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60
00459 선택. 대 영웅? 아니면 마그나카르타? =========================================================================
하얗다. 말 그대로 하얀색 일색이었다. 허공에는 하얀 빛이 넘실거리고 바닥에는 하얀 안개가 잔잔히 흐르고 있다. 눈앞에는 작은 빛이 잇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게, 몽환적인 기운이 흐르는 세상이었다.
– 그대는…. 누구신가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허공에서 한 줄기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틀림없이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였으나, 어디를 봐도 그저 하얀 허공뿐이었다.
그때였다.
– 호. 한낱 인간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니 잠깐.
이번에는 왼쪽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오른쪽의 목소리가 흔들림 없는 고요한 여인의 목소리였다면, 왼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심원하면서도 낮고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목소리 자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마치 물을 한 모금 머금고 말하는 것 같아 약간 알아듣기 어려웠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는 걸 그만두었다. 보아하니 상대 쪽에서 나를 인지한 것 같으나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속 찾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왼쪽에서, 재차 목소리가 이어졌다.
– 미처 알아보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시길.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가 삼가 인사를 올립니다. 태고의 불을 품은 존재시여, 도대체 어인 일로 이곳에 방문하셨나이까.
응?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 태고의 불을 품은 존재?
갑작스러운 경칭에 당황하기는 했으나, 아마 화정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걸었다.
화정?
– 흥.
하지만 되돌아온 건 새침한 콧소리였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심장을 쓰다듬었다. 아무튼 조금 전 말로 알아낸 정보는 두 가지. 하나는 왼쪽의 목소리가 화정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 대상이 바로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라는 소리였다.
이 말인즉슨, 오른쪽의 목소리가 바로 사내가 말한 대 영웅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할 수 있어, 나는 오른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장소에 온 이유는 한 사내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네가 대 영웅이라 불린 자인가?”
– 흠…. 용의 경배를 받는 인간이라. 이상하군요. 아무튼 그 사내가 부른 대 영웅을 찾는 거라면 아마 저일 거예요. 그나저나 사내의 부탁? 어떤 부탁을 받았길래 저를 찾으시는 건가요?
미성의 목소리가 허공을 잔잔하게 울렸다. 그리고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사내의 부탁을 말하기에 앞서, 일단은 마그나카르타의 부활이나 영혼의 승천 등 현재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야기할수록 대 영웅의 반응은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 용의 부활을 얘기할 때는 걱정을, 동료였던 영혼들이 깨어나 용과 전투를 벌였을 때는 탄성을, 용을 쓰러뜨린 후 영혼이 승천했다고 했을 때는 경악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맹세의 검에 관한 이야기와 마그나카르타의 저주를 완전히 해제했다고 덧붙이자,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 후유. 그렇군요. 마그나카르타의 저주는 해제됐고, 동료들은 원래 가야 할 곳으로….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대 영웅이 반응은 온당 당연한 것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대 영웅이 동료들에게 벌인 짓은 나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문득 머릿속으로 사내의 말이 떠올랐다.
‘수천 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정말로 끔찍했지요.’
‘산맥에 들어오면서 죽음을 각오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죽어서 만큼은 각자가 품은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결코 죽어서까지 구차한 망령이 되어 살아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사내의 입장에서 말을 들은 나로서는, 저렇게 약간이나마 죄책감을 벗은듯한 목소리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당초 왜 대 영웅이 이 장소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고.
그래도 이미 끝난 일이었다. 제 3자가 왈가왈부할 것도 아니었고, 얼른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승천하기 전에, 사내가 한 가지 부탁을 하더군. 그때 왜 그래야만 했는지,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대 영웅은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비록 형체가 보이지 않아 어떤 기색도 읽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흐르는 침묵이 대 영웅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후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대 영웅은 비로소 목소리를 울렸다.
– 그건…. 동료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첫마디는 절로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구차하다 생각되는 변명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 그렇게 얘기해주면 되는 건가?”
–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하지만 말 그대로,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언어와 지혜의 신 가네샤 님의 힘을 빈 염원의 비석은 확실히 강력한 신의 권능을 행사하지만, 그만한 제한도 있으니까요.
“제한?”
– 네. 거기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제한이 있지요. 하나는 오직 한 번의 염원을 말할 기회를 부여하며, 다른 하나는 염원이 무조건 발동하는 게 아니라는 제한이죠. 인간의 염원에 개인의 욕심이 최우선으로 앞서있다면, 가네샤 님은 이유를 불문하고 염원을 들어주지 않으세요.
“개인의 욕심이 앞서있다면…. 염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 그래요. 저는 대 영웅이라 불린 여인이었으나, 보통의 인간 여인이기도 했어요. 저라고 그대로 산맥을 나가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살고 싶지 않았을까요? 아니요. 그러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요. 염원을 빌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었으며,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염원은 제 욕심이 가장 앞서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저로서는 모험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제 이해하시겠나요? 제가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그런가. 그랬던가.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설마 이런 제한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살며시 팔짱을 끼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도 원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사내나 여인의 영혼이 보여준 능력은 지금 내가봐도 놀랄 만큼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래도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확실히 인간을 위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아마 내가 너였다면 조금 더 동료들을 믿었을 거다. 사실을 밝히고 서로 힘을 합쳐 저주를 해제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야. 너는 이미 일을 벌인 후에 동료들에게 얘기했고, 그 결과 네 동료들은 사후에도 수천 년 동안 끔찍한 절망을 맛봐야만 했다.”
– 알아요. 제 결정은 부인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독단이었다는 걸. 하지만 그대는 그때 그 시절이 어땠는지 조금도 모르겠죠. 마그나카르타라는 공통된 적이 없어진 이상, 인간들의 고결한 신념이 언제까지 이어졌을까요? 저는 그 후의 상황을 걱정한 거예요.
인간은 항상 변화하는 존재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대 영웅의 말에 일부는 공감할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이 정도면 사내의 부탁은 완수했다고 볼 수 있었다. 추후 맹세의 검으로 소환했을 때 얘기해주면 될 터. 더는 여기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이만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 어머니시여. 지금 대 영웅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진동은 심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지금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마그나카르타가 입을 열은 것이다.
순간 나는 너 같은 자식 둔 기억 없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는 차분히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라는 말이 나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 말 그대로입니다. 비록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나, 대 영웅의 속내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 입 다물어요. 마그나카르타. 비록 무수한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악랄했던 계획은 끝까지 가지 못했고 오늘로써 분쇄됐어요. 당신은 패배했어요.
대 영웅은 재빠르게 패배자가 짖는 소리라고 매도했으나, 마그나카르타는 그에 아랑곳 않으며 말을 이었다.
– 비록 당신께서 제 일말의 복수를 깨트렸으나, 그것은 어머니의 의지로 행한 일. 제가 감히 불만을 표시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이 산맥에 들어온 모든 인간이 고통 받거나 아니면 그 후손들이 고통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 영웅은 전자를 선택했음에도 자신만은 이 장소로 홀로 쏙 들어오더군요. 제가 봉인된 장소로 말입니다.
“확실히 대 영웅의 영혼은 동료들과 섞여 있지 않았지. 왜 혼자 여기에 있는지는 나도 궁금했어.”
– 겉으로는 인간을 위한다는 구변 좋은 말을 대고 있지만, 저는 저 대 영웅이라 불리는 자의 속내를 알 것도 같습니다. 관에 오르시면서 주변에 세워진 일곱 개의 비석을 보셨을 겁니다.
“일곱 개의 비석이라면…. 설마 염원의 비석을 말하는 건가? 아니 잠깐만. 관이라고? 제단이 아니라?”
–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아직도 염원의 비석을 발동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으며, 보신 것은 제단이 아닌 저 대 영웅의 신체가 동결돼있는 일종의 관입니다. 대 영웅은 제가 남긴 저주를 걱정한다는 이유로 모든 동료를 제물로 바쳤음에도, 정작 자신은 이 장소에 남아 저와 함께 영원히 봉인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저 간악한 속내를 아시겠나이까? 대 영웅은 추후 이 장소로 찾아올 연자를 대비하여 종래에는 부활의 길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나는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마그나카르타의 말이 실제일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또한 하는 말이 종말의 용이라는 이름치고는 너무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날 모든 일이 끝나고 그대로 혼자서 나갔겠지요!
대 영웅 또한 그렇게 느꼈는지, 곧 발끈한듯한 목소리가 서 있는 바닥을 떠르르 울렸다. 그러나 마그나카르타는 예의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 영웅을 비웃었다.
– 크큭. 아니지, 아니야. 홀로 살아서 나가는 게 두려웠겠지. 동료의 가족들을, 지인들을 볼 자신이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처음 나와 대면했을 때가 기억나는데. 네가 나에게 집요하게 저주를 내린 동료가 누구냐고 물었었지? 답을 해주자 한결 안도하던 게 기억나는군.
– 역시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본성은 변하지 않네요. 그대여. 설마 저 패배자의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죠? 우리는 후손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어요.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마그나카르타의 혹시 모를 수작을 감시하기 위해서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러니 저 정신 나간 패배자의….
그 순간, 나는 차분히 손을 들었다. 이것은 클랜 회의 시 가끔 보이는 신호로, 필요 이상으로 소란스러워졌을 때 이제 그만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즉 일종의 버릇과도 같은 습관이랄까.
그러나 신기하게도, 점차 격해지던 두 존재의 대화가 뚝 멈추었다.
나는 잠깐 잠자코 있었으나, 이내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내가 이 장소에 온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이 사내의 부탁 때문이었다. 사내가 우리에게 보인 호의에 답하기 위해서지,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또한 나는 사용자다. 홀 플레인의 사용자. 수지가 있다면 모를까.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는 이 장소에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몸을 돌아보니 정면 방향으로 2미터 높이 정도의 입구가 서 있었다. 아마 저기로 나가면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 그렇게 생각해 한 걸음 떼려는 찰나였다.
– 어머니시여. 이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마그나카르타의 간절한 목소리가 이만 떠나려는 발길을 붙잡았다. 일순 무시하고 가려고 했으나, 나는 생각을 바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런데.”
– 외람되지만, 가시기 전 감히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부탁?”
– 그렇습니다. 이미 복수는 종결됐으니….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와 상관이 있는 이야기라면 모를까. 아까부터 흰소리들을 하는 걸 참고 있었는데, 이제 조금씩 짜증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구구절절 말할 거면 그냥 치우고. 요점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일순 옆에서 대 영웅이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으나, 나는 가볍게 흘리며 왼쪽을 응시했다.
잠시 후 마그나카르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개인적으로는 이제 그만 영면에 들고 싶으며, 대 영웅에게 복수를 잇고 싶습니다.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
영면, 복수, 그리고 보고 싶다. 이 세 개의 바람을 동시에 이룰 수는 있는 걸까? 아니 그전에, 보고 싶다는 건 또 무슨 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탓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마그나카르타는 바로 말을 이었다.
– 인간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전쟁을 하면서 내내 궁금했던 한 가지 의문은, 도대체 왜 인간이 그토록 우리를 배척하려고 했냐는 겁니다. 우리 용들은 인간과의 공존하고 있었고 또 그것을 원하였으나, 거부한 건 인간들 쪽이었습니다. 과연 인간들이 우리를 배척하고 이뤄낸 결과가 어떤지 한 번 보고 싶습니다.
– 하. 마그나카르타. 공존이라고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족 위에 군림하고, 제물을 바치고…!
또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 나는 다시금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해방을 원하는 것 같은데. 웃기는군. 인간들이 기를 쓰고 너를 봉인했는데, 내가 왜 위험을 자초하면서까지 너를 해방해야 되는지 이유를 말해봐.”
– 방금 하신 말씀은, 저야말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위험이라니요? 세상에 대한 복수는 불가능하며 이미 접었습니다. 제가 말한 복수란 저 대 영웅에 대한 복수를 말하는 겁니다. 또한 이미 제 본체는 다시 살릴 수 없을 만큼 사그라졌고, 파손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습니까? 어째서 저를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어머니는 세상을 창조한 불이시며 모든 존재를 아우르고 굽어보는 존재. 저 또한 종말의 이름을 받기는 했으나, 근원은 태고의 불에서 비롯된 염화의 용입니다. 지혜에 빛에 오른 염화는 모두가 어머니를 공경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불완전한 상태로 보이시나, 어머니께 덤비는 자식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 지랄하네.
그 때, 마침내 화정이 입을 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뻔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 내가 저 사고뭉치를 키웠을 때만 생각하면…. 뭐? 어머니께 덤비는 자식이 어디 있어? 아주 지랄을 해요 지랄을.
화정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확실히 네가 어머니라 칭하는 존재는 내 품에 있지만, 나는 네가 말하는 어머니가 아니야. 인간이다, 인간. 그러니 그걸 감안해서 이야기하고, 어머니라 부르는 것도 관뒀으면 좋겠는데. 나는 엄연한 남성이거든.”
마그나카르타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미 화정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스스로 밝힌 것이다.
그리고 설령 마그나카르타가 덤벼든다고 해도, 이미 한 번 거의 단신으로 쓰러트린 상대였다. 엘릭서도 있겠다. 동료들과 힘을 합쳐 약간의 무리를 감수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 몽환적인 공간에 고요한 침묵이 흘러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마그나카르타의 침묵을 대신해, 다른 목소리가 곧바로 침묵을 깨트려버렸다.
– 그대여. 설마 지금, 저 용의 말을 들으려는 건가요? 그건 아니겠지요?
나는 대 영웅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마그나카르타가 있을 거라 생각되는 공간만 바라보았다. 아마 머리가 돌아가는 용이라면, 그리고 인간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면. 내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한낱 인간이라도, 어머니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윽고, 들려온 마그나카르타의 목소리는 여전히 경칭이었다. 새삼 화정의 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느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 인간임을 감안하라. 무슨 말인지는 알겠나이다. 그럼 이건 어떠실는지요.
그 순간이었다. 한 줄기 강한 바람이 나를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허공으로 서너 개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가 사용자 김수현을 인정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에게 다섯 가지의 용의 권능이 부여됩니다.』
『역사상 최강으로, 최악으로 평가 받은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 그런 용의 인정을 받은 만큼 권능 또한 매우 강력합니다. 하지만 현재 사용자 김수현의 사용자 정보로서는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의 수나, 능력이 제한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용의 권능은 총 두 가지뿐이며….』
– 어떠십니까.
마그나카르타는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 흐응. 뭐 나쁘지는 않네.
그나저나 용의 권능이라.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화정도 인정한 만큼 확실히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말을 걸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 뭘?
마그나카르타를 해방하는 것.
– 그거야 네 마음대로지. 뭐 굳이 의견을 말하라고 하면…. 말마따나, 저 녀석도 어찌 보면 내 자식이라고 할 수 있거든. 이렇게 있는 걸 보면 과히 마음이 좋지는 않아.
마음대로 하라 말하기는 했지만, 화정도 은근히 마그나카르타의 해방을 원하는 눈치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더 들어봐야 결정하겠지만, 나는 한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걸 느꼈다.
곧 더 없느냐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자, 마그나카르타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지금으로서는 이게 한계입니다. 하지만 제 말을 들어 저를 해방해주신다면, 드릴 수 있는 선물이 하나 더 있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곳에는 염원의 비석을 가동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말인가?”
– 바로 그렇습니다.
“오호라.”
대 영웅은 염원의 비석은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나 말고도 열두 명의 클랜원이 있다.
이 말인즉슨,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총 열세 번의 염원을 빌 수 있다는 소리. 그렇게 생각하자 이 제안이 무척 구미가 당기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한껏 당황한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세차게 때렸다. 대 영웅의 목소리였다.
– 우리는, 우리는! 그대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어요. 지금 그대가 하려는 행동은 그 숭고했던 희생을 백지로 되돌리는….
“개인적인 복수나 세상을 보고 싶다는 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어쨌든 최종적으로는 영면에 들고 싶다잖아. 그리고 나는 애당초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사람이라고. 즉 네가 말하는 숭고한 희생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소리지.”
– 뭐, 뭐라고요?
“후. 차라리 그때 멸망하는 게 나았을 것을…. 그럼 이 거지같은 세상에 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 아무튼 수지만 맞는다면 못해줄 이유도 없으니까, 헛소리는 이만 집어치우렴.”
방금 말은 진심이었다. 그때 세상이 아예 멸망해버렸으면 이곳에 올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아무튼 대 영웅을 원망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사내 또한 대 영웅의 처분을 나에게 맡겼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나는 거주민이 아닌 사용자였다.
기가 막히는지 아니면 할 말이 없는지. 대 영웅에게서는 더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마그나카르타가 있을 거라 생각되는,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덤덤히 입을 열었다.
“세상을 보고 싶고, 복수를 하고 싶고, 영면에 들고 싶다. 그럼 어디 그 세 가지 부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들어보고 싶은데. 아. 미리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듣고 판단할 생각이야.”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마그나카르타가 반색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거야 당연합니다. 물론이지요. 하지만 그 전에…. 서로간에 조금 더 확실한 믿음을 위해, 지금 품속에 있는 물건을 잠시 꺼내주시겠습니까?
품속의 물건? 반사적으로 품을 더듬자 이내 뭔가 자그맣고 둥글둥글한 물체가 잡히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마그나카르타가 뭘 하려는지 대충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
화악!
환한 빛 무리가 눈앞을 가득 메웠다가, 곧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정신을 차려보자 옅은 빛이 스며든 잿빛 홀이 보였다. 손은 여전히 제단, 아니 관에 얹은 상태였다.
그때, 돌연히 아래쪽에서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머리만 돌려 시선을 내리자,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클랜원들을 볼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느라 많은 시간이 지체돼 걱정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걱정하는 눈길들이 아니었다. 처음 이 장소에 들어왔을 때처럼 호기심 어린 눈동자만 보일 뿐이다.
그 순간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그 공간에서 흐르는 시간은 현실과 다른 배율로 흐르는 모양이다. 그 공간에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내도, 현실에서는 몇 초에 불과하다. 봉인 공간이라 생각하면 이해될 법한 일이었다.
“클랜 로드! 괜찮으십니까?”
멍하나 바라보고만 있자 신재룡이 손을 크게 흔들며 외친다. 나는 한두 번 머리를 끄덕인 후 안솔을 응시했다. 안솔 또한 나를 쳐다보고 있어, 우리는 금방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이윽고 나는 침착히 손을 들어 관을 가리켰다.
그렇게 서로 눈을 마주친지 약 5초 정도 흘렀을까.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우던 안솔이 순간 “아차.”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입도 커다랗게 벌리며 머리를 마구마구 끄덕이기 시작했다. 목을 덮는 단발 머리가 세차게 휘날릴 정도였다.
‘?’
어떤 의미인지 일순 혼란이 왔으나, 저렇게 미친 듯이 끄덕이는 걸 보면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터.
이로써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안솔의 반응도 확인했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고민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관 위를 응시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연한 초록빛을 띤 일곱 개의 구슬이 가지런히 나열돼있었다. 그 구슬들을 보며 나는 침착히 머릿속을 더듬었다.
‘관 위를 보시면 아마 일곱 개의 구슬이 놓여있을 겁니다. 조작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일단 첫 번째로….’
이윽고 완전히 떠올린 순간.
‘제일 왼쪽에 있는 구슬을 한 번 눌러주십시오.’
나는 주저 않고 손가락을 움직여 가장 왼쪽에 있는 구슬을 꾹 눌렀다.
============================ 작품 후기 ============================
죄, 죄송합니다. 오늘 어떻게든 자정에 맞추려고 했는데, 아버지한테 의도치 않게 30분간 붙잡혔습니다. 제 잘못 때문이에요. ㅜ.ㅠ
실은 오늘 아침에 출근 하시길래, 현관문으로 따라나가 인사를 드렸거든요. 그런데 문이 닫히기 직전에, 그 영화에서 조폭들이 인사하는 것처럼 다시 인사를 드렸거든요. 그~. 어깨 쭉 넓히고 머리 꾸벅 숙이면서 “다녀오십시오 형님!”. 이렇게요. 그리고 바로 도망쳤습니다.
일단 출근이 바쁘셔서 그대로 나가시기는 했는데, 오늘 약속이 있으셨는지 늦게 돌아오시더군요. 그것도 술에 잔뜩 취하신 채로요. -_- 그리고 그 와중에 오늘 아침 인사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하하. 머리랑 등이랑 어깨가 아직도 얼얼합니다. 이 야밤에 “아버님!”이란 단어를 몇 번이나 복창해야 했는지…. 허허허.
아. 오늘 용량이 조금 많지요? 원래 두 편 분량이기는 한데, 사실 내용으로 따지면 한 편 분량입니다. 즉 이번 회 보여드릴 내용이 딱 여기까지였다는 것이지요. 괜히 늘렸다가 원래 기획했던 회수를 초과할 것 같아(실은 이미 초과했는지도 몰라요. 퍽퍽!), 그냥 한 편으로 묶었습니다.
아무튼, 재미있게 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