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57
00456 안현을 구출하다. =========================================================================
“네…?”
숨을 살짝 들이켠 안솔은 미약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사내는 재차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안솔을 지그시 올려다보며 무언의 허락을 구하는 중이었다.
“아…. 하, 하지만….”
그 눈길이 자못 부담스러웠는지, 안솔은 이리저리 고개만 돌리며 사내를 회피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가득한 게 마치 “오라버니. 어떻게 해야 돼요?”라 묻는 것 같았다.
‘부디 우리에게도, 당신과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구원할 한 번의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나로서는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대충 말을 들어보니 보상의 냄새가 솔솔 풍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놓고 받으라 하기에는 약간 눈치가 보이는 게 사실이라, 살며시 미소 짓는 걸로 대신했다.
안솔은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느슨히 말아 쥔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목울대가 꼴깍 움직이는 게 머릿속이 꽤 복잡한 모양이다.
잠시 후.
“정말 괜찮으세요…?”
무척 다행스럽게도, 안솔은 차려진 밥상을 뒤엎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이래도 될까?”하는 기색이 가득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마침내 안솔의 허락이 떨어졌다. 은혜를 갚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사내는 얼굴에 환한 기색이 번졌다.
–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원자시여. 그럼 이제 간단한 의식을 치를 테니, 너무 놀라지 말아주십시오.
다시금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안솔.
문득 지금 안솔이 느끼는 기분을 대강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상 나만 쫄랑쫄랑 쫓아다니다가, 이렇게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상황에 직면하니 어색하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에 쥔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고는 지그시 눈을 감아 입을 열었다.
– 이스탄텔의 이름으로, 저 하늘에 떠오른 태양을 향해 맹세한다.
‘…뭐라고? 이스탄텔의 이름으로?’
익숙한 단어가 나와 나는 재빠르게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사내가 매우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우기도 했거니와, 손에 쥐었던 검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기적의 빛을 인도한 구원자를 지킬 것을, 다시 한 번 약속한다.
사내는 약 1분 동안 빠른 속도로 주문을 영창 했다. 어느새 하늘 높이 떠오른 검은 태양 빛을 받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중이었다. 검이 뿌리는 빛이 밝아질수록 영혼들에 흐르던 빛도 점차 환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 …이스탄텔의 법에 의거해 영혼의 서약을 마칩니다.
마쳤다는 소리가 나온 걸 보니, 사내가 말한 간단한 의식이 끝난 듯싶었다.
나는 마지막 말에 주목했다. 이스탄텔의 법이란, 바꾸어 말하면 이스탄텔 로우(Law).
일순간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 궁금증이 증폭했으나 분위기상 여전히 말을 붙일 계제는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소영에게 물어보기로 생각하며, 나는 사내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우우우우우우우웅!
하늘에 떠오른 검에서 사방을 비추는 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동시에 영혼들의 몸에 흐르던 빛 또한 발광해 검이 내뿜는 빛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시종일관 시무룩해 있는 안솔이 마음에 걸렸는지,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구원자시여.
“하지만….”
– 우리는 지금 그 누구보다 기쁘고, 자랑스러우며, 행복합니다. 우리는 비로소 수천 년간 바라 마지않던 해방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구원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의 작은 성의를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사내의 간곡한 말에 약간의 위로를 받은 걸까. 기운 없던 안솔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밝아졌다.
어느덧 사내의 몸에 흐르는 빛이 강해지는가 싶더니, 반대로 영혼은 점차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련한 눈길로 요새를 천천히 둘러보던 사내는, 조금은 허무해 보이는 눈동자로 나를 돌아보았다.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말해보라는 의미로 머리를 까닥였다.
– 우리는 지금 바로 맹세를 따를 것이나, 이 아이는 잠시 남겨둘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따라가시게 되면 아마 지하 1층에는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내가 말한 이 아이란, 아까 내 몸을 치료해준 황금빛 머리칼의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인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다소곳이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가.
사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결단을 내렸는지 차분히 말을 이었다.
– 지하 1층에서 볼 일을 마치시면, 지하 2층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지하 2층이요?”
– 예. 지하 2층은 마그나카르타를 봉인한 장소이며, 대 영웅이 마지막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곳입니다. 아마 제 예상이라면, 대 영웅은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군요.”
나는 지그시 사내를 응시했다. 왠지 다음에 나올 말이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러니 볼 일을 마치시면, 2층으로 가셔서 대 영웅과 한 번만 만나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 영웅이란 자도 구원해달라는 말입니까?”
– 아니요, 아닙니다. 우리가 뜻하지 않게 구원받았듯이, 그 부분에 관해서는 온전히 맡기겠습니다. 그저…. 한 번 만나서 이야기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추후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왜 그랬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 정도면 큰 부담 없는 부탁이라 나는 알겠다고 말해주었다. 사내는 한결 안도한 얼굴로 미소 짓더니 차분히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주변의 영혼은 하나의 빛으로 변해, 하나하나 검으로 흘러 들어가는 중이었다.
문득 사내는 옆에 있던 여인을 쿡 찔렀다. 여인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사내가 귓가에 속닥거린다. 이내 흘끔 나를 쳐다본 여인은 호호 웃으며 사내의 옆구리를 거세게 가격했다. 사내는 격한 신음을 내뱉었으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꼭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다들 안녕히….
이윽고 사내는 끝 인사와 함께 한 줄기 빛으로 화해 검으로 스르르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강렬한 빛을 번쩍인 검은 하늘에서 하릴없이 떨어져, 안솔이 허둥지둥 받아내었다.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해 떨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맹세의 검.』
(설명 : 고대를 넘어서는 아득한 신화 시절. 용과 인간은 대륙의 주도권을 놓은 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신화의 영웅들은, 광휘의 사제가 이뤄낸 기적으로 수천 년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 맹세의 검은 빛을 인도해준 구원자에 대한 일종의 서약입니다. 단 한 번, 사용자가 원할 때 최후의 전투에 참가한 신화 속 영웅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이나, 사용자가 부를 경우 언제 어느 때나 주저 없이 달려올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는 가히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신화 속 영웅으로 이루어진 군단을 소환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나로서는 매우 소중한 성과를 얻은 셈이다. 비록 1회성이라는 조건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힘은 이미 절절히 체감한 상태였다.
‘정말로, 꼭 필요할 때만 써야겠구나.’
“오라버니….”
그렇게 생각할 무렵, 양손으로 맹세의 검을 쥔 안솔이 다가와 조심스레 팔을 내밀었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이리저리 일렁이는 눈망울을 응시했다. 어떻게 보면 이 성과는 거의 안솔 혼자서 이루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히 머리를 흔들었다.
“네가 가지고 있으려무나.”
“네…? 아, 아니요.”
“네가 구원한 이들이야. 그러니 소중히 갖고 있다가, 나중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내게 말하렴.”
“…으응. 정말이요?”
안솔은 잠시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지만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들어 검을 꼭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애틋한 눈빛으로 검을 내려다보는 게, 절로 흐뭇한 마음이 일었다.
아무튼 이제야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안솔의 얼굴에 겨우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마주 웃어주며 안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제 웃는구나. 우리 복덩이.”
“…저는 복덩이에요?”
“그럼. 그렇고말고. 정말 잘했다.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야.”
“와아…! 칭찬받았다아.”
안솔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면서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꼭 내 품에 안기려는 듯한 모양새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안솔의 벌린 양팔은 각각 누군가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
“히히. 우리 복덩이 정말 기특하네. 자자, 오빠한테만 가지 말고, 언니에게 오렴. 이 못된 것아. 어디서 은근슬쩍….”
“어, 어…? 유, 유정이 언니? 갑자기 왜 이러세요? 왜 내 팔을 잡아요?”
“아이고. 우리 솔이 이리 와봐.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뻐요? 이러는 거 보니까 정말 여우 같네~.”
“이익…!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 아니 다은이 언니는 왜 또 내 팔을 잡는 거예요. 놔줘요. 놔달란 말이에요. 이이익…!”
그렇게 유정과 다은에게 질질 끌려가는 안솔을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시선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늘은 맑고 푸르다. 내리쬐는 햇살이 요새를 비춘다. 어느새 주변을 빽빽이 메웠던 영혼들은 온데간데없고, 부서진 동상과 그을린 벽면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리고 홀로 우뚝 남아있는 뼈만 남은 용의 사체 하나. 어떻게 보면 저것 또한 하나의 성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일순 고민에 빠져들었다.
‘저 용은 어떻게 처리하나…. 그리고 왜 마족의 뿔이 있는지도 밝혀내야 하는데.’
그러한 찰나, 누군가 돌연히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걸 느꼈다. 차분히 몸을 돌아보자 홀로 남은 영혼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여인은 나와 눈을 마주하자 자신의 가슴을 지그시 눌러 보였다. 그러자 봉긋한…. 아니, 아니.
‘따라오라는 소린가?’
그 순간 나는 아차 한 심정으로 외쳤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다들 주목! 지금껏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으니, 공략의 기쁨은 모든 일을 끝마친 후에 나누도록 하지요. 얼른 정렬하십시오.”
“김수현! 저 용! 저 용은 어떻게 할 거야?”
역시나 비비앙이 탐욕스러운 눈길로 용의 사체를 가리키는걸 보며,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지금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 일단은 여기 두자고. 아무튼 가면서 얘기하자, 가면서.”
“히잉.”
비비앙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으나 결국에는 아쉬운 탄성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클랜원 또한 지하에 있을 안현을 떠올렸는지 삽시간에 모여 정렬했다. 정렬을 마치자, 이윽고 여인의 영혼이 어딘가를 향해 차분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삐 걸음을 놀려 여인의 뒤를 뒤쫓았다.
이제 용이 잠든 산맥의 공략도 서서히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
지하로 가는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요새의 중앙 광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내의 말대로 커다란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이 출현했을 때 거대한 지진이 나는가 싶었는데, 아마 지하 2층에서 억지로 뚫고 올라오느라 생긴 진동인 듯싶었다.
생각보다 구멍의 깊이가 그렇게 깊지 않아, 우리는 매우 간단히 지하 1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은 근접 계열들이 먼저 들어가 착지했으며, 차후 마법사와 사제의 낙하를 받아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려오는 사용자가 로프를 설치함으로써, 차후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윽고 모두가 지하로 내려온 이후 우리는 일자로 만들어진 통로를 걸어야 했다.
지하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좌우 벽면을 따라 반듯한 통로를 걸을 뿐이라, 그냥 일반 동굴을 탐험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론 우리는 마그나카르타 덕분에 쉽게 들어온 편이니 정상적으로 들어오려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통로의 경사는 거의 평평했으나, 걷는 느낌으로 보아 약간이지만 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바지런히 여인의 뒤를 쫓으며 담담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나 또 전투를 치러야 할까 경계했는데, 지하에는 어떤 괴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걸어가는 걸 보니 유적의 숨겨진 지역으로 보는 게 옳은 듯싶었다. 물론 끝까지 주의해야겠지만, 일종의 보너스 스테이지라고 해야 할까.
‘예. 지하 2층은 마그나카르타를 봉인한 장소이며, 대 영웅이 마지막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곳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보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 현재까지 우리가 얻은 보상은 총 네 개 정도로 볼 수 있다. 맹세의 검, 용의 사체 그리고 한나와 차소림.
한나와 차소림은 꽤 특이한 케이스였다. 이곳으로 오면서 아까 영혼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어봤는데, 예상대로 한 명은 아르쿠스 발키리였고 다른 한 명은 황혼의 무녀였다고 한다. 즉 영혼들 입장에서는 이 두 명이 후배나 다름없는 입장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눈 후 두 영혼은 각각의 후배에게 소정의 선물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 선물이라는 게 바로 힘. 즉 능력이었다.
한나는 고대 무녀가 사용했던 세 가지 힘 중 하나인 음각 문신의 능력을 부여 받았으며, 차소림은 잠재 능력 중 하나인 발할라의 가호가 아스테라의 축복이라는 능력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속된 말로 두 사람 모두 땡잡았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맹세의 검 하나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보상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지 않은가.
그리고 안현의 구출이 거의 확실시 되는 지금. 구출 후 들어갈 지하 2층에 어떤 보상이 있을지 기대하며, 나는 차분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던 여인의 영혼이 차차 느려지는걸 느꼈기 때문이다.
앞을 보자, 지금껏 완만했던 경사가 비교적 급격하게 굽어 올라가는 지점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굴곡인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조금이지만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예전에는 계단 역할을 했던 장소일 것이다.
굴곡진 지점 앞에서 여인의 영혼이 잠시 멈추었다. 위로 올라가는 경사의 끝에는 거대한 어둠이 자리잡은 상태였다. 이곳을 올라 들어가면 어떤 장소가 나올 것 같은데, 깊은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멈춰 섰던 여인의 영혼은, 이윽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인을 따라 조심조심 경사를 올라서자 공허한 어둠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검은색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마치 칠흑 색으로 칠한 도화지를 보는 것 같았다.
허준영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경사의 끝에 서서 담담히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군.”
그 말은 들은 걸까. 마찬가지로 가장 선두에 있던 여인의 영혼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여인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순 벙어리인가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해보면 벙어리는 아니었다. 사내에게 번역 마법을 걸어준 것도 이 여인이었고, 나를 치료할 때 주문을 외우는 소리도 확실히 들었다.
그때였다.
돌연히 호기심이 일어 제 3의 눈으로 여인의 정보를 확인하려는 찰나, 여인이 들어올린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와 동시에.
파파파파파파파팟!
마치 수십 개의 형광등을 동시에 켜는 것처럼, 위쪽으로 어둠 일색이었던 공간을 조명하는 밝은 빛이 켜졌다.
나는 바로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어찌나 휘황찬란했는지, 한순간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빛이 내리쬐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 이제는 쳐다볼 수 있을 정도로 빛이 살그머니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회복된 시야로, 어둠을 걷어낸 공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 작품 후기 ============================
어디 보자~. 안현의 구출 파트는 다음 회에서 끝날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음 파트는 대 영웅과의 대면과 남은 보상 회수 파트가 되겠지요. 그것도 끝내면 비로소 이번 유적 공략 파트도 거의 마무리 짓게 될 것 같습니다.
아. 어제 코멘트는 잘 보았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설정한 제한에 걸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의견이 참 많이 나왔더라고 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분도 적지 않아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연참은…. 음. 어제 코멘트를 보며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가둬놓고 군 만두만 먹이신다니 요. 아니 저보고 여성으로 변하시라니 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ㅋㅋㅋㅋ.
진짜, 그 예전에 어떤 코멘트였죠? 차소림 설정 중에 처녀 유지 설정이 있어 안현의 고자설이 대두됐는데, 그때도 달린 코멘트들을 보고 엄청 웃었지요.
‘하하, 바보 같기는. 앞이 불가능하다면 입 또는 뒤로 하면 되잖아?'(적나라한 표현을 쓰기에는 너무 민망해 최대한 순화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를 떠오르게 하는 코멘트였습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