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09
00508 하룻강아지들, 범 무서운지 모른다. =========================================================================
“으아~. 교육도 힘드네. 수현아. 저녁 일정 없으면 형이랑 밥이나 먹으러 가자.”
“…….”
“수현아? 수현아!”
“어, 어? 아…. 나는 괜찮아. 형 혼자 먹어.”
너무 넋을 놓고 있었던 걸까. 형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어 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멍한 기운이 가시지를 않는다.
그렇게 자꾸 허공만 응시하자 자못 걱정이 들었는지, 형이 살그머니 나를 들여다본다.
“수현아. 정말 괜찮아?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아프긴.”
“얼굴에 힘이 없어 보이는데…. 그럴수록 밥을 먹어야 해.”
“아 그놈의 밥. 정말 괜찮다니까.”
약간 귀찮은 기분이 들어 형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사실 아무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걱정은 아니고 조금 신경이 쓰인다고 해야 할까.
‘곁눈질로 흘끗흘끗 보시지 않았습니까!’
한소영이. 그 한소영이 나를 곁눈질했다고 한다. 어느 오지랖 넓은 놈이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그러나 심란한 마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보았다면 모를까. 아닌척하면서 나 몰래 곁눈질했다는 건, 어쩌면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아니면….
…아. 모르겠다.
“모르겠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응?”
“방금 모르겠다고 했잖아. 아무튼 수현아. 그냥 형이랑 식당이나 가자~. 응?”
“아 좀. 자꾸 왜 그래. 가기 싫다니까.”
형이 또다시 얼굴을 들이밀어 가까스로 밀어내는데 성공한 찰나.
돌연히, 멀리서 한소영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한소영이 오는 방향으로.
“아.”
한소영은 금세 나를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흠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매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아마 나를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조금 화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랜만….”
“아까 안 봤어요.”
한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탓에 조금이지만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예?”
“저, 아까 머셔너리 로드 본 거 아니라고요. 그 교육생이 농담한 거예요. 스스로 농담을 했다는 자백서까지 받아놨으니, 원한다면 확인해보셔도 돼요. 아니. 확인해보세요. 여기 가져왔으니까.”
아니. 그렇다고 무슨 자백서까지?
목구멍 끝까지 치솟은 말을, 나는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품을 들추려는 한소영의 손을 빠르게 붙잡았다. 그러자 약간 서늘하면서, 금방이라도 녹아 내릴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잡은 느낌이랄까.
“굳이 보여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소영은 일순 잡힌 손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차분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럴 거라 생각했거든요.”
“…네?”
“하연에게 들은 것 같아서요. 이번 마력 재능 계열 교육생 중에 조금 맹랑한 놈이 있다면서요?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하하하.”
“네…. 네.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맵시 좋게 손을 비틀어 뺀 한소영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긍정했다. 나는 아차 하며 놓아주면서도,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생각해보면 한소영도 한 자존심 하는 여인이지 않은가.
또한 저번에 놀린 일로 삐쳐있었다고는 해도, 아까 전 벌어진 사건은 무조건 내 잘못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 탓에 알게 모르게 속앓이를 한 것 같은데, 그냥 대충 져주고 한 발 물러나는 게 나을 것이다. 고작 이런 일들로 한소영과 기 싸움을 벌이기는 싫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웃는 낯에 침을 뱉지는 않겠지.
“그건 그렇고, 마침 잘 만났네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혹시 시간 좀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언제 한 번 차라도 한 잔 하시죠.”
“시간이요?”
“예. 저번 일도 사과를 하고 싶고, 겸사겸사 워프 게이트 건도 감사를 드리고 싶네요.”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무튼, 딱히 상관은 없어요.”
어느덧 어색한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누고 있자, 나와 한소영이 예전의 사이로 돌아간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애당초 한소영이 그렇게 속 좁은 여인도 아니고.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었는데, 나는 무얼 그렇게 신경 쓰고 있었을까.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하하.”
“음. 그러고 보니 마지아 건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기는 하네요.”
“몇 가지 이야깃거리는 있습니다. 일정이 없으실 때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주말에 좀 한가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소영은 살며시 고개를 숙인 후 내 옆을 지나쳤다. 아까처럼 급하게 걷는 게 아니라, 한소영 특유의 고고한 걸음걸이였다.
잠시 후. 복도를 도는 한소영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먹먹했던 머릿속은 어느새 잔잔해진 상태였다.
창밖을 언뜻 보니 약간 어두워진 듯했다. 이제야 슬슬 배고픔이 느껴져, 나는 형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형. 그만 식당으로 갈까?”
그리고 그 순간, 형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어깨에 올린 손을 치웠다. 그와 동시에 지그시 나를 돌아보며 볼멘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냥 혼자 갈게.”
“응? 아까 배고프다며.”
“그래. 아무튼 간다.”
“형?”
“너는 그렇게 좋아하는 이스탄텔 로우 로드랑 차 마시면 되잖아.”
“아니 그건 주말에….”
그러나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형은 휘적휘적 복도를 걸었다. 그것도 한소영의 반대 방향으로.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으로 형의 등을 응시했다.
…형은 또 갑자기 왜 저래?
*
사용자 아카데미는 초반에서 중, 후반으로 갈수록 일정이 빠듯하게 변한다. 말 그대로, 교육과 교육의 연속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00일 중 14주차를 기준으로, 12주차는 넘어서야 일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며, 남는 시간은 개인 정비나 클랜 홍보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것 또한 교육 일정을 정상적으로 끝냈을 때 얘기고, 그러지 못한다면 13주차, 14주차도 꼼짝없이 교육으로 보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병아리들의 입장에서는 재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설령 특별 교관이라고 하더라도,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는 이상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한소영의 말처럼 나와 마력 재능 계열 사용자들의 교육 접점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봐야 중, 후반부부터 시작되는 정신 교육 즈음에 몇 번 기회가 있을까?
물론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교육 일정을 총괄하는 총 교관이 신재룡인 이상, 해당 기간을 약간 앞당기는 것 정도는 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아직은 요원한 일이라,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 근접 계열 병아리들이 많은 만큼, 그렇게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누이 생각해왔듯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말이다.
“크학!”
생긴 것과는 다른, 싱거운 웃음이 나올만한 재미있는 기합이 들렸다. 동시에 섬뜩한 빛을 흘리는 한 자루 창이 기세 좋게 그어 내려진다.
그러나.
탁!
어디까지나 기세만 좋았을 뿐.
정작 내 몸에 닿은 순간, 창 끝은 미미한 생채기도 내지 못한 채 도로 튕겨 나갔다.
그러자 창을 지른 거구 사내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떠오른다. 아마 자신이라면 작은 상처라도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앞서 돌아간 병아리들과 별다를 바 없는 결과를 내자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애당초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한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
사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걸음을 옮겼다.
현재 교육하는 인원은 총 52명으로, 주로 창을 다루는 이들을 소환한 상태였다.
오늘 교육 내용은, 바로 각자의 무기로 나를 치는 것.
이미 기본 교육은 어느 정도 받은 상태일 터. 예전에 사용자 아카데미의 백미라고 생각했던 주말 대련이 없어진 이상, 나름대로 자구책이라 생각해 마련한 교육이었다.
즉 이론보다는 실전으로 들어가, 같은 사용자에 살상 무기를 지르는 적응력을 높이는 훈련이었다. 겸사겸사 자세도 봐줄 수 있고.
…사실 이러면서 제 3의 눈으로 한 명씩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는 중이기도 했다.
잠시 후. 사내에 이어서 나온 병아리는, 결 좋은 머리칼을 짧게 커트한 기가 세 보이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꾸벅 인사를 건네더니 몇 걸음 쭉 물러나며 상체를 굽혔다.
찌르긴가?
“핫!”
내 예상이 맞는다는 듯, 여인은 앙칼진 기합을 내지르며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그러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즈음, 오른발로 강하게 바닥을 밟으며 있는 힘껏 창을 뻗는다. 속으로 몇 번 혀를 찬 후, 나는 미리미리 왼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잠시, 몸을 쿡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악.” 소리가 들리며 창이 미끄러지듯이 빗나가고, 여인은 입을 크게 벌리며 그대로 고꾸라진다. 이내 왼팔에는, 뭔가 부드러우면서 말랑말랑한 감촉이…. 어. 가슴 닿았네.
여인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니까 조언은 조금 해줄까.
“처음 자세는 나름 괜찮았는데, 오른발을 축으로 삼으셨으면 조금 더 무게를 실으셔야 합니다. 조금 전에는 무릎은 물론이고, 다리 전체에 힘이 들어가 지르는 순간 자세가 흐트러졌어요. 그래서 창이 빗나간 겁니다.”
“아, 아, 아, 알겠습니다!”
여인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구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망치듯이 자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한숨을 흘렸다.
어쩌면 이렇게 인재가 없는 걸까. 물론 아직 모든 병아리를 다 본 건 아니지만, 괜히 시간 낭비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불현듯 온몸을 엄습했다.
그렇게 잠깐 쓰디쓴 입맛을 달래고 나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음.”
그때였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그 명성이 자자한 머셔너리 로드가 아니신가~?”
갑작스럽게 걸걸한 목소리가 강의실을 왕왕 울렸다.
막 걸어 나오던 병아리가 걸음을 멈추더니 의아한 얼굴로 문 쪽을 돌아본다. 하여 나 또한 문을 바라본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반쯤 열린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공찬호였다. 공찬호는 등에 수라마창을 맨 채, 이죽거리는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흐. 이거 정말 오랜만인데? 저번에 사용자 아카데미 이후로 만나지를 못했으니까…. 거의 2년만인가?”
그렇게 말한 공찬호는, 내가 말할 틈도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와 병아리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얹어 어깨동무를 하고는, 툭툭 치며 말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팔은, 꽤나 묵직했다.
“어이, 병아리들! 지금 여기 있는 이분이 누군지 아나?”
“그…. 김수현 교관님입니다….”
누군가 쭈뼛쭈뼛 대답한다. 그러자 공찬호는 와하하 웃으며 머리를 크게 주억였다.
“그래 그래! 머셔너리 클랜 로드라고! 다들 몇 번은 들어봤지? 시크릿 클래스! 10강 중 1인! 전쟁의 영웅!”
“하…. 하하….”
“그 누구냐. 지금 교관 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놈이 한 명 더 있지? 그놈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분이라고. 응? 특별 교관으로 들어올만한 자격이 있는 사용자라는 소리야! 그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
직접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미 진수현이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과연. 신재룡의 말이 이런 행동을 말하는 것이었나.
병아리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마지못해 따라 웃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그리 인기 좋은 교관은 되지 못한 듯싶었다.
좌우간 아무리 나를 추켜세워준다고 해도, 공찬호의 언행은 명명백백한 교육 방해였기에 정식으로 항의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뭔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고.
문득 갑작스럽게 짜증이 치솟아, 나는 곧바로 어깨에 올린 손을 쳐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공찬호. 교육 중입니다. 방해하지 마세요.”
“응? 아 왜~. 그래도 내가 교육 교관으로 가르치는 애들인데, 조금 구경할 수는 있잖아? 안 그래?”
“사용자 공찬호.”
“그러고 보니 꽤 재미있는 교육을 하는 것 같은데…. 나도 한 번 해보면 안될까? 응? 내가 치고, 너는 버티고. 어때? 하하하!”
말을 마친 공찬호는, 무에 그리 웃긴지 혼자서 컬컬 웃어 젖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지체 않고 귀걸이를 빼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아,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일이 있어 집에 늦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한 절반 정도 썼을 때,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네요. 요새 이상하게 몸이 많이 피곤합니다. 오늘 늦은 부분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 부탁합니다. _(__)_ 최대한 빠르게 페이스를 회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리리플.』
1. 천국의악당 : 1등 축하합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적어보니 감회가 새로운 기분마저 드네요. 하하하. 🙂
2. 마스터칼솔럼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초반에 버릇이나 습관을 그렇게 들이다 보니 고치는 게 쉽지가 않네요. ㅜ.ㅠ
3. 고오지이라아 : 재미있다고 보시는 분들이 많아서 오늘 추가로 넣었습니다. 공찬호 사건과 연계해서 넣을 수 있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
4. hohokoya1 : 그럼요. 작품도 중요하고, 학업도 중요하죠.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두 마리 토끼 모두 잡았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5. 꿈꾸던그날 : 에이. 이미 2부작으로 줄였습니다. 4부작으로 가려면 초반에 마몬이 나오지 말았어야 해요.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후후.(?)
6. 오뭬 : 실은 김수현의 진명 중 마성을 약간 다른 의미로 적어놓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안현도 이제 나름 봄이 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
7. 꼬야 : 예전에 로유미라는 별명이 생기기전에, 다른 작가 분들은 저를 씬 고자라고 불렀습니다. 뭐, 로유미 덕분에(?) 금방 묻히기는 했지만 말이죠. -_-a
8. psk6492 : 한소영은 아직 더 많은 창피를 당해야 하고, 더 많이 부끄러워해야만 합니다. 이상하게 한소영만 보면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싶어지네요.(?)
9. 피로물질 : 아 그런가요? 잠시만요. 한 번 확인해볼게요.(확인 중입니다.) 443회 10 Page. 맞네요. 뭐! 뭐! 가 아니라 왜! 뭐로 적혀있습니다. 수정할게요~.
10. 감자띱 : 오, 오래 기다리셨나요? 2시 넘어서 올렸는데….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