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40
00439 용이 잠든 산맥. =========================================================================
그때였다.
“───. ───. ───.”
“───. ───. ───.”
공터에 서 있는 망인들 사이로 웅얼거리는 소리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태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주문 영창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우우우웅!
생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웅혼한 진동음과 함께, 공터를 아우르는 2개의 입체 마법 진이 둥글게 퍼져 나온 것이다. 그것들은 삽시간에 허공으로 떠올라 각기 붉고 푸른빛을 비추었고, 이내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얼른 공터를 주시하자 아직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망인들이 보였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 번뜩이는 시뻘건 눈동자가 히쭉 휘어지는 순간, 나는 지체 않고 외쳤다.
“사제!”
“안젤루스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기특하게도 안솔이 바로 내 외침에 화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쐐액!
한순간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흘러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발 아래서 반구형의 막이 일어나 우리를 둥그스름히 감싸 안았다.
우우웅!
쾅, 콰앙!
이내 눈 깜짝할 새 짓쳐 든 바람 소리는 희뿌연 한 막에 부딪쳐 사그라졌고, 파문을 남기며 서서히 사라졌다. 말 그대로 간발의 차이였다.
“안솔! 나이스 타이밍!”
유정이 달뜬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나는 아직이라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재빠른 대응이기는 했지만,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일렀기 때문이다.
마법진을 소환한 건 이러한 단발성에 의의를 두지 않는다. 보통은 마법의 위력을 증강하고, 더 나아가 연사에 필요한 주문 영창 시간을 줄이려는 게 주 목적이라 볼 수 있다.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시야를 가득히 메워오는 수많은 마법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담은 마법들은, 마치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사납게도 보호막을 덮쳐 들고 있었다. 안솔 또한 입술을 꾹 씹은 채, 질 수 없다는 얼굴로 날아오는 마법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다발의 마법과 안젤루스 보호막의 격돌이 시작됐다.
쾅, 쾅쾅, 쾅쾅쾅, 쾅쾅쾅쾅!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안솔이 생성한 안젤루스 보호막은 확실히 대단했다. 서로 부딪칠 때마다 보호막에는 미미한 파문이 일었지만, 마법은 결국 파문을 뚫지 못해 닿는 족족 중화되는 중이었다. 불벼락과 얼음덩어리들이 세차게 쳐 내리고 있는 속에서, 안솔은 단신으로 그 모든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고 있었다.
“끄으응…!”
그러나 언제까지고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안솔은 살며시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지팡이를 쥔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고, 보호막의 빛도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물론 우리라고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보석 마법사’ 한별이었다.
“대상 지정, 안젤루스 신성 주문. 사용 보석, 애주라이트 화이트.”
곧 자그마한 보석 하나가 한별의 손에서 떠오르더니 환한 빛을 뿌리며 보호막으로 섞여 들었다.
“보석 증폭!”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외침은, 바로 한별의 고유 능력인 ‘보석 증폭’이었다.
사르르! 사르르!
증폭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보석이 가루로 변해 보호막 겉면에 흐르듯 녹아 내리는 순간, 서서히 빛을 잃어가던 보호막이 원래의 빛깔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며 본래 이상의 힘을 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손에 하얀 빛을 쥐고 있던 한별은, 예의 쌀쌀맞은 그러나 조금은 다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솔아! 보호막 유지는 나한테 맡기고…!”
“어, 언니. 그럼 부탁해요.”
바로 마력의 흐름을 넘겼는지, 안솔은 한 걸음 물러서 “후우우.”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살겠다는 얼굴….
“하~압!”
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볼이 빵빵 해질 정도로 있는 힘껏 숨을 들이키더니, 양손으로 지팡이를 꼬옥 잡아 공터를 겨누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토해내듯, 빽! 소리를 내질렀다.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짜작! 짜자작!
그 말과 함께, 공터로 매서운 번개가 서너 줄기 내리쳤다. 번개는 보호막과 같은 하얀 빛을 띠고 있었다. 안솔의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의 고유 능력, ‘천벌’의 발동이었다.
쾅!
동시에, 방금 부딪친 푸른 구체를 마지막으로 막에 쉴 새 없이 일던 파문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조금 기다리자 더는 마법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안솔의 권능 ‘천벌’이 마법진을 소환한 망인을 운 좋게 친 모양이다.
“휴….”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게 힘겨웠는지, 한별은 허공의 마법진이 사라진걸 확인한 후 안젤루스의 보호막을 해제했다.
그렇게 ‘천벌’을 기점으로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악…. 하악….”
안솔은 고개를 떨군 채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전쟁 중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사제라고 오해할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까 호흡을 잘못 조절한 것에 불과해, 나는 시선을 돌려 전방의 공터를 응시했다. 그러나 안력을 돋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안개와 ‘천벌’로 일어난 여파가 섞여 더욱 보이지 않는다.
“후. 힘들었어.”
잠시 후, 호흡을 가다듬은 안솔은 이마를 쓱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어때요?”
그리고 살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와 목과 허리를 빳빳이 세우며 물은 찰나였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아주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공터에서 망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끔찍한 비명이 떠르르 울렸다. 흘끗 옆을 쳐다보자, 멍한 얼굴로 공터를 주시하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살아있다는데?”
“어, 어떻게…. 분명 제대로 맞췄을 텐데….”
큰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더듬거린다. 그러나 안솔의 ‘천벌’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지금 들리는 망인들의 합창은 처음 공터에서 확인했던 수보다 적다고 생각되는 괴성이었다.
끄아아악! 끄아아악!
다시 들려오는 괴성에, 허준영은 안솔의 어깨를 톡 치고는 내 옆으로 섰다.
“아마 빗맞은 놈들이 있겠지…. 김수현.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아까보다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도 들었어. 전부 전투 준비!”
허준영이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주어, 나는 바로 몸을 돌려 클랜원들을 응시했다.
조금 전 마법 공격이 무서웠던 걸까, 아니면 악명 높은 용이 잠든 산맥에 들어와 치르는 첫 전투라서 그런 걸까? 다들 침착한 태도로 무기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한 낯빛이 역력했다.
“히히! 망인들의 피는 차가울까? 뜨거울까? 검을까? 붉을까? 히히히!”
…한 명만 빼고.
유정이 정신 줄을 놓은 모습에 잠시 혀를 찼지만, 이제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내 들고 있던 무검을 일월신검으로 교체한 후, 나는 곧장 상세한 지시를 내렸다.
“방진에서 층진으로 변경하겠습니다. 남다은, 차소림, 허준영은 나와 함께 앞으로. 사제와 마법사는 제일 후방에서, 궁수는 적당히 물러나며 지원 사격을 해주세요. 우정민은 키퍼로, 유정이는 알아서 지원 전투를 하도록.”
앞서 호명한 세 명은 바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는 들어오는 방향을 계산해 일월신검을 비스듬히 들었다. 달빛을 머금은 일월신검은 섬뜩할 만큼 푸르스름한 반사광을 내뿜고 있었다.
쓱, 쓰윽!
끄어어, 끄어어억!
괴성은 생각보다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상대로 ‘천벌’을 빗맞은 놈들이 꽤나 있는지, 이따금 과하게 발을 끄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쓰윽, 쓰윽, 쓰윽, 쓰윽!
쿵! 쾅! 쿵! 쾅!
‘남은 거리는 2미터쯤 되려나….’
“바로 앞입니다. 한 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차소림이 말했다. 그리고 그 즉시, 녹이 잔뜩 슨 대검이 자욱한 안개를 가르며 비죽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무기가, 거무스름한 다리가, 붉게 빛나는 안광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었다. 피부는 갈라터지다 못해 붉은 속살을 간간이 비추고 있었고, 얼굴은 절반은 썩어 문드러진 살이 절반은 해골이 드러나 있었다. 확실히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모습이었다.
“동시 돌진인가…. 그렇다면.”
허준영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하늘을 찌를 만치 길쭉이 솟은 검으로 뭔가 거리를 재는 것처럼 주춤거린다.
그러나 허준영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이며 두세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후려갈기듯 팔을 내려쳐 검을 대지에 충돌시켰다.
쿵!
대지가 쪼개지는 소리가 주변을 크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차소림의 말처럼 대여섯은 되어 보이는 망인들이 일제히 안개를 헤치며 튀어나왔다.
이윽고 놈들이 우리를 보며 막 뛰어오르려는 순간이었다.
투쾅!
차차차차차창!
순간 쪼개진 대지에서 수십 자루의 마력 검들이 중구난방으로 솟구쳤다. 그것들은 이제 막 뛰어오른 망인들은 정확히 노리며 들어가고 있었다. 허준영의 능력 중 하나였지만 자세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기막힌 타이밍으로 망인들의 돌진을 상쇄한 것이다.
서걱, 서걱서걱!
끄어억! 끄어어억!
망인들의 몸에 삽시간에 수십의 검상이 생겼다. 생겨난 구멍에는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온다. 놈들은 들어오기는커녕 바닥을 구르며 우왕좌왕하며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아까 전과는 다른 고통이 담긴 구슬픈 비명이었다.
쉬익!
그때, 차소림은 들고 있던 창을 앞으로 쭉 뻗어 들었다. 이어서 한 차례 짧은 기합이 들리는가 싶더니 눈앞 허공으로 은빛 기운이 기다란 잔상을 남겼다. 차소림이 갈팡질팡하는 망인들을 향해 직선으로 돌진해 들어간 것이다.
아르쿠스 발키리 세트로 무장한 차소림은 아름다우면서도 용맹했다. 어찌나 강력히 들어갔는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낄 정도였다.
푸욱!
살을 찢고 들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흘러들었다.
차소림은 가장 선두에 있던 망인에게 곧바로 창을 찔러 넣어 그대로 밀고 나갔다. 망인은 반사적으로 녹슨 대검을 들어 올렸지만, 차소림은 최대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오히려 창을 뒤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아, 망인은 곧 팔을 허우적거리며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허준영이 돌진을 죽이고 진을 흩뜨려놓았다면, 차소림은 아예 진을 붕괴시킨 것이다.
결국 망인이 손에서 녹슨 대검을 놓치는 것과 함께, 차소림은 망인을 꼽은 채 그대로 창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부웅!
쿠당탕탕!
그 탓에 망인은 창 끝에서 빠지며 허공을 날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망인들은, 창이 지나간 자리에 맞아 다시금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쓰러뜨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앙!
그러나 그때, 허준영과 차소림이 휘젓는 공간 바로 앞으로 새로운 망인들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망인은 여섯 마리가 전부가 아니었다. 조금 전 망인들은 선봉에 불과했고, 저놈들은 뒤이어 들어오는 놈들인 듯싶었다.
그렇게 지원 온 망인들이 차소림을 에워싸려 좌우로 퍼지려는 순간.
씨잉! 씨이잉!
퍽, 퍽!
화살 두 발이 귀신같이 날아와, 차소림과 가장 가까이 있던 망인들에게 각각 꽂혀 들었다. 한 발은 번쩍이는 섬광으로 가슴을 직격했고, 다른 한 발은 망인의 얼굴에 깨끗하게 꿰뚫었다.
“숙여!”
궁수들이 벌어다 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허준영은 날카롭게 외치며 앞으로 달렸다. 차소림은 방어 자세를 잡으려고 하다가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남은 망인들은 한 박자 늦기는 했지만, 에워싸기는 글렀다 싶었는지 무기를 힘껏 뒤로 젖히고 있었다.
이윽고 허준영은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대지를 힘차게 내디뎠다. 그리고 상체를 크게 기울여 새로 출현한 망인들을 향해 오른팔을 쭉 뻗어내었다.
달빛을 반사하는 검은 찬연한 반사광을 뿌리며 반원을 그렸다. 거리는 약간 남은 상태였지만 허준영 검의 길이는 굉장히 길다. 거기다 팔 길이를 합치고 상체마저 기울이자, 닿을 간격은 충분히 되고도 남았다. 이내 길쭉한 검은 차소림의 등을 스치고 지나가, 망인들을 사정없이 찢으며 지나쳤다. 여지없이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때였다.
쓰윽, 쓰윽, 쓰윽, 쓰윽!
쿵! 쾅! 쿵! 쾅!
또다시 들리는 망인들이 다가오는 소리.
이번에는 정면이 아닌 좌우 방향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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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 회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