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65
00464 이미 시작된 또 다른 전쟁. =========================================================================
삐걱, 삐걱!
“아앙….”
침대가 큰 물결을 이루며 출렁이자 한 여인의 달뜬 신음 또한 같이 흔들렸다.
거의 내동댕이친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나 여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불쾌함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스스로 가슴 가리개를 벗어 살빛이 흐르는 젖가슴을 드러내고, 느릿하게 문지르며 누군가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여인의 눈빛은 한없이 끈적끈적해져, 흡사 사내의 그것을 갈구하는 창녀의 눈빛과도 같았다.
“헉…. 헉….”
이내 거친 숨을 내뱉는 사내가 내부를 가리는 커튼을 찢듯이 헤집으며 침대에 올라섰다. 여인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빛도 만만치는 않다. 발갛게 충혈된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어, 마치 발정기의 짐승과도 같은 눈동자였다.
잠시 후, 여인의 붉은 혀가 입술을 살짝 적시는 순간 실낱같이 이어지던 사내의 이성이 툭 끊어졌다. 사내의 몸이 허물어지듯 무너져 여인의 몸을 덮어버리고, 동시에 여인의 손이 부드러이 사내의 등을 휘감는다.
이윽고 여인의 손이 탄탄한 등을 스치듯 쓸어 내린 찰나, 희고 고운 목을 빨아들이던 사내의 입에서 한 줄기 불길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불은 삽시간에 타올라 침대를 뜨겁고 격렬하게 달구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에 녹아 내린 사내와 여인은 서로 엉겨 붙어 정신 없이 서로를 탐했다.
약을 마신 걸까, 술에 취한 걸까, 아니면 열정에 빠진 걸까.
사내가 조금도 배려 않고 저돌적으로 들이 받고 있었으나, 여인은 얼굴에는 환희 어린 기색이 서려있었다. 오히려 사내의 몸을 미친 듯이 끌어안으며 깔깔 웃음을 터뜨리자, 사내는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내어 화답했다.
여인의 웃음이 간드러진 교성으로 변한 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러 교성은 흐느끼는듯한 신음으로 변화했다.
이윽고 사내와 여인이 함께 울부짖으며 합창을 노래할 즈음. 어느 순간 사내의 몸이 우뚝 멈추더니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여인의 숨 넘어가는 소리가 새어나오며, 폭풍처럼 이어지던 정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침대를 두르는 하얀 망사 커튼 너머로, 헐떡거리는 사내와 몸을 움찔거리면서 가쁘게 숨을 몰아 쉬는 여인이 비쳤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었는데, 어느새 창틀에는 옅은 노을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사내가 멍한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자 여인은 배시시 웃으며 사내의 입가에 무언가를 꽂아주었다. 연초였다. 이내 손수 불까지 붙여주는 탓에 사내는 피식 웃으며 연초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후…. 희선아. 아무래도 이것만 피고 가봐야겠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있었어.”
사내의 무심한 말에 생글생글한 여인, 아니 희선의 얼굴에 일견 서운한 기색이 감돌았다.
“벌써 가게요?”
“벌써라니.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데…. 서로 오래 자리 비워봤자 좋을 거 없잖아.”
“나는 언니한테 오늘 못 들어온다고 말하고 나왔는데….”
“너야 조금 예쁨 받는 클랜원에 불과하고. 나는 아니거든. 당장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산더미.”
사내의 말은 언뜻 깔보는 어조가 깔려있었으나, 애초 그런 말투인지 희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번 일만 끝나면 여유 생긴다고 했으면서….”
“흐흐. 여유가 생겼으니까 이 짓거리도 하는 거 아니겠냐.”
사내는 유들유들하게 대꾸한 후 연초를 가볍게 튕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다가, 문득 말끔한 이마를 문지르며 희선을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머셔너리 놈들이 산맥으로 들어간 지 며칠이나 지났지?”
“음~. 한 달하고도 이 주? 삼 주? 그 정도 지났을 거예요. 조금 있으면 두 달이 되니까, 거의 실종이나 다름없죠? 여태껏 아무 연락도 없으니까요.”
“두 달이 다 돼간다 라…. 모니카 쪽에서 따로 행동은 없고?”
“조용해요.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요새는 거의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중이에요.”
희선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일순간 사내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이내 목 부분을 차분히 다듬는 사내를 보며 희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혁이 오빠. 우리…. 정말로 괜찮을까요?”
“응? 괜찮으냐니? 그게 무슨 소리지?”
“그렇잖아요. 머셔너리 쪽이 그렇게 만만한 클랜도 아니고. 특히 그림자 여왕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들었어요.”
“아하, 그림자 여왕이라. 확실히 무서운 사용자지. 나는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5, 6년 전만 해도 살문에서 밥 먹듯이 사람 죽이던 년인데, 그렇게 변했다는 게 정말로 놀랍거든. 뭐,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지만 말이야. 하하하.”
혁이라 불린 사내는 한껏 여유롭게 웃어 젖혔다. 그러나 희선은 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전보다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빠. 나 지금 웃자고 하는 소리 아니에요. 이러다가 그들이 혹시라도 산맥에서 돌아오면 어떡하실 거예요?”
“아 왜 그래. 머셔너리고 그림자 여왕이고, 아직 산맥에 있잖아.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확인했고. 그리고 설령 돌아와도. 놈들이 뭐, 어찌할 건데? 증거는 모두 없앴고 꼬리 자를 준비도 해놨잖아?”
“그래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불안해서 그래요, 불안해서. 이것뿐만이 아니잖아요. 지금 수 클랜 쪽에서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요. 지금 내부 투쟁만해도 버거운데….”
“누가 버겁다 그래?”
한순간 혁의 날 선 반문에 희선은 움찔 몸을 움츠렸다. 눈동자는 부르르 떨리고 이불을 꽉 쥐고 있는 게 겁에 질린듯한 태도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희선을 지그시 노려보던 혁의 시선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그러더니 침착히 다가가 희선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 내렸다.
“희선아. 이왕 벌어진 일이다. 응? 다음 주 선발 회의가 끝나면, 한달 후에는 현재 서부에 임시로 있는 대표 클랜들이 물러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지금은 걱정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더 중요하다고.”
“…….”
“그리고 너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아니 하지 마. 생각해봐. 산맥까지 왔다 갔다 하는 데만 두 달이야. 그리고 내부 회의 및 투표는 다음 주고. 그런데, 기껏해야 일이 주잖아. 설마 별일이라도 일어나겠어?”
“…그래도.”
“그래도 는 무슨 그래도. 아니면 너. 설마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거냐?”
“그건 아니에요.”
희선을 고개를 저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이제야 조금 괜찮아졌는지 혁은 조용히 웃으며 손을 떼었다. 희선을 슬쩍 혁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혁이 말했다.
“원래 이런 세상이야…. 그리고 명심해. 먼저 싸움을 걸어온 쪽은 우리가 아니라, 머셔너리 클랜이야. 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우리는 아무 말도 못 했고. 이번 사건은 서부 도시 때문이기도 하지만, 겸사겸사 똑같이 되받아 쳐주는 거라고. 알아들어?”
“네. 알겠어요…. 그나저나, 그놈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그놈? 아아. 이미 내 손아귀에 있지. 아마 지금쯤 수 클랜 쪽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다. 뭐 일단은 나한테도 도움이 되니까 모른 척을 한 거지…. 그런데 너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다. 벌써 1년이 지난 일인데, 왜 갑자기 지금 꺼내?”
“불안…. 그냥 조심하라고요. 베.”
희선은 진중히 말을 잇다가 갑자기 활짝 미소 지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혁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보이더니 휙 몸을 돌려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열려는 찰나, 별안간 희선을 돌아본 혁은 왼손을 살며시 들어올려 꾹 쥐어 보였다.
“걱정 붙들어 매라고.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머셔너리 클랜이나 수 클랜이나. 지금은 다 내 손안에 있어. 그러니까, 너는 네 클랜 일이나 잘 처리해. 그년한테 잘 좀 말해달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혁은 지체 않고 문을 열고 나섰다.
탕.
이내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직 정사의 열풍과 연초의 향기가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는 방에 희선 홀로 남게 되었다.
이윽고 희선이 얼굴에 지어져 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희선의 얼굴에 처음 말을 꺼낼 때처럼 자못 걱정하는 낯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혁의 호언장담을 들었음에도, 뭔가 굉장히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문을 응시하던 희선은, 곧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다. 중천에 올랐던 해는 이제 서서히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밝은 햇살을 머금던 잎에는 저녁 노을의 어스름함이 살금살금 스며들고 있었다.
걸음을 약간 늦추며 주변을 둘러보자 여전히 우거진 수풀과 무성한 나무들이 보였다.
하지만 들어올 때처럼 음침한 풍경은 아니었다. 자욱한 안개가 사라졌고 망인들의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한 줄기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황혼이 내려앉은 수풀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나갈 때의 용이 잠든 산맥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라 봐도 좋을 만큼 아름다웠다.
“젠장. 이 빌어먹을 천둥벌거숭이 자식.”
문득 들려온 투덜거림에 시선을 돌리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허준영이 보였다. 허준영의 등에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잠들어있는 안현이 업혀있었다. 허준영은 요새를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쭉 안현을 업고 온 상태였다. 아마 조금 전 웅얼거림은 몸이 힘들다기보다 애당초 안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데서 비롯된 투덜거림이리라.
“어이, 김수현.”
“왜.”
“유적을 나온 후에, 우리가 구출한 사용자들이 꽤 많이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안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
“그래. 그렇지. 그러면 궁금하지 않나? 지금 이놈이 깨어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못하는 건지 말이야. 가장 최근에 들어왔다는 놈이 가장 늦게 깨어나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러니까, 자는 척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허준영의 말에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럴 가능성이 없었던 탓이다. 안현이 정말로 잠든 척을 하고 있다면 나는 물론이고 허준영에게도 진작에 걸렸을 터.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게 약간 걱정스럽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안현을 제외한 다른 사용자들이 모두 깨어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제 3의 눈으로 확인했을 때 큰 이상이 없었으니,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어느덧 주변에 빽빽했던 수풀이 조금이나마 사그라지고 드문드문 너른 공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곧 있으면 완전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 것이다. 마침 장소도 좋겠다, 이제 슬슬 야영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살며시 몸을 돌아보았다.
나를 따라오는 클랜원들과 그리고 클랜원들을 따라오는 깨어난 사용자들. 물론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용자는 일부 클랜원들에게 업혀있는 상태였다.
비비앙과 헬레나는 무얼 그리 열심히 얘기하는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고, 다은과 한나는 서로 속닥이며 킥킥 웃는 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주저 않고 불호령을 내렸겠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적을 나온 이후 며칠이 흘렀음에도 망인이 단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아 이미 청소됐다 잠정 결론을 내렸으며, 서로 떠드는 와중에도 간간이 주변을 훑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문득 나를 돌아본 다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백옥 같은 검지를 고운 입술에 대어 살살 문지르기 시작한다. 이내 입안으로 검지를 쏙 집어넣은 다은은 목울대를 꼴깍 움직이며 매혹적인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다은의 저 행동은 일종의 신호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지금 무척이나 고픈(?) 상태니 오늘 밤 같이 놀자는 소리랄까.
연신 간절한 눈초리를 보내는 다은을 나는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주변 장소를 한 번 더 둘러보고 나서, 바로 걸음을 멈춘 후 높여 외쳤다.
“모두 정지! 행군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야영은 이 장소에서 할 생각이오니 다들 바로 준비해주세요.”
클랜원들 또한 슬슬 야영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지시를 내리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한 명씩 업고 있던 클랜원들은 조금은 지친듯한 얼굴로 사용자들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풀썩!
“이 빌어먹을 천둥벌거숭이.”
허준영은 안현을 거칠게 내려놓고는 분이 오른 얼굴로 발길질을 했다. 세게 찬 거는 아니고, 툭 건드린 정도였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곤 움찔했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차는 건 좋은데, 안 걸리게 차라.”
“…새겨듣도록 하지.”
그렇게, 허준영이 떨떠름해하는 얼굴이 꽤 재미있어 조용히 웃고 있을 즈음이었다.
“클랜 로드!”
문득 등 뒤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신재룡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클랜 로드. 지금 야영석을 깔고 식사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하는 김에 겸사겸사 공지를 하려고 하는데, 오늘 불침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제와 똑같이 하실 겁니까?”
나는 머리를 끄덕이려다가, 돌연 한별이 생각이 떠올라 바로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 지역은 이제 괴물이 출현하지 않는 것 같으니 조금은 풀어도 괜찮을 것 같네요. 4인 1조에서 2인 1조로 바꾸도록 하지요. 조원이나 순번은 식사 후에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신재룡은 한 걸음 더 다가와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의뢰인들에게는 제가 따로 말을 해놨습니다.”
“음? 말이라뇨?”
“안현군과 한결이와 같이 갔던 의뢰인들 말입니다…. 이제 슬슬 사정 파악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정 파악이라….”
사정 파악.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상념에 잠겼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사정은 파악한 상태였다. 물론 의뢰인들이 깨어나기는 했으나, 김수정이나 한결이보다 더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결에게 전후 사정을 들은 결과,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다.
하기야 언제까지 공략을 완료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게 보면 결국 유적 하나 얻은 사실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이제는 슬슬 시선을 돌릴 때도 됐다.
물론 결과적으로 용이 잠든 산맥은 완전히 공략하기는 했다. 보상도 엄청나고, 사용자들도 구출했으며, 고질적으로 시달리던 체력 문제의 해결에 엄청난 진전을 가져왔다.
즉 모든 게 좋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실 도대체 어느 개 자식이, 무슨 이유로 우리 클랜에 이딴 짓거리를 벌이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시로 돌아가 하나하나 꼬리를 잡고, 끝에 걸리는 그 순간….
음지 전쟁.
문득 떠오른 순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분명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냥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벌써 상대를 조여 들어갈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고 만 모양이다.
아니면, 1회 차 때 음지에서 살았던 나 자신을 떠올렸거나.
“크, 클랜 로드? 괘, 괜찮으십니까?”
말을 더듬는 소리에 눈을 뜨자, 왜인지 주춤 물러나는 신재룡이 보였다. 입이 살짝 벌어져 있고 목울대는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재빠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생각하느라….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그 사용자들과는 제가 따로 이야기를 나눠볼 테니, 사용자 신재룡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
“그럼 이만 가보십시오. 아…. 한별이한테는 오늘 저와 함께 초번을 설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머리를 꾸벅 숙인 신재룡은 이내 침착히 몸을 돌려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마 머리가 꽤 돌아가는 사용자인 만큼 방금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앞으로 시작될 무대에, 신재룡은 어울리지 않는 사용자였다.
천천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나는 품속에서 연초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한 붉은빛이 흐르는 석양 속으로, 한 줄기 흐릿한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이네요. 이 파트를 완료하고 약간 안정하면, 이제 강철 산맥으로 들어가야겠지요. 그리고 악마들이 출현하고, 투닥투닥하고, 강철 산맥을 완료하면…. 그때부터는 서서히 완결이 눈에 보일 것 같네요. 하하하.
이번 파트도 초반부에는 아리송한 부분이 있으실 겁니다. 이게 누구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렇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용이 잠든 산맥도 초반에 비슷한 반응이 나왔지요. 그리고 후반부로 가면서 하나하나 해답으로 풀어냈고요.
음지 전쟁 편도 비슷합니다. 지금 아리송한 부분은 이 파트에서 활용되는 복선으로 보시면 되며, 추후 몇 번 언급되며 모두 설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생각보다 스케일은 큽니다. 단순히 범인 몇 명만 때려서 잡는 건 금방 끝나고, 재미도 없을 것 같아서요. 하하하.
PS. 캐릭터 투표 때 사용할 대사 짜는 것 좀 도와주세요. 한소영, 한나가 막히네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