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63
00462 이미 시작된 또 다른 전쟁. =========================================================================
가네샤의 분노 어린 음성이 홀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안 그래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층 더 헝클어진 기분이다. 나는 지끈지끈한 이마를 꾹 눌렀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안솔, 비비앙. 지금 당장 무슨 염원을 빌었는지 말하도록.”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둘 다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하고 있다. 저 모습들을 보자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가네샤가 분노한 원인이 저 둘에게 있다는 걸.
계속 기다려도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다그치는 투로 입을 열었다.
“말 안 해?”
안솔과 비비앙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다 쭈뼛쭈뼛 나를 쳐다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 김수현 너무해. 왜 우리한테만 그래? 우리가 아닐 수도 있잖아….”
“그, 그래요오. 그리고 설령 우리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염원은 비밀로 하기로 하셨잖아요오….”
아까 투닥투닥 싸우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안솔과 비비앙은 서로 쿵 짝을 맞추며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나는 이마를 매만지던 손을 오므려 머리칼을 꽉 움켰다. 하여간 저럴 때만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
“나는 별로 상관없는데?”
그때 유정이 붉은 머리를 사르르 흔들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목울대만 꼴깍꼴깍 움직이는 바보 콤비를 쳐다보더니, 문득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을 양손으로 살며시 모아 올렸다. 오. 포니테일도 잘 어울리네.
“그리고 아무리 비밀로 하기로 했다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말을 해야지. 설마, 오빠 말을 안들을 셈이야?”
어느새 섬백을 꺼내든 유정은 중지에 끼어 빙글빙글 돌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밝히기 싫었는지, 안솔과 비비앙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시, 싫어! 이건 엄연한 프라이버시라고! 그러는 너희도 안 밝혔잖아!”
“마, 맞아요! 자꾸 이렇게 몰아붙이면 거짓말을 하겠어요!”
유정은 두 눈을 슬쩍 추켜올렸다.
“그래? 그럼 말하면 되지 뭐. 나는 상용이 오빠 살려달라고 했어. 이제 됐어?”
그리고 코웃음을 침과 함께 시원스럽게 밝히자, 안솔과 비비앙은 멀거니 유정을 응시했다. 마치 이런 게 어디 있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두 바보가 거듭 입을 열기도 전에, 한결과 신재룡이 동시에 목소리를 내었다.
“어, 유정이 누나. 저도요. 저도 상용이 형을 살려달라고 빌었는데….”
“허. 유정양. 저와 같은 염원을 비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세 명은 똑같은 염원을 말했다는 건가? 그리고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잠시 후, 클랜원들은 한 명 한 명 자신이 빌었던 염원을 말하기 시작했다.
선유운은 이미 알고 있었고, 우정민은 원혜수의 정신을 되돌려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한나는 하나 남은 고대 무녀의 힘이 잠들어있는 장소를 물었다고 하고.
이윽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전긍긍해 보이는 차소림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였다.
“시, 실은!”
이대로 가면 꼼짝없이 말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두 바보 중 한 바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나도 비슷한 염원을 빌었어…. 그…. 신상용을 살려달라고….”
“저, 저도요. 실은 저도 그랬어요.”
비비앙이 말에 안솔이 재빠르게 추임새를 넣는다. 말끝을 흐린 걸로 보아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주 경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비앙이야 신상용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클랜원이고, 안솔도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지냈으니까.
“그러면 다섯 명이 똑같은 소원을 말했다는 건데…. 계속 같은 소원을 빌어서 짜증을 부리는 건가?”
“마, 맞아. 가네샤가 자꾸 뭣 같은 소원이라고 했잖아? 자꾸, 자꾸. 응? 그러니까, 결국에는 속 좁은 여신이라는 소리지. 가네샤가 잘못했네.”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비비앙이 말하니까 묘하게 말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머리를 갸웃하며 중앙의 비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잠시나마 잠잠했던 비석이 재차 새빨간 불빛을 비추었고, 이내 가네샤의 분노한 음성이 허공을 떠르르 울렸다.
– 뭐라? 누구를 살려달라 했다? 속 좁은 여신? 닥치거라 이년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
응?
– 정말 뻔뻔스럽기 그지없구나! 네 년들은 분명! 이, 이, 이, 입에 담기도 망측한, 파렴치한 짓을…!
“꺄아아악! 오라 피에르! 오라 퀘리타투스! 꺄아아아악!”
“오라버니! 들으시면 안 돼요오옷! 으에에엑! 으에에에엑!”
순간 비비앙은 꽥꽥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안솔 역시 빽 소리를 지르더니 삽시간에 달려와 내 귀를 틀어막았다. 분명 망측한 이라는 말까지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으로 안솔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 같은 소동이 지나간 이후, 우리는 겨우겨우 염원을 비는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속 좁은 여신이라는 말이 걸렸을지도 모르겠으나, 가네샤는 분노했다고 해서 포탈을 닫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아직 염원을 빌지 않은 클랜원은 두 명으로 한별과 허준영이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둘 중에서, 먼저 들어가겠다고 한 클랜원은 바로 허준영이었다. 가네샤가 극심이 분노한 상태라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허준영은 애당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중앙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동안 무릎 꿇은 허준영을 보고 있다가, 나는 시선을 돌려 한별을 바라보았다. 어떤 염원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이 멍해 보인다.
그러다 문득 내 시선을 느꼈는지, 한별은 천천히 몸을 돌아 나와 마주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별아. 부탁한다.”
“…네?”
한별이는 눈을 살짝 떴다. 나는 구석에 쭈그러진 채 사이 좋게 고개를 파묻고 있는 두 바보를 가리켰다.
“너는 저러지 말아다오.”
“아…. 네.”
한별은 어설프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하기야 한별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해, 나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번쩍!
허준영의 몸이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나오고, 동시에 비석이 환한 빛을 비추어 주변을 조명했다. 중앙 공간을 물들인 빛깔은 바로 노란색이었다. 성공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실패도 하지 않은 것이다.
“오빠. 이제 제가 가볼게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응? 어어. 알겠다. 성공하길 바랄게.”
한별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허준영은 차분히 몸을 돌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런 허준영의 양손에는, 가슴을 전부 가릴만한 크기의 불그스름한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상자라 당연히 의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후. 생각보다 무겁군.”
“헤에…. 꽁꽁아. 이건 뭐야?”
이내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상자를 세게 내려놓자, 살금살금 다가온 비비앙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꽁꽁이라. 얼음을 표현한 단어인가? 그렇다면 확실히 어울리는데.
하지만 허준영의 반응은 냉담했다.
“관심 꺼라. 파렴치녀.”
“뭐, 뭐라고! 내가 왜! 아니라니까!”
“음. 그럼 줄여서 치녀.”
“아니라니까! 그리고 왜 봐준다는 듯이 말하는데!”
또다시 소란이 일어날 징조가 보여, 나는 아예 관심을 끄기로 작정했다. 조용히 시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왜, 조금이라도 조용히 있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나?
어느새 중앙 공간으로 들어간 한별은 천천히 무릎을 꿇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허공으로 사용자 정보 창을 띄웠다.
돌아가기 앞서, 우선 용의 권능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
*
– 염원을 말하라.
잔잔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딱딱히 굳어있는 음성이 공간을 웅웅 울렸다.
한별은 무릎을 꿇은 채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하지만 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예의 초록빛이 흐르는 비석만이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 어서 말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염원을 빌기 싫은 것이더냐?
“아니요. 지금 말씀 드릴게요. 그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한별은 평소에도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아직 가네샤의 분노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듯 보이니, 시간을 끌수록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한별은,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지체 않고 입을 열었다.
“가네샤 님. 염원이란 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도 말씀드릴 수 있는 거겠죠?”
– 그거야 당연한 말. 그럼 너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염원을 말하겠다는 것이더냐?
“네. 혹시 수현이 오빠…. 아니. 저희들 중에서, 이 비석에 처음 들어왔던 사내를 기억하세요?”
– …뭐라? 설마 또?
한별은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생각보다 가네샤의 반응이 이상해, 혹시 자신이 말을 잘못 꺼낸 건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별의 말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가네샤의 반응이 곱지 않던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실 처음만 해도, 가네샤는 굉장히 즐거운 기분을 느꼈다. 까마득할 정도의 신을 뵌 것도 그렇고, 첫 번째로 들어온 사내가 보여주는 재주도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번째로 들어온 여인의 수줍으면서도 사심 없는 고백은, 가네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게 하였다.
그 후로 들어온 인간들의 염원은 딱히 재미있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적당한 염원들이었다. 지금껏 이곳에 들어온 인간들의 염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최소한 도리에는 벗어나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보냈을 무렵, 한 여인이 가네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지금은 멸망한 안젤루스 교단의 사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네샤는 약간 사그라졌던 기대감이 다시 부푸는걸 느꼈다.
안젤루스 교단이 사제를 선발하는 방식은 매우 엄격하다. 천성이 선하고 욕심 없는 자들을 선발하고, 이후로도 극한에 가까운 기도와 수련을 통해 내면을 다스린다.
그렇게 혹독한 수련을 거치고 세상에 나선 사제들은, 거의 대부분이 성자나 성녀로 추앙을 받을 만큼 명성을 떨쳤다.
물론 사제치고는 아직 어린 듯 보였으나, 안솔이 ‘신님, 신님. 혹시 여기서 말한 염원이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지었던 가네샤였다.
‘여기 맨 처음 들어왔던 오라버니를 기억하실 거예요.’
‘호호. 그렇고말고. 당연히 기억하고 있단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이어진 안솔의 염원은 가네샤의 기대는 물론이요, 신의 정신까지 풍비박산을 내버렸다.
‘그럼요.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저에게 말이에요. 오라버니와 언제 어디서라도, 한 침대에서 알몸으로 부둥켜안은 채 잘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능력을 평생 사용하고 싶어요.’
‘뭐, 뭐라고?’
‘네? 다시 말씀 드릴까요?’
‘아니, 아니. 지금 네 말인즉슨…. 설마 남녀의 육체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더냐?’
‘네 맞아요! 섹스요 섹스!’
‘뭐, 뭐라? 이녀어어어언! 그 안젤루스의 사제라는 여인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오오오!’
가네샤는 극심한 분노를 터뜨리며 일말의 고민 없이 안솔을 날려버렸다.
이어서 가네샤가 차마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다른 여인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내 이름은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에스피니온 최고의 미녀 연금술사로써, 언어와 지혜의 신 가네샤에게 일생일대의 염원을 말하겠어.’
최고의 미녀는 차치하고서라도. 반말이 걸리기는 했으나, 가네샤는 애써 웃으며 비비앙을 맞이해주었다. 얼굴 표정이나 주변에 흐르는 기운이 사뭇 비장한 게, 뭔가 굉장히 중요한 염원을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비앙 또한 맨 처음 들어온 사내를 기억하느냐는 말을 꺼내자, 가네샤는 간신히 가라앉힌 불안감이 살아나는 걸 느꼈다. 바로 전의 안젤루스 사제와 똑같은 레퍼토리였기 때문이다.
‘그 사내는 나와 매우 중요한 약속을 했어. 하지만 아직 지키고 있지 않은 상태야.’
‘호. 약속이라. 다행이군.’
‘응?’
‘아니, 아니다. 그럼 그 약속이란 걸, 사내가 이행하기를 바라는 건가?’
‘그러면 좋겠지만, 아니. 약속은 내 스스로 받아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오호라. 그래?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지? 어서 말해보거라.’
여기까지만 했어도 가네샤는 비비앙을 기특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비비앙의 염원은 가네샤의 정신을 확인 사살함은 물론, 여태껏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내 엉덩이를 탐스럽게 만들어줘.’
‘…뭐?’
‘엉덩이 말이야, 엉덩이. 아까 말한 사내 있지? 그 사내가 내 엉덩이를 볼 때마다, 한 번쯤은 치지 않고 못 배길 정도로 탐스럽게 만들어 달라는 말이야. 찰싹찰싹! 이거 몰라?’
‘이, 이년들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아아아!’
가네샤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비비앙은 시범을 보이려 엉덩이를 삐쭉 내민 채 손으로 착착 두드렸다.
그리고 가네샤는, 비로소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비비앙마저 날려버리고 말았다.
– 후.
조금 전을 떠올리자 다시금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가네샤는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바로 전의 사내와 생각보다 재미있는 거래를 해 약간 마음이 풀어진 것도 있었고, 눈앞의 여인은 아직 아무런 죄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아직이기는 했지만.
– 좋다. 염원을 말하거라. 하지만 그 염원이 가당찮은 것이라 생각될 경우,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네?”
한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마지막 순번인 만큼 염원은 이미 생각해두었으나, 가네샤의 반응이 생각보다 까칠했던 탓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당찮은 염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한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아까 말씀 드렸던 사내…. 그러니까, 그분이 그냥 잘됐으면 좋겠어요.”
– 흐응. 그냥 잘됐으면 좋겠다 라. 그 말은, 네가 말한 사내의 행운을 말하는 것이더냐.
가네샤의 해석에, 한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
–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럼 네가 말한 염원은 매우 광범위하다. 조금 더 구체화해서 말하도록.
“구체화…. 알겠어요. 이따금 그분이 많이 힘들어하실 때가 있어요. 아무래도 체력적인 문제 같은데,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으니 저도 문제를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분의 체력을 올려주실 수 없을까요?”
– 그래? 그게 네 염원이라면, 불가하다. 그럼….
“왜요?”
– ?
막 한별을 내보내려던 가네샤는 순간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기분으로 무릎 꿇은 한별을 내려다보았다.
– 왜요 라. 염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제한은 이미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복을 못하겠다는 건가?
“승복을 못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한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납득할 수 없어요.”
어떻게 보면 한낱 인간치고는 매우 맹랑한 말이었다.
하지만 가네샤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잔잔히 가라앉고 있었다. 한별의 소원이 가당찮은 게 아니었고, 무엇보다 눈빛이 도전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언어와 지혜의 신인 자신을 상대로 담론이라도 해보자는 태도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한 가네샤는 산산이 사그라졌던 흥미가 부쩍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 호호! 좋아. 그럼 납득을 시켜주지. 먼저 네게 묻겠다. 네가 그 사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무엇이냐? 아. 노파심에 말하건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생각을 말았으면 좋겠구나.
가네샤의 물음에 한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10초 후, 조용히 눈을 뜨며 말했다.
“…그냥요.”
– 그냥이라. 아니지, 아니야. 네가 말을 못하는 것 같으니 내가 맞춰보마. 너는 그 사내의 이야기를 할 때 태도나 감정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단다. 또한 쌀쌀맞아 보이는 눈동자가 일순 애틋하게 변하기도 하더구나. 아마 사내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을 테지. 즉 좋아하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소리야. 그건 확실히 어여쁜 감정이 분명하나, 그렇기에 네 염원이 욕심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왜냐하면, 지금 네가 품은 감정은 일방행적일 테니까 말이다.
“…….”
– 호호. 말이 없구나. 이제 납득이 되었느냐?
“아니요.”
그때였다.
곧바로 부정한 한별은 담담한 눈으로 비석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떼어 고요한 목소리로 반론을 시작했다.
“그래요. 은혜를 입은 것도 맞고, 그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도 부인하지 않겠어요.”
– 그걸 인정하면 그 후의 말도 자연스레 인정하는….
“아니요. 거기까지만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는 말씀은….”
– 아니라고?
한별과 가네샤는 서로 한 번씩 말을 끊어내었다. 말을 하는 한별의 눈동자는 차가웠고, 비석의 초록빛 물결은 고고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한치도 밀리지 않으며 말을 주고받던 찰나, 이어진 한별의 말에 가네샤는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아니요. 모르겠어요.”
– …모른다?
약간은 멍하게 들리는 음성에, 한별은 침착히 머리를 끄덕였다.
“네. 몰라요.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를 사랑하기는커녕, 단 한 명도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말씀하신 두 감정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어요.”
– …계속해보거라.
“그리고 말씀하신 일방행적인 감정. 이건 맞아요. 제가 그분을 특별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분은 저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아니. 않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염원을 빌어서 그분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은 건 아니에요. 지금 제 말을 거짓말이라고 느끼고 계신가요?”
– …….
한별의 물음에 가네샤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것은 한별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방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별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느낀 순간, 가네샤는 자신의 논지가 하나하나 논파되는 것을 느꼈다.
“그분과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이 염원을 빌어서 그분이 저를 돌아봐주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그분이 힘들어할 때면 저도 심란하고, 혹시라도 쓰러질 때면 가슴이 아프고, 간혹 제 이름을 불러주고 웃어주실 때는 마음이 편안해요. 하지만 제가 그분이 잘되기를 바란 건, 그냥. 말 그대로 그냥. 그냥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 …그냥이라.
“네. 그냥이요. 사실 저도 제 감정을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비겁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가네샤 님께서 말씀해주세요.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이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는 감정이라면, 이대로 납득하고 물러나겠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 염원을 들어주세요.”
–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확실히 너는 지금 네 감정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신기하구나. 타인의 행복을 바라면서, 자신과 연관 짓지 않는다니. 이건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도 보이기 힘든 감정이거늘. 아니. 오히려 완전한 타인이기에 가능한 일이던가.
가네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 한별의 말은 헬레나의 말을 정확히 실천하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야릇하고도 복잡하며 또한 미묘하다. 그리고 가네샤의 판단은 주관적이다.
한별은 이 판단 자체를 가네샤에게 넘겨 또 다른 해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 번에 두 개의 염원을 말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가네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어떤 것도 명확히 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인간의 감정이란 하나의 정답으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른다. 특히나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있는 감정이라면, 끝에 이르러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에 신조차도 함부로 잣대를 내릴 수가 없었다.
– 확실히 네가 말하는 염원은, 나조차도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구나. 이건 확실히 욕심으로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려워. 아니, 있다고 해도 최우선은 아니야.
“네.”
한별이 수긍하자 가네샤는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 호호호. 아이야. 사실 나는 아직도 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단다. 이렇게 말해줄 수는 있지.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이, 앞서 말한 좋아하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걸 말이야.
“그건 그래요.”
– 허나, 그렇다고 네 말도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너는 그 사내를 위해 염원을 빌었으면서, 정말로 그 어떤 것도 바라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내게 네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을 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지. 결국 현재와 미래의 차이랄까…. 정말로, 참으로 애매하구나.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거냐는 말투에, 가네샤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바로 전의 사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곧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애매한 경우에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 아이야. 그럼 어디 나와 한 번, 거래를 해보지 않겠느냐?
“거래요…?”
한별이 의아히 되물었다. 그러자 잠시 후, 한별이 서 있던 공간을 중심으로 약간이지만 장난기 어린 음성이 아련히 울려 퍼졌다.
– 그래. 거래. 아니 선물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 네가 말한 염원은 적당한 선에서 들어주도록 하지. 그리고 네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네가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하마. 호호호. 어떻느냐?
“…네?”
한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같은 시각.
“아 정말 궁금하다고!”
“꺼져라. 치녀.”
“좀 알려주면 어때서!”
“싫다.”
허준영이 가져온 상자를 둘러싼 소란 속에서, 김수현은 차분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무척 만족한 신음을 흘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으음.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게…. 폴리모프와 용족화라. 제한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이거 정말 괜찮은데.”
이윽고 사용자 정보 창을 닫은 김수현은, 허준영이 가져온 불그스름한 상자를 응시했다.
김수현도 정확한 정체는 모르나, 상자를 감도는 기운이 종잡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불길한 상자처럼 보였고, 또 어떻게 보면 행운의 상자처럼 보였다.
김수현이 말했다.
“허준영. 그게 뭔데 그래. 웬만하면 말해주지 그래.”
“아아. 별거 아니야. 판도라의 상자라고 하더라고.”
“판도라의 상자?”
“그래. 원래는 카오스 미믹을 달라고 했었어. 너희들 말을 듣고 평소에 호기심이 있었거든. 그런데 가네샤가 애매하다고 하더니, 거래를 하자고 하더군. 그래서 받아온 게 이거야.”
꽤 상세히 설명하는 허준영을 보며 비비앙은 어이가 가출한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렇게 알려달라고 할 때는 안 알려주더니, 김수현이 물어보자 단박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흠. 판도라의 상자라.”
약간 호기심이 생긴 김수현은 제 3의 눈을 활성화해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번쩍!
비석에서 뿜어져 나온 노란빛이 홀을 물들였다.
김수현은 막 상자를 확인하려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중앙 공간을 응시했다.
중앙에는 이내 서서히 사그라지는 노란빛과, 스르르 미끄러지듯 나오는 한별이 있었다. 그런 한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당황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이윽고 김수현과 한별이 서로 시선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을 위해, 사용자 김한별이 염원을 빌었습니다!』
『이브의 혈통에 대한 사용 조건이 갱신됩니다!』
김수현이 보는 허공으로 두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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