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12
00511 99 Vs 102. =========================================================================
“오늘은 따로 호출하지 않았는데도 오셨군요.”
중앙 제단에 앉은 세라프가 웬일이냐는 듯 말을 건다. 왠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싫은가?”
“No.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사용자 김수현을 환영합니다.”
매우를 강조하는 세라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차분히 돌 바닥에 착석했다. 그러자 역시나 한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으나 되레 익숙한 기분이다. 그래. 저번에 제단에 같이 앉았을 때는 어색해 죽을뻔했었지.
이윽고 세라프가 머리를 빠끔히 내밀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마르는 데려오지 않으신 겁니까?”
“응? 응.”
“…그렇습니까.”
“내가 걔를 여기 왜 데려와? 저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만.”
일견 세라프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떠오른다. 그러나 곧 표정을 회복한 세라프는 예의 고요한 미성으로 소환의 방을 울렸다.
“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글쎄. 과연 무슨 일로 왔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세라프.”
그렇게 본론으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되물음으로 받아 쳤다. 말장난이나 하자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물론 스무 고개를 하자고 꺼낸 말도 아니었고.
세라프는 이미 내가 방문한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전에 맹아라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천사의 호출로 방해를 받은 적이 있으니까. 물론 호출한 천사가 세라프일 리는 없지만, 적어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말인즉슨, 시치미 떼지 말고 털어놓으라는 소리였다.
“사용자 맹아라와 관련된 일 때문입니까?”
역시 알고 있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어,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영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그렇게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닙니다만. 사실 사용자 김수현과는 큰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맹아라가 왜 그렇게 나를 찾아오는 건데.”
“그건….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도, 그 부분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도한 행동이 아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도 라고. 이내 조금씩이지만, 예상했던 것들이 맞아가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작은 관계든 큰 관계든 간에, 이제는 아니야. 이렇게 된 이상 나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겠어.”
그저 그런, 아예 모르는 사용자라면 모를까. 소환의 방까지 온 이상 그냥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진수현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지.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아니면 내 고집을 알고 있는 건지. 세라프는 잠시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허공을 느릿하게 젓더니, 곧 텅 빈 공중을 보며 입을 달싹인다. 다른 천사와 교신을 나누는 모양이다. 이제는 익숙한 모습이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천천히 손을 떨어트린 세라프는, 연록 빛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북 대륙 수호자의 관리에 실수가 있었던걸 참작해, 해당 부분에 관한 정보를 사용자 김수현에게 일부 공개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합니다. 모든 정보는 공개할 수 없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좋아. 일단 말해봐.”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 조금 고민이 듭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약 1분 12초 동안 정리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예. 그러세요.”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까닥였다. 그러자 세라프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나는 속으로 초를 세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확히 72초를 세었을 무렵, 세라프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을 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칼 같은데?
“사용자 김수현은…. 근 3년 동안 정말 많은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마족 벨페고르의 처단부터 시작한 악마에 관한 성과는 우리 모두가 찬탄을 금치 못한, 그야말로 엄청난 업적입니다.”
“그거 이번이 열두 번째로 듣는 얘기다. 아. 그냥 참고하라고.”
그러자 조용히 눈을 뜬 세라프가 날개를 크게 일렁인다.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얼른 본론이나 얘기하라고 생떼를 부리기에는, 세라프의 태도에 무거운 무게가 넘쳐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일각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도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바로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이 천사에 대한 적대심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는 정도였습니다.”
“허. 그래서?”
“…결국, 내부 회의를 통해 사용자 김수현의 적대를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흠….”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천사를 적대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기는 했으니까. 그래도 내부 회의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사용자 김수현의 태도는 확실히 문제가 될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태껏 이룬 업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태도와 업적.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천사들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이 사용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이룬 업적은 마음에 든다 이건가.
세라프의 말이 이어진다.
“이 문제를 두고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주어진 특전을 회수해야 한다. 특전을 건드릴 수 없다면, 적어도 화정만큼은 거두어야 한다. 아니. 이대로 놔두어야 한다. 혹은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어떨까.”
“특전을 회수한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애당초 그게 말이 돼?”
“몇 번이나 호출이 무시당했을 때 사용자 김수현은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사용자로 낙인 찍힌 상태였습니다. 또한 여담으로 말씀 드리면, 특전의 회수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극렬히 반대하고 있으니까요.”
“나 참. 어이가 없군.”
약간은 어이없는 기분이 들어, 나는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한때 소환의 방을 찾아가지 않은 동안 정말 별별 얘기들이 오고 간 모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약한 의구심도 일었다. 천사들이 이 정도로 나를 문젯거리로 삼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적어도. 적어도 화정만큼은 거두어야 한다고?
“그렇게 사용자 김수현의 문제를 두고 회의를 거듭할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전, 한 명의 사용자가 홀 플레인에 새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 말이 나온 순간, 나는 바로 생각을 멈추고 세라프의 말에 집중했다. 드디어 진수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용자는 비범했습니다. 여타 사용자와는 다르게 매우 높은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잘 키울 수만 있다면, 예전의 수현과 대적할 수 있을 만큼 말이지요.”
예전의 나라 해도 그리 만만한 수준은 아닌데. 그런데 진수현이 그 정도로 잠재성이 높다고?
그때였다.
“사용자 김수현. 잠시,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껏 계속 설명만 하던 세라프가 처음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 뭔데.”
나는 별 생각 없이 바로 허락해주었다.
“혹시 소설 또는 만화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기는 해. 그건 갑자기 왜?”
그러나 이어진 질문은 미처 예상치 못한 말이라, 일순 떨떠름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세라프는, 그런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고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해하시기 조금 더 쉬울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잠시 후.
잠깐 뜸을 들였던 세라프의 입술이, 이내 살며시 열린다.
“그러면 지금부터 영웅 육성 계획. 즉 제 2의 김수현 생성 프로젝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모든 소설이나 만화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하나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일종의 주인공 법칙이랄까.
소설, 만화 내 주인공은 언제나 그리고 한결같이 잘나간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기연을 얻고, 주변에 좋은 동료들이 알아서 모여들며, 설령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쳐와도 우연이라는 요소로 극복해버린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주인공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추후에는 최강의 자리에 오르는 법칙.
세라프의 ‘혹시 소설 또는 만화를 좋아하십니까.’ 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였고, 또한 영웅 육성 프로젝트의 실체이기도 했다.
즉 소설 내 주인공에게 일어날법한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계획하고 조작해, 말 그대로 진수현을 육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웅 육성 계획을 진수현을 대상으로 실행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현재 나의 독주를 저지하고 견제할만한 사용자를 생성하는 것.
두 번째는, 첫 번째에서 더 나아가, 추후 악마들과의 전투에서 앞장서 활용할 사용자를 키우겠다는 것.
이런저런 구실을 붙이기는 했지만, 한 마디로 천사들의 통제가 용이한 사용자를 키우겠다는 소리였다. 즉 천사들은 말 잘 듣는 김수현을 원했다는 소리였다.
세라프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무서웠던 점은, 이 모든 게 철저한 비밀리에 붙여졌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사용자들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진수현도 자신도 모를 정도로.
좌우간 계획은 최소 3년이라는 장기간의 시간을 두고, 천사들이 엄선한 사용자들을 통해 수면 아래서 시행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1년 차, 그러니까 맹아라가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꽤나 적극적으로 추진된 모양이다.
그러나.
이후 또다시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여러 일들이 벌어졌고, 영웅 육성 계획은 기세 좋게 시작한 만큼이나 빠르게 식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 결국 계획의 폐지가 결정되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세라프는 기다랗게 숨을 흘렸다.
“후~. 앞선 계획이 폐지된 것 또한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애초 저를 포함해 지속적으로 반대한 천사들도 있었습니다만….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바로 근 1년 6개월간, 총 세 가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사건?”
“흠.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두 가지 사건과, 한 사용자 때문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 세 원인으로 우리 쪽에 힘이 실려, 폐지에 관한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럼 그 세 원인이라는 게 뭐지?”
그걸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세라프는 차분히 목을 가다듬었다.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각 원인마다 우리가 부여한 가치가 다릅니다. 가장 중요성이 낮은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백옥과도 같은 검지를 펴 1자를 만들고는, 고요히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원인은, 용이 잠든 산맥에서 사용자 김한별이 언어와 지혜의 신, 가네샤에 빈 염원에 있습니다. 이브의 혈통 조건이 변경됨으로써, 사용자 김수현은 현존하는 사용자 중에서 도저히 대적 불가능한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대적이 불가능한 존재라. 그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그러나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세라프는 곧바로 중지를 폈다. 이어서 곧게 선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두 번째 원인은 악마 14군주 중 하나인 마몬과 수하 마족들의 처단. 다시 말하면, 그들을 처리한 과정에 있습니다.”
“마몬을 처리한 과정이라면…. 아아. 심장 적출이나 강간 등을 말하는 건가?”
“비록 처단 과정이 야만적이라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상대는 증오스러운 악마와 그 피조물들. 그 당시 수현이 보인 적대심은 우리를 대하는 태도와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상당수의 천사들이 계획을 폐지하는 것으로, 동시에 제가 발의한 새로운 계획에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큭.”
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의 지시는 차후 출현할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나름의 뜻이 있어 내렸던 지시였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약지가 펴졌다. 이제 세 번째 원인이 나올 차례였다.
“그리고 세 번째 원인은…. 바로 사용자 김수현의 행운에 있습니다.”
이 말은 조금 의외였기에, 나로서는 의아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행운? 행운이 세 원인 중 하나라고?”
“그렇습니다.”
“어째서? 내 행운 능력치는 고작 90포인트밖에 되지 않는데?”
“사용자 김수현의 행운 능력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 반문에 세라프가 담담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세 손가락을 동시에 접고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사용자 안솔의 존재 때문입니다.”
============================ 작품 후기 ============================
음. 많은 분들이 소제목을 보는데 불편하셨던 모양이네요. 알겠습니다. 앞으로 소제목을 지을 때는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내용과 더욱 많은 연관성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수현과 공찬호는, 간단히 말해서 땡 처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땡 처리라고 하면 조금 이상할까요?
코멘트에 달려있는 내용은, 한 사건에서 동시에 일어날 예정입니다. 물론 그 후 해결 방향은 각각 달라지겠지만요.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 내 공찬호와 진수현의 관계를 생각해보시면 조금은 감을 잡으실 수 있을지도. 🙂
그나저나 현재 공찬호의 심리를 정확히 맞춘 분이 계시네요. 그분은 언제 봐도 놀랍습니다. 하하하.