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5
00045 비상을 위한 준비 =========================================================================
여성은 상냥한 손길로 식사를 내려 놓고는 조신한 걸음걸이로 물러났다. 조금전과는 확연히 다른 몸놀림 이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은 야채 샐러드, 구운 빵, 크림 스튜 그리고 고기 파이가 전부였다. 솔직히 A코스를 주문했지만 코스 요리로 부르긴 애매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다른 요리에 비해 값이 저렴하고 맛도 괜찮았던걸로 기억한다.
분명 유쾌하게 떠들면서 먹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시장이 반찬인지라 입맛을 다시던 안현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나 또한 흰 김이 모락이 올라오는 크림 스튜를 한가득 떠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고소하고 담백한 식감이 입 안 가득 퍼지더니 이내 혀 위에서 사르륵 녹는 느낌이 들었다.
“오….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진짜 살살 녹는것 같아요.”
안현이 호들갑을 떨자 안솔도 빵을 하나 들더니 조심스레 한 입 물었다. 곧이어 솔 또한 의외라는듯 눈을 휘둥그래 뜨더니 입을 오물거리는 속도를 높였다. 둘 다 진진하게 먹는걸 보며 나는 속으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다만 한 사람만큼은 아직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유정이는 평소 엄청 많이 먹는건 아니지만(술은 예외로 두자.) 그래도 깨작이는 애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먹는둥 마는둥 젓가락만 휘휘 젓고 있었다. 눈이 멍하고 시선이 분산된걸 보니 아마 내면에 심한 충격을 받은것 같았다. 하긴 살기를 가득 담은 마력 방출의 직접 대상이 되고 거리가 근접해 있던 만큼 다른 애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나 또한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겪은 만큼 현재 유정의 기분을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었다. 굴욕감. 모멸감. 자괴감. 무력함. 당해본 사람만이 아는 더러운 기분. 이번은 내가 어느정도 의도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금 미안한 감은 있었다. 마력에서 밀린다는건 일단 상대 사용자보다 자신의 실력이 아래라는걸 증명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들 모두가 애들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도 얼마나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할지 아무도 모르기 떄문이다.
이제는 우리들은 홀 플레인 이라는 거대한 세상에 나온 한명의 어엿한 사용자였다. 신규 사용자들만 비교하는게 아니라 수많은 기존의 사용자들과도 경쟁을 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애들은 아직 병아리나 다름 없었다. 병아리 중에서도 햇병아리.
애들은 아직 배고픈걸 모른다. 행동도 조심할줄 모르고, 나설때와 나서지 않을때를 구분하지 않는다. 간단히 줄이면 애들한테는 절박함 이라는 감정이 없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일부 내 탓도 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통과 의례부터 내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노닐었으니까.
지금은 이냥저냥 운이 따랐다고 해도 계속 이런 태도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10년이 넘을지도 모르는 홀 플레인 안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 나는 99%의 확률로 아니오라고 답할것이다. 항상 행동에 조심하고 나서지 않으려고 했던 나도 셀 수 없을만큼 수많은 사선을 넘어야 했으니까.
지금은 말 그대로 마지노 선 이었다. 사용자들간의 살인, 즉 PK가 마지막 선을 지키고 있었다. 북대륙은 은연중이긴 해도 아직 기존 사용자들끼리 서로 살인하는걸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부랑자들이 현재 공통으로 배척 받는 것이다.
하지만 곧 1차 연합 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상황은 180도 반전 된다. 극 후반부인 이것저것 가릴것 없이 무조건 PK는 하지 않아도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명확하게 갈린다. 더 나아가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해질것이다. 그런 격변하는 홀 플레인 안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생존을 위해 나는 앞으로 애들한테 생존을 위한 기술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저 풀린 정신을 바싹 조일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뮬에서 많은걸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여관인 로 온 것이다.
식사를 마무리짓고 나는 2인실 방 2개를 대실했다. 남은 골드를 세어보니 내가 받은 주급과 합해 총 6골드 40실버가(+1000골드) 있었다. 식사 + 대실은 1주일을 기준으로 20실버였기 때문에 총 40실버를 지불했다.
각각 배정한 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여장을 풀게한 뒤 나는 곧바로 애들을 나와 현의 방으로 모이게 했다. 안현은 손을 계속 쥐었다 피었다 하고 있었다. 얼굴에 설레는 기대감이 가득한게 한시라도 빨리 도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것 같았다. 유정의 얼굴은 아직도 가라 앉아 있었고 솔이는 그런 언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눈치 없는 현은 팔을 붕붕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형. 그러면 앞으로 우리 네명이 뮬에서 같이 행동하고 그러는 거죠? 몬스터도 잡고, 던전이나 동굴 탐험도 하고. 보물들도 발견하고.”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애들과 만난 후로 왜 이렇게 한숨이 나오는걸까. 소풍 가는것처럼 들떠 있는 안현을 나는 잠시 지그시 바라보았다. 바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전에 안현 또한 단단한 정신 교육이 절실해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안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도 일단 클랜부터 만들어요. 이름은 뭐로 하실거에요? 솔직히 황금 사자 같은 이름은 너무 구리고….”
“못 만들어.”
“다른…네? 안 만드신다구요? 왜요?”
“안 만드는게 아니라 못 만든다고.”
나는 한손으로 머리를 짚고 이번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전투 훈련에 관해서는 열성적으로 임한 안현이지만 그 외 홀 플레인의 역사 또는 설정 관련 수업에서는 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걸 안다면 지금 클랜을 만들자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텐데. 안현은 그제서야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뜸을 들인 후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 우리 네명은 정식 클랜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부족해.”
“조건…이요? 저는 한명만 있어도 클랜을 만들 수 있다고 들은것 같은데.”
조건이 인원을 말하는게 아닌데. 순 외우기 쉬운것만 잔뜩 외웠군. 나는 속으로 혀를 한번 차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짚고 넘어갈건 무조건 짚고 넘어갈 생각이다. 나중에 어느정도 숙련된 사용자가 된 이후에 이런 꼴을 보이면 그때는 가차 없겠지만 말이다.
클랜은 비슷한 목적을 가진 사용자들의 모임으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정식 클랜은 개나소나 만들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사용자들이 아닌 천사들의 신탁을 받은 거주민들이 각 도시마다 클랜 등록소 안에서 클랜에 관한 모든 사항을 전반적으로 관리한다. 그런만큼 공평하긴 해도 동시에 엄격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건 바로 실적을 쌓는 방법 밖에 없었다. 물론 업적을 쌓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홀 플레인의 메인 스트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인만큼 지금 이루기는 요원한 일 이었다.
실적은 업적과는 달리 적용되는 범위가 굉장히 광범위하다.
캐러밴, 원정대는 실제로 어떤 임무를 마친 후 꼭 공통적으로 성과 보고를 해야한다. 성과 보고는 도시마다 배치된 신전에 들러 맡은 임무를 보고하는 과정이다. 신전의 관계자가 보고를 검토한 후 중요하다 싶으면 자력으로 감찰단을 꾸리거나 대표 클랜에게 요청해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
그러한 과정 하나하나를 실적으로 볼 수 있었다. 어느 장소에서 어떤 몬스터가 출현 했는지, 던전 또는 동굴을 발견했는지, 탐험 내용은 어떤지 사소한 사항 하나하나가 모두 실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부분들 이었다.
어느정도 실적을 쌓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정식 클랜의 창설 승 신청을 하는데 당연히 그 과정에는 심사가 필수적으로 포함 된다. 하루에도 수많은 신청이 이루어지지만 한달에 승인되는 건수가 한 손으로 꼽는다는걸 사실을 알면 심사가 굉장히 까다롭다는걸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런만큼 정식 클랜으로 발호한 클랜들의 저력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호오….”
내가 이러한 사실을 차분히 설명해주자 안현은 호오라고 지껄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는 뭔놈의 호오. 지금 솔이만 봐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같고만. 이윽고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이는 안현을 보며 나는 애들의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세명의 시선이 나에게 주목 되는걸 보자 나는 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 입을 열었다.
“모두들 홀 플레인에 첫 발걸음을 내딛은 기분은 어때?”
“…별로 유쾌하지 않아.”
유정의 착 가라 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한두번 고개를 주억이고는 말을 이었다.
“분해?”
“…억울해. 분해.”
내 물음에 유정이 즉답했다. 그만큼 방금전에 자신의 무력함을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물론 상대가 추후에 지금의 나와 자웅을 겨룰만큼 성장하는걸 감안한다면 어느정도 핸디캡은 있었다. 그래도 그만큼 효과는 확실하다는 생각에 나는 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내가 항상 너희들한테 말했었지. 홀 플레인은 변수가 많은 세상이라고.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줄 모른다고. 만약 방금 여성이 부랑자였다면 어떻게 됬을것 같아?”
거침없는 내 말에 모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게 아니었다.
“긴장해. 도가 넘치는 긴장은 독이지만 홀 플레인은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해. 우리는 지금 피크닉 나온것도 아니고 보물 찾기를 하러 온것도 아니야. 이곳에서 살아 남고, 다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 있는거라고. 다들 알아 들어?”
안현, 안솔, 이유정의 주변으로 숙연한 침묵이 감돌았다. 안현은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수그렸고 유정이와 솔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분한줄 알면 됬어. 하지만 억울할건 없다. 그건 네가 그만큼 약하다는 말이니까. 억울하면 수련을 해서 힘을 길러. 방금전과 같은 굴욕을 느끼고 싶지 않으면 이 악물고 정신 단단하게 잡으라고.”
나는 잠시 모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다들 약간이라도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자각한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은 이제 슬슬 애들을 성장시킬 첫번째 계획을 꺼낼때가 왔다는 소리였다.
나는 조금은 누그러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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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랜 랭크와 관련한 내용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