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37
00436 용이 잠든 산맥. =========================================================================
한 차례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수많은 사용자들의 머리칼이 너울거리듯 나부꼈다. 한 여인의 칠흑 색 머리칼이 허공에 사르르 흩뿌려지더니 살랑살랑 흔들리며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철혈의 여왕(Queen Of Blood And Iron)’ 한소영.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여인이었지만, 지금 여인의 눈동자에는 뜻 모를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인의 시선이 닿은 장소는 해발 고도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한 평지였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는다. 희뿌연 안개로 뒤덮인 분지는 오직 음울하고 음산한 기운만이 흘러나와,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용자들의 발걸음을 붙잡아놓고 있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이번 바람 역시 서늘했지만 뭔가 느낌이 다르다. 불쾌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묻어있는 게,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마치 “더 이상 다가오면 죽는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잠시 후, 한 사내가 여인의 옆으로 다가섰다. 약간은 빛이 바랜 체인 메일을 걸친 사내는 양손으로 커다란 도끼를 힘껏 움켜잡고 있었다. 그러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한두 방울 땀이 배어져 나오는 게, 사내 역시 무척이나 긴장한 듯싶었다.
이윽고 사내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소환하신 여왕의 군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알아. 5분전에 소멸을 확인했으니까.”
여인은 가볍게 수긍했다. 그러나 설마 소멸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사내는 눈을 크게 부릅떠 자신의 감정을 내비쳤다.
여인은 부드럽지만, 짧은 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뒤로 정연히 서 있는 클랜원들을 응시했다.
클랜 이스탄텔 로우.
북 대륙에 퍼진 명성만큼이나 강력한 실력을 지닌 그들이었지만, 지금 보이는 얼굴은 여인이나 사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간간이 공포심마저 보이는 게, 눈앞 분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짓눌린 모습이었다.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걸까?”
일말의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였다. 여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안타까운 눈빛으로 분지를 응시했다.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몸을 돌리기에는 아깝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지, 사내는 침착히 머리를 저으며 여인을 달랬다.
“클랜 로드. 사용자 정창민의 마지막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숨을 거두면서까지 안으로 들어가는걸 말렸습니다. 비록 여기까지 어찌어찌 오기는 했지만, 유적을 공략하려면 더욱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용자 정창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원이었으며, 결계를 다루는 능력으로 유명한 사용자였다. 또한 한 번의 실수로 ‘용이 잠든 산맥’에 먹힌 비운의 사용자이기도 했다.
‘악랄, 절규, 절망, 살의, 증오 등…. 아무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무언가 무척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집니다. 클랜 로드. 실은, 저는 정말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냥 버릇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입술을 짓씹다가 이내 침묵을 깨고 한 마디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결국 여인의 포기 선언이 떨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몸을 돌리자 지켜보던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안도한 표정들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가장 뒤쪽에 서 있던 한 청년의 입술에서 기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클랜원들은 오늘 강행군에 지쳐 저녁 식사를 끝내자마자 침낭 속으로 들어갔고, 오직 나와 허준영만이 남아 불침번을 서는 중이었다.
탁, 탁탁!
쪼개놓은 장작을 던져 넣으려는 찰나, 나는 설핏 눈을 돌려 허준영을 응시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반응이 늦고 말았다. 이내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자 탁탁, 또다시 불똥이 튀어 오른다.
다시 살아나는 불씨를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뭐가. 안현과 한결이를 구하러 가는 게?”
“그냥 모두 다. 안현을 구하러 가는 것도, 이런 일에 내가 참가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일에 참가해야 하는 것도 라.
나는 차분히 허준영을 응시했다. 사내인 주제에 허리까지 기른 기다란 머리칼에는 어두운 보라 빛이 흐르고 있었다. 입고 있는 복장은 검은색 코트 형 메일이었는데, 알 수 없는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다.
허준영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자신의 검을 꺼내 다리에 얹어놓은 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를 감도는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어둡다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칼집 채 얹힌 검이 사람보다 따뜻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윽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허준영은 비로소 눈을 열어 나를 마주 쳐다보았다. 머리 색과 마찬가지로 진한 보랏빛을 띤 눈동자였다.
“1년 전. 그러니까 내가 막 머셔너리에 가입했을 때,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
“1년 전?”
의아히 되물으며, 나는 1년 전 일을 회상했다.
허준영과의 첫 인연은 부랑자 척살 조로 활동했을 때였다. 마침 부랑자들이 은신해있는 장소의 정보가 들어와 척살에 나섰는데, 그곳에 다다랐을 무렵 한 발 앞서 도착해있는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그 사용자가 바로 허준영이었다. 그는 수뇌부 포함 거의 백 명에 가까운 부랑자들과 홀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때의 허준영은…. 글쎄. 나름대로 선전하고는 있었지만, 부랑자들의 조직적인 대응에 꽤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여 나와 척살 조는 곧바로 그를 지원했고 동시에 부랑자들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물론 허준영이 거기서 바로 가입한 건 아니었다. 이후 그는 간단한 감사 표시와 “언젠가 은혜를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났고, 나는 사용자 정보만 기억한 채 발길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나와 허준영의 재회는 북 대륙의 수호자 이효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알고 보니 허준영의 정체는 이효을의 손과 발이 되어 음지에서 돕는 역할이었던 것. 그때 부랑자를 처리하러 갔던 것도 이효을의 부탁을 받아 간 것이라고.
당시 이효을은 후계자를 찾아낸 상태였다. 인수인계가 끝나면 바로 수호자를 그만두는 터라, 마찬가지로 허준영과의 계약도 슬슬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여 이효을은 어차피 둘 다 그만두는 거, 머셔너리에서 미리 허준영을 데려가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했다.
이후로 나와 허준영은 약간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식 절차를 밟아 가입하게 되었다.
나야 남다은과 비견될 정도의 사용자 한 명을 얻으니 좋은 일이었고, 허준영도 은혜를 갚을 일이 있으니 보답하겠다는 의미로 가입하게 된 것이다.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떠올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허준영은 살짝 답답한 어조로 말했다.
“안현 말이다. 1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않은가. 그리고 수습하는데 꽤 곤란을 겪었고.”
“아, 그거. 그래도…. 그때랑 지금은 비교도 안 되지.”
싱겁게 웃으며 대꾸하자 허준영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에는 비슷한 맥락 아닌가? 그 일이 있은 후로 조금 잠잠해지나 싶더니,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또 문제를 일으켰다. 그때도 지금도 네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건 그래.”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놔두는 게 어떤가? 솔직히 나는 이번 사건으로 놈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상태다. 운이 좋다면 살아 돌아올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우리가 굳이….”
“그건 안 돼.”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둘을 구하기로 결정했고, 구조대는 벌써 이만큼이나 왔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나는 마음을 바꿀 생각도 발길을 돌릴 생각도 없어. 돌아가려면 너 혼자 돌아가.”
탁탁! 탁탁!
돌연히 거세어진 불길에서 세찬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불똥에 맞았는지, 허준영은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싫다.”
“용이 잠든 산맥은 위험한 지역이야.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벌써부터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해.”
“그냥 생각일 뿐이었어. 생각해보니 한결이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겠군.”
“불가피한 일이지.”
나는 쓰게 웃었다. 조금 전 말은 허준영의 본심이라기보다는 습관이었다. 이놈은 결국에는 힘을 빌려줄 거면서도, 그전까지는 투덜투덜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가끔 보면 꼭 새침한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뭐, 사내가 고양이라니 조금 안 어울리기는 하지만.
그때였다.
“응?”
“흠.”
다시 천천히 사그라지는 불길에 장작을 집으려는 찰나, 나와 허준영은 동시에 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대지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진동들을 느꼈기 때문이다. 땅굴을 파는듯한 진동은 지금도 꾸준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자칼로드인가…. 수는 서른 정도.’
자칼로드. 간단히 말해서 땅속 괴물이다. 몸 자체가 땅을 파거나 지하에서 생활하는데 최적화된 괴물인데, 사용자들이 잠든 틈을 타 습격하는 악랄한 놈들이었다.
스으윽, 스르릉!
“그러고 보니 슬슬 불침번을 교체할 시간이던가…. 다녀오지. 먼저 자고 있어라.”
허준영은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멋들어진 솜씨로 검을 빼어 들었다. 검신의 폭은 굉장히 얇지만 길이는 매우 길어 거의 자신의 키와 비슷할 정도였다. 이내 천천히 어깨에 검을 걸치는 허준영을 보며 나는 멀뚱히 입을 열었다.
“같이 가도 되는데.”
“별로. 보아하니 따라오는 놈들은 아닌 것 같고…. 땅꾼들 정도면 몇 십 마리가 몰려와도 상관없어.”
‘따라오는 놈들이라.’
허준영은 흘리듯이 대답했다. 나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방금 말을 꺼낸 따라오는 놈들이란, 모니카를 나올 때부터 알게 모르게 우리를 따라오는 사용자 혹은 부랑자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워낙 거리 조절이 섬세해 나도 그냥 누군가 따라온다는 사실만 느끼고 있었는데, 하여튼 감은 무지 좋은 놈이었다.
“아무튼 대충 처리하고 올 테니, 걱정 말고 먼저 잠자리에 들도록.”
허준영의 확언에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하기야 그 정도의 실력이면 속칭 ‘땅꾼’들 정도야 100마리도 우스울 것이다.
“불침번이라도 깨워놓을까?”
“아니 됐어. 다녀오고 나서 깨울 테니까, 연초나 있으면 하나 줘.”
연초나 빌려달라는 요청에 꺼내어 던져주자, 그는 얇은 손가락으로 정확히 잡아챘다. 동시에 대지를 가볍게 뛰어오른 순간, 마치 궁신탄영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허준영의 몸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나와 같이 민첩 능력치가 높은 시크릿 클래스였다.
나는 대충 불길을 확인한 후 침낭으로 몸을 묻었다.
이윽고 한 쪽에서 어둠이 크게 솟구치는 것과, 대지를 가르는 소리와, 자칼로드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이 미약하게 흘러들었다.
그러한 소리들을 반주 삼으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약간 안개가 꼈지만, 하늘이 맑고 푸른 아침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출발하면서 안솔과 유정이 푹 잤다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도 자칼로드에게 습격 당할뻔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반사적으로 허준영을 쳐다보자, 그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음으로써 대답했다. 원래 자랑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냥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용이 잠든 산맥은 서부 소도시 도로시로부터 서북 방향으로 3주 정도 가면 나오는 지역이다.
3주면 그래도 사용자들의 발길이 몇 번 닿았을 법도 한데, 산맥은 흔히 말하는 미개척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가는 길이 워낙 험난하기도 하거니와 상대하기 까다로운 괴물들이 떼지어 출현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만해도 이미 붉은 사막과 자석의 황야를 거쳐, 질척거리는 늪지대를 통과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안개의 평야만 지나치면, 그때부터 굽이굽이 산맥을 이루는 험한 산지대가 나온다. 그곳부터가 바로 미개척 지역의 시작이었다.
나는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1회 차 시절, 북 대륙은 강철 산맥 공략 전 모든 지역을 안정화하고 공략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바로 용이 잠든 산맥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전한 클랜은 내가 몸을 담고 있던 이스탄텔 로우 클랜. 비록 한 명 사망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유적 코앞까지 가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결국 유적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당시 이스탄텔 로우의 사망자는 정창민이라는 이름으로, 결계를 다루는 능력에 일가견이 있는 사용자였다. 그는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숨을 거두기 직전 내게 유언을 남겼다.
‘수현아…. 혹시라도 클랜 로드님이…. 클랜원들이 말려도 기어이 가시겠다고 하면…. 네가 꼭 말려주라….’
‘널 많이 예뻐하시잖아. 하하…. 아마 다들 말리면 고집은 부리시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부탁해. 뭔가, 불안해. 그리고….’
결국 한소영은 클랜원들의 만류에 고집을 꺾었다. 그리고 이후, 정창민의 유언에 따라 유적 부근에 대규모 봉인 결계를 치고, 오직 산맥 내부만 깨끗이 청소하는 걸로 공략을 마무리 지었다.
돌아오고 나서 대외적으로 안정화라고 발표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완전한 공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유적 내부까지 탐험한 게 아닌, 안에 있는 것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봉인을 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있다면, 바로 산맥 내에서 실종된 사용자들의 존재였다.
1회 차든 2회 차든, 산맥 내에서 실종된 사용자들의 종적은 홀연히 사라졌다. 하다못해 시체라도 있어야 정상인데 시체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마 유적 내에 있는 게 아닐까 많은 사용자들이 예상했지만, 결국 유적 자체를 봉인하는 것으로 예상은 추측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쩌면 유적을 탐험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산맥에 얽힌 역사로 생각을 돌렸다.
고대 홀 플레인에서도 옛 시대의 기록을 적어놓은 신화 속의 대 전쟁. 대륙을 지배했던 용과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인간들의 전투.
기록에서 일컫기를 최후의 승리자는 분명히 인간이었다. 신화 속 거주민들은 최후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는 죽기 직전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최후의 장소에 저주를 내렸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록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이후 결과에 대한 짤막한 한 줄이라도 언급돼있어야 정상인데, 전투에서 승리하고 용이 저주를 내렸다는 게 기록의 끝이었다.
아무튼 수십 년간을 이어왔던 전투의 종지부를 찍은 장소가, 바로 우리가 향하는 곳이었다.
“와아. 그러면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데요?”
차분히 행군을 하던 도중, 안솔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가면서 간단히 고대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꽤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무지무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 팔을 꾹꾹 잡아당기는 안솔을 향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후는 몰라. 기록에도 나와있지 않으니까. 궁금하면 돌아가서 직접 찾아보렴.”
“으응….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 궁금하다….”
안솔은 내 팔을 꼭 잡고 있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별로 걱정이 안되나 봐?”
“우웅? 걱정이요?”
“안현. 네 친 오빠.”
“아~. 네. 별로 걱정 안 되요. 우리 오빠야 생명력은 바퀴벌레 급이고~. 그리고 오라버니가 직접 구하러 가는 중이시잖아요. 헤헤.”
안솔은 해맑게 웃어 보였다. 정말로 괜찮은지 이제는 잡은 팔을 휙휙 휘두르기까지.
‘아직 살아는 있는 건가?’
이 반응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 즈음이었다. 갑작스레 남다은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빙긋 웃으며 안솔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솔이. 클랜 로드님을 정말 좋아하는가 보구나.”
“네! 저는요. 우리 오라버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어, 어? 어, 언니. 왜 갑자기 절 은근슬쩍 잡아 끄시는 거예요?”
“아. 우리 솔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
“어, 어…?”
양팔을 활짝 벌렸던 안솔은, 그대로 남다은에게 잡혀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내 허공에 방방 손을 휘젓는 안솔을 보며 훨씬 편해진 팔을 한 바퀴 돌린 찰나였다.
“으윽…! 으으윽…!”
순간 진의 후방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들었다. 한결의 목소리였다. 나는 바로 행군을 멈추고 신재룡에게 달려갔다. 현재 한결은 신재룡이 업은 채 가는 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한 걸음에 달려가자, 신재룡이 한결이를 반듯이 눕힌 채 걱정스런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흘리고는 입맛을 다셨다.
“한결군이 갑자기….”
“상태가 어떤데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안개의 평야 끝자락에서부터 갑작스럽게 고통스러워하더군요. 아니. 힘들어하다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다가, 이제는 고통스러워하네요. 치료 주문도 듣지 않으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치료 주문이 듣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한결이는 빈 껍데기, 혹은 반쪽자리에 불과했으니까.
일단 가슴에 손을 대보자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었다. 다만 출발했을 때보다 훨씬 미약해진 게, 곧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다시 강행군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용자 신재룡. 부탁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사제치고는 힘이 좋으니까요.”
신재룡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는 다시 한결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이윽고 다시 강행군 준비를 하는 클랜원들을 보며 나는 입술을 물었다. 솔직히 여태껏 쉬지 않고 달려온 만큼, 산맥을 앞두고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정비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해서 최대한 강행군을 자제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강행군 준비는 삽시간에 마쳤다. 이내 다시 출발하기 직전,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춰 후방을 응시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느낀 몰래 몰래 따라오는 기척들이, 오늘 아침 부로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허준영을 쳐다보자, 그는 마찬가지로 뒤를 쳐다보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클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3분만 휴식하겠습니다. 휴식 후 한결이를 찾을 때까지는 거의 쉬지 못할 테니,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빠르게 말을 마치고 나서, 나는 신속히 한 쪽으로 이동해 클랜원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고연주에게 눈짓을 주자, 금세 알아들은 그녀가 살그머니 나를 따라왔다.
“수현. 무슨 일이에요?”
“어제까지 우리를 따라오던 기척들이 사라졌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묻자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는걸 보니, 그녀도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정확히는 아침 식사 후, 평야의 끝에 다다르자 물러난 것 같아요. 아마 우리가 산맥으로 들어가는지 들어가지 않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것 같던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네?”
고개를 갸웃하는 고연주.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고연주는 잠깐 움찔하더니 의아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사용자 고연주.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중요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중요한 부탁이요? 혹시…. 돌아가라는 말은 아니죠?”
“미안하지만, 맞습니다.”
“…헐.”
고연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곧 우는 소리와 함께 내 품에 무너지듯 몸을 허물어뜨렸다.
“허헝~. 너무해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고연주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 또한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라는 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즉흥적인 생각이 아닌 회의실에서 김수정을 봤을 때부터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따라오는 무리를 느꼈을 때 거의 확신에 이르렀고. 애당초 유정이를 데려온 이유는, 고연주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요?”
“예. 지금부터 고연주는 아무도 모르게 도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마 우리를 몰래 따라온 무리는, 고연주의 말처럼 구조대가 산맥으로 들어가는지 또는 들어가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따라왔을 것이다.
더욱 정확히 말해보면, ‘그림자 여왕’의 참가와 그녀의 중간 이탈 여부를 확인하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보와 추적에 한해서 고연주만큼 부담스러운 상대가 없으니까.
‘물론 이 모든 게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나는 1회 차 시절 10년 동안 음지에서 활동한 내 감을 믿고 있었다. 이번 사건은 뭔가 굉장히 찜찜하고 구릿한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중요한 건,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재차 힘주어 말하자, 고연주의 우는 소리가 뚝 끊겼다.
이윽고 품에 묻은 고개가 슬쩍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수현. 무슨 일 때문이에요?”
나른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자, 입가에 진한 미소를 배어 물고 있는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속삭이듯이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았네요. 덕분에 큰집은 잘 다녀왔습니다. 산소도 들러서 인사도 하고 왔고요. 🙂
아. 결혼식을 볼 때는 뭔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고, 너무 빨리 마치는데 의아한 기분도 들더라고요.
허준영, 안솔, 신재룡. 사용자 정보는 오늘 아침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차로 왔다갔다 하니 지금 약간 정신도 없고, 많이 지치네요. 하하.
* 이준영의 이름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허준영으로 변경했습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 구조대에 참가한 클랜원은 백승훈이 아니라 신재룡이었습니다. 백승훈은 새로 추가한 사제 클랜원 중 한 명인데, 전 회에 신재룡과 혼동했습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