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95
00494 힘을 실어주다. =========================================================================
포탈을 통해 소환의 방으로 들어선 순간,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사용자 김…. 수…?”
언제나 그렇듯 소환의 방을 울리는 고요한 음색. 그러나 ‘현.’으로 끝났어야 하는 말은, 채 끝맺음을 잇지 못하고 아련히 흐려지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미미한 의문을 품고서.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일부러 세라프의 시선을 피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내 품에 안긴 채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마르와, 여전히 발목을 꼭 물고 있는 도도가 보인다. …얘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좌우간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으려는 찰나, 문득 앞으로 미약한 한숨이 흘러들었다. 그리고 약간은 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용자 김수현. 앉으시면 안됩니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십시오.”
나는 그제야 시선을 들어 앞을 응시했다. 그러자 비로소 제단에 앉은 세라프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 일렁이는 날개와 애틋해 보이는 눈동자. 근 1년 만에 보는 세라프는 기억 속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역시…. 이 둘을 데리고 들어오면 안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애들인데.”
“오십보백보일 뿐, 거주민이라는 성질은 같습니다.”
세라프는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거절했다. 나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하여간 쓸데없는 것에 짜기는 여전해.”
“쓸데없다니요. 그리고 짜다니요. 사용자 김수현. 이 소환의 방이라는 공간은, 저와 사용자 김수현만의 장소입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공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할진대. 거주민이라는 존재가 침범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
“제가 사용자 김수현을 바라보는 만큼, 사용자 김수현도 저만을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대화가 오고 가서 그런 걸까. 서로 언성을 높인 건 아니었으나, 워낙 조용하고 밀폐된 공간이라 작은 목소리도 왕왕 울렸다. 그 탓에 잠이 깼는지 여태 새근새근 잠들어있던 마르가 가물가물한 눈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반쯤 앉았던 몸을 도로 일으켰다. 세라프의 말을 타당했고 괜한 억지를 부릴 일도 아니었다.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안될 수 있다고도 예상한 만큼, 나는 군말 않고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는 찰나였다.
“마!”
갑자기 마르의 입에서 ‘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한 손으로는 내 가슴을 통통 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세라프를 가리키고 있다. 거기다 가물가물했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보아하니, 아무래도 세라프를 엄마라고 여기는 듯싶었다.
지금쯤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누가 들으면 무척 서운해할 거라 생각하며, 나는 싱겁게 웃었다.
우선 나가서 신전에 맡겨 논 후, 얘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되찾으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빙글 몸을 돌려 포탈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빠? 빠? 마아, 마아!”
처음으로 마르가 칭얼거렸다. 꼭 왜 엄마한테 데려다 주지 않는 거예요?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라프 말대로 이들을 여기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마르를 어르고 토닥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사, 사용자 김수현!”
전보다 확연히 높아진 목소리가, 막 포탈로 들어가려는 발길을 붙잡았다. 언뜻 시선을 돌리자 입을 살짝 벌린 채 나를 향해 손을 뻗은 세라프가 보였다. 그리고, 이내 나와 눈을 마주친 세라프는 살그머니 손을 오므리며 천천히 거두었다.
“응?”
“그, 그게….”
“나갔다 오라며.”
“그, 그냥…. 오, 오십시오….”
“그냥 오라고? 왜? 안 된다고 했잖아.”
“새,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찾아오기도 했고…. 아직 어린 아이들이기도 하고…. 아, 아니. 그러니까, 융통성입니다. 융통성.”
의아히 물어보자, 세라프는 뭔가 애가 타는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런 세라프의 시선은, 언제부턴가 마르에 딱 꽂힌 상태였다.
“흠. 융통성이라.”
“…싫으신 겁니까?”
싫으신 겁니까. 세라프 치고는 깨나 귀여운 말투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싫을 리가 없잖은가. 뭐,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의아하기는 했지만.
나는 다시 걸음을 돌려 항상 앉던 자리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의 칭얼거림은 여전히 멎지 않았다. 자꾸만 세라프를 향해 팔을 젓는 게, 이렇게 보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힘들겠는데. 네 말대로 애당초 데리고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잠시, 그 아이를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세라프?”
“이대로라면 대화의 진행이 어렵습니다. 계속 이대로 지지부진하느니, 차라리 모든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제가 보고 있겠습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분명 그렇기는 한데, 아까부터 뭔가 이상한 기분이 엄습한다.
하지만 마르의 간절해 보이는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 세라프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잘 생각해보면 이 또한 도우미 역할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제단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니까, 마르를 건네준 순간.
돌연, 세라프가 옆으로 조금 비켜 앉았다. 그에 따라 제단에 약간의 공간이 생겨 내가 앉을만한 자리가 생겼다.
…당혹스러웠다. 마르를 건네주고 돌아설 생각이었는데, 방금 행동은 마치 옆에 앉으라는 뜻 같지 않은가.
그러나 세라프는 고개를 숙인 채 품에 안긴 마르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처럼 한없이 거룩하고 성스러웠다. 문득 황혼 빛 노을이 드리운 강물처럼 발갛게 익은 볼이 눈에 밟혔다.
“빠, 빠.”
그렇게나 원하던 엄마 품에 안겼음에도 마르의 칭얼거림은 그치지를 않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나를 보며 팔을 뻗고 있다.
나는 한동안 마르를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세라프가 비킨 자리에 천천히 몸을 앉혔다. 분명히 널찍한 제단이었으나, 이상하게 바로 옆에 앉은듯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그제야 칭얼거림을 멈춘 마르가 비로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흘끗 곁눈질을 해보자, 머리 아래와 가랑이 안을 감싸듯 받친 채 몸 쪽으로 한껏 끌어당긴 세라프가 보였다. 눈동자는 여전히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나, 입가에 알듯 말듯 미미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다.
점차, 그리고 서서히.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세라프는 분명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마르의 옹알이가 잦아들고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올 즈음. 조금의 움직임이나 흔들림 없이 잔잔히 마르를 보듬던 세라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잠든 것 같습니다.”
“그러네.”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라프가 항상 어떻게 나를 보는지 알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과 요정의 혼혈….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타고난 잠재성이 정말 대단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마르. 요정 여왕인 마르가리타의 이름을 따서, 마르.”
“마르…. 마르…. 정말 예쁜 이름이에요.”
“…어?”
그 순간, 잠시나마 세라프의 말투가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재차 세라프를 바라본 찰나, 나는 숨이 멎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세라프가, 가만히 몸을 들어 나와의 거리를 줄인 것이다.
이내 희고 아담한 어깨와, 고운 선을 그리는 목선과, 볼에 흘러내린 은빛 머리칼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세라프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겨와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처음 맡아보는 세라프의 향기는…. 뭐랄까. 정화되는 기분이라고 할까? 아무튼 좋은 냄새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 느꼈던 묘한 기분의 정체가 무언지 알 것 같았다. 소환의 방에 들어올 때 나와 세라프가 앉는 자리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세라프는 제단, 나는 바닥. 그러면 결국 서로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어깨를 비비고 있으면. 거기가 마르까지 있는 상태면.
이건 꼭, 부부 같지 않은가.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서너 번 헛기침 후 입을 열었다.
“신전에 계시를 내렸다고 들었어.”
“광휘의 사제가 잘 전달했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그동안 총 7번의 호출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계시를 이용해 신전을 방문할 동기를 더욱 강력히 부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러면. 고작 호출에 응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계시를 내렸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라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곤히 잠든 마르를 차분하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은 이번에 용이 잠든 산맥을 공략했습니다. 혹시 신전에서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음. 조사 결과 완벽한 성과로 인정됐어. 그 결과 이번에 클랜 랭크를 상승시켜 준다던데.”
“그렇습니다. 현재 머셔너리 클랜의 클랜 랭크는 AA. 그리고 이번 성과로 인해 S랭크로 상승할 예정입니다. 즉, 북 대륙 역사상 첫 번째로 S랭크 클랜이 탄생하는 겁니다.”
“흠?”
북 대륙 역사상 첫 번째 S랭크 클랜이라.
한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세라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1회 차 때 S랭크 클랜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출현한 시기는 강철 산맥 공략 직후였다. 말인즉슨, 원래 지금 S랭크 클랜이 출현할 시기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사실 그동안 클랜 랭크가 올라간다고 실질적인 혜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 딱히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세라프의 말을 들어보니, 그냥 말을 꺼낸 것 같지는 않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기는 한데…. S랭크가 되면 좋은 일이라도 있나? 지금껏 머셔너리 말고도 서너 클랜들이 AA랭크까지 올렸지만, 별다른 혜택은 없었잖아.”
“물론 클랜 랭크가 올라간다고 해서 주어지는, 사용자들이 바라는 정해진 혜택은 없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격을 판단하는 척도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자격? 무슨 자격?”
“사용자 김수현은 지금껏 머셔너리 클랜을 이끌면서 수많은 실적과 업적을 쌓았습니다. 개중에는 악마의 계획을 분쇄한 굵직한 것들도 끼어있지요.”
깨나 갑작스럽게 악마를 언급한 탓에,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세라프를 응시했다.
1회 차와 2회 차를 통틀어, 악마라는 주제만 나오면 이야기가 좋게 흘러간 적이 드물었다. 그런 만큼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서로 말을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세라프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어쨌든 일단 말을 더 들어볼 요량으로 나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3년간 사용자 김수현이 이뤄낸 성과는 단연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천사들은 사용자 김수현의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기나긴 회의를 거친 결과. 이 엄청난 성과를 기리는 의미로, 머셔너리 클랜의, 머셔너리 클랜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을 부여할 생각입니다.”
세라프는 유난히 머셔너리 클랜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지긋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아무튼 뜻은 고마운데, 그 특별한 혜택이라는 게 뭔지 말을 해줘야지.”
“안 그래도 지금 말씀 드리려고 했습니다. 거두절미하면, 우리는 머셔너리 클랜에 아카데미를 건설할 권한을 부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잠깐 세라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카데미? 그 바바라에 있는 사용자 아카데미를 말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1회 차 때 사용자 아카데미는 오직 하나였다. 정상에 오르기까지도 그랬고, 북 대륙뿐만 아니라 전 대륙이 사용자 아카데미는 하나였다.
물론 아틀란타로 넘어가면서 시작의 여관과 사용자 아카데미의 권한이 이동한 경우는 있지만, 한 대륙에 두 개의 아카데미가 생긴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잠깐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이해가 안 가는데. 애당초 사용자 아카데미는 바바라에 건설된 상태잖아?”
“물론 바바라의 사용자 아카데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제가 조금 전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자세히 말해보라는 의미로 머리칼을 크게 쓸어 넘겼다. 갑갑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라프는 서두르지 않고, 오히려 지긋이 나를 응시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인 세라프는, 이내 고요히 입을 열었다.
“누구나 공용할 수 있는 사용자 아카데미가 아닌, 머셔너리 클랜만의 아카데미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아. 기다리신 분들에게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드립니다. 제가 오늘 집에 늦게 돌아와서, 집필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_(__)_
PS. 로유진은 로리 거유의 준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얼마 전 친형이 제 작품을 검색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맛있게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저보고 너보고 여군이라고 하던데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더군요. 순간 심장이 쿵덕했습니다. 친형뿐만이 아니라, 부모님도 이따금 코멘트를 보십니다.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요즘 가족들이 저를 보는 눈이 이상해졌단 말입니다. 엉엉엉엉! ㅜ.ㅠ 그리고 저는 크신 누님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