대륙을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킨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순간 여기저기서 무거운 침음들이 흘러나온다. 그 일은 지금은 공공연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적어도 알고 있는 사용자들에 한해서. 하기야 몇 년을 동고동락한 동료가 부랑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나라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저는 여기서, 과거 황금 사자 클랜이 강철 산맥 원정 직전 계획했던 계획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강철 산맥 원정 직전이라면…. 부랑자 말살 계획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가벼운 사안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선율이 꽤나 진중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나는 맞는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 비록 끝은 흐지부지했지만…. 그때 황금 사자 내부에 첩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부랑자 말살 계획을 얼마나 강력하게 밀어붙였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황금 사자가 그 계획만큼은 제대로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회의실에 잠잠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날카로운 눈길들로 변했다. 나는 한두 번 목을 가다듬은 후 침착히 말을 이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모든 부랑자들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수뇌부들은 발 빠르게 탈출했고, 지금 어딘가에 숨어 재기를 꾀하고 있겠지요.”
“그러니까 머셔너리 로드의 말씀은…. 부랑자들을 상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입니까?”
한창 말을 잇던 도중, 가슴에 수(秀)가 그려져 있는 사용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게, 마치 내가 하려는 말을 알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병신인가?’
방금 말은 그저 예를 든 것에 불과했고, 지금 북 대륙은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고 겨우 안정화로 돌입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전쟁은 무슨 놈의 전쟁?
도대체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이 아닙니다. 현재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며, 부랑자도 전력의 태반을 잃었으니 회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그, 그렇습니까?”
“다만 이대로 부랑자들을 놔둘 수는 없으니, 이번 기회를 살려 아주 뿌리를 뽑자는 말입니다.”
더듬거리는 사용자에게 상세한 부연 설명을 해주고 나서, 나는 한 번 더 말을 덧붙였다.
“즉 부랑자를 상대로 했던 관대한 정책을 철회하고, 우리도 강력히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똑같이 라고 해야 할까요?”
“똑같이 라. 머셔너리 로드께서 좋은 생각이 있으시나 보군요.”
발언을 허락했을 때부터 이효을은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제는 빙긋 웃으며 나를 보는 게, 궁금하니 뜸들이지 말고 빨리 본론을 말하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로 했다.
“부랑자들은 이제껏 사용자들을 상대로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악랄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살인, 강도, 강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시체를 잔인하게 훼손하여 보란 듯이 걸어놓은 적도 있지요. 또는 성 노예로 데리고 다니다 싫증나면 죽이는 경우도 다반사고요. 그 결과,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부랑자가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잡았습니다.”
“으응…. 그럼 우리도 부랑자들 상대로 똑같은 짓을 저지르자는 건가요?”
“부랑자들은 사용자를 먹이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으로 그러한 존재감이 많이 옅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회는 지금입니다. 그들은 이미 사용자이기를 포기한 이들입니다. 그러할진대, 똑같은 사용자 취급을 해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반대로 부랑자들이 먹이가 될 차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니까…. 부랑자를 하나의 성과로 만들어 사용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자는 의미군요.”
역시나.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효을은 단번에 핵심 의미를 짚어냈다.
홀 플레인에서 사용자들은 사냥, 탐험, 유적 발굴 등으로 성과를 얻는다. 그리고 이효을은 부랑자들을 하나의 성과로 만든다고 했다.
이 말인즉슨, 사용자들이 부랑자를 어떻게 다루든 일절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랑자들의 장비를 노리거나, 회로를 파괴해 노예로 만들어 사고 팔거나, 인체 실험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죽여버리는 것 등등.
이효을은 탐탁잖은 얼굴로 고민에 빠져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망설이고 있다. 왜 그런지는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건의한 계획을 실행하는 건, 전쟁이 끝난 지금이 가장 적기라는 사실을.
‘조금 더 설득할 필요가 있겠군.’
계속 망설이는 이효을을 향해,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니, 그러려는 찰나였다.
짝, 짝, 짝, 짝.
끊어 치는 박수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박수를 친 사용자는 다름 아닌 고려의 새로운 클랜 로드, 조성호였다. 의아한 기분으로 쳐다보자 그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거 참,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아주,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머셔너리 로드.”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조성호의 눈동자는 차가운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 고려 로드가…. 연합군과의 전쟁 중 사망했었지.’
또한 조성호는 고려 로드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그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찬성하는지, 이유가 대강 짐작되었다.
“확실히 흥미를 돋구는 제안이야. 부랑자들을 하나의 성과로 만든다…. 그리고 성과는, 얻은 사용자의 개인 소유물이지. 재미있어. 흐흐.”
‘저주술사’ 강태욱도 우호적인 의견이었다. 어차피 저놈이야 내 의견에 찬성할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튼 벌써부터 두 명의 찬성표가 나와, 나는 어떠냐는 뜻으로 이효을을 응시했다.
북 대륙의 수호자도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했는지 상념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아까부터 계속 입맛을 다시는 게 여전히 아리송한 듯 보였지만.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은…. 아무래도….”
이윽고 이효을은 입술에 살짝 침을 적셨다.
*
한 여인이 테이블에 앉아, 아니 엎어져 있었다.
나이는 이제 스물 중반쯤 될까? 의자에 붙은 허리와 엉덩이는 비스듬히 비틀었고, 상체의 가슴은 테이블을 엎누르고 있다. 한 쪽 팔로 머리를 받쳐 눈앞에 펼쳐진 찢어진 기록들을 보고 있었지만, 멍한 눈을 보아하니 그냥 정신을 놓은 듯 보였다.
“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네.”
“운 좋~다!”
그렇게 여인이 한없이 허공만 멀거니 쳐다볼 무렵, 한 무리 사내들이 주점에 들어와 한 쪽 탁자를 차지했다. 서로 자축하며 시끄러운 목소리로 떠드는 게, 오늘 사냥에서 괜찮은 수확을 올린 모양이다.
이내 한껏 떠들다 배를 쓱쓱 문지른 사내 중 한 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상하네. 종업원들이 안 보이는데?”
“그럼 주인을 불러보자고. 임 마담님! 임 마담님!”
거한의 사내가 큰 목소리로 재차 불렀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거한에 비해 왜소한 몸집을 가진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오늘은 안 계시는 건가?”
“이런…. 그럼 이곳에 들어온 의미가 없는데. 모니카의 꽃을 보러 왔는데, 꽃이 없으면….”
“그냥 조용히 음식이나 먹지. 이 주점 음식도 꽤나 괜찮으니까.”
“메마른 놈. 너야 어떤 음식이든 배만 채우면 상관없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자고로 시각적인 즐거움은 음식의 맛을 한층 돋구어주는 법이지.”
거한은 몸집답지 않은 섬세한 말을 내뱉곤 아쉬운 눈으로 주점을 훑었다. 그리고 메마르다 평가 당한 남성은 콧방귀를 뀌었다.
“글쎄.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네 목적은 몸이 아닌가. 설마 임 마담이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고, 너에게 관심을 줄 것 같지는 않은데.”
“신경 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어.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은.”
시큰둥하게 대꾸하던 거한은 일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어느 순간 테이블에 엎어져있는 여인에게로 꽂혀있었다.
“…혀와 눈뿐만이 아니라, 아랫도리도 즐거워야 하는 날이지. 안 그래? 친구들?”
거한의 시선에 부쩍 호기심이 일었는지, 왜소한 사내와 메마른 사내는 옆쪽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동시에 부정했다.
“반반하네. 그런데 무슨 여자가 저렇게 사나워 보이냐? 꼭 신경질 부리기 직전의 고양이 같잖아. 뭐, 그래도 몸매는….”
“아서라. 보니까 전투 사용자 같은데, 그냥 조용히 밥이나 먹자고.”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탱탱한 엉덩이. 확실히 여인은 여성으로써 활짝 개화한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가 앙칼져 보이는 인상이 흠이었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매력이었다.
“이 친구들이 뭘 모르는군. 난 말이야, 저런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좋아. 저런 여자일수록 정복하는 맛이 있거든? 침대에서 내지르는 신음 또한 더욱 각별하다고.”
거한은 쯧쯧 혀를 차며 손을 까닥까닥 하고는 거드름을 피웠다.
“얼씨구. 그냥 여자가 좋은 거겠지.”
그때였다. 왜소한 사내가 핀잔을 주는 순간, 여인이 눈이 날카롭게 사내들을 훑었다. 메마른 남성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하여 재빨리 말리려는 찰나 거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이, 이제 그만하고….”
“잘 봐라. 이 형님의 실력을 보여주마.”
들은 척도 않은 거한은 여인이 있는 테이블로 척척 다가갔다. 왜소한 남성은 흥미로운 얼굴로, 메마른 남성은 뭔가 꺼림칙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이윽고 여인에 엎드린 테이블에 거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기 아가씨….”
“꺼져.”
하지만 여인은 거한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즉답했다. 그저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는 게 관심도 없다는 말투였다.
거한은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그러나 몇 번 눈을 끔뻑이더니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야, 역시 얼굴값은 한다 이건가?”
“꺼지라고 했어. 지금 기분 별로니까 건들지마.”
“아이쿠. 우리 아기 고양이께서 기분이 별로셨군요. 하하하. 너무 그러지 말고….”
“야.”
비로소 여인은 거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고개를 삐딱하게 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새끼가 귓구멍에 좆을 처박았나…. 밥 처먹으러 왔으면 조용히 밥만 처먹고 가지?”
“아이구 우리 고양이, 화내는 것도 예쁘네~.”
“… 아까 멋대로 품평회한 건 그냥 넘어가줄 테니까, 제발 조용히 꺼지렴. 응?”
“…그냥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
거한은 여전히 능글능글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여인의 어깨에 얹고는 주물주물 매만지기 시작했다. 여인은 일순 고개를 똑바로 하더니 어이없다는 얼굴로 코웃음 쳤다.
“하, 이게 진짜 미쳤나. 진짜 돌겠네…. 오빠가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두고 보자고 했는데.”
“오빠? 아가씨 오빠랑 사고 쳤어? 그럼 됐네. 끝났네. 응? 나랑도 사고 치면 되잖아. 크허허허!”
자신이 한 농담이 꽤나 웃겼는지 거한은 우렁차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인은 눈을 감으며 한숨을 폭 쉬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그것을 모종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거한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려는 때였다.
휙!
“그만 튕기고, 돈이라면 넉넉히 줄…. 크헉!”
한순간 바람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거한의 눈앞에 있던 여인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거한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일순 아래턱에서 찌를 듯 솟구친 날카로운 기운에 절로 입을 다문 것이다.
“정말, 가만히 있으려니까 별 거지같은 새끼들이…. 오빠, 죽고 싶어?”
이어서 귓가에 흘러드는 나지막한 속삭임.
거한은 문득 턱이 미미하게 떨린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리고 등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까지도.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턱을 톡, 톡, 건드리는 붉은빛을 띤 단검이 잡혔다. 여인은 눈 깜짝할 새에 이동해 거한의 뒤를 점거한 상태였다.
거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근찬아?”
“아가씨. 그만하지.”
한 박자 늦게, 두 사내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들 또한 거한이 지나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료가 당하는걸 볼 수만은 없어 급히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여인의 움직임을 읽지 못한 듯, 눈동자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빛이 힘차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 섬광이 꽂혔다. 섬광은 화려하게 터지며 파편을 일으켰고, 막 다가가려던 두 사내는 엉거주춤 걸음을 멈췄다.
“헉!”
“뭐, 뭐야?”
그리고 한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경악을 내뱉었다. 카운터에는 어느새 시위 없는 활을 든 여인이 여인과 사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마른 사내가 더듬더듬 말했다.
“이, 임 마담님?”
“네, 손님. 오랜만이네요. 후후.”
임한나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상냥히 웃어 보이더니 다시 번쩍거리는 섬광을 일으켰다. 사내들은 당황했다.
“자, 잠시만요. 오해입니다.”
“네, 네. 아무튼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아주시겠어요?”
“그, 그게 저 여자가….”
“죄송하지만 이 주점에서 소란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서요. 자리에 앉아주세요.”
한나의 단호한 대답에 사내는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도로 앉는 사내들을 보며, 한나는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유정에게 말했다.
“유정아. 너도 일단 단검부터 내리렴.”
“언니! 이 새끼들이 먼저…!”
“새끼들이라니. 그런 말하면 못써. 너, 벌써 클랜 로드님 말씀을 잊은 거야?”
“…젠장.”
한 번만 더 사고 쳤다간 알아서 해라. 수현의 엄포를 떠올린 유정은 마지못해 단검을 내렸다. 이내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자 거한은 한 번에 숨을 토해내며 목을 쓰다듬었다.
왜소한 사내는 어색이 눈치만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분이랑…. 아시는 사이십니까?”
“저분이라면, 유정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그렇습니다.”
“그럼요. 저와 같은 클랜원인데 모를 리가 없죠.”
임한나는 흐르는 바다와 같이 대답했고, 메마른 사내는 침음을 흘렸다. 같은 클랜원이라면 머셔너리 클랜원이라는 소리. 그 사실을 깨달은 거한의 동료는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후회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하, 하하하. 이상하게 오늘따라 종업원들이 보이지 않아서요. 그래서 임 마담님을 찾았는데….”
“어머. 사랑 주점은 앞으로 일주일간 문을 닫아요. 곧 개축 공사를 하거든요. 밖에 안내문을 붙여놨는데?”
친절한 설명이 이어지자 사내들은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곧 어깨를 으쓱하는 게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나마 메마른 사내가 눈치가 좀 있는지, 급히 거한을 잡아 끌며 머리를 숙였다.
“시, 실례했습니다. 저희가 소란을 피운 거 같은데,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그럼요. 제 생각에도 이만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한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내 무리는 곧바로 짐을 챙겨 밖으로 달아났다.
이윽고 문이 쾅 닫힌 순간, 한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정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주저앉더니 볼멘 소리를 냈다.
“짜증나…. 언니 도대체 어디 갔었어.”
“미안미안. 본 지부에서 급한 통신이 왔거든. 연락을 받느라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어.”
한나가 손을 저으며 사과하자, 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급한 연락? 무슨 연락?”
“그게…. 한결이가 돌아왔대.”
한나가 입을 열자 유정의 얼굴에 남아있던 불만이 싹 사라졌다.
“한결이? 진짜?”
“응. 그런데….”
“어휴. 하여간 엄~청 늦게 돌아오네. 아, 안현은? 그리고 의뢰인들도 무사히 돌아왔대?”
다급히 묻는 유정에 한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유정이 답답해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자 눈을 감으며 말문을 열었다.
“아니.”
“응?”
“다른 사용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어. 돌아온 사람은 한결이 뿐이야.”
“…뭐라고?”
유정은 의자에 붙였던 엉덩이를 도로 일으켰다. 아미를 잔뜩 찌푸린 게 방금 말을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이다.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돌아오지 않아?”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냥 연락만 받은 거니까…. 아무튼 하연이 언니가 지금 바로 모이라고 하니까, 가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간다.”
“그, 그리고!”
그러나 유정은 더는 듣지 않고 신속히 몸을 날렸다.
막 “한결이 상태도 이상하다고….”라고 말하려던 한나는 쓰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가면 알게 될 일이었다.
“후유. 얼른 정리하고 나도 가봐야겠네.”
한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유정이 쓰러트린 의자를 주웠다.
이내 허리를 피어 의자를 집어넣으려는 순간, 한나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리고 빤한 시선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에 놓인, 갈기갈기 찢긴 여러 기록들에 멈춰있었다. 한나는 차분히 찢긴 조각을 맞춰보았다.
– 클랜…. 기공창술사, 신의 방패는 실종 1주일째…. 머셔너리 클랜의 첫 번째 의뢰 실패?
–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 지금 어디서 무엇을….
– 용병 클랜의 한계….
– 머셔너리 클랜….
머셔너리 클랜에 대하여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
“용병 클랜의 한계? 아주 놀고 있어, 정말.”
이내 한 마디 툭 내뱉은 한나는 테이블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른 가야겠다는 말과 달리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길은, 어딘가 모르게 근심하는 기색이 묻어있었다.
*
서부, 어디 깊은 산속의 계곡.
아직 아침 해도 채 떠오르지 않은 꼭두새벽이었지만 계곡 주변은 분주했다. 아니, 분주해지기 시작해야 한다고 나 할까.
탁, 탁, 탁, 탁!
끝 쪽에서부터 찾아오는 분주함에 거센 바람이 휘날렸다. 계곡 곳곳에 꽃인 횃불을 흘러오는 바람결에 이리저리 일렁였다.
바람을 일으키는 정체는 바로 한 사내였다. 그는 한 걸음마다 크게 뛰어오르며 죽자고 달리고 있었다. 무에 그리 급한지,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고 호흡은 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는 달리는걸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가속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이윽고 사내의 눈에 물이 흐르는 계곡을 중심으로, 부근에 여러 천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에서 꾸벅꾸벅 머리를 꺼트리는 사내도.
사람을 보자마자 사내는 달리는 도중 크게 외쳤다.
“크, 큰일났습니다!”
“허흡?! 아, 아후…. 깜짝이야!”
천막 밖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던 사내는 화들짝 머리를 들었다. 그 탓에 긴 머리가 한순간 좌우로 휘날렸다. 깜짝 놀라 눈은 크게 뜬 상태였지만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게 불의 따뜻함에 잠시 졸고 있던 모양이다.
긴 머리 사내는 쓱 입을 훔치더니 벼락같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깜짝 놀랐잖아 임마! 지금 다들 자고 있는 거 안보여?”
“추, 추적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호통에도 아랑곳 않고, 남성은 본론부터 곧장 꺼내 들었다.
“추적대?”
긴 머리 사내는 잠깐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의미를 알아들어 북북 머리를 긁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가득한 행동이었다.
“하…. 또 추적대라…. 미치겠네.”
“저, 정찰 조에서 연락이….”
“아, 알았어 알았어.”
긴 머리 사내는 알겠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계속해서 머리만 긁다가 설핏 고개를 들어 헐떡이는 사내를 응시했다. 순간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 그런데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 우리가 추적 한두 번 받아보는 것도 아니고.”
“하, 하지만….”
“진정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적대가 오든 말든 여유롭던 놈이…. 오늘따라 왜 이래?”
“그, 그게!”
사내는 여전히 초조한 빛을 지우지 못하며 주변을 훑었다. 그때였다.
“…끙. 무슨 일이야.”
천막을 헤치고 새로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털이 덮여 있고 배는 불룩 나온 게 과히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달려온 남성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이, 이강산 님! 큰일났습니다! 추적대를 발견했습니다.”
“추적대? 하~암.”
이강산은 몇 번 입을 두드리고는 시큰둥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 정찰 조 보고는 어때?”
“그게…. 끊겼습니다.”
그 순간 이강산은 하품을 멈췄다.
“…끊겼다고?”
“예. 현재 통신 두절 상태입니다.”
남성은 꿀꺽 침을 삼키며 바로 말을 이었다.
“정확히, 10분전 통신을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추적대에 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지막 보고는 들어왔어?”
“들어왔습니다. 추적대 인원은 열 명 남짓. 가슴에 달린 문양은 진한 붉은색 바탕에 검과 방패가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인원이 겨우 열 명…. 아니 잠깐만. 붉은색 바탕에, 검과 방패?”
그 순간 이강산과 긴 머리 사내의 고개가 동시에 돌았다.
남성은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려가는 둘에게, 호흡을 고를 생각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머, 머셔너리! 머셔너리 클랜의 척살 조가 온 게 분명합니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음색.
“이런…. 미…. 친….”
그와 동시에, 이강산의 안색이 급변하고 긴 머리 사내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 작품 후기 ============================
현재 2부에서 나열된 주요 사건 시간대는 이렇습니다.
1. 김수현 마몬 처치(몇 달 전.).
2. 안현, 백한결 의뢰 수령 후 출발(1달하고 2주 전).
3. 안현, 백한결 실종 신고(2주 전).
4. 백한결 홀로 모니카로 귀환(현재).
5. 머셔너리 클랜 척살조 부랑자 덮침(현재).
2년이 지난 후인데, 자세한 설명 없이 사건부터 들어가고 있으니 상황 파악이 약간 힘드실 거예요.
2부의 첫 시작은 사슬 구조로 잡았습니다. 여러 사건들이 터지고, 그걸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하나로 종합됩니다. 다만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간간이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차분히 설명하려면 전개가 더욱 느려지겠다고 생각했거든요. 🙂
1. 이름(Name) : 이유정(3년 차)
2. 클래스(Class) : 여명의 검투사(Rare, Gladiator Of the Dawn,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사랑에 빠진 미친 여자(狂女)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5)
7. 신장 • 체중 : 166.3cm • 54.7kg
8. 성향 : 첨예 • 순정(Sharp • Pure Love)
1. 피에 젖은 마음(Rank : A Zero)
1. 양손 단검술(Rank : B Plus)
2. 묘(猫)족 체술(Rank : B Zero)
3. 백병전(Rank : C Plus)
4. –
전 : [근력 67] [내구 69] [민첩 78] [체력 65] [마력72] [행운53] 후 : [근력 83] [내구 79] [민첩 92(+2)] [체력 84] [마력 90] [행운 88]
1. 이름(Name) : 임한나(5년 차)
2. 클래스(Class) : 황혼의 무녀(Rare, Medium Of Twiligh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스스로 꺾이기를 원한 청초한 꽃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68.7cm • 55.6kg
8. 성향 : 질서 • 신념(Lawful • Belief)
1. 축문(Rank : S Plus)
1. 중도의 활(Rank : A Zero)
2. 통찰(洞察)(Rank : A Plus)
3. 연사(Rank : B Plus)
4. 천리안(Rank : B Zero)
전 : [근력 72] [내구 84] [민첩 92] [체력 68] [마력 88] [행운 90] 후 : [근력 72] [내구 84] [민첩 93] [체력 71] [마력 89] [행운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