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02
00501 Witch. =========================================================================
한별이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도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이내 차분히 추스르며 안솔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깼는지 흐리멍덩해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상해 보인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치 안솔이 안솔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눈동자는 흐릿하면서도 공허해 보이고 꼭 다문 입술은 지긋한 느낌을 주었다.
일순간 무척 낯선 기분을 느꼈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안솔의 모순된 모습은 예전에도 서너 번 확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가끔이기는 했으나 확실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른다. 서로 아무 말도 않은 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이내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한별이 천천히 손을 거두었을 즈음,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안솔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
“우리 오빠…. 지금쯤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겠죠?”
“안현? 그렇지.”
왜 갑자기 안현 이야기를 꺼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서서히 청력을 높였다.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은 만큼, 몸이 자동적으로 알고 반응하는 것이다. 안솔이 각성했을 때는, 사소한 말 하나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잠시 후.
안솔은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이더니 커다랗게 하품하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됐어요…. 흐아앙~.”
“응?”
“아무리 바보이며 멍청한 우리 오빠라지만…. 한 번쯤은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오빠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오라버니의 악몽이…. 흐아아앙~. 음냐음냐….”
“안솔? 안솔!”
그때, 한창 말을 잇던 안솔이 갑작스럽게 고개를 꺼트렸다. 조금 더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옆구리를 콱 찌르자, 안솔은 비명을 지르며 퍼덕거렸다. 그러나 도로 올린 얼굴에서는 조금 전과 같은 각성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공허하던 눈동자는 그렁그렁하게 변했고, 꼭 다문 입술은 삐죽 내밀려있다.
이내 부뎨에에 울음을 터뜨리는 안솔을 보며 나는 허탈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
다음 날.
야영지 정리와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아침 일찍 행군의 출발을 알렸다. 섬망의 산은 거의 벗어난 상태였으나, 다음 진입 예정 지역인 환각의 협곡에서도 도시까지 근 하루는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중간에 최대한 휴식을 줄이며 부지런히 행군한 결과, 우리는 정오와 오후를 넘어, 저녁마저 한참은 넘긴 시간에서야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를 바로 앞에 둘 수 있었다.(이미 몇 번이고 대청소를 한 터라 괴물의 습격이 전무했고, 필드 효과도 해제된 탓에 시간이 단축된 것도 있었다.)
“헥, 헥….”
“나, 나는 이 계단이 정말 싫어….”
클랜원들 중 몇 명은 바닥에 한껏 널브러진 상태였다. 협곡에 세운 도시라 들어가기 전 필수로 거쳐야 하는 계단이 있는데, 길이가 워낙 길어 전부 오르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그나마 체력이 높은 클랜원은 살만한 얼굴이었지만, 체력이 낮거나 거주민의 경우는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좌우간 이렇게 도시에 도착할 수는 있었으나, 고민은 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시간대가 너무 애매했다. 차라리 오후에라도 도착했다면 모를까. 뭔가 일을 하기에는 조금, 아니 많이 늦은 시간이 돼버린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부딪쳐보자는 생각에, 나는 두어 번 박수를 쳐 이목을 집중시킨 후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헬레나는 매우 흥미로운 얼굴로 도시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도시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헬레나?”
“호. 이거 정말이지 엄청나구나. 건물의 배치로 하나의 거대한 마법 구조를 이룬 것 하며, 바닥에 각인돼있는 무수한 마법 진까지…. 아니. 이 구조는? 설마…!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을 했다는 것인가?”
“헬레나 루 에이옌스.”
“어리석구나! 하지만 순수하다. 그래 너무 순수해. 마법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인간만이…. 아. 부르셨는지요.”
아예 정신이 팔렸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헬레나는, 곧 붕 뜬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한 시라도 빨리 도시에 들어가고 싶다는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간이 오래 걸리나?”
“…저번에 한 번 보여드리지 않았습니까?”
헬레나는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품속에서 메모리아 스톤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이토록 정제된 메모리아 스톤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 일뿐이지, 이렇게 손에 들어온 이상 워프 게이트의 활성화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제가 시동해서 그런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그렇다는 말이지.”
“적당한 장소만 지정해주시면 예상 소요 시간은 17분 27초입니다. 계산한 좌표와 공간을 연결해야 하고, 아무래도 크기도 전보다 넓혀야 하는지라.”
“흠.”
쓸데없이 정확한 시간 계산이라 생각하며,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숨을 고르는 두 거주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분은 어떻습니까.”
“예, 예?”
대답한 거주민은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털보 사내였다.
“원하신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되기까지 기다리셨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두 거주민은 끔뻑끔뻑 눈을 깜빡이고는 서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털보 사내가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보아하니 이 사내가 의사 결정권을 가진 듯싶었다.
“으음. 말씀은 한없이 감사하나, 그렇다면 굳이 고생해서 따라온 이유가 없으니까요. 건물이나 장소를 보는데 그렇게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공사는 최대한 빠르게 들어가는 게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보시다시피 시간대가 이런지라. 우리 사용자들은 상관없지만, 두 분은 건물을 보는데 약간 애로사항이 있지 않을까요.”
실은 약간이 아니라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사용자야 어두컴컴한 밤이라도 안력을 높이면 그만이나, 두 거주민은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마볼로처럼 능력이 있는 거주민이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털보 사내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 부분은 여기 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불을 밝혀주십시오.”
“도시 전부에 말입니까? 그건….”
“그러면야 좋겠지만,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허허. 그래서 말입니다. 실은 이곳에 오면서 하나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만…. 제안을 드려도 괜찮을는지요. 잘만 되면 공사 기간을 제법 단축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둔 것? 예. 말씀해보세요.”
그러자 털보 사내는 한 걸음 성큼 앞으로 나서 도시를 돌아보았다. 그런 사내의 시선은 도시 외곽에서도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우뚝 솟은 성채를 보는듯했다.
이윽고 사내는 여전히 성채에 시선을 꽂은 채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도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 혹은, 거점이라 부를만한 건물이 있습니까?”
*
시작의 여관이 활성화되고, 사용자 아카데미가 시작된 지도 어느새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2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한 사람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달간 비 전투 사용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터라, 처음 장비를 착용했을 때는 어색한 기분마저 느꼈다.
하지만 어색함도 잠시. 요새 안현은 하루하루를 좋은 기분으로 보내고 있었다. 비록 옛날처럼 김수현을 따라다니며 일선에 나서지는 못했으나, 일단 이렇게 장비를 착용하고 전투 사용자로써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예전에는 당연하다 생각한 것들을 잃어보니, 비로소 지금 자신이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달아가는 중이라고나 할까.
또한, 안현은 알고 있었다. 이번 보조는 안솔과 하연이 마련해준 하나의 기회라는 사실을. 안현도 인간인 만큼 낯짝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안솔은 자신의 동생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에도 사고를 친다면 더는 하연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양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분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공부뿐이야. 아니, 공부가 아니지. 이제부터는 정말 정신 바짝 차리겠어.”
“공부? 정신? 아무튼 의기는 좋네.”
그때, 어떻게든 머셔너리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던 찰나, 불현듯 안현의 등 뒤로 맑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안현은 화들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문 쪽에서는 기품 있게 입을 두드리며 하품하는 하연이 서 있었다.
안현은 볼을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갑작스럽게 민망한 기분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어. 하연이 누나 오셨어요.”
“으응~. 방금 교육이 끝났거든.”
하연은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목을 주무르고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생각보다 늦게 끝나셨네요? 다른 분들은 아까 저녁 식사하러 가시던데.”
“그럴 거야. 교육이 끝나고 질문을 받느라 거진 두 시간은 지체됐거든.”
“예? 두 시간이요?”
“그렇다니까. 하여간 이번에 들어온 병아리들, 뭔가 이상해. 이제 막 들어온 사용자들 같지가 않아. 적응도 엄청나게 빠르고 호기심도 엄청 많은 거 있지?”
안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저도 말은 들은 것 같아요. 이번 기수로 들어온 병아리들, 보스 괴물까지 잡았다는 소리가 있더라고요.”
“사실일걸? 그러고 보니 이번에 시크릿 클래스도 한 명 들어왔는데, 못 잡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헤. 그 영혼 명령자 말인가요?”
“응. 아, 너 저녁 아직 안 먹었지? 가면서 이야기하자. 마침 부탁할 것도 있거든.”
계속 수다를 떨 생각은 없었는지, 하연은 엄지로 문 쪽을 가리켰다. 나가자는 의미였다. 마침 아까 같이 식사를 하자는 제의도 거절했던 터라, 안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안현은 숙소로 돌아와 내일 있을 교육을 준비했다.
어느새 창틀에는 어두운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하나하나 꼼꼼히 준비하고 검토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안현은 곧바로 잠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 창가를 쳐다보고는 책상에 어질러진 기록을 탁탁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애용하는 흑색 창을 들며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학술 정보 관이랑 창고 쪽만 돌면 된다고 했었나?”
안현이 지금 시간에 나가는 이유는, 아까 저녁 식사 중 들은 하연의 부탁에 있었다. 부탁이란 오늘 자정에 사용자 아카데미 내 일부 지역을 순찰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순찰은 원래 생활 교관들이 담당해야 할 일이었으나, 이따금 교관 보조로 따라온 이들이 도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병아리들과 친해질 기회가 있는 숙소 내 순찰이라면 모를까, 어떤 접점도 없는 외부 순찰은 일종의 경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현은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건물을 나섰다. 애당초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성격이기도 했거니와, 수면 전 가볍게 돌며 산책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자…. 학술 정보 관은 이상 무. 헤, 여기는 여전하네.”
오연히 서 있는 학술 정보 관을 둘러보고 나서, 안현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며 걸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3년 전 이곳에서 네 명이 몰래 술자리를 벌였던 때가 떠올랐는지, 약간은 아련해 보이는 눈으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어 보이고는 다음 순찰 지역인 창고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악…!”
그때였다.
깊은 밤.
땅거미가 짙게 드리운 건물과, 곳곳에 쌓인 커다란 상자들과 낡은 컨테이너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찰나, 뭔가 이상야릇한 미미한 소음이 바람을 타고 안현에 흘러들었다. 하지만 소음은 곧바로 바람결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안현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기척을 숨겨야 할 때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침착해야 한다는 거야.’
느닷없이 김수현의 말이 떠오른 순간, 안현의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흥얼흥얼하던 콧노래가 끊기고, 들떠있던 눈동자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흑색 창을 부여잡는 것과 동시에, 광범위한 마력 감지가 은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비록 그 세밀함이나 속도가 김수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안현의 본능은 배운 것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이내 지그시 눈을 감은 안현은 마력 감지에 걸리는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 컨테이너 안. 인원은…. 넷, 아니 다섯.’
바로 눈을 뜬 안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 신속한 발걸음으로 컨테이너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가기보다는 우선 상황 파악을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현은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며 컨테이너 벽을 따라 돌았다.
이윽고 왼쪽 벽면을 따라 이동할 무렵, 안현은 다행히 엄지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만한 구멍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낡은 컨테이너라 창고로 쓰여서 그런지, 군데군데 드물게 구멍이 나있던 것이다.
안현은 느릿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차분히 마력을 일으켜 안력을 한껏 높인 후, 숨을 죽인 채 구멍에 눈을 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뜨거운 공기가 살그머니 안현의 눈동자에 닿았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_(__)_ 오늘 너무 피곤해서 20시에는 도저히 글이 잡히지를 않더군요. 하루 쉴까 하다가, 그래도 어제 축하를 해주신 분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헤헤. 그나마 자정이 돼서야 약간 정신이 들어서, 다행히 지금이라도 올릴 수 있었습니다. ㅜ.ㅠ
아. 독자 분들. 알고 있습니다. 메모라이즈에는 매의 눈을 갖고 있는 독자 분들이 많으시다는 것을요. 저번 회와 이번 회를 보면 뭔가 알아채신 분들이 꽤 계실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으니, 그분들을 위한 배려를 해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