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81
00480 작전명 : 광대놀음. =========================================================================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내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중 한 사내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아련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내는 깔끔했다. 벽 쪽에는 큼직한 창문이 반듯이 걸려있고, 창문을 따라 반들반들한 탁자들이 가지런히 비치돼있는 게, 깔끔한 인테리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아무도 없다는 것. 이처럼 훌륭한 식당인데, 누가 봐도 이상하다 생각할 정도로 어떤 사용자도 보이지 않았다.
앞서 들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거한은 몸을 돌려 입구에 멈춘 사내를 바라보았다.
“형님. 그쪽에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뭐, 조금 늦을 수도 있지.”
“…그게 말이 됩니까? 여기는 머셔너리 구역입니다. 자기들이 오라 해놓고. 아니, 형님을 오라 가라 한 것도 모자라….”
“어서 오세요.”
그때였다. 거한이 벌컥 화를 내려는 순간, 주방에서 상냥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사뿐사뿐 한 걸음으로 홀로 나온 여인은 목소리 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마치 한 떨기 청초한 꽃처럼 아름다우며 기품이 흐르는 여인. 그러면서도 불룩히 솟아오른 가슴은 일순간 사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윽고 입구의 사내와 여인이 마주친 순간, 두 남녀는 동시에 침음을 흘렸다. 꼭 아는 사이인 것처럼.
“안녕…. 하세요.”
여인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으나, 약간 주저하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사내는 곧바로 태도를 회복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태연히 인사를 건넸다.
“예. 오랜만입니다. 사용자 임한나. 여기 러브 하우스에 오는 것도 간만이네요. 아, 지금은 사랑 주점이었던가요?”
“네. 한 번 개축 공사를 한 이후로 이름을 바꿨거든요…. 태진씨…. 아차. 수 로드라고 해야 하나요?”
“그렇게 불러주시면 고맙겠네요. 지금은 엄연히 한 클랜의 로드니까요.”
“네…. 수 로드.”
찰나의 순간 한나의 얼굴에 뜻 모를 서운함이 스쳤다. 수 클랜 로드, 박태진은 그러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예전 기억이 떠올라, 전혀 아랑곳 않는 기색과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머셔너리 클랜에서 활동하고 있다 들었는데…. 사랑 주점에서 일하시는 겁니까?”
“그냥…. 그래요…. 아, 뭐라도 좀 만들어 드릴까요? 예전에 오실 때 자주 드시던 거….”
“아니요. 괜찮습니다. 먹으러 온 게 아니라 일 때문에 온 거니까요. 그런데 그쪽 분은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네, 네. 그럼 우선 자리를 안내해드릴 테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한나는 시무룩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약간은 가라앉은 어깨와 느릿해진 걸음으로 이동했다. 박태진은 조금이지만 통쾌한 기분으로 한나를 따라 탁자에 앉았다.
“곧 오신다고 들었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윽고 한나가 떠나간 순간 박태진의 머릿속에서 통쾌함이 사라지고 의아함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한도 마찬가지였는지, 의자를 한껏 밀어 앉으며 뇌까렸다.
“그런데 형님. 도대체 왜 머셔너리에서 우리를 보자고 했을까요?”
“글쎄. 일단 들어봐야 알겠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요즘 혁이 형이랑 한창 붙어먹고 있는 놈들이….”
“백두산. 혹시나 싶어 미리 말하는데, 머셔너리 앞에서 말조심해라.”
일순간 눈을 가늘게 뜬 박태진이 날카롭게 말했다. 백두산은 허둥지둥 머리를 끄덕이고는 커다란 손으로 입을 단단히 막았다. 하는 짓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아, 박태진은 피식 웃었다.
“나 원. 아무튼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고.”
딸랑.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박태진은 곱다고는 볼 수 없는 눈초리로 앞을 바라보았다. 한 인상 좋은 사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바른 자세로 앉아있다. 이목구비도 말쑥하니 초면에 악감정을 주는 인상은 아닌데, 사내를 마주 보는 박태진은 서슴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실 이렇게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는 원인은 하나였다. 감히 연합의 1인자를 오라 가라 해서도 아니었고, 사내가 머셔너리 소속이라서도 아니었다. 상대에 따라서 오라 가라 할 수도 있거니와, 비록 머셔너리가 박태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고는 하나 고의성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저 신혁의 손에 이리저리 놀아나는 게 한없이 한심할 뿐.
그러나 박태진이 정작 얼굴을 찌푸린 원인은 바로 탁자에 있었다. 조막만 한 녹화용 영상 수정구와 두툼한 기록 뭉치. 수정구는 이미 한 번 재생을 끝냈는지 빛이 바랜 상태였고, 두툼한 기록 뭉치 또한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그랬다. 지금 탁자를 둘러싼 사내들은 바로 코란 연합과 머셔너리 클랜의 사용자였다. 수 클랜 로드 박태진, 세렌게티 클랜 로드 백두산, 머셔너리 클랜원 조승우. 이 세 명의 사내가 한 탁자에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잠깐 이야기가 끊긴 건, 아무래도 탁자에 놓인 수정구와 기록 뭉치에 있는 듯싶었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도로 말문을 연 사내는, 우락부락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백두산이었다. 씩씩 콧김을 뿜으며 기록을 들추더니 돌연히 탁자를 거세게 후려친 것이다. 쾅 소리와 함께 탁자에 놓인 찻잔이 울리고 흐르던 침묵도 깨졌다.
“염병! 지랄들을 하고 있군!”
“아이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근력이 좋으신가 봅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어이, 지금 웃음이 나오나? 스파이 뿌려놓은 게 그렇게 자랑스럽나?”
“아. 그건 오해라고 말씀 드렸는데요.”
“오해? 이 개….”
“백두산.”
참지 못해 거친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박태진이 재빠르게 제지했다. 백두산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분기가 가시지 않는지 이를 가는 소리가 자못 살벌하다. 그러한 와중에도, 조승우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두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열이 뻗치는 건 박태진 또한 매한가지였으나, 침착하려 애쓰는 듯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 화를 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이내 숨을 고른 박태진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한테 이것들을 보여준 이유가 뭐요.”
“그거야…. 수 클랜 로드께서는 연합을 이끄시는 인물이니,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 미사여구는 뺍시다. 그러니까 머셔너리 클랜에서 바라는 게 있을 거 아니요.”
“…어라? 이런 반응은 의외네요. 수정구에서 보기로는….”
조승우는 살며시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이나 일부러 말을 흐렸다는 것쯤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용자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두 사내의 얼굴이 딱딱히 굳은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이윽고 박태진은 탁자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지그시 주먹을 움키며 조승우를 노려보았다.
“사용자 조승우라고 했던가…. 착각하지 마라.”
“…….”
“조금 경쟁이 과열된 건 인정하나, 연합은 가족이다. 한 가족이라는 기치아래 모여든 사용자들이란 말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으나, 더는 입을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하.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제가 연합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나 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조승우는 곧바로 사과했다. 박태진은 차분히 숨을 흘리고는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목이 타는지 찻잔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후. 나도 사과하지요. 화가 나면 말이 험하게 나오는 성격이라. 아무튼, 머셔너리의 요구 조건이나 들어봅시다.”
“그게 요구 조건이라기보다는…. 부탁이라는 말이 더 낫겠네요. 사실 딱히 요구할 거는 없거든요.”
“뭐라고? 요구할게 없다?”
“예. 참고로 이 영상과 똑같은 내용을 담은 수정구를 이미 중앙 관리 기구에 제출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적당히 덮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텅!
둔탁한 소음이 탁자를 울렸다. 기껏 들어올린 찻잔이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박태진은 멍한 눈길로 조승우를 응시하면서도 맹렬히 머리를 회전시켰다. 사실 머셔너리가 이번 사건을 덮는 조건으로 이것저것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미 중앙 관리 기구에 제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그럼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도대체 뭐요?”
“수 로드. 목소리가 너무 높군요.”
“그럼 지금 안 높아지게 생겼습니까?”
“하. 이해가 안되네요, 이해가.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박태진은 벌컥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앞을 바라본 순간 도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인상이 일변한 조승우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마치 조금 전과는 다른 사람을 보는듯했다.
“장난이라. 지금 우리가 이러는 게 장난처럼 보이십니까?”
“…….”
“수 로드.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우리 머셔너리는, 연합을 믿었습니다. 연합과의 좋은 관계를 맺으려 기껏 얻어온 성과도 내주었지요. 그런데. 그러니까 익명의 제보로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우리 기분이, 머셔너리 로드의 기분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으음….”
“수 로드야말로 함부로 목소리 높이지 마십시오. 화를 내야 하는 건, 연합이 아니라 머셔너리입니다.”
“아니. 혁이의 잘못을 부인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무튼 혁이라면 모를까. 그럼 당최 왜 나를 보자고 한 거요.”
저 말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누가 그랬는지도 모른다. 연합의 적이 한둘이 아닌 만큼 지금의 박태진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박태진은 머리가 좋다. 그런 만큼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고, 정리했다. 이미 중앙 관리 기구에 제출한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그러니 적당히 구슬려 일을 덮는 건 무리고, 이제부터는 앞으로 불어 닥칠 폭풍에서 한 걸음 비키는 게 우선 과제였다. 늑대 같은 동부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박태진은 은근슬쩍 신혁을 들먹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조승우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싸늘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조승우가 말했다.
“…쯧. 저도 약 올리자고 이러는 거 아니니까 얼굴 붉히는 건 이쯤 하지요. 어쨌든 이렇게 수 로드를 뵙자 한 이유는, 차후 연합과의 관계를 위함입니다.”
“관계를 위함이다?”
“그렇지요. 우리 클랜 로드는 매우 현실적인 분입니다. 이딴 가당찮은 짓을 벌인 신혁은 용서할 수 없으나, 다른 분들은….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셨거든요. 그리고 사실, 중앙 관리 기구에서도 적당한 선에서 그치기를 요구했고요.”
“중앙 관리 기구에서? 아니, 그게 정말이요? 거기서 왜…?”
“예. 이 부분은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다만 이효을, 강철 산맥. 이것만 전하면 알아들을 거라 하시더군요.”
“이효을…? 강철 산맥…? 아!”
처음에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칼자루를 잡지 못한 입장으로서는 어떤 말을 들어도 불안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이효을과 강철 산맥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박태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왜 중앙 관리 기구에서 중재를 해주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암담한 눈앞에 나름 그럴듯한 구명 줄이 떨어진 셈이다.
“다행이네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신 것 같으니…. 아무튼 머셔너리의 부탁은 간단합니다. 아까 말처럼, 이 사건을 그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사건은 계획을 주도한 남벌 로드에게 집중하고,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겠습니다.”
“흠. 말씀은 고마우나, 그래도 연관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서. 연합 전체가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거요.”
“그 정도는 감수하시죠.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십시오. 연합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퍽이나 가만히 있겠습니다?”
“…….”
“물론 이번 사건으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연합의 힘은 잘 알고 있습니다. 클랜 로드도 그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요. 이번 한 번만 깔끔하게 사과하시고, 남벌 로드의 처리를 도와주십시오. 아니. 그냥 방관만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머셔너리는 이번 일을 완전히 잊겠습니다. 그리고 차후 연합과 좋은 관계를 맺을 의향도 있습니다.”
“…후.”
박태진은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느릿하게 이마를 매만졌다.
사실 이미 중앙 관리 기구가 알고 있는 이상, 지금도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다. 아니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된다고 할까?
어떻게 보면 박태진으로서는 좋은 기회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번 사건이 터지면 헤일로 건은 어떻게 될지 모르나, 현재 연합 내 2인자인 신혁을 확실히 축출할 수 있다. 그것도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점은 확실히 커다란 메리트였다.
하지만 아까 한 가족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주제에, 지금 와서 선뜻 승낙하기도 망설여졌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꺼낸 말은, 완곡한 말 돌리기였다.
“으음. 무슨 말인지는 확실히 알아들었는데…. 아무래도 머셔너리 로드와도 이야기를 해야 할 듯 싶소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무례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현재 클랜 로드는 굉장히 바쁘십니다. 이런저런 일로요. 그래서 이번 일을 완전히 맡기셨고, 따라서 권한도 전부 저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좋다, 아니면 싫다라는 말로 말이지요.”
백두산의 눈썹이 한 번 세차게 꿈틀거렸다. 감히 하늘같은 형님에게 하는 말이 자못 거만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태진의 말이라면 껌뻑 죽고 따르는 만큼, 입술을 짓씹으며 최대한 참으려 애썼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박태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재차 깊은 한숨을 흘리며 자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조승우는 반응을 확인하자마자 살그머니 미소 지었다. 동시에 오른쪽 머릿결을 살며시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까 조금 무례했던 언행은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사실 처음 말을 들었을 때 너무 화가 난지라….”
“괜찮습니다. 말마따나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았을 뿐인데. 우리로서도 이번 사건은 매우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사과를 해야 될 쪽은….”
“아아. 아닙니다. 상황은 충분히 인지했습니다. 아까 수 로드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잘못은 오롯이 남벌 로드에게 있으니까요. 더구나 이렇게까지 코란 연합의 긍지와 배포를 보여주셨는데…. 이 정도면 우리 클랜 로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아까 말씀대로, 남벌을 제외한 연합에는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음? 뭐…. 아무튼 그렇게 말해주시고 이해해주시니 고맙군요. 이 사건 이후로 머셔너리와의 관계는, 저도 좋은 쪽으로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얼음장 같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평소 신혁을 최고 경쟁자로 생각해온 박태진은 나름 만족할 수 있었다. 물론 원하는걸 얻은 건 조승우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이윽고 조승우는 탁자를 쓸어 수정구와 기록 뭉치를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천연덕스레 입을 엶과 동시에.
“그럼 이제 슬슬 얘기를 마무리 지어볼까요?”
이번에는, 왼쪽 머릿결을 쓸어 넘겼다.
*
모든 얘기를 마친 후, 박태진과 백두산은 사랑 주점을 빠져 나왔다. 조승우가 여기 주방장 솜씨가 좋다고 추켜세우며 식사라도 하고 갈 것을 권했지만, 박태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것도 주방장으로 소개된 임한나 앞에서.
그때 임한나가 알게 모르게 비친 서운한 태도를 떠올리며 박태진은 까닭없는 쾌감을 느꼈다.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 자신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이런 태도를 보이며, 거기에 쾌감을 느끼는 자신이 옹졸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두산은 쓴웃음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인 듯, 옆에서 걷던 도중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는 한편으로 조금 시원하기도 했소.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 얄미운 놈이 박살 난다는 소리 아니요. 물론 우리도 비난은 받겠지만….”
“백두산. 내가 말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아니 형님이 연합을 가족이라 말했을 때는 저도 감동적이기는 했는데.”
“두산아. 그냥 조용히 입다물고 있자. 지금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이건 일종의 통보야, 통보. 일방적인 통보. 그쪽에서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어.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못한 거라고.”
백두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박태진의 말뜻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입맛을 다시는 형님이 안쓰러웠는지, 이내 재차 입을 열었다. 물론 이번에는 다른 화제였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냥 입 꽉 막고 있으면 되잖아요. 그나저나…. 어떱디까? 생각해보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응? 누구를 오랜만에 만나?”
박태진은 태연히 말을 돌렸다. 그러자 백두산은 음흉이 웃으며 옆구리를 툭 쳤다.
“에이, 모르는 척 하시기는. 임한나요 임한나. 그 모니카의 꽃…? 뭐라더라. 아무튼 그, 그 가슴 큰 젖소 년. 아까 보니까 형님한테 관심 좀 있는 것 같던데.”
“관심은 무슨. 머셔너리에서 레어 클래스까지 얻은 사용자야. 그런데 이상하긴 하더라. 왜 레어 클래스가 그런 데서 일하고 있는 거지?”
“나야 모르죠. 그런데 내가 아마 그년이었다면 지금쯤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요. 그때 형님의 고백만 받아들였다면 지금 우리 연합 일인자의 여자가 되었을 텐데….”
“됐어 인마. 이제 와서 첫사랑 얘기를 꺼내봤자 뭐하겠어. 그리고 그 여자가 얼마나 철벽인데. 무수한 사용자가 구애했는데 단 한 번도 넘어가지 않은 여자야. 그리고 나랑 해봤자, 정신 사랑만 했겠지. 아무튼 이제는 아쉬운 것도 없고 미련도 없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박태진은 백두산의 말에 솔깃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임한나의 아름다운 얼굴을, 상냥했던 목소리를, 그리고 커다란 가슴을. 더구나 한때 철벽으로 유명했던 모니카의 꽃이었던 만큼, 한 번쯤은 정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욕망이었다.
백두산은 신나게 떠들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해보라는 등, 자기라면 몇 번 따먹고 버리겠다는 등 저속한 말들을 내뱉었고, 박태진은 적당히 맞장구 치며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박태진의 말하지 말라고는 했으나, 도저히 조금 전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을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다는 사실을. 박태진이 철벽이라 말한 여인이 지금 스스로 옷을 벗으며 계획의 성공을 보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알몸으로 한 사내에게 안긴 채, 오늘 보였던 박태진의 태도를 깎아 내리며, 신음을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두 사내는 사이 좋게 워프 게이트 앞에 섰다. 그리고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으로 포탈에 몸을 묻었다.
============================ 작품 후기 ============================
하하. 코멘트들은 잘 읽었습니다. 진행이 처진다고 느끼는 분이 두어 분 계시더군요. 다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인 게, 저번 회와 이번 회를 아무 의미 없이 넣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해답이 나오는 회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요. 그런 만큼 대화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오류가 생겨, 저번 회는 26일 오전 6시경에 1차 수정을 했습니다.(자세한 수정 내용은 저번 회 후기에 적었습니다.) 원하시는 내용은, 다음 회부터 나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
그리고 한 분의 질문에 답을 해드리자면, 저번 회에 사망한 여인은 박환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이 아닙니다. 연합인도 아니고요. 박환희의 편은 맞으나, 도움을 주는 인물로 보시면 됩니다. 이에 대한 부가적인 내용은, 차후 전개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