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53
00452 잊혀진 영웅들. =========================================================================
그롸롸롸롸롸롸롸!
사나운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대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하늘에는 날개를 활짝 젖힌 채 하늘 높이 솟구치는 본 드래곤이 있었다.
어느새 망인들의 시선은 더는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안중에도 없다는 양, 모조리 하늘로 시선을 올린 채 무시무시한 적의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다급히 클랜원 돌아보았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몸을 피할 기회입니다. 일단은 이 장소에서 거리를 최대한 벌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서, 나는 신속히 안솔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이동하려는 찰나 마주 잡은 손에서 미약한 저항감을 느꼈다. 경황이 없어 몇 차례 더 잡아당겨 봤으나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저항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안솔?”
“으응…!”
“안솔!”
“으으응…!”
안솔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쪽으로 손을 끌어당기며 소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다.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러나 크게 부릅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게,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새에 갑자기 나타난 용. 그리고 그런 용을 상대하는 해골 망인들.
‘혹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일순 섬찟한 소름이 돋았다.
안솔은 아까 망인들의 소환 의식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납득할 수 있었다. 만약 망인들이 소환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이 요새에 출현한 용을 상대했을 터.
‘지금 이 상황을…. 전부 예견한 건가? 그러면?’
그때였다. 안개가 끼어 흐릿했던 하늘이 한순간 일변했다. 마치 해가 넘어가기 직전 황혼이 깔린 것처럼 붉게 물든 것이다.
동시에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을 피해 비행하던 본 드래곤의 움직임이 별안간 느릿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날개를 활짝 펼쳐 꼿꼿이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눈가의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커다랗게 소리질렀다.
그 순간, 돌연히 하늘이 열리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하늘이 열린 게 아니었다. 하늘 가득히 떠다니던 구름이 좌우로 열리더니, 벌어진 틈으로 활활 타오르는 빗방울들이 벼락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슈슈슝!
폭우처럼 쏟아지는 타오르는 빗방울들은 내려갈수록 기다랗게 늘어졌다. 그리고 지면에 닿기 직전에는 불 줄기로 변하여, 망인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정확하게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고막이 얼얼할 정도의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거대한 폭발이 솟구쳤다.
마치 하늘에서 융단 폭격을 가하는 것 같다. 오른쪽에서 시작된 폭격은 사선 방향으로 가로지르더니, 건물마저 터뜨리며 쫙 퍼졌다.
다행히 중앙 광장은 빗겨가 직접적인 영향은 피했으나, 그 여파는 피할 수 없었다.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고 터져나간 조각이 튀어 오른다. 이내 굉음은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어느덧 이글이글 불타는 소리가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화륵! 화르륵!
요새가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허억!”
털썩, 누군가 땅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폭격을 이기지 못해 다리가 풀린 모양이다. 다른 클랜원은 조용히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아마 속내는 똑같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전투도 탐험도 아니었다. 하나의 전쟁이었다.
“다들….”
말을 잇기 전 나는 안솔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클랜원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와 안솔은 이 자리에 남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어서 이 자리에서 피하십시오.”
급박한 와중에도, 모든 클랜원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름 심사숙고 후 내린 결정이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이 자리에 남거나, 아니면 피하거나.
사실 피하는 방법이 가장 좋기는 했다. 안솔이 지금 저러고는 있지만 억지로 들고 가면 그만이었으니까.
사용자 정보는 물론, 지금껏 그리고 조금 전에도 확인한 안솔의 능력은 가벼이 넘길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안솔이 어떻게든 여기에 남아있으려는 데는 분명히 어떠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러니까, 나는 안솔의 선택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싫다.”
“싫어!”
“싫어요!”
“싫은데?”
“싫거든요?”
“싫습니다!”
클랜원의 입을 모은 대답은 한결같이 내 기대를 배신했다.
나는 감히 클랜 로드의 명령에 거부하겠느냐는 뜻을 담아 근엄히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냐는 시선이 우수수 꽂혀 들었기 때문이다.
입술이 바짝 말라온다. 클랜원의 대답은 고맙고 뜻은 장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클랜원은 거의 머셔너리의 정예 급에 해당하는 사용자들이다. 이런대서 허무하게 잃을 전력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일단 용과 망인들이 전투를 벌이는 틈을 타 대부분의 클랜원을 대피시키고, 나는 추후 상황을 보아 움직일 계획이었다.
그리고 방금 공세를 보아하니 망인들이 이길 것 같지가 않다. 용도 무시무시하기는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단일 개체라는 것. 적어도 겹겹이 포위될 가능성은 없다는 소리다.
나는 생각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일단은 안솔과 이대로 계속 상황을 지켜본다. 그리고 만일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가정했을 때, 남은 클랜원이 안솔 하나라면 어떻게든 몸을 뺄 수는 있을 것 같았으니까.
“괜찮아요.”
그때, 자그마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안솔을 그렁그렁한 눈을 쓱 닦고는 물기 묻은 손으로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하늘을 겨냥하는 망인들이 보였다. 수천에 이르는 망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든 팔을 나란히 뒤로 당긴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Occidite Eos!
이어서 알 수 없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검이, 창이, 화살이, 마법이 동시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하늘을 빼곡히 메울 정도로 엄청난 수량이었지만,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떠오른 것들은, 떠올랐다.
말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용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한 게 아니라, 그냥 중구난방으로 허공에 치솟은 것이다. 즉 그냥 하늘 높이 던진 것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본 드래곤은 아래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힘차게 날갯짓을 해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해가 되지 않는 공격. 도대체 뭣들하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드려는 찰나.
– Drrrr…. Ea – Yaal!
다시 한 번 웅장한 외침이 들리고, 허공으로 보라색 둥그런 장막이 생성됐다. 마치 밤하늘에 별이 박힌 듯 간간이 빛을 반짝이는 장막은, 일순 모터를 돌리는듯한 커다란 소음을 울렸다.
슈슈슉! 슈슈슈슉!
슈슈슈슈슈슈슈슉!
하늘로 떠오른 각양각색의 공격들이, 한순간 장막의 중앙으로 쏘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흡사 하수구에 물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찔러 들어가더니, 장막을 통과하자마자 하나의 점이 되었다.
이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광대한 힘을 품은 점이, 장막을 뻥 뚫어 앞으로 뻗어나간다.
장관이었다. 수백 수천의 힘이 집약된 점은, 기다란 꼬리를 남기며 유성처럼 달려들었다. 다급히 날아오르는 용을 순식간에 뒤쫓아 그대로 몸통에 작렬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점의 폭발은 본 드래곤의 전신을 깡그리 집어삼킬 듯이 물들였다.
꽈꽈꽈꽝!
그롸롸롸롸롸롸롸!
그리고 그 순간.
“───. ───. ───.”
나직이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솔이 지팡이를 상단으로 들어올렸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감히 말을 붙일 생각을 못했다. 왜냐하면….
“───. ───. ───.”
눈을 꼭 감은 채 조용히 주문을 외우는 안솔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하고 성스러워 보였으니까.
마치 구원자를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
슬펐다. 그저 슬펐다.
유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안솔은 사방에서 밀려오는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지면에 새겨진 애통함.
건물에 스며든 구슬픔.
한낱 뼛조각이 간직한 서러움.
아니, 요새 곳곳에 새겨진 서글픔.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안솔에게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억울하다!
너무나도 분하고, 원통하다!
그에 한없이 애처롭게 느끼면서도, 안솔은 생각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나 짙은 원념이 한이 되어 남은 걸까.
해답은 벽에서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벽에 적힌 글자를 해석하고 있을 때, 안솔만이 다른걸 보았다.
길고 길었던 대 전쟁.
그리고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최후의 전투.
1, 2년에 끝난 전쟁이 아니었다. 무려 수십 년간 이어진 전쟁이었다.
수십 년. 그것은 한 아이가 태어나 성년을 넘어서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자라난 아이는,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어야만 했다. 뜻하지 않은 습격으로 어머니를 잃어야만 했다. 전쟁 통에 형도, 누나도 잃어야 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그러한 참혹한 시대였다.
셀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끔찍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시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최후의 전투가 다가왔다.
인간 중에서도 특별히 선별된 인간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산맥으로 들어가는 걸 자청했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산맥으로 들어가는 이상 태반이 죽을 거라는걸.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걸.
그럼에도 자청해서 들어간 것은 피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모두가 원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시대를 끝내자는 것을. 비록 자신들은 죽더라도 형제, 자매, 자식 그리고 후손들에게는 이 시대를 물려주지 말자는 것을.
다시 예전의 평화로운 시절을 되찾겠다.
그러한 하나의 신념 아래 인간, 아니.
‘영웅’들은 산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시작된 최후의 전투.
용의 공세는 거세었고, 용의 편에 선 인간들은 간교했다. 예상대로 수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지만, 결국 용은 인간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전쟁의 끝은 무수한 피가 흘러 웅덩이가 고여 들었으나 그 위로 떠오른 승리는 인간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쟁의 끝은 모든 것의 끝을 고하지 않았다.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가 내린 두 개의 저주.
하나는 말 그대로 완전한 저주였으며, 다른 하나는 예언에 가까운 저주였다. 전자의 저주는 인간은 물론이고 산맥을 뒤덮었다.
남은 하나, 후자의 예언의 저주는 영웅들을 지휘한 대 영웅에게만 전달됐다.
그리고 그 결과.
대 영웅은, 저주를 받아들였다.
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승리의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절망을 맛봐야만 했다. 길었던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허무한 죽음뿐이었다.
사후에도 그들은 자유롭지 못했다. 응당 각자가 믿었던 곳으로 승천함이 옳았으나, 마그나카르타의 저주와 그것을 받아들인 대 영웅으로 인해 그들은 산맥을 떠나지 못하였다.
생전에 걸린 저주가 사후에도 영향을 미쳐, 산맥을 배회하는 망령이 돼버린 것이다.
꽈꽈꽈꽝!
그롸롸롸롸롸롸롸!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에, 안솔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허공에는 비틀거리고는 있었지만 다시금 날갯짓을 하는 본 드래곤과, 그것을 의연하게 바라보는 해골 망인들이 서 있었다. 마치 이 정도 공격에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는 듯 그들은 초연히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솔은 더욱 슬펐다.
살아 생전 모든 것을 바쳐 싸운 이들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믿었던 지휘관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들이다.
사후에 수천 년 동안 산맥을 외로이 떠돈 이들이다.
응당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까맣게 잊혀진 이들이다.
그러할진대.
그들이 현실로 소환된 지금, 종말의 용 또한 함께 부활했다.
그리고 그들은 주저 없이, 다시 한 번 싸우는 걸 선택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지만, 승천도 못한 채 수천 년 동안 억울함을 품어왔지만, 승리 앞에서 배신을 당해버렸지만.
처음 산맥에 들어왔을 때 품었던 신념은 아직도 살아있었다.
오직 하나의 신념, 다시 예전의 평화로운 시절을 되찾겠다.
부활한 용이 세상에 나가는걸 걱정한 그들은, 영원한 소멸을 각오하고 다시 한 번 칼을 빼어 든 것이다.
몸을 추스른 마그나카르타와 다시 공격 준비를 마친 인간 영웅들.
그들을 보며 안솔은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어느덧 지팡이에서 흐르는 은은한 빛은 안솔의 온몸으로 흘러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안솔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적…!”
안솔의 전신에서 찬연한 빛이 솟구쳤다. 새하얀 빛의 기둥이 허공으로 솟구쳐 둥그런 타원을 그린다. 그러더니,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 무리와 함께 타원의 중앙으로 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안솔이 말했다.
“천사 님, 천사 님….”
고요히 눈을 뜬 천사는 소원을 말하라는 듯 내려다본다.
“부디….”
어느새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서로 막 공격을 가하려는 찰나, 갑작스레 출현한 거대한 천사에 용도, 망인도 모두 놀란 탓이다. 안솔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마음으로 발동한 기적은, 이 요새 전체를 아우르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솔은 절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묻혀 있는 분들을 구원해주세요…!”
절절한 외침. 천사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사방에 모인 망인들을 확인한 순간,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잠시 후, 모든 상황을 파악했는지 천사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종일관 서글펐던 안솔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Salvation….
이내 짧게 읊조리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진 순간이었다.
천사가 망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고는 살며시 양팔을 벌렸다. 이어서 마치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미소를 보냈을 때, 천사의 전신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화아아악!
하늘에서 일대를 뒤덮을 정도의 강렬한 빛이 지면에 사르르 내려앉았다.
수천 년간 어둠이 자리잡았던 땅에, 비로소 따뜻한 빛의 기적이 실현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오늘 안솔의 시점으로 시작하는 내용은 http://bgmstore.net/view/0O1HB 이 BGM과 들으시면 아주 좋습니다. 제가 집필하면서 들었던 노래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