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88
00487 평온한 한 때. =========================================================================
“그럼 지금 이 시간 부로, 해밀 클랜을 헤일로의 대표 클랜으로 공인하는 바임을 선포합니다!”
이효을의 말이 끝난 순간 옆에서 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상에 선 이효을을 바라보더니 차분히 앞으로 걸어가 마찬가지로 단상에 올랐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용자들은 너도나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수만 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내 회의실은 다수의 갈채와 일부의 환호로 가득히 메워졌다. 나 또한 있는 힘껏 박수를 보내며 흐뭇한 마음으로 단상을 응시했다.
오늘은 서부 도시를 관리할 대표 클랜들을 선발하는 날. 사실 선발이라고 말하기도 조금 그런 게, 대표 클랜은 이미 며칠 전에 확정된 상태였다. 즉 이 자리는 단순히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자리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밀 클랜이 헤일로를 차지한 명분에 불만을 제기할 클랜은 없다. 불만을 가질 만큼 성과를 쌓은 클랜이 없기도 했거니와, 코란 연합은 자격이 박탈됐고 머셔너리는 스스로 자격을 포기했으니까.
아무튼 아무래도 좋다. 이제는 정말로 다 끝났다.
“감사합니다.”
형은 미미하게 웃으며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그저 감사합니다 라는 한 마디. 어떻게 보면 가장 형다운 인사라고 볼 수 있었다.
짝짝짝짝! 짝짝짝짝!
짝짝짝짝! 짝짝짝짝!
갈채는 아직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이효을은 손사래를 치며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제야 박수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미약한 환호를 보내는 사용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해밀 클랜원들이었다.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다.
이윽고 형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역시나 해밀 클랜원들에게…. 아니 잠시만, 뭐야. 저 인간 왜 나한테 오는 거야.
“수현아!”
“꺅! 어떡해 어떡해! 꺅!”
내 이름을 부른 형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왔다. 나는 당혹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미친 듯이 꺅꺅거리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또 어디선가 따가운 눈초리들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려보자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 여러 여인들이 보였다. 가희, 진하 누나, 혜린이 누나 등등…. 옷차림을 보니 오늘 열과 성을 다해 꽃 단장을 하고 온 모양인데, 왜 나를 노려보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흘리며 형을 맞이했다.
“축하해. 형.”
“축하는. 그렇게 말해주니까 오히려 미안하다. 원래는 네 클랜이….”
“또, 또, 또, 또. 말했잖아. 우리는 마지아 때문에 포기한 거라고. 그리고 해밀도 충분히 자격이 있는 클랜이야. 그러니까 오늘은 좀 기뻐해보라고.”
“…하하. 그래 그래. 아무튼, 정말 고맙다.”
형은 멋쩍게 웃더니 기어코 나를 한 번 안고야 말았다. 이 모습이 형제애로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왜 수정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이는 걸까? 저건 녹화용 수정구인데?
“자자.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이로써 헤일로, 베스, 도로시의 대표 클랜 선발은 끝났지만, 아직 여러분들에게 할 이야기가 남아있어요.”
잠시 후, 잠깐 자리를 비켰던 이효을이 다시 단상에 올랐다. 그러자 비로소 환호가 가라앉고, 비로소 회의실에 처음의 엄숙한 기운이 자리잡았다. 고마운 마음에 바라보자 이효을은 눈을 한 번 찡긋했다. 그리고 주변을 쓱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근 2년 동안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죠. 전쟁부터,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얼마 전 구 코란 연합의 사태까지요. …사실, 저는 그동안 북 대륙이 정말로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쇠퇴기라고도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강철 산맥의 실패 때부터 예정돼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바로 지금부터라는 거예요.”
바로 지금부터라. 뭔가 심상찮은 이야기가 나올 조짐이다. 다른 사용자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하나같이 진중한 얼굴로 이효을을 보고 있다. 이내 증폭 마법을 걸은 음성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터닝 포인트라는 말이 있어요. 전환점을 의미하는 단어죠. 저는 북 대륙 모든 도시의 주인이 정해진 오늘을, 바로 터닝 포인트라고 여기고 있어요. 길었던 쇠퇴기가 끝나고 이제 다시 부흥기로 돌입할 터닝 포인트요. 그리고 이 부흥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때가 바로 강철 산맥에 재도전할 때라고 생각해요.”
터닝 포인트라.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은 아시겠지요?”
이효을의 말은 간단했다. 한 마디로 터닝 포인트라는 단어를 사용해 강철 산맥에 재도전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즉 그때를 대비해 괜히 싸우지 말고 힘을 비축하자는 소리였다. 뭐, 누구를 저격하는지 알 것 같은데.
어찌됐든, 그렇게 강철 산맥의 언급으로 말을 마무리 짓고 나서, 이효을은 자리가 파함을 선언했다.
사용자들은 한 명 한 명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냥 나가는 사용자들과 선발을 축하하는 사용자들로 나뉘어, 안은 도로 어수선해졌다.
“우리도 이만 갑시다.”
좌우간 공식 선발도 끝났겠다, 나도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텅텅 빈 의자들이 보였다. 분명 고연주와 남다은, 그리고 임한나와 함께 자리에 참석했는데, 세 명 모두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없어진 세 여인을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형님. 오랜만이에요. 오늘 정말로 축하해요.”
“아유, 아니에요 동서. 다 도련님 덕분이죠.”
“네네. 아차, 아주버님은 잘 지내시죠?”
“보시다시피요. 도련님이야말로 안색이 훤해지셨어요.”
“호호호호호호호호.”
“호호호호호호호호.”
…없어진 세 명은 해밀 클랜원들과 함께 있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축하를 하는데,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아주 꼴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멍멍해 보인다. 나는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형. 나 간다.”
“응? 어, 어? 간다고? 어딜?”
“어디긴. 클랜 하우스에 돌아가야지. 나 오늘 바빠.”
“그래? 그래도 식사라도 같이 하고 가지 그러냐. 오늘은 너랑 오붓하게 밥이나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말이야.”
섭섭한 마음이 차오르는지, 형은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시무룩한 모습을 보고 있자 약간이지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다. 더구나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우리가 저쪽의 이야기를 들었듯이, 저쪽도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탓이다. 이내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뿜어내는 해밀의 여인들을 보며,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이만 갈게. 그리고 나보다는 형 클랜원들이랑 보내는 게 더 좋잖아?”
“게네들은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애들이고. 그런데 너는 아니잖아.”
“미안미안. 정말로 바빠서 그래. 다음에 시간이 나면 내가 자리를 마련할게.”
“그래…. 알겠다.”
그렇게 간단한 작별을 나눈 후 형은 터덜터덜 해밀 클랜원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와는 반대로, 세 명의 머셔너리 클랜원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참 잘했어요 라고 느껴진다면, 내 착각일까?
이윽고 형이 여러 손길에 붙잡혀 밖으로 끌려가는 게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응? 수현? 왠 한숨이에요? 오늘처럼 좋은 날에, 복 달아나게시리.”
“그냥, 걱정이 돼서 그렇습니다. 걱정이 돼서요.”
“걱정이요?”
“예. 우리 형 말입니다.”
고연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근심을 털어놓았다. 갑갑한 가슴을 억누를 길이 없기도 했거니와, 또한 진심으로 형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고연주가 말했다.
“왜요? 아주버님처럼 완벽한 남자도 찾기 드문데….”
“그거야 저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다고, 사람이 눈치가 없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어요. 조금 전에도 보세요. 저렇게나 손짓하는 여인들이 많은데, 저한테 오면 어떡합니까?”
“…그, 그럴 수도 있죠. 수현은 친동생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요. 저는, 언제나 형이 좋은 여자 만나기를 바라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눈치가 없으니 걱정을 안 할래야…. 후유. 아무튼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
“사실 이럴 때마다 간혹 의심이 듭니다. 정말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게 맞을까 하는, 그런 의심이요…. 쯧.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네요. 이만 갑시다.”
나는 한숨을 폭폭 내쉬며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채 열 걸음을 걷기도 전에 도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다시 뒤를 돌아보자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세 여인이 보였다. 그리고 세 명은 하나같이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니. 왜 나를 저렇게 쳐다보는 걸까?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실로 오랜만에 정상적인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세안을 하고 식사를 한다. 그리고 고연주가 타준 차 한 잔과 함께 집무실로 올라오면, 곧 조승우가 따라 들어와 아침 보고를 시작한다.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차를 마시는 기분은 아주 그만이다.
그래. 이것은 정말 간만에 느껴보는 여유요 행복이었다.
“오라버니는 성과를 개방하라! 개방하라! 개방하라!”
“오빠는 용이 잠든 산맥의 성과를 개방해라! 개방해라! 개방해라!”
…지금 문밖으로 들려오는 저 목소리만 아니라면 말이지.
탁.
찻잔을 너무 세게 내려놓은 탓일까. 막 기록을 정리하던 조승우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문을 한 번 돌아보더니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안솔양과 예지양인 것 같습니다만. 하하. 클랜 로드. 저 귀여운 농성을 멈추려면, 아무래도 이제는 성과를 개방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귀여운 농성이라. 나는 물끄러미 조승우를 응시했다. 저게 귀엽게 보인다니, 취향 한 번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개뿔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그러자 묵묵히 서 있던 새로운 수행인원이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지그시 문을 가리켰다.
“사용자 선유운. 가서 한 대씩 쥐어박고 오십시오. 아주 세게요.”
“예.”
담담히 대답한 선유운은 바로 문을 열어 복도로 나섰다.
“하하하, 하하하!”
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조승우는 너털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뎨에에~.”
“우에에엥~.”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농성을 대신해 꺼이 꺼이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아예 내쫓아버렸는지, 곧 울음소리마저도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완료했습니다. 클랜 로드.”
“예. 이제 좀 조용하네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내 덤덤한 얼굴로 돌아온 선유운이 주먹을 쓱쓱 매만지자, 조승우가 웃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깨나 당황한 듯 보였다.
좌우간 말 그대로 이제 좀 조용해졌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남은 찻물을 말끔히 비웠다. 그리고 힘껏 기지개를 피며 입을 열었다.
“사용자 조승우. 제가 분명 성과는 알아서 개방하라고 한 것 같은데…. 도대체 뭘 자꾸 개방하라는 겁니까?”
“아…. 그게 말입니다. 실은 이 모든 게 바로 붉은 상자 때문입니다.”
“예? 붉은 상자요?”
“그렇습니다. 저번 용이 잠든 산맥 탐험에서 사용자 허준영이 얻어온 성과인데 말입니다.”
아. 판도라의 상자를 말하는 거였구나. 설마 아직까지도 개방하지 않고 있었던 건가?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조승우가 말을 이었다.
“사실 사용자라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 클랜원들이 개방을 요구했는데. 사용자 허준영이 모두 거절했다고 합니다.”
“아니. 왜요?”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당최 왜 그렇게 꼭꼭 숨겨두고 있는 건지…. 사실 클랜 로드가 개인 성과로 인정한만큼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말이죠.”
“흠.”
공개를 거부한다 라. 나도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허준영의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필시 이유는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해,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죠. 허준영과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괜한 일에 신경 쓰게 만든 것 같네요.”
조승우는 송구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머리를 저었고 이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어차피 아침 보고도 모두 끝마쳤기 때문이다.
이윽고 조승우마저 문을 나서자, 집무실에는 나와 선유운만 남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새로 수행인원을 교체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선유운은 누구처럼 쓸데없는 말도 않고 천성이 과묵해, 옆에 두는데 아무런 부담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이 내가 요구하는 일을 해내는 태도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수행인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불현듯 또 하나의 성과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래. 용이 잠든 산맥에서 얻어온 성과는, 판도라의 상자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 헤. 잊지 않고 있었네? 아니, 이제야 떠올린 건가?
그때 내부에서 아름다운 미성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화정의 목소리였다. 이브의 혈통을 떠올린 순간 자동적으로 반응해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새 하도 바빠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얼른 체력을 올리라 노래를 부르던 화정이 아니던가.
그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 화정은 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닌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 아니, 괜찮아. 이 몸이 말했잖니. 2차 각성은 온몸이 편안한 상태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치러야 한다고.
‘그랬던가? 아무튼, 그래서 일부러 그동안 말도 않고 기다려준 거야? 내가 떠올릴 때까지?’
–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었지. 괜히 내가 재촉하면 신경 쓰일까 봐서….
‘와…. 화정. 이건 정말 감동인데. 그런 속 깊은 배려도 다해주고 말이야.’
– 호호호. 겨우 이 정도로 무슨. 사실 꼭 너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야. 정확히는 한 번 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진짜로 감동하는 거보니까 기분은 좋네. 대충 이런 기분이었구나….
‘응? 한 번 해보고 싶었다니? 이런 기분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아련하게 들리는듯한 화정의 말.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그래도 명색이 신인데, 하고 싶은 것도 있나?’
– 그럼. 일종의 유희라고나 할까? 나 정말 꼭 해보고 싶었거든! 왜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거.
‘도대체 그런 게 뭔데.’
– 그러니까. 너네 세상에서는 바깥양반이라고 해야 하나? 남편이 일 때문에 바빠서 막 돌아다니면, 부인은 서운해하면서도,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 저러는 거니 생각하며 참고 내조하잖아? 그런 기분 말이야.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럼 현모양처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던 거로군.’
– 응. 사실 바가지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호호.
‘그리고 나를 남편으로 생각했고.’
– 바로 그거…! 어…?
그때였다.
잠깐이지만 나와 화정 사이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신나서 떠들던 화정이 돌연히 말을 멈춘 것이다. 순간 약간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헛기침과 함께 볼을 긁적였다.
‘저, 화정. 그러니까…. 일단 고마….’
– 다, 닥쳐! 입 다물어!
대답은, 아주 빠르게 돌아왔다.
어느덧 말투도 원래의 뾰족한 음색으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왠지 화정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계속 말을 걸기로 결심했다.
‘저기, 우리 잠시 이야기를….’
– 시,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아니 너무 그러지 말고….’
– 시, 시끄럽다고 했잖아! 지, 지금 안 그래도 충분히 부끄러우니까! 제, 제발 조용히 좀 하란 말이야!
나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화정의 기세가 너무나도 엄청나, 이러다 또 폭주할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잠잠히 서 있는 선유운이 눈에 밟혔다. 선유운도 내 시선을 느낀 듯 눈을 살짝 뜨며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아, 그게 말입니다. 실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한순간 약간 고민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이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 상황을 대충 각색해 말해주어, 여인의 심리에 대한 의견을 구하려는 순간.
– 죽인다!
‘…….’
– 말 하지마! 죽일 거야! 입만 열어도 죽일 거야! 확실히 죽일 거라고!
‘…….’
결국,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 작품 후기 ============================
생각보다 길었던 음지 전쟁 파트가 끝나고, 드디어 새로운 파트로 돌입했습니다. 🙂
음지 전쟁 파트는 개인적으로 매우 야심 차게 준비한 파트입니다.
먼저 이 파트를 구성한 이유는, 예전에 어떤 분의 코멘트에 있었지요. 그 코멘트의 내용이 어땠느냐면, ‘김수현은 설정상 10년 차 사용자며, 음지에서 생활한 사용자다. 그러나 진행하는 내용을 보면 2회 차 때 얻은 힘으로 강제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다.’였습니다. 즉 10년 동안 음지에서 굴러먹었으면 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해결할 법도 한데, 거의 일관된 방식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 지적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 준비한 파트가 바로 이번 음지 전쟁 파트였습니다. 최대한 김수현의 치밀함을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었지요. 어느 분 말마따나 칼로 연합을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손 안 대고 코 푸는 형식으로 망하게 만드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번 파트는, 글쎄요. 사용자 아카데미 때와 비교하면 괜찮았고, 전쟁 때와 비교하면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전쟁 때 신상용의 죽음으로 반응이 반전됐다면, 이번 파트는 거의 끝까지 고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만큼 아쉬운 면도 상당히 많습니다. 중간중간 더 적고 싶은 내용도 있었고, 마무리도 확실하게 짓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결국 많은 부분을 쳐내고 마무리는 차후 진행 중간중간에 드러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는 게 저나 독자 분들 에게나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마 용이 잠든 산맥부터 음지 전쟁 파트로 이어지기까지, 작품 내 분위기가 거의 어두웠던 탓에, 몇몇 분들은 지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응원해주신 분들과, 따끔한 지적을 해주신 분들과,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하하하. _(__)_
앞으로는, 지금껏 고생한 수현이에게 조금 휴식을 줄 예정입니다. 성과도 개방하고, 여태껏 뿌려놓은 복선들도 회수할 겸 말이지요. 어두웠던 분위기도 달콤하고 밝은 쪽으로 변화할 겁니다.
후기가 많이 길어졌네요.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