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66
00465 이미 시작된 또 다른 전쟁. =========================================================================
밤이 깊었다.
하늘은 어두컴컴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나, 아스라이 떠 있는 보름달이 야영지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찌르르. 찌르르.
타닥! 타닥타닥!
나지막이 들려오는 풀벌레 우는 소리, 모닥불 불똥 튀기는 소리. 가만히 그 소리들을 듣고 있다, 나는 물고 있던 연초를 빼어 모닥불 쪽으로 튕겼다. 무언가 불에 사그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딱히 사막에 흐르는 고즈넉함을 타려는 건 아니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거니와, 이렇게 계속 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잔잔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하늘을 보고 있다가 나는 천천히 옆을 더듬었다. 가칠가칠한 기록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을 눈앞으로 집어 들자, 한쪽 면이 모닥불 빛으로 발갛게 익은 그림이 그려진 기록이 보였다. 지도였다. 나는 재빠르게 지도를 훑었다.
용이 잠든 산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우리는 붉은 사막, 자석의 황야, 질척거리는 늪지대를 거쳐 산맥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돌아오는 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가 야영하는 장소는 붉은 사막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일주일을 거쳐 용이 잠든 산맥을 나올 수 있었고, 이후 삼 주라는 시간이 지나 이 붉은 사막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말인즉슨, 이제 도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오빠? 안 주무세요?”
그때였다. 사막 지대에 누워 지도를 보고 있던 도중 별안간 한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마침 남은 거리를 가늠하는 것도 마쳤던 터라, 나는 차분히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러자 눈앞으로 하늘을 일부 가리는 한별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자야지.”
나는 곧바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어서 완전히 일어서려는 찰나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윽고 시선을 돌려 바라보자 움찔하며 몇 걸음 물러서는 한별이 보였다.
“그런데 너는 안자니? 오늘 초번은 비비앙과 차소림일 텐데.”
“…소림이 언니랑 바꾸기로 했어요.”
“또? 너 오늘 나랑 말번으로 서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또 바꾼 거야?”
“그냥…. 요….”
한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찔리는 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계속 따질 마음은 들지 않아, 나는 그저 한숨만 내뱉으며 마저 몸을 일으켰다.
사실 한별이가 잘못한 건 아니었다. 한별이는 자신의 소중한 기회를 사용해 내 체력 문제를 일부 해소해주었다. 나로서는 한없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둘이서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정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또 왜 그런 염원을 빌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 단지 그러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한별이는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평소에는 나를 똑같이 대했으나 염원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어김없이 피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다른 클랜원이 엿들을까 봐 그러나 싶어, 불침번을 2인 1조로 바꾸고 나와 같은 조로 배정해,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별은 불침번을 몰래 바꿈으로써 나와의 자리를 회피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산맥부터 지금까지 쭉.
물론 그렇다고 아주 이야기를 못 나눈 것도 아니었다. 참다 참다못해 억지로 끌고 가서 염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 한 번의 대화도 별로 소득 없는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일단 하고 싶었던 말은 모두 한 것 같다.
덕분에 이브의 혈통에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그 선택지는 여타 불확실한 선택지들보다 훨씬 안전하고 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사용자 정보의 체력이 상승할 여지가 생겼고, 그래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등등.
허나 한별의 반응은 실로 애매했다. 고맙다는 말은 그냥 저냥 알아들은 것 같은데, 가네샤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튼 상황이 이쯤 되자 나도 어느 정도는 포기한 상태였다. 한별이 자꾸만 묵비권을 행사하니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거기다 애당초 염원을 묻지 않겠다고 말해 놓은 게 있는 터라, 억지로 다그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럼에도 오늘 자리를 마련하려 한 것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곧 도시로 들어가게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구구절절이 나열할 것도 없이 내 손이 필요한 굵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마지막으로 한별의 진심을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아직 나와 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관계가 발전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돌연히 몸이 찌뿌듯한 걸 느껴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문득 쓰게 웃고 말았다. 스스로 여성에 대한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으나, 이럴 때 여성의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한껏 올린 두 팔을 내린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참…. 너랑 얘기 한 번 하는 거 힘들다.”
“오, 오빠.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그냥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할게. 아무튼 이만 가볼 테니까….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이야기하자.”
“…네.”
한별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몸을 돌려 차분히 걸었다.
그렇게 서서히 야영지를 벗어날 무렵. 마침 초번을 설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하품을 하며 걸어 나오는 비비앙이 보였다. 비비앙은 입을 펑펑 두드리다가 나와 마주치자마자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어? 기우여? 어오…. 음냐음냐. 너도 오늘 초번이야?”
“…아니. 나는 말번이다. 이제 그만 자려고.”
“아하…. 그런데 왜 이쪽으로 와? 침낭은 저쪽에 있는데.”
“자기 전에 볼 일 좀 보려고.”
오른쪽 방향을 가리키던 비비앙은 이내 커다랗게 하품하며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볼 일을 보러 간다는 말을 아마 생리 현상을 해결한다는 말로 이해한 듯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생리 현상을 해결하러 가는 게 아니라, 정말로 볼 일을 보러 간다는 소리였다.
절대 졸면 안 된다는 엄중한 주의를 준 후에, 나는 호언장담하는 비비앙을 두고 야영지 밖으로 벗어났다.
용이 잠든 산맥에서 붉은 사막으로 오기까지, 할 수 있는 선에서 사정 파악은 모두 한 것 같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금 할 수 있는 선으로써, 한결이와 깨어난 의뢰인들을 삼자대면 시킨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가 처음 했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아주 진전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 가지 새로 알아낸 사실이 있는데, 바로 김수정에게 의뢰 비용을 지불한 사용자의 정체였다.
이름은 송희선. 현대에서는 연기자 출신으로 2년 전 홀 플레인으로 넘어온 사용자. 외모는 반반하나 능력치는 크게 보잘것없다. 하지만 송희선은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 후 남부 자유 연합에 소속한 클랜에 오퍼를 받았다. 해당 클랜의 클랜 로드가 송희선과 아는 사이인데, 현대에서 똑같은 연기자를 했다고 한다.
“이쯤이면 된 것 같은데.”
어느덧 야영지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저기 멀리서 발간 불빛을 비추는 장소를 보다가, 나는 품으로 손을 넣었다. 이내 조막만 한 크기의 동글동글한 게 만져져, 나는 이만 생각을 정리하고 잡힌 구슬을 꺼내 들었다.
꺼낸 구슬의 정체는 통신용 수정구였다. 그러나 반들반들한 빛이 흐르는 여타 수정구와는 달리, 눈앞의 수정구는 거무칙칙한 빛을 띠고 있었다.
수정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늦은 밤이기는 했지만 이제 통신을 받을 자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다. 즉 홀 플레인의 음지에서 활동하는 자들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용이 잠든 산맥에 들어가기 전 고연주에게 지시를 내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연주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다. 이제 곧 도시로 들어가게 되면 나 또한 나름대로 행동할 계획이라, 이건 그 나름의 행동을 위한 첫 번째 걸음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주저 않고 수정구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츠츳! 츠츠츳!
수정구가 밝게 달아오르며 거슬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노이즈가 차차 잦아들며 누군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수정구는 여전히 검은색 일색이다. 말인즉슨 지금 나타난 사용자 또한 온몸에 검은색을 두르고 있다는 소리였다.
“오랜만이네.”
(…설마 머셔너리 로드께서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낮게 깔린 목소리였으나 음색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흡사 쇠를 긁는듯한 음성이었다.
아무튼 확실히 통신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왜? 나라고 연락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그런 뜻이 아니라, 서로 더는 연락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습니다. 머셔너리 로드와 우리의 관계는, 우리 쪽에서 그림자 여왕을 놓아준 것으로 정리된 게 아니었습니까.)
그림자 여왕을 놓아준 것으로 정리됐다 라. 나는 1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고연주는 이미 3년 전에 제 발로 걸어 나온 상태야. 아닌가? 그리고…. 너희들 나한테 목숨 빚도 있지 않나?”
(목숨 빚이요?)
“그래 목숨 빚. 내 기억에는…. 그때 고연주의 부탁으로, 너희를 깡그리 몰살시키지 않고 일부 살려준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통신망도 개통했잖아. 너도 아직 가지고 있는 걸 보면….”
(하. 그 학살을 빚이라고…? 그리고 머셔너리 로드가 말하는 빚은 이미 갚았다고 생각하니 더는 할 말이 없군요. 이 수정구는 오늘 부로 폐기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사내가 말을 끊고 들어오자 갑자기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이내 사내가 통신을 끊기 직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끊으면….”
(……?)
“…죽는다.”
(…….)
그러자 수정구에 비친 검은 사내는 행동을 멈춤과 동시에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사내는 말을 잇지는 않았으나, 수정구가 약간 일그러진 걸로 보아 입을 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사내를 지그시 노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희가 아무리 꽁꽁 숨어있다고 해도, 내가 못 찾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끊어도 되고.”
그리고.
(…용건이 뭡니까.)
마침내 들려온 사내의 말에, 나는 비로소 살며시 웃음 지을 수 있었다.
*
깊은 밤, 야영지 부근.
“보석아.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 내 생각에는 말이야….”
“…….”
“아차. 그나저나 안현은 정말로 걱정이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데 곧 있으면 도시에 도착하잖아? 그러면 김수현도 엄청 오랜만에 공식 석상으로 돌아오는 건데…. 보석이는 어떻게 생각해?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까?”
“…….”
쉴 틈 없이, 다양한 화제로 말을 잇는 비비앙을 보며 한별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쉬지 않고 나불나불 떠들자 이제는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요호호호! 그지?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후유.”
한별은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예쁜 입술을 꽉 막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으나, 그래도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니 그냥 속 편히 귀를 막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내 제멋대로 떠드는 비비앙을 최대한 무시하려 애쓰며, 한별은 천천히 상념에 잠겼다.
그것은 요 근래 자신의 머리와 속내를 어지럽히는 장본인에 대한 생각이었다.
김수현.
머셔너리 로드.
오빠.
‘참…. 너랑 얘기 한 번 하는 거 힘들다.’
‘그냥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할게.’
문득 김수현이 넌지시 건넨 말이 떠올라, 한별은 시무룩이 고개를 묻었다.
알고 있다. 한별은 지금 김수현이 왜 저러는지도, 그리고 스스로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계속 피하려는 걸까.
그것은 한별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고 오는 내내 계속 숙고했던 생각이었다. 또한 아직 자신도 해답을 찾지 못한 하나의 난제이기도 했다.
사실 한별이 이렇게 김수현을 피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첫 번째는 염원의 정확한 내용을 들키기 싫다는 뜻 모를 심리였고, 두 번째는 아직 한별도 김수현을 향하는 감정을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별은 가네샤에게 두 개의 염원을 빌었다. 첫 번째 염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대비해, 두 번째 염원으로 가네샤가 자신의 감정을 알려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염원은 어디까지나 본인만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얘기한 염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틀어졌다.
첫 번째 염원도, 두 번째 염원도 모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완전히 받아들여진 게 아니라, 정확히 절반에 불과했다.
가네샤는 수현에게 한별이 수현을 위해 염원을 빌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한별의 감정을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한별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한별은 복잡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진심을 들키기 싫으면서도, 이 뜻 모를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해답을 구하고 싶었다.
아무튼, 이렇게나 모순된 상황인데. 설상가상 김수현도 어떤 염원을 빌었는지 자꾸만 캐물으니, 복잡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과연 말을 하게 되면 김수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거니와, 한별은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이미 머셔너리 클랜 내 여인들이 김수현을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물론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은 사용자 정보가 우대받는 세상이다. 능력 좋은 사내가 여러 여인을 거느리거나, 마찬가지로 여인이 여러 사내를 거느리는 일이 없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에 맞지 않는 관념이라 볼 수 있으나, 한별 또한 현대에서 살다 온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러할진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여인에게도 향하는 김수현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니 그전에 김수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미지수였고, 자신이 다른 여인들 사이로 끼어들어 갈 자격이 있는지도 미지수였다. 선발 주자라면 모를까, 후발 주자인 만큼 눈치가 안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 모든 게 다 미지수였다.
“하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 라! 이 바보! 이 멍청이!”
결국 끝없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소리 지른 한별은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물병을 쥐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어떻게든 식히지 않으면 새카맣게 타버릴 것만 같았다.
한별은 고개를 한껏 젖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내리는 순간, 어느새 잠잠해진 비비앙과 눈을 마주쳤다.
비비앙은 수 차례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손가락만 빨고 있었는데, 아마 한별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닐까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한별은 아차 한 기분을 느껴, 입가에 묻은 물을 닦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비비앙보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헤에…. 그래? 다행이다. 상처받을뻔했는데.”
“…물 마실래요?”
“좋지. 마침 너무 떠들어서 목이 마른 참이었어.”
한별이 물병을 건네주자 비비앙은 반색하며 마개를 돌렸다.
이내 좋다고 물을 마시는 비비앙을 보며 한별은 갑자기 부러운 기분을 느꼈다. 항상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면 세상에 근심 걱정이란 모르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끄러미 보고 있던 도중,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한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비비앙….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꿀꺽…. 꿀꺽….”
비비앙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여전히 물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확실히 들었는지, 한별을 흘끗 곁눈질하더니 고개를 까닥여 말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잠시 후, 한별은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되뇌며 바닥에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보는 방향으로 적었다가, 바로 지워 반대 방향으로 적었다. 그래야 비비앙이 더 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A, m, o, r. 그리고 N, u, n, t, i, o, s….”
“푸하. 시원하다. 뭔데? 뭐가 궁금한데?”
비비앙이 다시 물병을 내밀며 물었다. 목소리가 약간 상기된 게 한별이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 들뜬 모양이다.
“이거에요.”
마침 글자를 모두 적은 한별은 물병을 건네 받으며 바닥을 가리켰다.
Amor Nuntios.
한별의 염원으로 김수현의 체내에 흐르던 이브의 혈통 조건이 갱신됐다. 이것은 갱신된 조건 중 가장 아랫부분에 쓰여있던 것으로, 김수현이 상세한 내용을 말해주며 나왔던 단어였다.
그때는 둘 다 모르는 단어라 서로 고개만 저었는데, 약간 이상한 기분을 느껴 기억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비비앙이라면 알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갑자기 묻게 된 것이다.
“으음…. 잘 안 보이는데. 잠시만.”
주변이 어두웠던 탓일까. 머리를 갸웃한 비비앙은 몸을 최대한 기울이며 지면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모래에 그려진 글자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한별은 잠자코 기다리며 손에 쥔 물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바닥 부분에서 찰랑거림이 느껴지는 게 물이 조금은 남은 듯싶었다. 아직 가슴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기도 했고, 남은 물을 깨끗이 비울 겸 한별은 입가로 물병을 기울였다. 남은 물은 딱 한 모금 정도였다.
그렇게 입안 가득 물을 머금었을 무렵, 끝부분까지 시선을 돌린 비비앙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하. Amor Nuntios. 이거 그거네. 음음. 그거야. 나름 유래는 있는 단어인데….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잠시 뜸을 들인 비비앙은 이내 의기양양이 웃어 보였다. 한별은 물을 넘길 생각도 못 한 채 머리를 갸웃했다.
“?”
“사랑 메시지. 혹은 사랑 전달자라 보면….”
그리고 그 순간, 한별의 입에서 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푸!”
“돼…? 꺄아악!”
“콜록! 미, 미안해요…! 콜록, 콜록!”
“야!”
비비앙은 빽 소리를 질렀다. 글자를 본다고 한껏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졸지에 정면에서 물을 맞았기 때문이다. 물병에서 뿌려지는 물을 맞아도 기분이 나쁜데, 남의 입에서 분사되는 물을 맞으니 더더욱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콜록! 혹시…. 콜록! 이거…. 콜록! 오빠한테…. 콜록, 콜록!”
“뭐! 뭐! 이거 오빠한테 뭐! 아오 진짜!”
그때였다.
한별이 사레 걸린 와중에도 혹시 김수현이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물에 흠뻑 젖은 비비앙이 벌컥 화를 내고 있을 때.
“으….”
야영지 한쪽에서 누군가의 목멘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지금껏 깨어나지 못했던 사용자에게서 나오는 신음이었다.
============================ 작품 후기 ============================
Reader : 네 소원이 무엇이냐.
로유진 : 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다음 회 정시 업데이트를 하는 것이옵니다.
Reader : 그럼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로유진 :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다음 회 후기에 김수현, 김유현 사용자 정보를 업데이트 하는 것이옵니다.
Reader : 그럼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로유진 :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다음 회에 캐릭터 대사를 완성해 투표를 하는 것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