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56
00455 잊혀진 영웅들. =========================================================================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어색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수천의 영혼이 일제히 무릎을 꿇은 광경은 무릇 장관이었으나, 까닭 없는 부담감을 주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는지, 안솔이 내 손을 꼭 잡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어색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나와 마주 보는 방향에 있는 사내가 스르르 몸을 일으키자 다른 영혼들도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금 호의 어린 미소를 짓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볼 무렵. 돌연히 한 마법사가 다가오고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영창 시간은 무척 짧았다. 그냥 두세 마디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사분히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아까 내 몸을 치료해준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었다.
– 이제 들리십니까? 우리의 구원자시여.
그때였다. 잠깐 여인에게 시선을 빼앗긴 찰나, 아까와는 달리 확실히 들을 수 있는 유창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크게 놀랐으나 나는 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 여인이 외운 주문이 일종의 번역 마법이라는 사실을.
차분히 머리를 끄덕이자 사내는 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감사합니다. 구원자시여. 우리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구원자라는 존재가 아닙니다.”
일부러 말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에게서는 일말의 불쾌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활짝 웃어 보이더니 머리를 좌우로 젓는다.
– 아니요, 맞습니다. 어둠에 물들었던 우리를 정화하고, 수천 년 동안 목적 없이 방황하던 영혼을 해방하셨습니다. 버림받았던 우리를 빛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분은 확실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저 말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는지 안솔을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숨었다.
나는 사내의 말을 떠올리며 새삼스런 기분으로 안솔을 내려다보았다. 안솔의 진명이 바로 빛을 인도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한없이 따뜻한 눈길을 보내던 사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도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는 멀거니 영혼들이 착용한 장비를 응시했다. 말끔한 모습을 되찾은 게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장비들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왕 승천들 하실 거, 입고 있는 장비 좀 두고 가시면 안되겠냐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등 뒤로 “갚으실 필요 없어요….”라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와, 그냥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혹시 대답해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 물론입니다. 어떤 것을 하문하셔도, 최선을 다해 말씀드릴 것을 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아니. 고마워하는 건 알겠는데, 제발 그만 좀 해. 저렇게 말하면 꼭 뭔가 대단하고, 있어 보이는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잖아.
사실 별것 아닌 질문을 던질 예정이라, 나는 속으로 강하게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 산맥에 들어온 이유는 바로 사람을 찾으려 들어왔습니다. 최근 이 산맥에서 이유 없이 실종을 당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 중에 우리와 아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흘러 흘러 이 요새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혹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말을 꺼낸 순간 호의 서린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내 심각한 기색을 내비친 사내는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아, 그 일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아마 요새 밖으로 벗어난 옛 동료들이 벌인 일이라 생각됩니다.
“옛 동료들이요…?”
– 우리가 이 요새에 갇힌 지도 어느새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생전에 아무리 고결한 인격을 지녔다 할지라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 영원히 버틸 수는 없는 법이지요.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저 방관했습니다. 어떻게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잠시 쓴웃음을 보인 사내는, 곧 예의 깔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일단 지금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들이 이 요새 지하에 잠들어있다는 사실과 일부는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들을 살려낼 방법까지도요.
일부라는 말이 약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일단 안현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안현이 실종된 후 우리가 바로 산맥으로 들어왔으니, 안현은 비교적 최근에 요새로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요새 지하로 가는 방법과, 살려낼 방법을 말씀해주실 수 있겠지요?”
– 물론입니다. 다만, 그전에….
문득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나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잠시 저의…. 아니,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이어지는 사내의 말은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해명으로도 볼 수 있었다.
물론 나로서는 마그나카르타가 쓰러진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터라, 썩 흥미로운 기분으로 들을 수 있었다.
마그나카르타의 저주. 그것은 하나의 저주를 말하는 게 아니라, 두 개의 저주였다.
하나의 저주는 예상했던 대로 산맥 일대에 내린 저주였다.
간단히 말해서. 저주에 물들은 영혼은 이 산맥을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금제가 걸렸다고 하는데, 아마 그것이 영혼의 원념과 섞여 필드 효과를 이루어낸 듯싶었다.
그리고 나머지 저주는 예상외로 예언의 저주였다.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는 숨을 거두기 직전 하나의 예언을 대 영웅에게 남겼다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패해 사라지지만, 나는 그리고 이 예언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인간 중 아무도,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내 힘을 내 바람을 남기도록 하겠다. 그래. 당분간은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너희 후손 중에서라도 내 힘과 바람을 잇는 자가 나타나는 순간. 종말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 그 순간! 그때 세상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어디 한 번 마음껏 발버둥을 쳐보도록. 크하하하하하하하!’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그러나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예언에 가까운 저주.
간신히 전투를 끝낸 인간들은 새로운 국면과 직면해야만 했다. 전투가 끝났음에도 산맥이 저주로 물들어 꼼짝없이 발이 묶인 것이다.
그래도. 비록 끝이 어그러지기는 했으나 인간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한 그들은 요새에 남아 저주를 해제할 방법에 골몰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산맥의 전투를 이끌었던 대 영웅이 하나의 전언을 알렸다. 드디어 저주를 해제할 방법을 찾은 거라 생각한 인간들은, 모두 한 장소에 모여 대 영웅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대 영웅이 모습을 보였다. 이제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인간들은 한껏 기대에 차올라 자신들의 지휘관을 응시했다.
그러나 대 영웅이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바로 사과였다.
– 여러분. 미안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인간들은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황한 인간들을 향해 대 영웅은 그동안의 전모를 소상히 밝혔다.
요지는 마지막에 마그나카르타가 남긴 예언의 대한 내용과, 그 저주를 막아낼 방법을 찾았다는 것.
대 영웅의 말인즉슨, 우리는 어느 인간이 마그나카르타의 힘과 바람을 이어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대로 산맥을 벗어나게 된다면 차후 세상의 혼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즉 저주를 막아낼 방법이라는 게, 바로 산맥 전투에 참가한 그리고 살아남은 인간들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말하는 것이었다.
– 그녀가 모든 말을 마쳤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습니다. 말을 마치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사과를 건넨 후,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고 바로 그 방법을 발동했지요. 그 방법이란 바로 우리의 죽음과 영원한 속박을 의미했습니다.
“그 방법이라는 게….”
– 대 영웅의 염원. 바로 염원의 비석을 사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염원의 비석이라고요?”
– 예. 염원의 비석. 신의 파편이 담긴 일곱 개의 비석으로 마법 진을 구성해, 언어와 지혜의 여신이신 가네샤의 힘을 빌리는 방법입니다. 만일 그 소원이 합당하다고 여겨질 경우, 발동한 인간은 그 어떤 염원이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그 힘으로 저주를 없애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아니면 예언이 깃든 사람을 알려달라는 식으로 처리할 수도….”
이제야 약간씩 이해가 가는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리가 기울어졌다.
대 영웅은 마그나카르타의 저주를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고작 생각한 방법이라는 게, 용의 힘과 바람이 깃든 인간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 모두의 목숨을 빼앗는다? 그리고 혹시라도 예언이 스며든 영혼이 흘러나갈 것을 우려해, 용의 저주를 받아들여 영혼들이 이 산맥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염원의 비석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대단한 힘을 가지고 그 정도 생각밖에 못했다는 게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튼 이 말에 따르면, 인간들은 마그나카르타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소리였다. 인간이 어떤 방법을 택해도 고통 받도록 만들었다.
다만 그 대상이, 산맥 전투에 참가해 살아남은 인간들이냐 혹은 차후 그들의 후손들이냐 만이 다를 뿐. 결국 마그나카르타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한 내 기색을 알아챘는지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그렇습니다. 그게 바른 생각이지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염원이 이루어지기까지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고요. 그 생각을 실천하지 못한 것은, 아마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녀를 이해하는 건 아닙니다. 비록 산맥에 들어오면서 죽음을 각오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죽어서는 각자가 품고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어떤 이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모시던 신의 곁으로 가고 싶어 했지요. 결코 죽어서까지 구차한 망령이 되어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내는 비로소 길었던 말을 마쳤다. 그리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사내의 얼굴이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공허함과 서글픔이 묻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 수천 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정말로 끔찍했지요. 우리는 죽어서도 어떻게든 저주를 해제하려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결국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봐야 마음에 품은 하소연을 적거나, 혹시 이곳에 올지도 모를 다른 사람의 힘에 기대는 것뿐이었지요. 그런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군요. 하하하.
하기야 저주가 뿌려졌으니 들어올 수가 없었겠지.
나는 영혼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아니 희망을 맛보기 직전 절망을 맛본 상황에서 저들처럼 되었다면, 나라도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리라.
이윽고 다시 시선을 내린 사내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덩그러니 서 있는 벽면에 흘끗 시선을 던졌다. 하얗던 벽면은 어느새 약간은 불에 그을린 상태였다.
– 미안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말씀 드렸는데, 생각보다는 길어졌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당신들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개인적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사내는 잠깐이지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쑥스럽게 웃으며 말하였다.
– 하하. 다른 사람에게서는 처음 듣는 말인데…. 기분이 미묘하네요. 뭔가 보상을 받는 기분이랄까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아, 이제 아까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말씀하신 사람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이 요새 지하에 잠들어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대 영웅과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장소에 있지요.
“그때의 일이 어지간히 억울했나 보군요.”
가볍게 말을 던지자, 사내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 아무래도…. 그때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우리처럼 포기하고 조용히 묻힌 동료들도 있는 반면, 이제는 버릇처럼 산맥을 배회하는 동료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입니다. 간혹 심하게 타락한 동료의 영혼이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빼앗으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여기는 그런 분은 없어 보이니까요.
문득 한결이 미약하게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수면 밖으로 떠올릴 문제는 아니라 여겨, 나는 다음 화제로 말을 돌렸다.
“그렇군요. 그럼 지하로 가는 방법과, 되살릴 방법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으음. 원래 산 인간이 가기에는 적당치 않은 곳이나 마침 좋은 방법이 생겼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마그나카르타가 부활해 지면을 뚫고 나왔으니까요. 장소는 바로 이 요새의 지하 1층에 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를 지하 2층에 봉인해뒀으니, 뚫고 나온 구멍으로 들어가시면 제법 수월하게 들어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사내는 옆에 있던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여인을 끌어와 나에게 보였다.
– 되돌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살아만 있다면, 이 친구의 능력으로 모두 살릴 수 있습니다.
여인은 아까 나에게 시간 역행 마법을 걸어준 장본인이었다. 어떤 식으로 살린다는 지 단박에 이해가 돼, 나는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원하는 이야기는 전부 들었습니다. 이제 더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다른 분은 이만 짐을 내려놓으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말인즉슨, 이제 그만 승천하라는 소리였다.
말을 듣자마자 사내는 환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잠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결국 이렇게 다 끝났다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사내의 뒤로 두 영혼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 영혼은 모두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갖고 있었는데, 한 명은 은색으로 빛나는 발키리 갑옷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말끔한 무녀 복장을 갖춘 영혼이었다.
문득, 둘의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게 다가왔다.
–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 저도 저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사내는 한 차례 둘을 번갈아 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 또한 일순간 갸웃했으나, 반사적으로 머리를 끄덕여 허락했다. 딱히 해를 입힐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내 반가운 얼굴로 나를 지나치는 두 여인을 보고 있자, 곧 조용히 서 있는 차소림과 한나에게서 각각 멈춰서는 걸 볼 수 있었다.
– 그럼 여쭈겠습니다. 당신은 플라비우스 님을 모시는 아르쿠스의 자매가 아니십니까?
– 혹시, 무녀의 진전을 이은 후인이신가요?
그리고 둘의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차소림의 클래스는 아르쿠스 발키리였고, 한나의 클래스는 황혼의 무녀였다.
이내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두 클랜원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땡잡았네.’
– 아하…. 그렇군요. 설마 여기서 동료들의 후인을 만날 줄이야…. 그렇네요. 이대로 승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건 우리를 구원하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하하하.
그때, 다시 맑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와 안솔에게로 서서히 가까워져 오는 영혼을 볼 수 있었다.
사내는 나를 향해 꾸벅 머리를 숙이더니 안솔의 앞으로 다가가 차분히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이제 쉬세요….”
안솔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사내는 머리를 도리도리 저음으로써 대답했다.
– 그럴 수 없습니다. 확실히 구원자 님 덕분에 우리를 옭아매던 모든 저주가 풀렸지만, 결국에는 이 또한 빚을 지게 된 셈이니까요.
안솔은 또다시 웅얼거렸다.
“괜찮다니까요오….”
– 하하. 아니요.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산맥에 있는 동안 무척이나 많은 생각과 후회를 했습니다. 한때는 대 영웅을 비롯한 모든 인간을 증오하던 때도 있었지요. 만일 이대로 승천해 구원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게 된다면, 결국 우리도 그와 다를 바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도 다시 되찾고 싶습니다.
더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긴 걸까. 안솔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스르릉, 챙!
이윽고 청명한 검음과 함께 사내의 손에 검이 들렸다. 마치 기사 서임을 받는 모습처럼 정중히 검을 쥐어, 안솔의 앞으로 천천히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처럼….
“아, 아니….”
안솔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고, 사내는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 부디 우리에게도, 당신과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구원할 한 번의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 작품 후기 ============================
독자 분들 설은 모두 잘 쇠셨나요? 일단 여기서, 운전하느라 고생하신 아버지 분들께 박수를! 설 음식 만드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 분들께 박수를(어머니 분이 과연 계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저는 나름 재미있게 잘 지냈습니다. 사촌 큰누나께서 새벽에 예정일대로 순산하셨다는 좋은 소식도 받았고, 그리고 외가에 가서 간만에 친척들도 만났어요.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 잠도 실컷 잔 것 같습니다. 😀
이제 설도 지났고, 2월의 시작이네요. 개인적으로 올 한해는 중요한 계획은 세운 터라, 벌써 두근두근한 기분입니다. 후후.
아. 독자 분들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혹시 독자 분들께서 소설 내 머셔너리의 클랜원 중 한 명이 된다면 말이지요. 만일 눈앞에 염원의 비석이 있다면, 과연 어떤 염원을 말씀하시겠어요? 재미있는 의견이 나오면 좋겠어요. 😀
PS. 보상은, 개수로 따지면 아직 절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