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89
00488 평온한 한 때. =========================================================================
머셔너리 클랜의 하우스는 항상 북적북적하다. 아니, 분주하다고 해야 할까?
현재 공식적으로 등록된 클랜원은 57명.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머셔너리는 용병 클랜이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걸고 있다. 그런 만큼 의뢰인들이 항시 드나들고 있으며, 이따금 가입 의뢰나 면담 요청 등, 모종의 목적을 지닌 사용자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의외의 방문을 받을 수 있었다. 카운터에서 면담 요청이라며, 한 명의 사용자를 올려 보낸 것이다.
또 어떤 의뢰인지, 기대와 걱정이 반반씩 들었다. 사실 나와의 면담 요청이 이루어지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한 1년 전부터 거의 모든 일과 의뢰는 아랫선에서 처리하고 있었는데, 클래 로드에 일이 넘어왔다는 것은 사안이 깨나 중하다는 소리였다. 즉 아래쪽에서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안건이랄까.
그러나 사용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나는 처음의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버릴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형님.”
“…누구 멋대로 형님이냐? 아니, 인가요? 수 로드.”
수 클랜의 새로운 로드, 박환희가 방문한 것이다.
꾸벅 인사를 건넨 박환희는 어설픈 웃음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하. 수 로드라니요. 민망하네요.”
“허.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로 창설된 연합을 대표하는 분인데….”
“아 왜 그러세요. 이름만이에요 이름만. 그냥 환희나 동생이라고 불러주세요.”
“흥.”
나는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로 코웃음 쳤다. 그러자 멋쩍게 웃어넘긴 박환희가 소파 하나를 가리켰다. 앉아도 되냐는 의미 같았다. 아무튼 기껏 찾아온 애를 문전박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그 자리에 앉은 기분은 어때.”
“예? 음…. 푹신푹신해요. 엄청 비쌀 것 같은데….”
박환희는 잠시 머리를 갸웃하더니 소파를 탁탁 치며 말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소파 말고.”
“예? 그럼…. 아아. 그냥 그래요. 아직 형식에 불과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부담도 없잖아 있고요.”
“그런가…. 하기야 한 클랜의 로드도 아니고 무려 연합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아무튼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하면, 앞으로 예뻐해 주시는 겁니까?”
“지랄도 정도껏 해야 개성이다.”
“아 왜요. 하하하.”
서지환은 약속을 이행했다. 협의한 대로 연합을 해체함과 동시에, 수, 상인 조합, 백화 클랜으로 새로운 코란 연합을 창설한 것이다. 그리고 연합의 대표로 수 클랜의 이인자인 박환희를 선출했다. 물론 아직은 임시직 성향이 강한 자리였으나, 죽은 박태진이 돌아올 리가 없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저절로 자리가 굳어질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박환희의 푸념을 들어주다가, 나는 적당한 데서 말을 끊었다. 어딘가 모르게 화제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기분이 느껴진 탓이다.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그래서…. 예?”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나는 머셔너리 로드고, 너는 수 로드야.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몰라서 물어?”
“아니…. 그냥…. 인사도 드리고…. 그리고 겸사겸사….”
겸사겸사라.
신나게 떠들던 박환희는 나직이 말을 흐리고는, 아주 약간 당혹해 하는 낯빛을 비췄다. 저놈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 있는 만큼 이런 반응이 자못 생소했으나, 동시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하여, 나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
“그게…. 나, 나가요?”
“응. 나가서 7층으로 올라가. 계단을 기준으로 맨 왼쪽 방에 한결이가 있을 거야.”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박환희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들켰다는 얼굴이다.
“네 속셈이야 뻔해. 한 번 보고는 싶은데, 저지른 죄가 있으니 어색하겠지. 그래서 너네 클랜 로드가 한 번 보고 가라고 해서. 이런 핑계를 만들려고 했던 거 아니야?”
“…무섭네요.”
역시나 예상이 맞았는지, 박환희는 고소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러게 잘 좀 하지. 쯧. 참고로 무슨 핑계를 대도 상관은 없는데, 한결이 반응은 책임 못 진다.”
“그거야 제가 감내할 일이니까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박환희는 재차 꾸벅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그러한 찰나, 나는 아차 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볼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환희! 잠시만.”
“예? 예 예.”
“언제 한 번 사용자 서지환을 만나고 싶다. 적당한 시일에 자리 좀 마련해봐.”
“지환이 아저씨요…?”
박환희는 잠깐 생각에 잠긴듯했다. 그러다 곧 씩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능글능글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 형님. 이제 연합도 박살냈겠다. 서서히 산하 클랜으로 만드시려고….”
“말조심해라 인마. 산하 클랜이 아니고, 협력 정도로 생각해.”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하하하.”
“저 자식이….”
행여 내가 일어날세라, 박환희는 도망치듯이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것도 끝끝내 웃는 얼굴로. 저놈은 정말, 마음에 들다가도 안 드는 놈이라니까.
혀를 쯧쯧 차며 머리를 가로저은 후, 나는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수많은 호출석이 보여, 그 중 하나를 골라 지그시 내리눌렀다. 박환희를 보니 아직 결과를 보고받지 못한 다른 한 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 3분도 채 안되어 또각또각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인은 바로 고연주였다. 이렇게 빠르게 호출에 응한 것을 보니 아마 고연주도 본관에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막힘 없이 시원스럽게 드러난 아미가 눈에 들어왔다.
“수~현~! 나 불렀어요?”
들리는 목소리에는, 뜻 모를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눈매도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다.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머리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혹시 우설희에 관한 보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응? 환희가 말을 안 해주던가요?”
“…만났나요?”
“네. 계단에서요.”
“그렇군요. 아무튼, 예. 그놈한테는 듣지 못했습니다.”
“흐응. 그렇군요. 우설희라…. 사실 아직 처리 중이기는 한데….”
살그머니 팔짱을 끼며 고민하는 고연주. 그러자 안 그래도 풍만한 가슴이 팔로 받침으로써 더욱 두드러진다. 이내 성적 매력이 물씬 묻어나는, 가슴 한가운데 오목하고 길게 패인 부분을 보며 침을 꿀꺽 넘길 즈음. 고연주가 살며시 눈웃음을 쳤다.
“알고 싶으세요?”
“…예?”
“알고 싶으시냐고요. 우설희가, 어떻게 됐는지 말이에요.”
“그거야 그렇죠. 애초에 중간중간 경과를 보고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먹인 고연주는, 곧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기 시작했다.
“할 수 없네요. 정 알고 싶으시다면야…. 호호.”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했으나, 우뚝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연주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 풀썩 쭈그려 앉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책상 아래 빈 공간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기까지. 좌우로 살랑살랑 실룩이는 복숭아…. 아니 엉덩이를 보고 있자니, 꼭 강아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잠시만요.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뭐하긴요? 보고하려고 하는 데요?”
고연주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완전히 안쪽으로 기어들어오더니 얼굴만 쏙 내밀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와 동시에, 가녀린 손을 뻗어 내 하의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보고를 하랬지, 이건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아니, 잠시만요. 왜 바지를 벗기는…! 고연주!”
“어머, 강아지? 그거 정말 좋은데요? 수현만의 강아지라. 호호호호!”
“여기는 집무실입니다. 당장 안 멈추면 정말 화냅니다?”
“아잉~. 화내지 말아요 주인님~! 멍!”
“…….”
“멍멍?”
그 순간 너무나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연주는 이 틈을 노렸는지, 차분히 그러나 재빠른 손놀림으로 하의를 끌어내렸다.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벌써 절반 이상 내려간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겨우 가출한 어이를 찾을 수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우설희는, 지금 창관에 있어요. 입을 함부로 놀린 죄로, 몸소 창녀 체험을 시켜주고 있는 중이죠. 즉 화대로 빚을 갚는 방식이랄까요?”
이내 벌컥 화를 내려는 순간, 고연주는 비로소 보고를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말을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본론을 꺼내기도 했거니와, 내용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문득, 어쩌면 고연주가 치밀하게 의도한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우설희가 창관에 있다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설희가 창관에 있다니요?”
“네. 이해가 잘 안 가시죠? 그러니까 지금 그년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가 직접 보여드릴게요.”
고연주는 그러한 와중에도 착실히 하의를 벗겼고, 종래에는 속옷마저 내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결국,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 남성이 꺼떡꺼떡 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었다. 나는 망연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세상에. 이런 대낮에, 그것도 집무실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사용자 고연주…. 그냥 밤에 하면 안되겠습니까? 아직 낮이란 말입니다….”
“무슨 상관이에요? 이것도 엄연한 보고라고요. 응응.”
그러거나 말거나, 고연주는 양손을 꼭 맞잡았다. 이어서 남성을 보는 눈동자에 몽롱한 빛이 피어오르는 걸 확인한 순간.
“어쩜…. 언제 봐도 늠름하다니까. 쪽.”
고연주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남성의 끝에 진한 입맞춤을 선사했다. 안 그래도 예민한 부분인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마저 느껴지자 점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고연주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머릿결마저도 부드럽다.
그러나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아니면 애를 태우려는 건지. 고연주는 느릿하게 입술을 떼고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딘가 야하다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수현만의 강아지로, 이름은 섀도우라고 해요. 품종은, 고연주 테리어죠.”
“…요크셔 테리어가 아니고요?”
“그럼요. 고연주 테리어.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은…. 바로 소시지랍니다?”
“…….”
그 말이 끝난 순간, 고연주는 기습적으로 입을 벌려 남성에 고개를 묻었다. 이어서 맛을 보려는 듯 입을 우물우물 움직이자, 길고 둥근 살덩어리가 기둥을 촉촉히 적시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고연주의 양 볼이 서서히 홀쭉해지는걸 확인한 후,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푹하면서도 끈적끈적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을 느끼며.
*
시간이 흘러, 어느덧 짙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이 되었다.
식당에는 고요하다 못해 엄숙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자 못해도 쉰 명은 돼 보이는 클랜원들이 보인다. 기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비슷한 시간에 식사를 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다들 입맛에 맞는 시간에 따로따로 오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식사 시간은 끝났다. 테이블에 접시가 보이지 않으며, 간간이 차나 음료들이 보일 뿐이었다. 클랜원들은 차와 음료를 마시는 척을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바로 나와 건너편의 허준영을.
“그러고 보니 연주 언니가 안보이네?”
“아…. 오늘 저녁은 거르신대요. 점심때 뭘 배불리 드셨다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소곤소곤 말을 나누는 한나와 다은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눈앞의 허준영을 응시했다. 허준영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찻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후후 웃는 안솔이 탐욕에 젖은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후. 준영이 오빠. 오늘만큼은 피할 수 없을 거예요.”
“…후룩.”
“자아, 자아! 어서 그 꽁꽁 숨겨둔 붉은 상자를 내보이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오라버니가 이노오옴! 하실 거란 말이에요!”
“…홀짝.”
안솔이 협박조로 연신 상자를 꺼내기를 종용했으나, 허준영은 한결같았다. 어떠한 대꾸도 않으며 계속 찻잔만 기울인 것이다. 마치 너는 짖어라 나는 무시한다는 것처럼, 허준영의 태도는 무시 그 자체였다.
안솔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양손을 꼭 쥐며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나를 휙 돌아보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니. 비단 안솔뿐만이 아니라, 식당에 있는 클랜원들 전부가.
결국 그 눈빛들을 이기지 못해, 나는 등을 떠밀리는 기분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이놈.”
“…….”
그러자 비로소 허준영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잠깐 찻잔을 잡은 손이 멈칫하더니 실눈을 떠 나를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실망했다는 감정이 읽히는 것으로 보아, 좋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보지마. 농담이었으니까.”
“…그거 참 다행이군. 자칫 잘못하면 크게 실망할뻔했다.”
나는 바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너 그 상자 아직도 가지고 있지?”
“상자? 판도라의 상자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 붉은 상자 있잖아.”
“아아. 가지고 있다. 아직 열지는 않았어.”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거 어떻게 얻은 거야?”
“으음.”
탁, 허준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엇갈려 맞추더니 의자에 몸을 깊게 묻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에는, 카오스 미믹을 달라했었지. 예전에 너희 이야기를 듣고는, 도대체 어떤 성과인지 구경하고 싶었거든.”
“…카오스 미믹? 그럼 그냥 궁금해서?”
의아한 기분에 반문하자 허준영은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럼 호기심을 해결하려 했다는 소리인데…. 그것도 욕심 아닌가?”
“가네샤도 깨나 고민하더군. 그리고 그렇게 큰 욕심도 없었고. 그냥 주면 말고, 안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럼 왜 그 상자가…. 그건 카오스 미믹이 아니잖아.”
“거래를 했거든.”
거래라. 그러고 보니 확실히 허준영이 나왔을 때, 노란색 빛이 비췄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 나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때 약간 짜증이 났다. 신이라는 작자가 고작 카오스 미믹 하나 때문에 고민하는 게 어이가 없었거든. 그래서 배포 좀 크게 가지라고 몇 마디 던졌어. 그리고 스스로 나오려는 찰나였지. 그런데….”
“그런데?”
“가네샤가 갑자기 미친년처럼 웃어 젖히더군.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거래를 하자고 하더라고. 정 그러면 자기가 비슷한 상자를 하나 주겠다는 거야. 다만 이 상자는 카오스 미믹처럼 무조건 좋은 게 나오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나올 수 있다고 했지. 한 번 네 행운을 시험해보겠냐고 해서….”
“그래서 가지고 나온 게 판도라의 상자다?”
허준영은 맞는다는 듯,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가네샤나 허준영이나 서로 도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됐기 때문이다. 하기야 안솔이나 비비앙보다는 낫겠지만….
‘이년드으으을!’
불현듯 가네샤의 분노한 음성이 떠올라, 나는 피식 웃을 수 있었다.
좌우간 사정은 알았으니,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아무튼 좋아. 너, 그거 천년만년 가지고 있을 건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럼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개방하는 건 어때? 나도 그렇고, 다른 클랜원들도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지금?”
두 눈을 추켜올리며 되물어,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래 지금.”
“흠…. 뭐, 네가 궁금하다면야. 좋다.”
그리고 허준영은, 아주, 아주 간단히 승낙해주었다. 조금이지만, 나는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
“왜? 상자는 지금 여기 없어. 가지고 와야 돼.”
“아, 아니…. 어, 그러냐. 그럼 기다리고 있으마.”
“그럼.”
허준영은 일말의 주저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본능에 따라 조승우를 찾았다. 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앉아있는 모든 클랜원들이, 하나같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허준영이 나간 문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오오오! 클랜 로드가 해냈다!”
“드디어 상자를 여는구나!”
“그동안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고!”
“두 분 예쁜 사랑하세요!”
하지만 이내 큰 상관이 없음을 알았는지, 일제히 환호하며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잠깐만. 뭐라고?
클랜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앉은 테이블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정적이 흐르던 식당은 삽시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일변했다. 어찌나 소란스러웠는지 꼭 토요일 밤 클럽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결국 조용히 하지 않으면 절대 개방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은 후에야, 클랜원들은 어느 정도 자제하는듯했다.
그렇게 어수선함이 차차 가라앉을 무렵.
허준영이 돌아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상반신을 완벽히 가리는 큼지막한 상자를 들은 채 돌아와, 상자를 테이블에 쿵 내려놓은 것이다. 어찌나 컸는지 6인용 테이블의 절반이 가려질 정도였다.
어느새 테이블 주변은 클랜원들로 겹겹이 에워싸인 상태였다.
허준영은 상자를 슬슬 어루만지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사실 몇 번 개방할 생각은 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상자를 열려고 할 때마다 가네샤의 웃음소리가 기억나더군.”
“가네샤의 웃음소리?”
“그래. 뭔가, 굉장히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흠.”
생각해보니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나는 우선 제 3의 눈으로 상자를 응시했다. 상자는 전에 보았던 대로 불길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딘가 모르게 미약한 행운이 느껴지는 게 이상하다.
『판도라의 상자(Pandora Box)』
(설명 : 희망이 들어있는 금단의 상자. 하지만 그 희망이 선한 것인지 아니면 불길한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개방하는 사용자에 따라 정해집니다. 그러나 가네샤가 건방진 인간을 골리기 위해 약간의 수작을 부려, 불길한 것이 나올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 사용자 허준영이 개방할 경우.
1. 희망이 나올 확률 : 27%.
2. 절망이 나올 확률 : 73%.)
…뭘까? 이 쓸데없이 정확해 보이는 확률은?
설명을 읽고 한 가지 느낀 게 있다면, 가네샤가 은근히 뒤끝 있는 여신이라는 것.
“준영아! 일단 열자! 열고 얘기하자!”
“열어라! 열어라! 열어라! 열어라!”
“오빠! 제가 열면 안될까요? 네?”
“싫어! 내가 열래!”
상자가 앞에 보이자 식당의 열기가 도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구호 앞에서 오직 허준영만이 담담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허준영은 상자를 내 쪽으로 쭉 밀었다.
“김수현. 네가 정해라.”
“응?”
“네가 열든, 아니면 한 명을 정하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왠지 내가 열어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도 상관없어?”
허준영은 정말로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가만히 보면 이놈도 은근히 감이 좋은 것 같다.
이윽고 허준영으로 향하던 구호가 이번엔 나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가 일단 내 손을 먼저 얹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상자를 확인했다.
『판도라의 상자(Pandora Box)』
(* 사용자 김수현이 개방할 경우.
1. 희망이 나올 확률 : 41%.
2. 절망이 나올 확률 : 59%.)
확률이, 변했다?
희망이 나올 확률은 아직 5할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으나, 허준영에 비해 14%나 상승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분명히 개방하는 사용자에 따라 나오는 게 달라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게 영향을 미치는 걸까? 설마 행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퍼뜩 머리를 들었다. 빠르게 시선을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열고 싶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안솔을 발견했을 때.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안솔.”
“네, 네?”
“네가 열어봐라.”
“오…. 오라버니!”
안솔의 안색이 확 밝아진다. 그러더니 거의 울듯한 얼굴로 상자를 덥석 껴안았다. 정말 어지간히도 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곧바로 도로 상자를 응시했다. 물론 여전이 제 3의 눈을 활성화한 채.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Pandora Box)』
(* 사용자 안솔이 개방할 경우.
1. 희망이 나올 확률 : + ???%.
2. 절망이 나올 확률 : – ???%.
* 규격 외 행운이 감지된 상태입니다. 100% 희망이 나오는걸 넘어서, 무언가가 나올지 감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붙어있는, 물음표로 표시된 확률을. 그리고 아래 새로 생긴 문구를.
나는 멍하니 안솔을 응시했다.
복덩이다. 복덩이가 여기 있다.
“오라버니! 정말 제가 열어도 되죠? 네?”
나는 머리를 크게 끄덕이며 지체 않고 외쳤다.
“그럼!”
그리고 잠시 후.
“영차! 여엉차!”
힘찬 기합과 함께 안솔이 상자를 개방했다.
============================ 작품 후기 ============================
『김수현 회고록.』
(본문 中 : 어쩌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한나가 코란 연합에 관한 보고를 했을 때부터. 그때부터 그런 말도 안 되는 관습이 생겨난 것이다. 아마 한나가 다른 여인들한테 자랑했는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왜 여인들이 보고를 할 때 몸으로 보고하는 관습이 생겨났는지, 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