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77
00476 생각해보니, 말은 부족하고 석으로 받아야 할 것 같다. =========================================================================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자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조승우가 보였다. 처음에는 생각 이상으로 긴장하는가 싶었는데, 며칠의 시간이 흐르자 훨씬 적응된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사실 지금도 하연이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렇게 커다란 공백은 느껴지지 않는다. 조승우 본인의 능력도 있겠지만, 역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클랜 로드. 요즘 얼굴 보는 게 너무 힘든 것 같습니다.”
이런 농담도 건넬 줄 알고 말이다. 아, 농담이 아닌가?
확실히 요즘 이곳저곳을 많이 쏘다니기는(?) 했다. 그래도 어쩌랴? 그냥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있어서 돌아다니는 건데.
“클랜원들의 원성이 이제는 아우성처럼 들립니다. 한 시라도 빨리 성과를 확인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하하하.”
“흠, 이거 어쩌나.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시간을 내기 힘들 것 같은데요. 정 그러면 알아서들 개봉하라고 하세요.”
“에이. 클랜 로드가 없으신데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그럼 조금 더 기다리던가요. 아무튼 끝날 때쯤 수정구로 통신을 넣겠습니다.”
조승우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머리를 꾸벅 숙였다. 간단히 화답해주고 나서, 나는 바로 몸을 돌려 1층 입구를 나섰다.
해 뜬 하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았다.
정원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고용인들은 한창 수다를 떨고 있다가, 내가 보이자마자 쏜살같이 흩어졌다. 그리고 풀을 다듬거나 연못의 물을 교체하는 등 열심히 정원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별다른 말 않고 고용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어차피 고용인들과는 계약 그 이상 이하의 관계도 아니었고, 잠시 노닥거린다고 해서 그다지 조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정도가 심하다 싶으면 다른 클랜원들이 알아서 관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정문을 나서 거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방문할 장소는 바로 대 도시 바바라. 그중에서도 중앙 관리 기구라는, 2년 전에 신설된 일종의 목적을 지닌 북 대륙의 대표 기관이었다. 즉 대표 클랜이 도시를 관리한다면, 중앙 관리 기구는 북 대륙을 관리하는 하나의 거대한 연합 기구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겉으로는 매우 거창한 명분을 지니고 출범한 기관이나, 사실 내막을 살피면 조금, 아니 상당히 웃긴 기관이었다.
전쟁과 복구 작업이 끝나고 나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건 바로 바바라였다. 황금 사자의 몰락 후, 공백이 된 도시를 과연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그 사태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1회 차 때도 비슷했다. 바바라의 소유권을 둘러싼 공방은 춘추전국시대가 오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따라서, 나름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사태의 결과는 예상외로 1회 차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까지는 똑같았으나, 결국 마지막에 이상한 방향으로 합의가 됐다고나 할까.
거두절미하면, 바바라는 공동으로 관리하는 도시가 됐다. 시작의 여관과 사용자 아카데미가 있는 만큼 병아리들의 적응과 활동을 돕는데 중점을 둘 것이며, 또한 차후 전쟁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 북 대륙에 명성 있는 클랜들이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불필요한 분란을 중재한다는 등등의 말이 있었는데, 아무튼 명분은 좋다.
내가 웃기다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중앙 관리 기구에 차출된 각 클랜의 분포에 있었다. 구성 현황을 살펴보면 동부 클랜 출신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서부, 남부, 북부가 사이 좋게(?) 나누어 먹었다. 말인즉슨 바바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클랜이 바로 동부라는 소리였다.
언젠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미래는 변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 법칙은 그때의 상황에도 똑같이 적용됐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냥저냥 넘어가는가 싶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혼란을 벗어나 안정에 접어들자, 남부에서 동부의 처사에 공공연하게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서로 정확히 반반으로 나누었다면 모를까. 동부와 함께 처음부터 전쟁에 참여했는데, 서부나 북부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동부 또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게 바로 동부이며, 가장 많은 공을 세운 것도 바로 동부이다. 그것을 감안해 인사를 구성했으며, 또한 바바라를 아주 차지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불만이냐는 생각이었다. 결국 여기에서도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나마 동부의 말대로 지금껏 나름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로 춘추전국시대가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현재 동부와 남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만 겉으로 확연히 드러내지만 않을 뿐이지.
“어디로 가시겠어요?”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워프 게이트에 도착했다.
“바바라입니다.”
“2골드 되겠습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내미는 사용자에게 이용 금액을 지불한 후, 나는 워프 게이트의 앞에 섰다. 그리고 포탈이 활성화되는 순간, 주저 않고 몸을 던졌다.
*
바바라로 이동하고 나서 나는 현 중앙 관리 기구가 자리잡은, 구 황금 사자 클랜 하우스로 걸음을 옮겼다. 나름 북 대륙을 대표하는 기관인 만큼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으나, 나는 예외였다. 쌓아놓은 명성도 있으며 이미 약속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간단한 신원 확인 절차만 거치고 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순간,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용자를 확인한 순간. 나는 잠시나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와. 머셔너리 로드.”
이지적이면서도 성숙한 외모와는 달리, 아이처럼 가늘고 뾰족한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이 장소는 처음이지? 후후.”
“…너.”
푹신한 소파에 앉은 채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여인은, 다름 아닌 이효을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설마 이효을이 이 건물에, 이 방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효을은 북 대륙의 수호자다. 즉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사용자 아카데미 때처럼 그저 그런 말단 직이라면 모를까. 또한 이 방은 건물의 최상층에 위치한 방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기관에, (지금껏 정체를 숨긴 탓이지만)아무런 명성도 쌓지 못한 사용자가 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잠깐만. 이렇다는 사실은….
“그만뒀냐? 수호자.”
“그렇지! 역시 너라면 보자마자 맞춰줄 줄 알았어! 으하하!”
이효을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기분 좋게 웃어 젖혔다. 나는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웃을 일은 아닐 텐데. 사정을 알고 있는 사용자라면, 네가 수호자라는 사실이 알아차릴 수도 있을걸? 대모 사건처럼.”
그러자 웃음을 뚝 그친 이효을은 무너지듯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들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나는 혀를 찼다. 원래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조금이지만 정신병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지.”
“그러니까 라니?”
“아주 간단해. 수호자를 그만둔 이상 더는 가치가 없어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주 효용이 없는 것도 아니야. 네 말마따나 대모 님 때와 같은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나라는 방패막이가 필요한 거지…. 아, 그렇다고 멍청하다고 욕하지는 말아줘. 애초에 그만두는 조건에 포함돼있던 거야.”
“멍…. 으음. 그럴 줄 알았지. 누누이 말했지? 천사들을 믿지 말라고.”
“아아. 몰라 몰라. 그냥 그만두었다는데 의의를 둘래. 아무튼 시시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요즘 최고로 잘 나가는 머셔너리 로드께서.”
“흠. 최고로 잘 나가는 건 아니지. 아니, 오히려 근래에 큰 사건도 있었고.”
이효을은 설레설레 손사래를 치고는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인 것 같아, 나는 기꺼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효을이 말했다.
“근래에 큰 사건이라면…. 아, 용이 잠든 산맥? 오호오호.”
“그래.”
“그거 깔끔하게 처리했잖아? 의뢰도 해결했고, 공략도 완료했고, 사용자들도 구출했고, 성과도 빵빵하게 얻어왔을 거 아니야? 아, 차 한 잔?”
“괜찮다.”
“Ok. 아차차. 성과 하니까 생각난 건데, 너 좀 멋있더라? 얼마 전에 기록 읽었어. 사망한 사용자들의 장비를 무상으로 돌려주기로 했다며? 그것도 코란 연합과 공조해서. 내가 그거 읽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너처럼 이기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그만, 그만!”
수호자를 그만둔 게 어지간히도 신났던 걸까.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다 어지럽다. 꼭 밥 달라고 짹짹대는 아기 새를 앞에 둔 기분이었다. 이내 지긋이 앞을 바라보자 혀를 살짝 내민 채 민망해하는 이효을이 보였다.
나는 잠시 이마를 매만지다가 품에 고이 모셔둔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앞으로 휙 던지자 이효을은 얍 소리를 내며 맵시 있게 잡아챘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영상 녹화용 수정구? 아니, 아닌가? 색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아니야. 맞아.”
“아하. 이거 나 보라고 준거야?”
“얼마든지.”
나는 차분히 다리를 꼬며 답했다. 그러자 이효을은 곧바로 손끝을 겉면에 맞추었다. 이내 마력을 흘려 넣었는지, 수정구에서 말간 빛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이효을의 얼굴을 주시했다.
(음…. 보아하니 다 모인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시작하는 게 어때?)
(그렇지. 아주 똑똑해. 그나저나 역시나 다들 알고 있었네? 그래 맞아. 머셔너리 사건은 내가 주도했어.)
영상이 재생될수록 이효을의 얼굴도 변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기분 좋아 죽겠던 얼굴이 한없이 가라앉고 진중해진 것이다. 그래, 마치 예전 수호자 시절처럼. 이제 좀 이야기를 나눌만하겠다는 생각하며 나는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얹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마침내 수정구의 빛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이효을이 고개를 들어, 깊은 한숨을 흘렸다.
“후.”
“어때? 그걸 감상한 소감이 궁금해지는데.”
“…일단 아까 말은 취소하겠어. 너 좀 멋지다고 한 거 말이야.”
“음?”
“얘네도 미쳤지만 너도 정말 어지간하다. 이러려고 그랬던 거였어? 복수하려고?”
“하하. 고작 그 정도로 복수는 무슨.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이효을은 멍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고작 그 정도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하여간 반응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으나, 이효을도 어지간하다. 고작 영상 한 번 보고 내가 하려는 바를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금 말했듯이 그 일이 복수의 메인이 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사실 오늘 이 장소를 방문한 것도, 메인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일환이었다.
“염병할. 그래도 어떻게 조용히 지내는가 싶었는데…. 하필 지금 이런 일이…. 아, 젠장….”
이효을 한동안 중얼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나를 쳐다보고는 거의 애원 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간청했다.
“머셔너리 로드야. 이거…. 그냥 적당히 넘어갈 생각은 없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게…. 이래 봤자 서로 좋을 게 없잖아? 싸움은 나쁘기도 하고.”
“그렇지. 싸움은 나쁜 거지. 하지만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주의라.”
이효을은 그럼 그렇지 라는 기색을 짓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내 그 상태서, 약간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머셔너리 로드. 열 받는 건 이해하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이거 터뜨려봤자 생각만큼 효과는 얻기 어려울 거야. 물론 연합의 이미지는 추락하고 욕도 엄청 먹겠지. 관련자도 처벌을 면하기는 어렵겠고. 하지만, 딱 그 정도에 불과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코란 연합은 무시무시해. 한두 클랜도 아니고, 무려 여덟의 대형 클랜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연합체라고. 거기다 산하 클랜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엄청난 수준이지. 지금 동부에서도 함부로 남부를 못 건드리는 이유 중 하나가, 푸른 늑대 때문이 아니야. 바로 코란 연합 때문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아. 알겠다. 그런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고작 연합의 이미지를 떨어트리고, 욕을 먹게 하는 정도에서 그칠 생각이 없거든.”
실은 오늘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탁!
얼굴을 감고 있던 손이 큰소리를 내며 책상에 떨어졌다. 이어서 드러난 이효을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져 있었다.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서려 있다. 여기까지 말한 이상, 아무래도 이효을도 내 의도를 눈치챈 듯싶었다.
“너…. 설마….”
“그래.”
조용히 긍정한 후,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아니 머셔너리는. 끝까지 갈 생각이다.”
============================ 작품 후기 ============================
아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 형 졸업식인데, 아버지가 바쁘실 예정이라 오늘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집에 돌아오니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하하.
그나저나 독자 분들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는 표를 떨어트리려고 어제 한 회나 소비해서 한소영을 그렸는데, 오히려 좋아하시면 어떡하십니까. ㅜ.ㅠ 아무래도 제가 독자 분들의 기호를 잘못 파악한 모양입니다. 쩝…. 아무래도 다음에는 코 파고 방구 뿡뿡 뀌는 한소영이라도 그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노, 농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