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04
00503 Witch. =========================================================================
확실히 사건이 터지긴 터진 듯싶었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원래 2주차에는, 나처럼 자격이 없는 사용자는 사용자 아카데미에 얼씬도 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특수성을 감안해, 나는 엄격한 확인 절차를 거친 후 안내 받을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윽고 안내인이 문을 열어주는 방으로 들어가자, 이미 자리에 앉아있는 10명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이효을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누군지 모를 여인.
마찬가지로 고개 숙인 안현과 참담한 얼굴의 하연.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조성호와 비열해 보이는 얼굴의 사내. 또 그 옆으로 앉아있는 자신만만해하는 여인. 한두 번 본 기억은 있는데, 아마 고려 클랜의 외교 간부인 듯싶다.
그리고 약간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병아리처럼 보이는 세 명의 사내들.
방에는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하연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직 조성호가 눈을 뜨더니 살며시 머리를 숙였을 뿐.
마주 머리를 숙임으로써 화답한 후, 나는 이효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몇 번 머리를 긁적인 이효을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럼 머셔너리 로드도 도착했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글쎄요.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요? 이미 상황 파악도 모두 끝났잖아요?”
이효을의 말은 끊은 사용자는 조성호의 옆에 앉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예의 자신만만해하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기록 한 장을 주르륵 내밀었다.
“머셔너리 로드?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의 총 교관이며, 고려 클랜의 외교 간부 김민서에요. 이건 이번 사건의 정황을 적어놓은 기록이에요. 우선 한 번 보시고,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라.
나는 팔짱을 낀 채로 흘끗 기록을 내려다보았다.
『사건 정황.』
1. 김성우, 임은규, 주연호(이하 세 명)은 차희영과 합의하에 창고에서 성관계를 맺었다.
2. 한채혁(고려 클랜원)은 이 사실을 우연히 발견, 처음에는 차희영을 도우려 접근했으나, 곧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는다는 말을 듣고 우선은 행동을 중지했다.
3. 그때 안현(머셔너리 클랜원)이 처음 한채혁과 같은 원인으로 난입, 사정을 설명하려는 한채혁을 무시한 채 무기로 세 명을 위협했다. 한채혁은 사용자 아카데미 법칙에 의거, 세 명과 차희영을 보호하려 어쩔 수 없이 맞대응 했다.
4. 이러한 과정에서 한채혁과 세 명은 안현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대충 훑어보자 문득 까닭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더는 볼 필요가 없다고 여겨 기록을 톡 튕겼다. 이내 물 흐르듯 밀려간 기록은 정확히 김민서의 앞에 안착했다.
그러자 김민서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읽으셨나 봐요?”
“오기 전에 어느 정도 들은 터라. 별로 달라진 건 없는 것 같군요.”
“네. 맞아요. 확실히 읽으셨네요. 호호호.”
“…….”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자기네가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김민서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지금까지 파악된 정황은 이렇고, 이 이상의 추가적인 정황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이 정황이 사실로 인정될 경우, 우리는 머셔너리 클랜에 총 두 가지를 요구하겠어요. 첫 번째는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는 머셔너리 클랜원 전원의 퇴관. 그리고 두 번째는 머셔너리 로드의 공식적인 사과. 이상이에요.”
말투만 보면 이미 안현의 죄를 확정한다는 일종의 통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앞에 놓인 물병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살그머니 안현을 바라보았다. 안현은 여전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거야 정황이 사실로 인정됐을 때 나올 이야기입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기상조요?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이상의 추가 정황은….”
“지금 장난하십니까? 계속 정황이라는 말을 사용하시는데, 정황은 사실이 아닙니다.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왜 자꾸 오직 정황만가지고 죄를 만들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 그래요?”
기가 찬 듯, 그러나 정곡을 찔렸는지 김민서는 격하게 숨을 흘렸다. 그러나 곧 태연한 얼굴을 보이더니 어깨를 들먹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머셔너리 로드는 이 기록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들고 있던 물병을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안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안현은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순간, 안현의 몸이 한 번 크게 움찔했다.
“푸!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말인즉슨, 우리 쪽 정황도 들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힘을 주어 말하자, 마침내 안현의 고개가 서서히 들린다. 나는 안현과 시선을 한 번 맞춘 후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안현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다. 회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나는 모든 사용자를 주시한 상태였다.
한채혁이라는 놈과 세 명의 사내는 어딘가 모르게 초조해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차희영이라는 여인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부분에는 약간 부어 오르거나 미약한 상처가 나 있었다.
저것은 차희영이 저항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고, 합의하 관계를 맺었다는 정황을 부정하는 나름 가능성 높은 증거였다.
물론 아직은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안현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전에 잠시. 기공창술사의 말을 듣기 전에, 머셔너리 로드께서 꼭 짚고 가셔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나와 비슷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발언권을 요청한 사용자는 조성호였다. 나와 이효을이 머리를 끄덕이자 조성호는 침착히 정황이 적힌 기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쓰게 웃어 보였다.
갑작스럽게, 이상할 정도로 그 웃음이 눈에 밟혔다. 그것은 분명히 미안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지금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앞서 들으셨던 것들 중에서 몇 가지 정정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한채혁과 세 명의 진술만 기록돼있을 뿐, 기공창술사와 차희영의 진술은 하나도 기록돼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폭탄 선언.
회의실의 모두가 깜짝 놀란 얼굴로 조성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조성호는 조금도 아랑곳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기공창술사는 머셔너리 로드가 오면 말하겠다고 했고, 차희영은…. 저도 방금 도착한지라, 충격을 받았는지 협박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튼 현재 진술에 어떤 이견도 말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머셔너리 로드의 말씀대로 기공창술사의 말도 들어봐야 하는 게 옳다고 사료됩니다.”
“클랜 로드?”
“그리고 또한.”
“클랜 로드! 지금 무슨…?”
김민서는 새된 목소리로 조성호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조성호가 차가운 눈동자로 김민서를 노려본 것이다. 그리고 나와 이효을을 번갈아 보더니 천천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앞서 두 분께 저지른 외교 간부의 결례는 제가 대신해서 사과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조금은 흥미로운 기분으로 조성호를 응시했다. 돌연히 조금전 조성호의 입가에 지어진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쩌면 조성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안현의 말을 들어보고 정황 확인 절차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들이 한없이 불리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또한 조성호는 머셔너리가 주도했던 백서연 사건에 직접 참가한 사용자였다. 그런 만큼 진실을 밝혀내는 것쯤은 우리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성호는 현재 상황에서 가장 클랜 로드다운 결정을 내렸다고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조성호는 자신이 할 말을 끝냈다는 양 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안현. 내가 왔으니까, 이제는 얘기할 수 있겠지?”
“예. 거짓없이 말하겠습니다.”
안현은 순순히 대답했고, 나는 곧바로 심문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창고에는 왜 갔었지?”
“순찰을 돌고 있었어요.”
“보조가 순찰을?”
“하연 누나가 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하연은 안현의 말이 맞는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아주 없는 일은 아니라 나는 수긍할 수 있었다.
“가서 무엇을 봤는데?”
“…사용자 한채혁과 세 명이 차희영을 강제로 범하는 광경이요.”
“기록에는 합의하 성관계라고 나와있는데?”
“제가 본 광경은 전혀 아니었어요. 차희영은 끈임 없이 그만두라고 저항했고, 구멍에서 보는 저에게 도와달라고까지 말했으니까요.”
“그러면 왜 이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았지?”
“…처음에 결백을 주장했지만 차희영이 어떤 증언도, 아니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아서요. 그래서 하연 누나의 말에 따라, 우선 클랜 로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거예요.”
안현의 말대로 차희영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협박을 받았는지 아니면 충격이 커서 저러는지는 모른다.
좌우간 차희영이 입을 다문 이상 안현의 말은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고, 또한 안현의 말에 맞추어 새로운 변명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연이 안현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게 돼있으니까.
나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서 일방적으로 폭행을 했나? 차희영을 구하려고?”
“구하려고 들어간 것은 맞지만, 일방적인 폭행은 아니었어요.”
“거, 거짓말 하지마! 네가 먼저 그 흑색 창으로 나를…!”
“조용히 해!”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한채혁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되레 조성호가 고함침으로써 간단히 묻히고 말았다.
한채혁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조성호를 바라봤으나, 조성호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계속하라는 듯 안현에게 고갯짓을 했다.
안현은 한두 번 헛기침한 후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들어가서 신분을 밝히고 그만두라고 요청했어요. 하지만 사용자 한채혁은 상관 말라는 식으로 거절했고, 세 명도 제 말을 따르지 않았죠. 무기를 먼저 꺼낸 것은 맞아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차희영을 구하려고 꺼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계속해봐.”
“결국 창으로 저 세 명을 떼어놓으려고 했는데, 그때 갑자기 사용자 한채혁이 달려들었어요. 그래서 싸움이 일어난 건데….”
“그럼 일방적인 폭행은 무슨 말이지?”
안현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조금 주저하는 듯 보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너무 약해서…. 그냥 두세 번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갑자기 쓰러져서….”
“킥.”
과연. 그랬던 건가. 그럼 어쨌든 일방적인 폭행이 맞긴 맞네.
나는 가벼운 실소를 터뜨린 후 김민서로 시선을 돌렸다.
“들으셨다시피, 우리 쪽 정황은 이렇습니다만.”
“호…. 호호…. 저희 쪽이랑은 조금 상이하네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상이하죠. 아무튼 길게 끌 것 없이, 이제는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 절차에 들어가야겠군요.”
“그, 그렇겠죠?”
아까 전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김민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아하니 나는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성호는 방금 도착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민서는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의 총 교관이었다. 원칙상 사용자 아카데미에 일어난 사건은 총 교관이 책임 권한을 갖는다. 그러면 아마 사건 보고도 김민서에게 제일 먼저 들어갔을 터.
김민서는 어떻게든 사건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려 했던 모양이지만, 그건 나와 조성호를 대상으로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김민서는 잠시 원망하는 눈초리로 조성호를 노려보고는 살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그, 그럼 어떤 식으로 사실 확인 절차를….”
“방법이야 많죠. 궁수로 하여금 흔적을 조사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정신 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지만 흔적도 정황이 될 뿐, 사실이 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정신 계열 마법을 사용하면, 사용자의 정신이 오염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 두 방법 모두 거부하겠어요.”
“흠.”
나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그러자 한 번 눈을 빛낸 김민서는 재빠르게 차희영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 지금으로서는 차희영에게 말을 들어보는 방법이….”
“그건 우리 쪽에서 거절하겠습니다.”
“뭐, 뭐라고요?”
“보아하니 충격이 꽤나 심한 것 같아서요. 애당초 합의하 관계였다면 왜 충격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저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만큼, 차희영의 증언은 분명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차희영이 증언을 한다고, 그 말이 무조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말인즉슨, 차희영을 회유해 불리한 증언이 나오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클랜 로드. 괜한 참견일지는 모르나, 현재 머셔너리 창고에는 진실의 수정이 몇 개 남은 상태에요.”
“아. 그거 참 좋네요.”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챘는지, 하연이 타이밍 좋게 말을 거들어주었다. 나는 아주 괜찮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인 후, 양손을 엇갈려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을 꾹 물고 있는 김민서를 향해 태연히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의 정확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진실의 수정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겠습니다. 물론 부담은 우리 쪽에서 하는 걸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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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분들. 의견을 말씀해주시는 것은 좋으나, 그렇다고 싸우지는 말아주세요. ㅜ.ㅠ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그런 만큼 이런 코멘트도 저런 코멘트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이지, 그것을 넘어서 과도한 비난을 하는 건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서로 존중할 수 있는 코멘트 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