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93
00492 새로운 식구. =========================================================================
“아무래도 시험은….”
“상관없다. 그보다 김수현. 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말하려는 찰나 허준영이 빠르게 선수를 쳐버렸다. 아마 얘도 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코를 두어 번 킁킁거린 후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겼다.
가면 갈수록 피 냄새는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이내 1층 로비에 도착하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고용인들이 보이고, 동시에 냄새의 근원지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더는 코를 킁킁거릴 필요도 없다. 고용인들이 하나같이 건물 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정원에 도착했을 때, 십 수명의 클랜원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아니 많이 다른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사샤가 지면에 쓰러져 있었다. 상반신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얼굴이 멍멍해 보이는 게 깨나 놀란 듯 보였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10미터쯤 되는 거리를 두고 하얀 동물이 꼿꼿이 서 있었다. 유미였다.
척 봐도 유미의 상태는 이상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은은히 빛나는 뿔에 묻은 핏자국이었다. 아마 모종의 이유로 사샤를 찌른 듯싶은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눈매는 잔뜩 일그러져있고 꼬리는 빳빳하게 세운 상태였다. 한 마디로 무척 화가 나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아! 클랜 로드!”
재빠르게 다가가 물어보자 마침 사샤를 치료하던 박다솜이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입만 오물거리다 도로 유미를 바라보는 게 딱히 할 말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발을 들어 사샤를 툭 건드렸다.
“사샤. 괜찮나?”
“아…. 괘, 괜찮다. 클랜 로드.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야.”
“그럼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잘 있나 싶어서 다가가려 했는데, 갑자기 뿔로 나를….”
후르르르!
그때 유미가 큰소리로 울어 젖혔다. 어딘가 모르게 억울함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사샤는 바로 입을 다물었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우선은 주변을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미는 지금 극도로 불안해하는 상태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사용자 박다솜. 사샤를 안으로 데려가서 치료해주세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 여기 계속 서 있지 말고,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주세요. 유미가 불안해하는 것 같으니 제가 한 번 달래보겠습니다.”
사샤는 그러겠다 대답한 후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군말 않고 절뚝절뚝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내 클랜원들도 한 명 한 명 본관으로 들어가자 정원에는 나와 유미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차분히 유미를 응시했다. 그렇게 서로 보며 약 3초의 시간이 흐르자, 이내 빳빳하던 꼬리가 살그머니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나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양팔을 내밀었다.
“유미야. 이리 온.”
뀨르르르…!
다행히도, 유미는 울먹울먹한 소리를 내더니 한달음에 달려와 안겨 들었다. 몸에서 덜덜 떠는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부드러이 등을 토닥여주었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렁그렁한 눈망울과 마주하며 뿔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그래 그래. 그런데 사샤한테 왜 그랬어. 둘이서 무슨 일 있었니?”
유미는 품에 묻은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앞다리를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보라고?”
그러자 고개를 끄덕끄덕.
아무래도 그러라는 의미인 것 같아, 나는 머리를 갸웃하면서도 유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정원의 끝, 그러니까 담 아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지점에 다다랐을 때. 발버둥쳐 내 품을 벗어난 유미는 구석으로 달려가 나를 돌아보았다.
하여 도대체 뭔가 싶어 아래로 시선을 내린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이건…?”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절반 이상이 깨져있는 두 개의 알. 그리고 그 알들 앞으로 두 생명체가 곤히 잠들어있다. 나는 숨을 내뱉을 생각도 못한 채 한동안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하연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유미요? 지금 무척 바쁠 거예요?’
‘호호…. 보시면 조금 놀라실지도 몰라요.’
아, 그런 건가. 유미가 요새 안보인 이유는 알을 품고 있어서였나. 그리고 사샤를 찌른 이유는 알에서 태어난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유니콘이라는 종족의 부성애나 모성애를 생각해보면 아주 납득 못할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대상이 뱀파이어인 사샤라면 더더욱.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 같아, 나는 새삼스런 마음으로 두 생명을 바라보았다.
페가수스의 알과 요정 여왕의 알.
하나는 카오스 미믹에서 얻었고, 다른 하나는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서 얻은 것이었다. 물론 엄연한 성과라고 할 수 있으나, 사실 여태껏 큰 신경을 썼던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굳이 부화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실은 끽해야 언제가 프라이로 부쳐먹을 생각을 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설마 유미가 품어 부화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나로서는 생소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게 과연 좋을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좌우간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꼬물꼬물 뒤척이는 두 생명을 조용히 응시했다.
아기 페가수스는 마치 유미의 어린 시절을 꼭 닮은 모양새였다. 아기 고양이만한 크기와 약간 젖어있는 백색의 털. 그러나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마에 뿔이 없다는 것과 등에 자그마한 한 쌍의 날개가 달려있다는 것 정도?
이어서 아기 요정으로 시선을 돌린 찰나,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나도 모르게, 절로 무릎을 꿇을뻔했다. 갓 태어난 탓에 비록 몸에 흙이 약간 묻어있었으나,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주변에 흐르는 거룩한 기운과, 깨끗한 모습이 너무도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굴. 온순해 보이는 얼굴과 살포시 다물어진 입술은, 한 여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인상이었다. 머리칼은 마르가리타와 같은 은은한 은빛을 발하고 있었고, 새하얀 등에 살짝 돋아난 한 쌍의 날개는 고결하기 그지없다.
머리칼 사이로 비죽 솟은 귀가 그나마 앙증맞게 보여, 이 요정이 아기라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을 정도였다.
그래. 나는 이 아기 요정을 보자마자 요정 여왕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둘은 꼭 닮아있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한참 동안 멍하니 아기 요정에 눈을 떼지 못하다가, 나는 아차 한 생각이 들어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이제나저제나 거주민 사이서 태어났으니 거주민 정보가 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1. 이름(Name) : -(미정)
2. 클래스(Class) : -(미정)
3. 소속 국가(Nation) : -(미정)
4. 소속 단체(Clan) : -(미정)
5. 진명 • 국적 : 하프 엘프(Half Elf), 요정 여왕의 후계자 • 요정의 숲
6. 성별(Sex) : 여성(0)
7. 신장 • 체중 : 43.7cm • 2.7kg
8. 성향 : 질서 • 순수(Lawful • Pure)
1. 가네샤의 축복(Rank : EX)
1.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Rank : F Zero)
1. -.
2. -.
3. -.
* 가네샤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요정입니다.
* 인간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와, 최후의 요정 여왕 마르가리타 달란트 비트라이스 사이에 태어난 자식입니다. 비록 그 과정이 끔찍했다고는 하나, 최고의 마력 재능과 최고의 요정이 될 자질을 물려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아기에 불과할지 몰라도, 무시무시한 성장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엽기적인 정보일까.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마력 능력치가 87포인트, 행운 능력치가 97포인트라고? 아니 그전에, 고유 능력과 특수 능력이 개화된 상태라고?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탓에 아직 멍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바스락, 풀을 밟는 거슬리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와 가까이 있던 아기 페가수스가 눈을 반짝 떠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삐이?”
작은 입에서 터져 나온 나지막한 울음소리.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주제에,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는지 아니면 다른 누가 있다는 걸 느꼈는지. 아기 페가수스가 고개를 두리번두리번거리자 유미가 얼른 다가가 혀로 핥아주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바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 요정을 한없이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우웅…? 으엉?!”
그러다 어느 순간, 미미하게 아미를 찡그린 아기 요정이 살며시 눈을 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천천히 한다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잠을 깨운 듯싶었다. 순간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곧 연한 푸른색 눈동자와 마주하자 걱정을 지울 수 있었다.
큼직하면서도 또랑또랑해 보이는 눈은, 나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이 사람은 누굴까? 이러는…. 아. 지금 살짝 고개를 기울였나?
이윽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아기 요정은 조용히 아래로 시선을 내렸고, 이내 도로 시선을 올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 모습이 꼭 품평이라도 하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나올 즈음.
갑작스럽게, 아기 요정이 작지만 하얗고 통통한 팔을 내뻗었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자그마한 입술을 떼었다.
“빠!”
“응?”
“빠! 빠!”
“빠…? 아빠…? 설마, 나를 아빠라고 생각하는 거니?”
뀨르르르! 뀨르르르!
그러자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유미가 대찬 목소리로 울어 젖힌다. 아기 요정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러다 아직도 허공을 휘젓는 손이 눈에 밟혀,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기 요정을 품에 안았다.
“꺄아! 빠~!”
아기 요정은 까르르 웃어 젖혔다. 그리고 내 품에 꼭 안긴 채 이내 꾸물꾸물 고개를 묻었다. 여전히 본능에 따라 부드러운 등을 보듬어주자, 잠시 후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허 참.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뜻 모를 기분이 들어 나는 까닭없는 한숨을 흘렸다. 워낙 뜬금없이 벌어지고 맞이한 일이라, 당최 이 상황이 믿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뀨르르르….
그러나 재차 유미의 울음이 들려와 시선을 내렸을 때,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이제 갓 태어난 생명들이다. 그러고 보니 아기 요정의 등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한데, 어찌됐건 간에 지금 이대로 밖에 두는 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불현듯 내 바지를 꾹 물어 당기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직 불안함이 가시질 않은 얼굴로 나를 보는 유미가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남은 손을 들어 천천히 유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가장 고생한 건 유미일 것이다.
“이 애들은…. 네가 품은 애들이니?”
뀨르르르….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신경을 못써줬구나.”
뀨르르, 뀨르르르….
“하하. 아니라는 거야? 아무튼…. 고생했어. 정말 수고했다. 네가 얘들의 엄마나 다름없어. 정말로 미안하고, 또 고맙다.”
후르? 후르르르…!
고맙다는 말을 한 순간 비로소 유미가 웃었다. 이어서 아니라는 듯, 괜찮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예전의 순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불안함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참. 나도 졸지에 아빠가 되게 생겼네.”
하여, 나 또한 살며시 웃어주는 것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렇게 약 5초간 서로 흐뭇하게 보고 있을 무렵.
후르릉…. 후릉후릉….
뭔가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와 함께 유미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또 한 번 후르릉 울어 젖히더니 지면을 벅벅 긁기 시작했고, 이내 내 발에 고개를 들이밀어 살금살금 비벼대기 시작했다.
왜지?
나는 약간이지만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하던 행동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수줍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돌연히, 유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사뭇 비장함이 감도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물어보았다.
“왜?”
그러자 미약하게 울어 젖힌 유미는 천천히,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워하는듯한 모양새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윽고 나를 완전히 등진 상태서, 내 쪽으로 엉덩이를 쭉 들이밀었다.
“…….”
…어?
============================ 작품 후기 ============================
아, 어제 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하네요. 하루 내내 축 처진 기분을 느꼈습니다. 몸도 찌뿌듯하고요. 오죽하면 글 적다가 체조만 두 번이나 했어요. 아무래도 내일, 아니 오늘이 월요일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