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44
00443 증오, 그리고 갈등. =========================================================================
용이 잠든 산맥의 면적을 정의해보면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광대무변(廣大無邊).
매우 너르고 커서 끝이 보이지 않아, 1회 차 시절에도 모든 지역을 청소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산맥의 끝이 아닌 유적이 있는 장소를 목적지로 설정한다면, 현재 우리가 어느 정도 거리가 남았는지는 가늠할 수 있다. 아무튼, 이제나저제나 공략의 핵심은 유적이니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해보면, 현재 한결을 구출한지 이틀하고 사흘째에 가까워지는 지금, 우리는 약 삼 분의 일 정도는 지나쳤다고 볼 수 있었다. 즉 첫 번째 관문인 초입과 두 번째 관문인 ‘방황의 대지’는 무사히 통과한 셈이다.
그리고 내일쯤 도착할 예정인 갈림길에 다다르게 되면, 비로소 세 번째 관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용이 잠든 산맥의 세 번째 관문은 특이하게도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갈림길은 일종의 분기점(分岐點) 역할을 한다고 나 할까.
오른쪽으로 가게 되면 ‘증오의 대지’라 부르는 지역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게 되면….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조용히 생각을 이어가던 찰나, 비비앙 특유의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설핏 시선을 들자 자그맣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둘러싼 세 여인이 보인다.
김한별, 차소림, 비비앙. 이 세 명은 나와 함께 불침번을 서는 중이었다. 말인즉슨 다른 아홉 명의 클랜원들은 침낭에 들어가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 휴식을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단 한결의 구출은 성공했으나, 안현의 구출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클랜원들은 여태껏 강행과 전투로 알게 모르게 지쳐있는 상태였다. 남은 여정을 생각하더라도, 이제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체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김수현. 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니까? 응?”
비비앙이 재차 말을 걸었다. 말투에는 제발 대꾸 좀 해달라는, 혹은 자신 좀 돌아봐 달라는 무언의 애원이 담겨있었다.
‘나뭇가지 하나 잘못 짚은 게 어지간히 마음에 걸리나 보군.’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차소림과 김한별이 워낙 조용한 성격이라 불침번이 심심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다행히 비비앙이 말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일환으로, 차분히 모닥불을 쑤시며 입을 열었다.
“뭐가.”
“왜 백한결이 장소를 배회했는지. 그러니까 더 나아가, 이 산맥이 어떤 장소인지 알 것 같아.”
비비앙의 목소리는 자못 의기양양해, 일순 “그냥 하지마.”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그러면 정말 오랜만에 울먹울먹하며,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는 비비앙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솔직히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일 가능성도 컸고.
하지만 눈을 초롱초롱이 빛내는 김한별, 차소림이 보여 나는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하기야 한 번쯤 들어두어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테고, 상황도 한가로이 장난칠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모닥불을 쑤시는걸 멈추고 차분히 비비앙을 응시했다.
“좋아…. 말해봐.”
“뭐야. 그 거드름 피우는 눈빛은. 아니꼽게시리.”
“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네, 네가 예전에 필드 효과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잖아? 그래서 그걸 기준으로 생각을 다르게 해본 거야!”
뭔가 굉장히 불경한 말을 들은 느낌이지만,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이 가상해 넘어가주기로 했다.
하여 계속 이야기하라는 뜻으로 고갯짓을 하자, 비비앙은 한결 안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흐흠. 그러니까…. 망인은 원래 생명이 끊어진 인간을 의미하잖아?”
“그렇지.”
“그래. 그러면 그러한 관점에서, 생명이 끊어진 인간은 모든 게 정지하지. 심장도, 몸의 움직임도, 그리고 사고도. 하지만 산맥에 들어온 이후로, 내가 보아온 망인은 왠지 망인 같지가 않았어. 가끔이지만 말도 들리고, 주문도 외우고, 전투 방식도 살아있는 인간과 거의 비슷해 보였다고나 할까? 그럼 여기서 문제. 분명 생명이 끊어진 인간인데, 여기서 출현하는 망인들은 어떻게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는 걸까?”
“원혼, 집념, 한, 저주 등등…. 글쎄. 얼어붙은 숲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 아무튼 네가 말한 것들을 가능케 하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
나는 조용히 대답하고 나서 비비앙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는 의미인지, 비비앙은 머리를 크게 끄덕이더니 신나게 말을 이었다.
“좋아 좋아. 그러면 다시 얘기를 돌려서, 필드 효과로 돌아가 보자고. 생각해봐. 도대체, 이 필드 효과라는 게 왜 일어났을까?”
“…일어나는 경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지. 누군가 인위적으로 발생시켰거나, 아니면 어떤 조건들이 맞아떨어져 자연적으로 발생했거나.”
“맞아. 그 중에서, 나는 자연 발생에 초점을 맞췄어. 왜냐하면 네가 지금껏 해준 이야기들을 종합해본 결과, 한 가지 가설이 생겨났거든.”
“가설?”
비비앙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코를 매만지더니, 약간 피곤한 모양인지 힘껏 기지개를 폈다.
“으다다다. 응. 신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가 인간들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부분. 그리고 네가 조금 전 이야기한 원혼, 집념, 한, 이런 것들?”
“그런 것들이라…. 자연 발생이라 함은, 마그나카르타의 저주와 인간의 원혼, 집념, 한 등등이 섞여 하나의 필드 효과를 만들어냈다는 말인가?”
“바로 그거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김수현. 왜 도대체 이 장소에 인간들이 한이 맺힌 걸까? 과연 용이 저주를 내려서일까?”
“…….”
나는 잠자코 비비앙의 말을 기다렸다. 어느새 김한별과 차소림도 비비앙에게 시선을 집중한 상태였다.
비비앙은 우리 셋을 쓱 훑어보더니 짙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지배권을 되찾으려 수십 년간 전쟁을 벌였는데, 최후의 장소인 산맥으로 들어서며 나름의 각오는 했겠지. 그런데 전투가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용이 고작 저주를 내렸다고 한이 맺혀? 내 생각에는 아니올시다 야. 물론 어느 정도의 연관이야 있겠지만…. 인간들의 한이 맺힌 데는 조금 더 다른, 직접적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 가령 역사에는 전해지지 못한, 어떤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했다고.”
비비앙은 비로소 긴 이야기를 끝냈다. 마지막에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서 그런지 살짝 호흡이 거칠어진 모습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비비앙을 새삼스런 마음으로 응시했다.
“어때? 내 이야기가?”
‘거의 정답이네.’
1회 차에서 사용자들은 용이 잠든 산맥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을 쏟아내었다. 그 중 가장 지지를 받았던 가설이 바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이 있다.’였는데, 비비앙의 말은 그 가설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 즉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소리. 해답은 유적에 잠들어 있겠지만, 결국 이스탄텔 로우에서 봉인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
아무튼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왠지 모르게 순순히 인정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까닭은 없다. 그냥 비비앙이 “에헴.”하는 모습이 보기 싫다고나 할까.
결국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반응이 별로 마음에 차지 않는지 비비앙은 잠깐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휙 고개를 돌려 조용히 모닥불을 쬐고 있는 김한별을 쳐다보았다.
“보석아. 너는 어때?”
“닥…. 시끄러워요. 제가 왜 보석이에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김한별은 눈썹을 한껏 치켜 올렸다가, 나를 한 번 보고는 누그러뜨렸다. 아마 조심스레 추측해보건대, 방금 “닥쳐요.”라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뭐 어때서. 보석을 사용하는 마법사니까 보석이지.”
“하지 말라고요. 제가 듣기 싫다는데 왜 자꾸 그러는 거예요? 자꾸 그러면 저도 연금이라고 부르겠어요.”
김한별은 맹렬히 반대했다. 비비앙은 입술을 삐쭉 내밀어 투덜거리더니 이번에는 가만히 있는 차소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창창이는 어때? 내 이야기 들었어?”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불침번 때 과한 이야기를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창창이라. 창을 사용하니까 창창이인 건가?
아무튼 차소림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손은 아르쿠스 발키리 창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꽤 재미있는 명명이라 생각되는데, 막상 이름을 불리는 당사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마지막 말인 “부디, 조심하시길.”의 어조는, 나조차도 진심이라 느껴질 정도로 살기가 충만했다.
속으로 키득키득 웃고 있자 비비앙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게 보였다. 안색이 시무룩해 보이는 게, 기껏 그럴듯한 가설을 세웠는데 반응이 미적지근하니 실망한 얼굴이다. 역시 비비앙은 저 얼굴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나는 차분히 감상에 들어갔다.
그때였다. 한동안 구시렁거리던 비비앙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얼굴에 분연한 기색이 가득한걸 보니, 괜히 분한 마음이 이는 모양이다.
이내 나를 향해 입을 열려는 낌새가 보여, 나는 바로 선수를 쳤다.
“닥쳐.”
“그럼 검검이는…. 왜! 뭐!”
“그렇게 부르지마.”
“싫어! 내 마음이거든! 이게 뭐 어때서!”
“계약서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부디 그 방정맞은 입을 영원히….”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방구를 뀌고도 성을 내던 비비앙은, 곧바로 넙죽 엎드렸다. 아주 간단한 진압이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다.
*
다음날.
4명 3교대로 2시간씩 휴식을 취한 후, 나는 곧바로 안현의 구조를 위한 출발을 알렸다.
사실 클랜원들은 아직 자세한 내막을 모르겠지만, 안현의 실종을 확인한 이상 나는 이미 유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왜냐하면 실종된 사용자들은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
물론 이것 또한 1회 차의 가설에 불과하다. 용이 잠든 산맥은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는 미개척으로 남은 지역이었다.
아침에 출발했다고는 하지만, 워낙 산세가 험하고 나무가 빽빽해 지금이 아침인지 오후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는 총 세 번의 전투를 거쳐, 출발한지 두 시간 만에 한결이 말한 갈림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갈림길.
산지인 이상 어느 곳이든 갈리는 길이 있겠지만, 이 갈림길은 조금 특별하다. 누가 봐도 확연히 갈림목이라 알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를 기준으로 길이 양 갈래로 나뉜 상태였다.
“여기가…. 갈림길?”
20분 전 전투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지, 남다은은 헐떡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다은의 시선은 눈앞의 커다랗고 말라비틀어진, 툭 치면 바스러질 것 같은 나무에 고정돼있었다.
나는 왼쪽 길과 오른쪽 길에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가, 옆에서 불안한 얼굴을 한 한결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갔다는 말이지?”
“네, 네. 확실해요.”
“얼마나 깊숙이 들어갔지?”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한 십 분…? 그리고….”
한결은 다시 말을 이으려다가 갑작스레 얼굴을 찡그리며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처음 구출했을 때와 같이 무작정 불안해하는 모습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 머릿속에 충격이 남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일단 마지막까지 들어간 장소를 보면 말해주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네. 죄송해요.”
한결을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후방으로 몸을 돌렸다. 이내 힘없이 걸어가는 한결을 보며 나는 바로 신재룡을 호출했다. 현재 한결을 전반적으로 담당하는 사용자가 바로 신재룡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한결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안 좋다면 안 좋은 상태이지요.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금 무리를 한다면, 현재 구조대에 정상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군요.”
“절대로 안 됩니다.”
신재룡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정도입니까?”
“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 돌아가 한결군을 쉬게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휴.”
“물론 안현의 구출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건 알고 있지만…. 초반부터 관리를 잘해야 후유증을 최대한 없앨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말씀하신 건지는 모르겠으나, 클랜 로드. 부디 한결군의 참가는 재고해주십시오. 어쩌면 계속 이 장소에 있는 것 자체가, 지금의 한결군에게는 부담이 될지도 모릅니다.”
재차 이어진 간곡한 어조에,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앞 갈림길을 보며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어제 비비앙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일단 유적으로 가는 길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큰 상관은 없다. 다만 안현이 들어간 오른쪽 길은, 바로 ‘증오의 대지’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필드 효과를 갖고 있는 길이었다.
그렇기에 필드 효과에서 보호를 받으려면 한결의 방어 능력이 꼭 필요한데, 지금 상태에서 억지로 시켰다가는….
‘차라리 정심단을 먹을까?’
출발 직전 준비해온 정심단이 있기에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고에 있던 수량을 싹 쓸어왔지만 애당초 보유하고 있던 재고가 부족했다. 클랜원들에게 간신히 하나씩 돌아갈 수량이었다. 더구나 급하게 출발하느라, 이 산맥에서 먹힐만한 효과를 지닌 정심단을 제조할 여유가 없기도 했고.
또한 앞으로 남은 지역의 필드 효과를 생각해보면, 정심단은 세 번째 관문인 ‘증오의 대지’보다 네 번째 관문에서 사용하는 게 더욱 효과적이었다.
‘일단은 들어가자.’
일단 지금 남은 길은 한결이 기억하는 장소에 가는 방법뿐이다. 결국 일단은 부딪쳐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나는 곧바로 속을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깐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곧바로 오른쪽 길로 걸음을 틀었다. 그리고 설핏 고개를 돌려 클랜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1차에서 가장 적은 득표를 기록한 이유정, 김한별은 2차 투표에도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2차 투표는 독자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싶은데요.
일단 총 인원은 여덟 명으로 제한하고 싶습니다. 이유정, 김한별이 두 자리를 차지했으니 남은 자리는 여섯 명이네요. 그냥 괜히 투표하는 건 아니고, 투표 결과 득표가 높은 캐릭터는 차후 작품 내 등장 비율이나 일러스트 제작에 선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1차 투표에 참가한 캐릭터들과, 김수현을 제외하고(주인공에게 표가 몰리는걸 방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혹시 추천하고픈 캐릭터가 있다면 코멘트로 남겨주세요. 제가 각각 하나씩 세어보아 1등에서 6등까지 커트해, 2차 투표로 올리겠습니다. 만일 투표를 실시하게 되면 후기에 남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