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62
00461 선택. 대 영웅? 아니면 마그나카르타? =========================================================================
염원의 비석을 활성화한 후.
“이로써 가동은 완료했나이다…. 응? 왜 그런 얼굴들을 하고 있으신지요.”
헬레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가동 완료를 보고했다. 하지만 곧 우리의 얼굴을 봤는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기뻐하기는커녕 울상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매해서 그래, 애매해서. 사실 염원이라고 해봤자, 개인의 욕심이 없을 수가 없잖아.”
“아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바라는 염원에 욕심이 아예 없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욕심이 최우선일 경우에나 제한되지, 차선으로 젖혀두면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요.”
헬레나의 조언은 매우 당연한 말이었으나,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미묘해 자신도 정확한 잣대를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부지기수다. 애당초 그러할진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해 욕심을 차선으로 젖혀라? 어불성설이었다.
내 웃음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헬레나는 어깨를 한 번 들먹이며 말을 이었다.
“정 그러면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꽂혔다.
헬레나는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러더니 이내 살며시 눈웃음을 치는 게, 꼭 색기 넘치는 요부 같아 보였다. 물론 머리칼과 눈동자 색이 변하기는 했으나, 처음 보았던 대 영웅의 모습과 비교하면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기본 원칙을 완전히 뒤엎을 수는 없으나, 가능성을 약간이라도 높일 수는 있지요.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비약적으로 높일 수도 있습니다.”
“오호라. 어떤 방법이지?”
“무릇 사람의 감정이란 야릇하기 그지없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할 수 있는…. 즉 함부로 측정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지요.”
“뜬구름 잡는 소리군.”
어떤 뜻인지는 이해했으나, 현 상황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헬레나는 검지를 좌우로 까닥이더니 어여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한 마디로 입을 잘 놀리면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결국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신을 상대로 입을 털라는 말인가? 그것도 언어와 지혜의 신이라는 가네샤를 상대로?
여전히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클랜원들 또한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서로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게, 아무래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모양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염원의 비석이라는 거대한 보상이 눈앞에 있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나가리가 될 터이니.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먼저 앞으로 나서고 싶겠는가.
한 번 입맛을 다신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부터 시작하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되지?”
“오빠. 자신 있어?”
유정이 냉큼 물었으나 나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이렇다 할 수가 생각나지 않으니, 남은 방법은 직접 맞부딪치는 것밖에 없다. 또한 이대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 만큼, 우선은 내가 시작을 끊는 게 나으리라.
“모두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습니다.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어쩔 도리가 있겠습니까? 되면 좋지만, 안되면 그만이지요. 이 보상에 대해서는 모두 여러분의 선택으로 돌리겠습니다. 어떤 염원을 빌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터이니, 다들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마시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합시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나마 이 말의 효과는 있었는지, 클랜원들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밝아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이미 포탈은 활성화된 상태로, 중앙 비석 부근은 이미 다른 차원의 공간이나 다름없습니다. 저 비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귀를 기울이면, 신의 목소리가 들려올 겁니다.”
이내 헬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예상보다 간단하다고 생각하며 중앙 비석을 향해 이동했다.
이윽고 마법 진의 중앙으로 들어간 찰나, 나는 주변의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진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클랜원들의 기척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나 홀로 존재하는 기분이랄까.
눈앞에는 초록빛 물결이 일렁이는 염원의 비석이 있었다. 나는 잠깐 비석을 매만졌다가, 들은 대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곧 무릎이 땅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우웅!
“응?”
순간 비석에서 맑은 빛이 뿜어져 나와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더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강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의 구부린 무릎이 저절로 세워지고, 이어서 엉덩이에 무게가 실려 바닥에 앉는다. 거기다 양쪽 다리를 오그려주어 편하게 앉도록 해주기까지.
그때였다.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 무렵, 귓가로 미성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아련히 울려 퍼졌다.
– 태고의 불이시여. 부디 편히 앉으세요. 이 미천한 가네샤가 모든 불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비록 인간의 몸에 불완전한 상태로 존재하시나, 이렇게라도 뵙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3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가슴으로 시선을 내렸다. 또 화정이었다.
– 흐응. 가네샤네. 반갑다고 전해줘.
그때 속에서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얼른 말을 걸었다.
아는 사이야?
– 음~. 나랑은 분야가 달라서. 그렇게 엄청나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야. 그래도 수완은 꽤 좋은지, 아랫것들이 몇 번 이야기하는 건 들은 기억이 나네.
아랫것이라. 아, 그럼 잘됐네. 화정 너….
– 싫어. 아무리 까마득한 후배라지만, 가네샤도 엄연한 신이야. 그것도 상급의 신이라고. 그리고 내 관할 하에 있는 아이도 아니라고 했잖아? 분명 좋은 기회인 거는 인정하지만, 여기에는 내가 관여할 어떤 타당한 명분도 없어.
야. 그깟….
– 그깟? 그깟? 푸. 그래. 하기야 너는 잘 모르겠지. 인간이니까. 하지만 방금 네가 하려던 부탁은, 나한테나 가네샤한테나 무척이나 실례되는 말이었다고. 알아들어?
화정은 이미 내가 하려던 말을 짐작했는지, 딱 잘라 끊어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화정이 이 정도로 단호하게 나오는 걸 보아하니, 더 조르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며 비석을 올려다보았다. 비석에는 여전히 신비한 색을 띤 초록빛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가네샤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태고의 불께서는, 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으음. 만나서 무척 반갑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 자신이 거주 중인 인간은 아주 특별히 아끼는 인간이니, 굳이 제한을 두지 않고 염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입술에 살짝 침을 바른 후,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후 폭풍은 무척이나 거세었다.
– 야! 너 죽을래 진짜!
– 호호! 반갑다고 하시니 기뻐요.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언어와 지혜의 신, 가네샤.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호호호!
젠장. 그럼 애초에 알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내부를 미친 듯이 휘도는 화정에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나는 속으로 강하게 투덜거렸다. 물론 전적으로 내 잘못이 크니 겉으로 내색한 건 아니었다.
– 후우. 이렇게 유쾌하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튀케가 관심을 가졌을 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히 재미있는 인간이네요. 감히 태고의 불 님과 농담을 하다니. 우리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에요.
“튀…. 누구 말입니까?”
– 튀케요. 행운의 여신.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올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르셨나요?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2회 차를 시작할 때, 능력치 상승 메시지에서 비슷한 말을 본 것 같기는 하다.
아무튼.
이러나 저러나 더는 내 알 바가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염원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튼 좋습니다. 그럼 염원을 빌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보아하니 시간을 끌면서 밖의 인간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제한에 관한 질문으로 최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것 같군요. 그러니 허락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안됩니까?”
– 그러면, 당연히 제 기분이 좋지 않겠죠? 이 공간은 염원을 비는 공간이지, 저를 이리저리 재보는 공간이 아니랍니다?
순간 나는 현기증이 도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참으로 까다로운 여신이로다. 아니, 설마 신과의 대화는 전부 이런 건가?
그런 나를 딱하게 여겼는지, 잠시 후 가네샤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그래도 그분의 낯이 있으니 그대의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해주겠어요. 이 염원의 비석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인간들이 다녀갔어요. 그런 만큼 제가 들은 염원 또한 다양했지요. 누구를 죽여달라, 누구를 살려달라. 혹은 최강으로 만들어달라,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 아니면 누군가의 사랑을 받게 해달라 등등. 참고로 이런 종류의 염원은 사랑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이루어진 바가 없어요.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요?
나는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기로 했다. 마치 내가 할 말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말을 하는데, 숨이 턱턱 막혀올 지경이었다. 이런 가네샤를 상대로 입을 잘 놀려보라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계속 있어봤자 결국 크게 나아질 것은 없을 터.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부터 시작해서 주변 사람들까지. 빌고 싶은 염원은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말해봤자 100% 실패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성공 가능성을 높이며 가장 도움이 되는 염원을 빌어야 한다.
바로 마음을 정할 수 있어,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헬레나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무릇 사람의 감정이란 야릇하기 그지없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할 수 있는….’
“그만두겠습니다. 그냥 조용히 염원이나 말하지요.”
– 현명한 선택이에요. 그럼 염원을 말씀해주세요.
“그전에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마음 좀 가다듬겠습니다.”
– 흐응.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콧소리가 들려와, 나는 침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인드 트레이닝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용자 정보, 신상용, 유현아, 형, 한소영….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나는 그것을 모두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그리고 1회 차에서 가장 비참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며, 악마와 마족에 대한 생각을 가득히 채워가기 시작했다.
다연이가 놈들에게 죽었을 때.
형이 놈들에게 죽었을 때.
한소영이 놈들에게 죽었을 때.
여러 기억을 떠올리자, 순간 내면에서 무언가 들끓어 오르는 걸 느꼈다. 진득진득하면서도 맹렬한 불꽃과도 같은 그것은, 명명백백한 살기요 증오였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악마를, 마족을 죽이고 싶다. 였다.
– 호! 대단하네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인간은 정말 오랜만인데. 특히나 이렇게나 진한 살기와 증오는….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닌,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감정이에요. 정말 놀라운데요?
가네샤의 목소리는 일견 칭찬으로 들렸으나, 어조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내가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 제한의 적용은 오롯이 염원을 말할 때만 적용되죠. 과연 그대의 이 증오와 살기가, 욕심을 앞설 수 있을까…. 저도 궁금하네요. 자, 이제 그대의 염원을 말씀해보세요.
가네샤의 말이 맞다. 이 증오와 살기는 오직 악마와 마족을 대상으로 한 것.
물론 앞선 소원들과도 아주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순수한 증오와 살기로 일으킨 이 감정에 다른 불순물이 첨가되는 순간, 제한이 어떻게 적용될지는 나도 자신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렇다면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다른 불순물이 섞일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고, 최대한 이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
속에서 뭉클뭉클 올라오는 기운을 토해낸 후,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생각이 길어질수록 마인드 트레이닝으로 만들어진 감정이 사그라질 수 있다.
하여, 나는 지체 않고 염원을 말했다.
“악마와 마족을, 지워버리고 싶다.”
*
팟!
작은 빛 무리와 함께 정신을 차려보자, 어느새 내가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가 차분히 안쪽을 응시했다.
화악!
비석은 아주 잠시 노란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초록빛으로 되돌아와 처음처럼 잔잔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이윽고 클랜원들이 있는 장소로 되돌아가자 묘한 웃음을 띤 헬레나가 입을 열었다.
“축하합니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지만, 실패는 하지 않으셨군요.”
“…어떻게 알았지?”
“비석이 노란빛을 내뿜었으니까요. 비석은 염원이 발동되면 파란빛을, 발동되지 않으면 빨간빛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는 노란빛을 발하지요. 적어도 빨간빛보다는 낫습니다.”
“그런가.”
헬레나의 말대로 내 염원의 발동은 이도 저도 아닌 경우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만족하는 편이었다.
비록 염원이 발동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원하는 정보는 얻었다. 한 마디로 염원의 성사 여부가 내 손에 달렸다는 소리였다. 즉 절반의 성공이라고나 할까.
나는 대충 머리를 주억이며 기지개를 폈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여러 클랜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어떻게 됐어요? 어떤 염원을 빌었어요? 네?”
안솔뿐만 아니라 클랜원들 또한 궁금해하는 듯했으나, 나로서는 절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또한 누구에게도 염원을 묻지 않겠다고 못박아 논 것도 있어, 나는 가볍게 안솔을 떼어내며 말했다.
“비밀이야. 서로 묻지 않기로 했잖아?”
“우웅…. 그래도….”
“그래도 는 무슨 그래도. 굳이 조언을 주자면, 네가 빌려는 염원에 최대한 진심을 담는 게 좋을 것 같다.”
“진심이요?”
그렇다고 대답한 후, 나는 두어 번 박수 치며 입을 열었다.
“자자. 이제 한 명씩 들어갑시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음에는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자 다행히, 누군가 차분히 화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차소림이었다.
차소림은 아르쿠스 창을 다소곳이 내려놓고는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중앙 비석으로 향했다.
이내 비석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는 차소림을, 나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응시했다. 과연 어떤 염원을 빌까?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게 차소림이 들어간지, 약 3분의 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
이윽고 차소림의 몸이 마법 진 밖으로 스르르 나올 무렵, 나는 두 눈을 크게 치켜 뜨고 말았다. 염원의 비석이 파란빛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염원의 발동에 성공한 것이다.
“와아!”
“오오오오!”
차소림이 돌아오자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환호를 터뜨렸다. 그러나 차소림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기뻐하는 빛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부끄러운 낯빛이 가득한 게,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무슨 염원을 빌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이미 묻지 않기로 한 일. 나는 깨끗이 생각을 접고 다른 클랜원의 참여를 독려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차소림의 성공이 신호탄이 됐는지, 클랜원들이 앞다투어 신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은이부터 시작해서 선유운까지 일곱 명이 거의 동시에 하겠다고 나설 정도라, 나는 한 명씩 차례대로 순번을 정해주었다. 그리고 클랜원들은 정해진 순번에 따라 하나 둘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행운은 나와 차소림까지만이었을까.
이후의 성적은 전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
개인당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봤자 5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나마 5분을 채운 것도 우정민과 신재룡뿐이었다.
그런데 무려 20분도 안 되는 사이, 비석은 총 여섯 번의 빨간빛을 비췄다.
다은, 우정민, 한나, 신재룡, 유정, 한결.
앞서 신청했던 일곱 명 중에서 여섯 명이 연달아 실패한 것이다.
“후….”
“휴….”
실패한 클랜원들의 시무룩한 한숨을 들으며 나는 비석 안에 있는 선유운을 응시했다. 이제 막 2분을 넘긴 선유운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더니, 문득 활과 화살을 꺼내 시위를 걸기 시작했다. 저건 또 무슨 염원일까. 돌연히 호기심이 일어 나는 일말의 기대와 함께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기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유운이 활을 한 번 튕기는가 싶더니 곧 미끄러지듯이 밖으로 밀려나왔고, 비석은 여지없이 빨간빛을 비췄다.
이내 터벅터벅 걸어오는 선유운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진한 한숨을 흘렸다. 위로의 뜻을 담은 눈길을 건네자, 선유운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활을 어깨에 걸었다.
“후유. 저 가네샤라는 여신, 참으로 까다롭더군요.”
“하하. 그래서 활을 쏜 겁니까? 신한테?”
물론 농담이었다. 선유운은 힘 빠진 얼굴을 하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아닙니다. 그냥 활을 쏘는 자세를 보여드릴 테니 문제점을 지적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
“아무래도 일반적인 염원은 안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문제점을 지적해주면, 그것을 빌미 삼아서 어떻게든 사용자 정보의 상승을 노려보려고 했거든요. 그리고 활을 튕겼는데….”
“튕겼는데?”
되묻자, 선유운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잘 보았으니, 이만 나가라고 하더군요.”
“푸!”
마침 가까이 있어 들을 수 있었는지, 다은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 유운씨! 아하하하! 도대체 무슨 염원이 그래요? 완전 꼼수 대박이다~.”
“…그러는 검후께서는, 도대체 어떤 염원을 비셨길래 그리 웃으시는 겁니까.”
“어머. 이건 숙녀의 비밀인데요? 나는 절대로 말 안 할 거예요. 그렇죠 클랜 로드?”
“끄응…. 아무튼, 어차피 실패한 건 매한가지 아닙니까.”
다은과 선유운의 가벼운 말다툼을 들으며 나는 다른 클랜원을 응시했다. 이제 남은 인원은 네 명. 안솔, 비비앙, 허준영, 김한별이었다.
그중에서 나는 안솔과 비비앙을 특히 주목하는 중이었다.
안솔과 비비앙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클랜원들이 돌아올 때마다 한 명씩 붙잡으며 이것저것을 캐묻는 열의가 참으로 볼만했다. 뭐 어찌됐든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소에도 저렇게 열심히 하면 좋으련만.
기어코 선유운을 붙잡아 여러 질문을 던진 둘은 침을 꼴깍 삼키며 나에게 다가왔다. 얼굴에 긴장한 빛이 역력한걸 보니 이제 충분히 정보를 모은 모양이다.
“김수현. 이제 내가 들어갈게.”
“오라버니. 저도 한 번 들어가볼게요.”
안솔과 비비앙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서로 눈이 번쩍 마주쳤을 즈음.
“내가 먼저다!”
선수를 취한 건 비비앙이었다. 서로 정보를 모으는 동안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꼈는지, 순번을 정할 틈도 없이 후다닥 몸을 돌린 것이다.
“어, 언니!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깜짝 놀란 안솔이 애처로이 소리를 질렀으나, 비비앙은 이미 절반을 넘게 달려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안솔이라고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한순간 숨을 씩씩 몰아쉰 안솔은 비비앙의 뒤를 재빠르게 쫓아 달렸다. 그러더니 달리는 와중 지팡이를 꺼내 들어, 점점 멀어져 가는 비비앙의 등을 겨누었다.
“안젤루스여! 신성한 권능으로, 저 간악한 자의 발걸음을 묶어주소서!”
안젤루스용 홀드 주문.
지팡이에서 쏘아진 하얀 빛은, 단 한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고 비비앙의 등을 직격했다. 아주 깔끔한 클린 히트였다.
불시에 홀드 주문을 맞은 비비앙은 우뚝 몸을 멈추었다. 아니 멈추는 것도 모자라, 관성의 힘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마치 굴렁쇠를 보는 기분이었다.
“후부러버우부버버!”
괴상망측한 비명을 지르는 비비앙과, 그 옆을 쌩 지나치는 안솔.
아니, 도대체 왜 저렇게들 용을 쓰는 거지? 먼저 들어간다고 성공률이 높아지는 게 아닌데?
“야! 안솔! 너 이러기야! 야, 야!”
결국 간신히 몸을 추스른 비비앙이 빽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안솔은 중앙 공간으로 쏙 들어간 뒤였다. 비비앙은 이를 북북 갈며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으나, 나는 참을 인을 되뇌며 비석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안솔은 경건히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은 결과를 볼 생각이었다.
“흠….”
처음 30초 정도는 꽤 잘 흘러가는 듯싶었다. 안솔의 얼굴에서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어서 추가로 30초의 시간이 흐르자, 안솔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빠르다. 아무래도 이제 염원을 말하려는 것 같아 절로 침이 넘어가려는 찰나. 안솔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머리를 한 번 끄덕였다.
그때였다.
펑!
미약한 폭음이 홀을 울리고.
“으에에엑?!”
그와 동시에, 양팔을 방방 휘두르는 안솔이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곧바로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쿠당탕탕!
정확히 비비앙의 옆에서 멈춘 안솔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했다. 나 또한 시선을 따라 중앙을 바라보자, 쉴 새 없이 깜빡깜빡 빨간빛을 비추고 있는 비석을 볼 수 있었다.
혹시 일이 잘못된 건가 싶어, 나는 바로 외쳤다.
“헬레나! 이건 무슨 현상이지?”
“그,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실패한 것 같기는 한데, 이런 반응은 저도 처음이라….”
헬레나도 잘 모르는지 더듬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정작 범인이라 추정되는 안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정말 진심을 말했는데?”
“흥! 꼴 좋~다! 그러니까 마음을 곱게 써야지, 마음을.”
“뭐, 뭐라고요? 그럼 언니는 뭐, 잘될 줄 알아요?”
“에베베베? 안 들려~. 안 들려~.”
안솔에게 당했던 게 어지간히 분했던 걸까. 비비앙은 양쪽 귀를 꼭 막더니 깐족거림의 진수를 보여주며 안솔을 약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살랑살랑 안쪽으로 들어가버리자, 안솔은 입술을 꾹 깨물며 바닥을 세게 쳤다.
이윽고 비비앙은 가벼운 표정을 지우고, 근엄한 얼굴로 비석을 쳐다보았다. 이내 비장하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문득 누군가 내 등을 토닥이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일단 일이 끝나면 두고 보자 마음먹으며,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무렵.
펑!
“꺄아아악!”
다시 한 번 폭음과 비명이 들려, 나는 다급히 시선을 들었다. 뭐지? 아직 30초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곧 안솔의 옆으로 처박히는 비비앙을 확인한 후, 나는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염원의 비석을 찾은 순간, 볼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빨간빛을 깜빡깜빡 비추는 염원의 비석을.
마치 그 모습이 화를 내는 것 같아 보여,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희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이년드으으으으을!
부르르 떨리는 음성이 주변을 웅웅 울리며 퍼져나갔다. 말투나 어조가 다르기는 했지만, 이건 분명히 가네샤의 음성이었다.
안솔과 비비앙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뜨끔한 얼굴로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가네샤의 분노한 음성이 다시금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 보자 보자 하니까 자꾸 뭣 같은 것만 말하고 있고오오! 내가 그리도 우습게 보이더냐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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