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69
00468 左遷. =========================================================================
드디어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로 돌아왔다.
클랜원들은 예상외로 우리를 성대하게 환영해주었다.
물론 환영해줄 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상당히 지나쳐 오히려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처음 환호나 박수 세례까지는 괜찮았으나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간신히 가라앉히자 이제는 하나같이 히죽히죽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모습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혹시 단체로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걱정이 들었으나, 아무튼 이대로 가만히 있기도 민망하다. 하여 우선 함께 다녀온 클랜원들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고 나서, 나는 바로 하연을 향해 직행했다. 그나마 하연이 가장 정상적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따로 별일은 없었습니까?”
“네. 그냥 잠잠히 지냈어요…. 아.”
그때였다. 하연은 살며시 웃어 보이더니 문득 내 어깨 쪽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이내 하연이 몇 걸음 물러나자 나는 얼른 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한 선유운과 안솔이 보였다.
선유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클랜 로드. 이번에 구출해온 사용자들 중 몇 명이 클랜 로드를 한 번 뵙고 싶다고 합니다.”
“응? 왜요? 그 사람들 장비는 다 챙겨주지 않았습니까?”
“장비 얘기가 아니라,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은혜를 갚고 싶다고 하는군요. 아무래도 클랜 가입 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만.”
“헛소리들 말고 그냥 돌아가라고 하세요. 아. 의뢰인들은 조만간 사용자 김수정을 데리고 한 번 방문하라고 전해주시고요. 이로써 의뢰를 완료했으니, 잔금을 받아야 하니까요.”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딱 잘라 거절했다. 겉으로는 은혜를 갚는다고는 하지만 속내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스카우트할만한 사용자가 있으면 또 모를까, 오면서 한 명 한 명 살펴본 결과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이윽고 머리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리는 선유운을 보며, 나는 안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를 보는 안솔의 눈동자는 무언가 모를 간절함을 품고 있었다.
“왜?”
“오라버니. 저…. 오늘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안솔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탐험은 장장 두 달이 넘게 걸린 대장정이었다. 그러니 몸이 피곤한 건 둘째치고서 라도 따뜻한 밥과 푹신한 침대가 그리울 것이다.
“아니. 그동안 힘들었으니까 오늘 하루는 피로를 푸는 게 낫겠지. 오늘은 푹 쉬렴. 가서 그렇게 전해주려무나.”
“정말이요?”
어차피 안현과 한결도 요양에 들어가야 하는 터라, 천천히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이내 나는 듯 달려가는 안솔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동안 어지간히도 몰아붙였던 모양이다.
잠시 후, 나는 다시 하연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저도 조금 피곤하군요.”
“고생하셨어요. 클랜 로드. 나오면서 식사 준비나 방 청소를 하라고 일러두었으니까, 바로 들어가셔도 될 거예요.”
하연의 말에 나는 차분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하연이 조심조심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던 도중,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자 중천에 떠 있는 해가 보인다. 아직은 밝은 빛을 비추고 있었지만 이제 곧 떨어질 것 같다.
도로 시선을 내리자, 갑자기 허전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유미가 안 보인다. 유미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내가 어딘가 나가기라도 하면 돌아올 때를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정문에서 볼 때가 부지기수였는데, 오늘은 왜 보이지 않는 걸까?
“그런데 유미는 어디 있습니까?”
“아, 유미요? 지금 무척 바쁠 거예요?”
“예? 바쁘다니요?”
“호호…. 보시면 조금 놀라실지도 몰라요.”
응? 보면 놀라다니?
하연의 말에 머리를 갸웃했지만, 아무튼 잘 있다는 말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살며시 문을 열어 우선 식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따뜻하고 맛 좋은 식사가 고픈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밖에서 먹는 밥보다는 이 장소의 밥이 나으니까.
식사는 확실히 괜찮았다. 아니. 밤의 꽃들이 해준 요리가 아닌 실력 있는 요리사가 만들어준 음식인 만큼,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식당에서 나와 1층 로비에 있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앞의 벽난로에는 발간 빛을 띠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온몸으로 쬐어 드는 뜨끈한 불빛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아 상념에 잠겼다.
지난 2년 동안 머셔너리는 무수한 의뢰를 받아 처리했고 수많은 유적을 발굴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과가 따라오기 마련인데, 그동안 그것들을 단순히 창고에 쟁여놓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주 수입원인 유적이 한정돼있는 만큼, 언제까지고 탐험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외적으로는 상점, 여관, 주점 등을 매입하거나 아니면 타 도시에 지부를 건설했고, 내적으로는 머셔너리 아카데미, 건물 개축, 대장간 등등 클랜원들의 복지를 높이는데 자금을 운용했다.
특히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바로 식당이었다. 식사는 의식주에 해당하는 만큼 생활에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있거니와, 사실 밤의 꽃들의 요리 솜씨가 굉장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오죽하면. 하루의 시작을 상쾌하게 해야 하는데, 밤의 꽃들이 요리한 식사를 먹으면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결국 밤의 꽃들을 하우스 관리로 돌리고 나서, 식당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현재 식당을 관리하고 있는 사용자는, 현대에서도 식당을 운용한 경력이 있는 나름 실력 있는 부부였다.
이 부부를 만나게 된 건…. 글쎄, 우연이랄까.
언젠가 에덴에 갈 일이 있어, 볼 일을 마친 후 한 아담한 식당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거기서 부부를 만나게 됐는데,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이 부부가 비 전투 사용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때 꽤 명성을 날린 실력 있는 전투 사용자.
처음에는 왜 비 전투 사용자처럼 생활하는지 궁금했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나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창 활동하다가 아내가 임신을 해버려, 남편이 더는 아내가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걸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둘은 아이를 출산함과 동시에 모든 활동을 중지했고, 모아놓은 돈으로 식당을 열었다.
아무튼 음식 솜씨가 매우 훌륭해, 약간의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그 자리에서 식당을 인수함과 함께 부부를 스카우트했다. 부부는 괜찮은 조건과 더욱 안전한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으니 좋고, 우리 또한 식사 때마다 질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상부상조였다.
“으으응. 오라버니이.”
오랜만에 맛 좋은 음식을 먹어서일까. 나른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바로 옆 의자에 몸을 앉히는 안솔이 보였다. 얼굴에는 포만감이 가득하고 왼손은 배를 살살 쓰다듬고 있다. 퍽 만족한 얼굴이었다.
“왜.”
“저요…. 지금 무지무지 배불러요오….”
“그래. 이제 좀 살 것 같으냐.”
“네에. 이렇게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음료를 마실 수 있다는 게…. 참 행복해요오….”
안솔은 빙그레 웃어 보이고서는 오른손에 든 커다란 컵을 한껏 들이켰다. 이내 음료를 쉬지 않고 뱃속으로 부어 넣는 안솔을, 나는 한동안 신기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저 희고 가냘픈 목에 어찌 저렇게 들어갈 수 있을까. 컵도 거의 일자로 기울였는데.
“크햐아아! 콜록, 콜록!”
이윽고 안솔은 컵을 탁 내려놓고는 약한 기침을 뱉었다.
그러자 그 순간, 갑자기 불길에서 떨어져 나오는 기분과 함께 조용했던 주변이 시끌시끌해진 걸 느꼈다.
살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식당에서 나온 클랜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인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이것저것 캐묻는 소리가 들리는 게, 탐험이 궁금한 이들에게 붙잡힌 모양이다.
그렇게 한동안 주변 얘기들을 듣고 있다가, 나는 다시 안솔을 돌아보았다. 배가 부르니 잠이 오는지 어느새 꾸벅꾸벅 고개를 꺼트리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안솔의 어깨를 흔들었다.
“안솔. 들어가서 자야지.”
“으응…. 응?”
안솔은 잠시 어깨를 비틀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번쩍 들어 졸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벽난로 앞이라 그런지 얼굴은 발개져 있었고, 눈동자에는 미약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다. 그러다 문득 안솔의 입술이 열렸다.
“오라버니….”
“응?”
“우리 오빠 있잖아요….”
“응.”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지 안솔의 입술이 오물거린다. 나는 차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에는 포기했는지, 안솔은 미약한 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나는 연초를 한 대 꺼내며 비틀비틀 걸어가는 안솔을 응시했다. 우리 오빠란, 바로 안현.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안현에 대한 처분은 이미 결정한 상태였으며 더는 고려할 여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나는 이것만 태우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연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눈을 감아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내일부터는 무척이나 바빠질 것이다.
*
다음날 아침, 머셔너리 클랜의 오전은 무척 부산스러웠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슬슬 성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즈음, 느닷없는 소집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소집령이 아닌 총 소집령.
산맥에 참가한 클랜원이나 참가하지 않은 클랜원이나 성과에 대한 호기심은 강했으나, 다들 일언반구도 없이 한 명 한 명 회의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클랜 로드인 김수현이 소집령을 내린 이유를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말하자면, 머셔너리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모든 권한이 김수현에게 집중돼있다. 물론 각 부문을 대표하는 클랜원들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행에 지나지 않는 정도였다.
즉 머셔너리는 대 간부 혹은 간부라는 자리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클랜원’에 한해서다. 머셔너리는 클랜 로드를 제외하면 모든 클랜원을 동등하게 대우하며, 연차나 실력에 상관없이 비슷한 발언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소수 정예인 머셔너리의 구조에 나름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런 만큼 2인자라는 말 또한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클랜원들 사이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사용자들은 있었다.
그 중 김수현이 가장 총애하는 3명의 사용자를 꼽아보자면, 그림자 여왕 고연주, 푸른 달의 마도사 정하연 그리고 기공창술사 안현이었다.
클랜 세력이 불어나며 김수현도 캐러밴 시절처럼 한 명씩 돌봐주기는 어려워졌지만, 안현은 예외였다. 김수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안현을 지도했고, 어디를 갈 때마다 꼬박꼬박 데리고 다녔다. 그뿐일까? 또한 유적 발굴 후 성과를 배분할 때마다 안현은 언제나 대상에 오르곤 했다.
그 결과 안현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사용자 정보를 보유할 수 있었고, 클랜 내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름 콧대가 높아질 법도 한데, 사실 안현의 클랜 내 평판은 꽤 좋은 편이다. 이유정과 달리 삐딱한 태도도 없었고 성격도 무던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새로 들어온 클랜원들에게 텃세는커녕,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마인드로 직접 챙겨주는 모습까지 보이니, 약간의 편애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클랜원은 없었다.
그런 안현이었기에, 이번에 터뜨린 사건에 대해서도 클랜 내 반응은 극명하게 갈리고 있었다. ‘예외 없는 처벌.’과 ‘그래도 안현.’이라는 반응.
그런 만큼 평소 안현을 예뻐한 김수현이 이번에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머셔너리 클랜원 전원이 주시할 정도로 초유의 관심사였다.
“이야, 왠지 어제 가만히 넘어간다 싶었는데 역시 아니었네. 안현은 과연 어떻게 되려나.”
“아까 회의실로 들어가는 건 봤는데…. 그나저나 클랜 로드도 조금 너무하네요. 이제 막 돌아온 클랜원인데 말이죠.”
“아니. 뭐가 너무해? 나는 좋기만 하구만. 아무리 안현이라고는 하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 오히려 질질 끌고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다면 클랜 로드에게 정말 실망했을 거야.”
“누가 잘못하지 않았대요? 하지만 현이 얘기도 좀 들어보고….”
총 소집령이 열리는 장소는 4층 대 회의실. 소집령을 받은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안현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니 무슨 얘기는 얘기? 오면서 이미 다 들었겠지!”
“쿨럭, 쿨럭쿨럭!”
그때였다. 동석이 험한 목소리로 벌컥 화를 내는 찰나, 계단 아래쪽에서 거센 기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계단을 힘겹게 올라오는 한 늙수그레한 사용자가 있었다. 동석은 바로 말을 멈추고 후다닥 달려갔다.
“아이고, 만성 어르신! 몸도 안 좋으신데 여기는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소집령이 내렸다 길래 왔지…. 그런데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겐가?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올라가는 길도 막아놓고 말이야. 쿨럭!”
이만성은 다시 한 번 거친 기침을 뱉은 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계단에 서 있던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회피했다. 이만성은 혀를 끌끌 차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결정은 클랜 로드가 내릴 테고, 지금 와서 이리저리 떠들어봐야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다들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서 올라가기나 하세. 보아하니 우리가 제일 늦은 것 같은데….”
동석은 군말 않고 이만성을 부축했다. 그렇게 클랜원들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4층 회의실로 걸음을 들였다.
이만성의 말대로 대 회의실에는 이미 거의 모든 사용자들이 모인 상태였다. 회의실 중앙에는 안현, 정하연, 백한결이 마치 죄인처럼 서 있었고, 좌우 테이블에는 가히 오십이 넘는 사용자들이 가지런히 착석해있었다.
잠시 후, 김수현은 천천히 자리에 앉는 이만성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모든 클랜원, 아니 고연주를 제외한 전부가 모였음을 확인하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 모인 것 같군요.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실에는 엄숙하고 무거운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어색한 눈초리로 중앙의 3명을 바라보았다. 안현, 정하연, 백한결. 저 세 명은 능력은 둘째치고서 라도, 김수현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머셔너리의 원년 멤버들이나 다름없었다.
김수현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들 사정은 알고 있을 터이니, 따로 설명 없이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자 안현?”
“예…. 예!”
이름을 부른 순간, 안현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사용자 안현이라는 말이 그토록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새도 없이,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변론을 해보도록.”
그리고 말을 꺼낸 순간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구구절절 없이 변론을 말하라 함은, 이미 안현의 죄를 확정했다는 소리였다. 클랜원들은 긴장하면서도, 두 달 전 김수현이 회의실을 나가며 남긴 말을 떠올렸다.
‘여러분들께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사건이 또 한 번 벌어진다면, 설령 그게 누구든지 간에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방금 드린 말씀은, 이번 사건에도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안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 혀, 형님. 저를 구해주신 것은 정말….”
“사용자 안현?”
“…죄송합니다. 클랜 로드님.”
“예. 사용자 안현. 저는 당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라 한 기억은 없습니다. 왜 그랬는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이 사태에 대해서 해명을 하고, 저를 납득시키란 말이었지요. 지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습니까?”
“…….”
눈앞에서 자신을 지그시, 그러나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사내가 자못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현은 꿀꺽 침을 삼켰다가 살그머니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순간 실수였다는 말은 변명이겠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태에 대해서는 어떤 해명을 해도 부족하다 생각하며, 모두 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처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흐음. 그런가요. 변명할 생각은 없고, 처벌을 달게 받겠다. 그럼 예정했던 대로 근신 처분을 내려도 할 말이 없겠군요.”
김수현은 한 쪽 눈을 슬쩍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안현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중간에 말을 끊어서가 아니었다. 처벌이 근신이라 함은 예상보다 훨씬 경미한 처벌이었기 때문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사용자 안현은 이 사태를 책임지고 근신 처분을 내리는 걸로 하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받지 않겠습니다.”
김수현의 말이 떨어지자, 아까보다 훨씬 커다란 어수선함이 회의실에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다만. 이 근신은 일반적인 근신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세 가지 제한이 있는 조건부 근신, 즉 사용자 안현에게 적용되는 세 가지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자 술렁이던 회의실에 다시 엄숙함과 고요함이 찾아 들었다.
안현은 살짝 놓았던 긴장을 다시 잡았다. 근신이라 함은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라는 뜻. 어떤 처벌이 나올지는 모르나, 근신이라는 범주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김수현은 앞에 놓인 기록을 들었다가, 도로 눈을 들어 안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첫 번째. 안현의 클랜원 직위를 해제합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안현을 더는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김수현 특유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 작품 후기 ============================
아. 미치겠네요. 투표 결과 한소영이 너무 앞서고 있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한소영에게 몰표가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 표를 떨어트려야겠어요. 어차피 조만간 한소영도 한 번 출현할 터. 최대한 밉상스럽게 그려내서 투표의 하락을 이끌어내겠습니다. 하하하.(노, 농담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두 개의 제한이 남았고, 안현에 대해서는 처벌이 과도하다 여기실지 모릅니다. 다만 나름 차후 생각은 있으니, 조금 더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PS. 투표해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투표는 계속 진행할 생각이니, 독자 분 모두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