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54
00453 잊혀진 영웅들. =========================================================================
화아아악!
한순간 빛이 온 세상을 물들이는 착시가 일었다.
망인들은 처음에는 약간 거부 반응을 보이는듯했으나, 몸을 따뜻하게 감싸오는 빛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커먼 기운이 감돌던 망인들의 몸에 하얀 빛이 천천히 스며들어 퍼지는 게 보였다.
문득 사방에서 중앙 광장으로 거친 바람이 흘러들었다. 거세게 나부끼는 머리칼을 걷어내며 나는 조용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망인들의 몸을 물들였던 빛은 어느새 외부에서 내부로 흘러 들어가는 중이었다. 아니. 빨려 들어가야 한다고 해야 맞을까?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망인들이 정신 없이 빛을 빨아들여 갈증을 해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변화가 시작되었다.
해골 망인들에 흐르던 음침한 기운은 진작에 사라졌다. 빛을 받아들일수록 해골의 모습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뼈만 남았던 부분에 새로운 살이 생기고, 그 위로 낡고 녹이 슬었던 장비가 원래의 말끔한 모습을 되찾는다.
심지어 두개골도 생전의 모습을 되찾아,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칼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해골에 불과했던 망인들이 감쪽같이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흡사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잠시 후, 천사와 빛이 동시에 사그라졌다. 빛이 가라앉은 주변에는 어느새 온몸으로 은은한 빛의 여운을 흘리는 망인, 아니 인간들이 서 있었다.
물론 저 인간들이 정말로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것은 분명히 영혼이다. 그러나 아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거룩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아마 저주에 물들어 어두웠던 영혼을 완벽하게 정화한 듯싶었다.
“저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허준영이 멍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지금 사방에 있는 영혼들도 멍해 보였으니까. 서로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게, 그들 또한 작금의 상황에 무척 놀란 모양이다.
나는 차분히 안솔을 돌아보았다. 고유 능력을 발동해 기적을 실현한 만큼, 안솔이 전후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도와주세요!”
그롸롸롸롸롸롸롸!
안솔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살 떨리는 울부짖음이 들리었다. 반사적으로 하늘을 쳐다보자 어느새 완전히 몸을 추스른 본 드래곤이 보였다.
‘저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일순 의문이 들었지만, 곧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솔의 기적은 어디까지나 망인들을 대상으로 발동했다. 그리고 본 드래곤의 두개골에 달려있는 뿔. 저것은,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마족의 뿔이 분명하다.
왜 저놈의 머리에 마족의 뿔이 달려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설령 안솔의 기적이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저 뿔은 이곳과 연관이 없으니 발동 대상에서 제외됐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지만….’
어느덧 하늘이 서서히 검어지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뜻 모를 불안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무언가 흉포하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뭉클뭉클 모여들고 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아 이 기운을 느꼈다.
한없이 불길하고 흉흉하다. 그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낯설면서도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 기운은….
그래. 마치 저주와 비슷한 느낌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놈은 이러한 상황이 매우 마음에 안 드는지 또 다른 종류의 공격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나는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안솔을 보며 침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될까?”
말을 꺼냄과 동시에, 경황없던 안솔의 얼굴에 한 줄기 생소함이 스쳤다. 비단 안솔뿐만이 아니라 주변 클랜원이 헛바람을 흘리는 소리도 들렸다.
지금껏 지적된 머셔너리 클랜의 비방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바로 중앙 집권 형 클랜의 한계를 지적한 기사였다.
그 말인즉슨, 모든 권한과 모든 권력이 오롯이 나에게 집중돼있다. 클랜 자체가 무조건 나를 통해 돌아가니, 내가 자리를 비우면 무너지는 사상누각 클랜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부정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비슷한 사건이 터졌으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권한을 돌렸다. 단순히 조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선택권을 부여하고 안솔의 말에 따르겠다는 소리였다.
안솔은 이 상황에 잠시 부담을 느낀 듯 보였지만, 이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형형히 빛내며 하늘을 가리켰다.
“저걸…. 저걸 막아주세요! 저분들은 대 영웅의 염원으로, 저 저주를 막을 수 없어요!”
어느새 모여든 뭉클뭉클한 검은 기운은, 하늘을 덮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간간이 잔물결이 일렁이는 게 꼭 몰아치기 직전의 파도를 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따금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꼭 물결치는 염화의 파도를 보는 것 같다.
그나저나 대 영웅의 염원이라.
그러고 보니 확실히 영혼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생전의 모습을 되찾은 이후 얼굴에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조금 전까지는 죽을 듯이 용과 싸우더니 지금은 전전긍긍한 기색들을 내비치고 있었다.
역시나 안솔은 내가 모르는 일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 여러 가지 물어보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급박해 보였으니.
하여,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
“저것을 막아내고. 그리고?”
“마, 막아내실 수 있는 거예요?”
한껏 놀란 목소리.
저 기운에 불이 섞여 있다면 가능하다. 차분히 머리를 끄덕이자 안솔의 목울대가 살그머니 움직인다.
“저, 저분들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서로 힘을 합쳐서 저 나쁜 용을 물리쳐주세요.”
“알겠다.”
곧바로 대답한 후, 나는 얼른 클랜원을 돌아보았다.
“모두 안솔의 말을 들었을 겁니다. 제가 저 공격 아니 저주를 막아내면, 이곳에 있는 영혼들과 힘을 합쳐 용을 공격하시면 됩니다.”
“클랜 로드. 혹시 막아내신다는 방법이….”
감을 잡은 걸까. 일견 신재룡이 걱정하는 어조로 물어와 나는 흘끗 시선을 던졌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우리가 가져온 엘릭서가 총 몇 병이지요?”
“두 병입니다.”
그러면 됐다. 한결은 이미 구했다. 그러니 만일의 상황에서 내가 한 병을 사용한다 해도, 안현에게 사용할 한 병이 남는다.
꾸르르릉!
그때, 하늘에서 흡사 뇌성이 울리는듯한 거대한 굉음이 주변을 왕왕 울렸다.
나는 재빠르게 화정에게 말을 걸었다. 할 수 있겠냐고.
– 할 수는 있는데…. 조금 힘들지도.
화정은 즉각 대답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애매한 말이었다.
저 용의 힘은 너도 막아내기 힘든 건가?
– 아니야 이 멍청이야! 이 부근을 전부 물들일 정도로 거대한 저주인데, 이걸 모두 감싸 안았다가는 네 몸이 버틸 수 없을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아무튼 할 수 있다는 소리. 나는 차분히 검을 집어넣었다. 양팔을 움직여 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롸롸롸롸롸롸롸!
용의 포효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듯 내려오는 거대한 장막을 볼 수 있었다. 화정이 경고한 대로였다. 흡사 위쪽에서 커튼을 쳐 떨어뜨리는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막이 하늘을 덮으며 주르륵 흘러내린다.
영혼들 사이로 한층 심한 동요가 흘러들 즈음, 나는 침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태고의 격으로 명할지 어니.’
그렇게 마음을 착 가라앉힌 후, 나는 지체 않고 심장에 내재된 힘을 일거에 터뜨렸다.
“영역 선포!”
화륵! 화르륵!
영역을 선포함과 동시에, 허공에서 둥글게 퍼져 내리는 반구형의 막이 일대에 떨어져 내렸다. 범위는 나와 클랜원을 포함한 모든 영혼들.
투쾅!
이내 유리그릇을 거꾸로 덮은 것 같은 맑은 불꽃이 흐르는 막은, 바닥을 깔끔하게 쪼개어 들어와 완전하게 자리잡았다. 동시에,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장막은 그대로 화정의 영역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통과했다.
“오, 오라버니!”
“클랜 로드!”
탄식 섞인 비명이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공격이 영역을 그대로 통과했으니 내가 막지 못한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약간의 설명이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다.
솔직히 나 또한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저건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상대를 해치려는 것뿐만이 아니라 일대에 영향을 미쳐 옭아매려는 목적, 즉 하나의 재앙이나 다름없다.
‘크으읍, 크으으읍!’
온몸을 찍어 누르는 압박감에 나는 속으로 거센 비명을 질렀다.
여태껏 이 정도의 대규모 영역을 선포한적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통과해 들어오는 힘이나 양 이 모든 게 장난이 아니었다. 무너져 내리는 고층 건물을 손으로 받아내는 기분이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물론, 격은 화정이 더 높다. 화정은 착실히 내려오는 장막을 잠식해 들어가는 중이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밀려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대로라면…!’
처음보다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기는 했지만, 계속 이 상태를 유지했다가는 모든 기운을 잠식하기도 전에, 저주의 기운이 영혼들에게 닿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상황이 되돌아간다. 영혼은 다시 저주로 물들어 이 산맥을 배회할 것이고, 안솔의 기적은 무위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는 못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
느닷없이, 선포했던 영역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를 즈음, 속으로 화정의 말소리가 들렸다.
– 내가 줄였어. 지금 저 영혼들이 네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사실을 깨닫고, 네가 있는 쪽으로 속속히 모여드는 중이야. 그만큼 보호 범위가 줄어드니, 일말의 여유가 생기겠지.
그런가. 그랬던가. 확실히 주변으로 누군가 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간신히 시선을 내려 주변을 내려보았다.
기척은, 화정의 말대로 바로 영혼들이었다.
그제야 도처에서 수백, 수천의 시선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눈길에서는, 하나같이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모든 방향에서 범위가 줄어들자 약간이지만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어느덧 검은 기운은 머리 바로 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내 목 부근으로 뜨끈한 기운이 내려앉은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화정의 힘을 폭발시켰다.
쿵!
그리고 그 순간, 기적적으로 기운이 멈추었다.
거의 끝에 다다르기 직전이었지만, 비로소 멈추는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아직 멈추기만 했을 뿐이다. 안솔은 막아달라고 했지만, 나는 최대한 이 기회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숨을 골랐다가, 남아있는 모든 잠력을 터뜨리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악!”
화르르르르르르륵!
나는 마치 카펫 끝자락을 쥐어 힘껏 펼치는 느낌으로 나는 힘차게 화정의 힘을 터뜨렸다.
그러자 붉은 융단이 쫙 깔리는 것처럼, 화정이 단숨에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본 드래곤이 하늘에서 땅으로 장막을 떨어뜨렸다면, 이번에는 내가 화정의 힘으로 기운을 잠식해 땅에서 하늘로 기운을 되돌린 것이다.
눈부실 정도의 맑은 불꽃이 하늘을 물들였다. 끝없이 떨어지던 하늘이 다시 올라간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검은색으로 일변했던 하늘에 어느새 맑은 불꽃이 넘실대는 게 보였다. 사방에서 퍼지는 파문에서 왠지 모르게 잔잔한 리듬이 느껴진다.
이로써, 영역 내로 들어온 기운은 완전히 내 통제하에 들어왔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저 멀리 떠 있는 본 드래곤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되돌아가, 뒤덮어라!’
공중에 멈춰있던 불의 휘장은, 주저 않고 본 드래곤을 향해 세차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르르륵!
목 언저리로 스며들었던 뜨끈한 기운이 차차 멀어져 간다. 온탕에 몸을 담갔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의 시원함이 대신 머물렀다.
그리고 이내 하늘로 급히 솟구치는 본 드래곤과, 그 뒤를 돌풍처럼 뒤쫓는 불길이 보였다.
그때였다.
“아….”
성공했다고 생각한 찰나, 나도 모르게 몸이 서서히 허물어지는걸 느꼈다. 하늘이 갑자기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뒤쪽으로 차분히 넘어 간다.
“───!”
그 순간, 누군가 내 뒷목을 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크롸롸롸롸롸롸롹!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로, 치솟은 불길이 본 드래곤을 잡아먹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어두운 방. 한 악마가 눈앞에 사슬에 휘감긴 마족을 보며 광소한다.)
아스모데우스 : 크하하하하하하하! 됐어! 됐다고! 드디어 용을 부활시켰어! 마침내 성공했단 말이다!
(한동안 광소하던 악마는 뻐기는 눈길로 씨앗화한 마족을 쳐다본다.)
아스모데우스 : 크후! 크후후! 크헤헤헤헤헤헤헤! 이제,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때.)
펑!
(폭음과 함께 마족의 몸이 터져나간다.)
아스모데우스 :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