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01
00500 Witch. =========================================================================
안현은 한동안 우물쭈물했다.
“그게…. 얘기하면 화내실 거잖아요.”
“너한테 화낸 적은 없다. 적법한 절차를 밟아 처벌했을 뿐이지.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
“…….”
“그냥 호기심 차원이라고 생각해. 그냥 말해봐.”
그럴듯하다고 여겼는지 안현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주저하더니 약간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을 욕하는 게 듣기 싫었어요.”
“형이 아니라 클랜…. 응?”
“그때…. 용이 잠든 산맥과 관련해서 이것저것 안 좋은 기록들이 나왔잖아요.”
“비방 기록들? 그건 내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트집이라고는 해도, 어떤 사용자들은 그런 기록이 사실인 것처럼 떠들고 다녔다고요. 바로 제 앞에서 그런 적도 있고요. 그래서….”
“그래서. 그런 속이 빤히 보이는 도발을 참지 못해, 그렇게 일을 저질렀다.”
안현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안현은 그때 사건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는지 아직 잘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안현은 그냥 도발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도발도 계획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말인즉슨, 코란 연합이 애당초 안현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소리였다.
그때였다. 별안간, 안현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그냥…. 형의 옆에, 가장 가까이 서 있고 싶었어요.”
“……?”
“앞서 말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보여드리고 싶었다고요. 항상 등만 보고 쫓아가는 게 아니라, 한 번쯤은…. 한 번쯤은….”
“…….”
“형의 말은 잊은 건 아니었고, 완전히 무시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도 초입에 잠깐 발을 걸치는 정도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지 말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나는 혀를 차며 안현을 응시했다. 말을 들어보니 어떤 의도로 행한 건지는 알 것 같다. 질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어쨌든 머셔너리를 위해 행동한 것이다. 아마 스스로 억울한 면도 없잖아 있을 것이고, 나름 하고 싶은 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현의 경솔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적당히 덮을 생각도 없다.
지금 안현이 머셔너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제대로 태도를 고치거나, 아니면 합당한 공을 세우거나. 그러나 사실상 이런 장소에서 공을 세우는 건 불가능하니, 결국에는 첫 번째 방법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 안현이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태도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절로 한숨이 나온다. 지금이야 모든 사건을 마무리했고 좋은 방향으로 흘렀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전에 들었다면 또 열이 받을뻔했다.
아니 사실 화가 나기는 했지만…. 앞서 말한 것도 있거니와, 안현은 이미 처벌을 받은 상태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지고 온 가방을 휙 던졌다.
철그렁!
가방에서는, 둔탁한 철성이 터져 나왔다. 잠깐 흠칫한 안현이 고개를 들어 의아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사용하던 장비들이다.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가려면 필요할 거야.”
“예? 사, 사용자 아카데미요?”
“그래. 교관은 업무를 보조해줄 사용자 한 명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으니까. 아무튼 자세한 설명은 하연에게 들어.”
“그럼….”
“물론, 착각은 금물이지. 원래는 다른 클랜원을 선발하려고 했지만, 하연과 안솔이 하도 부탁해서 너로 정한 거니까. 장비는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가 끝나는 즉시 또 회수할거야. 즉 너는 끝나면 또 여기로 와야 된다는 소리지.”
“누나랑…. 동생이….”
안현은 여전히 멍해 보였다. 아직은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차피 하연이 자세히 설명해줄 것이고,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오늘이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떠나는 날이라, 지금쯤 클랜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혀, 형! 가시는 거예요?”
“형이 아니라 클랜 로드. 그리고 한 4주간 자리를 비울 예정이니 그리 알아. 아니 네가 딱히 알 필요는 없겠네.”
안현은 나를 잡으려는 듯 손을 내뻗었으나, 이내 아차 하며 도로 내렸다.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기 직전, 고개만 반쯤 돌려 탁자를 응시했다.
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손은 가방을 천천히 매만지고 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용인 안현.”
“예…. 예!”
“이번에는…. 잘해라.”
“…예?”
의아한 물음으로 되물어, 나는 처음으로 간절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잘하라고. 이번에 사용자 아카데미는 정말로 중요해.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무조건 하연이 시키는 대로만 해. 너는 어디까지나 보조야, 보조. 어떤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하더라도, 절대로 사고는 치지 마. 그냥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나오면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아…. 예, 예!”
할 수 있는 말이 예 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곧 안현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싱겁게 웃었다.
“하여간 말은.”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주점의 문을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섰다.
꼭두새벽의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시원했다.
*
아틀란타였다.
아틀란타가 보였다.
바바라보다 몇 배는 돼 보이는 크기. 천사들이 입은 하얀 천을 두른 듯한 새하얗고 눈부신 외곽.
그래. 저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히 아틀란타였다.
돌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흥분이 차오르고, 갑작스럽게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비록 이번이 두 번째로 공략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아틀란타에 들어온 이상 테라는 금방이다.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집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아주 잠시만이라도 누군가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려 형을, 한소영을 찾았다. 아니 그 누구라도 좋았다.
그리고 나는 곧 한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내는,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왜 이 처음 보는 사내가 내 옆에 있을까? 그리고 왜 저렇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생각을 읽었는지, 사내는 돌연히 천천히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선이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가리키는 방향과 시선의 방향이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자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나는 사내가 가리킨 곳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 드디어 때가왔구나!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드디어 이때가 왔어!
일순간, 고막을 비틀어 찢는듯한 웃음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와 동시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온몸을 스멀스멀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공간이 억지로 비틀어지는듯했고, 세상이 와짝 일그러지는듯한 감각.
그래. 이 감각은…. 꼭 아틀란타를 탈환할 때, 지옥 대공의 등장과 비슷한….
아니 잠시만. 뭐라고?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나는 멍하니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가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 웃기지 마!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만두라고? 그건 내가 예전에 너희한테 했던 말이었어! 하지만, 너희는 어떻게 했지?
– 모른 척을 했지. 모른 척을 했다고! 그토록 그만두라고, 그토록, 살려달라고, 그토록 도와달라고 애걸복걸을 했는데도…!
– 너희는 나를 버리고, 죽이기까지 했어. 이 비정한 살인자 새끼들아!
– 하지만 괜찮아. 이제 나도 곧 살인자가 될 거니까~.
– 그러니까, 이대로 혼자 죽는 건 억울하잖아? 그러니 일부는 나와 함께 제물로, 나머지는 소환된 괴물에 모두 함께 죽는다는 소리야!
– ───. ───. ───. ───. ───. ───. ───. ───. ───. ───. ───. ───.
한 음성이 허공에 울릴 때마다 머릿속을 흔들어놓는 통에, 나는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세상은 이미 붉게 변해있었다. 지면에서는 더없이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시뻘건 불길이 올라오고 있었고, 하늘도 핏빛으로 물들었다.
한순간 하늘과 땅이 불길한 붉은색으로 일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모두 다 죽어버려!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여인이 양팔을 활짝 펼치며 웃음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
“오빠? 오빠!”
누군가 내 몸을 흔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어두운 공간과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막 잠에서 깬 터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흐릿하게 형체만 인식할 뿐.
“오빠! 수현이 오빠! 괜찮아요? 네?”
나는 조용히 좀 하라는 의미로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왜인지 머릿속이 왕왕 울리고 호흡이 거칠었다. 등도 축축한 걸로 보아 식은땀도 흐르는 모양이다.
한동안 지그시 눈을 감아 호흡을 고르자, 조금이나마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도로 눈을 뜨니, 아름다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별의 얼굴이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가득한 게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나는 튕기듯 침낭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김한별이 걱정이 담뿍 들어있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세상에…. 이 땀 좀 봐…. 오빠. 무슨 일이에요? 불침번을 서던 도중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왔는데….”
“…별거 아냐. 그냥 조금 이상한 꿈을 꿨거든.”
“꿈이면…. 악몽? 괜찮으세요?”
“괜찮지. 고작 꿈인데. 뭐, 기분이 더럽기는 하네.”
실은 고작 꿈이라 말할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금 전 꿈은 1회 차 기억을 바탕으로 한 실제 경험이었다. 즉 일종의 회상이라고나 할까.
아틀란타의 탈환과 마녀의 저주. 그리고 지옥 대공의 등장.
왜 갑자기 그때의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은 아주 더러웠다. 속이 갑갑하다 못해 터질 듯이 부글거렸다.
“우선 땀부터…. 새벽이라 공기도 차가운데, 계속 이렇게 있으면 감기 걸려요.”
“아니 아니. 정말 괜찮으니까. 물 한 병만 가져다 줄래?”
한별은 금세 일어나 물병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이동해 모닥불 부근에 앉은 후, 한껏 물을 들이켰다. 이내 시원한 물줄기가 식도를 타고 흘러 들자 들끓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결국 한 병을 전부 비우고 나서야, 나는 토해내듯 숨을 흘리며 바닥을 탁 짚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이제야 주변의 풍경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금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는 섬망의 산으로, 내일이면 환각의 협곡을 거쳐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4주.
이미 시작의 여관은 활성화된 지 오래였고, 병아리들은 3주차 교육에 접어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쯤이면, 막 4주차 교육에 접어들 것이고.
그토록 사용자들의 관심을 받는 병아리들이 들어오기는 했으나, 나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미 웬만한 사항에 대해서는 하연에게 하루걸러 통신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고, 또한 초반에는 사용자 아카데미 특성상 무조건 교육에 집중하기 때문이다.(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홍보를 하다 걸리면, 해당 교관은 그 즉시 퇴관 조치를 받게 된다.)
“오빠 잠시만….”
그때, 문득 목과 볼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언뜻 시선을 돌리니 무척 집중한 얼굴로 손을 움직이는 한별이 보였다. 한별은 한없이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며 내 몸에 묻은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잠시만요…. 닦아드릴게요….”
왠지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해져,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본 후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건너편에는 안솔이 있었다. 한별이와 같이 불침번을 서던 모양인데, 깜빡 잠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꺼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별이도 내가 웃는 이유를 알아챈 듯, 옆에서 소리 죽여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물끄러미 안솔을 응시했다. 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니 고개 숙이는 모습도 제 오빠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혀를 쯧쯧 찰 즈음이었다.
휙!
갑작스럽게, 안솔이 고개를 들었다.
============================ 작품 후기 ============================
행운 102 능력치 발동! 성녀의 예언이 발동했다!
그럼 다음 이 시간에….
하하. 드디어 500회네요. 물론 공지까지 합하면 완전한 500회는 아니지만, 그래도 감회가 정말 새롭습니다. 예전에 독자일 때는, 500회 이상 연재된 작품을 보면 되게 신기했거든요. 아 어떻게 이렇게 많이 적었을까. 다 읽을 수나 있을까 등등.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설마 저도 이렇게 500회를 연재할 줄은 몰랐습니다. 🙂
사실 나름 의미 있는 회이니만큼 특집으로 하나 기획할까도 생각해봤는데, 그러기보다는 그냥 스토리 진행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그대로 이어서 적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특별한 게 있다면, 중간에 회상 내용이 있겠네요. 이제 슬슬 아껴놨던 설정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야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